感樹齋先生文集卷之一 / 詩 / 別郭監司 再祐郭公以咸鏡監司不赴。仍入伽倻白雲庵。
閑情都付酒三盃。萬事人間念已灰。臨別殷勤問後約。明朝更入白雲臺。
감수재의 世居地인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고대 정경운의 조부인 당곡 정희보가 이주해 와 한 마을에 살게 되었고, 감수재는 당곡의 손녀에게 장가들게 되었다. 따라서 정경운의 사촌누이가 곧 감수재의 처가 된다. 그 후 정경운은 함양군 柏淵里 돌뿍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나 감수재가 사는 곳과 가까워 자주 왕래하며 돈독한 교유관계를 맺었고, 함양에 거주하는 내암 문인들과도 긴밀한 교유 관계를 가지면서 당시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감수재는 어려서부터 孝誠이 지극하여 貧寒한 家勢에서도 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나, 愼終의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평생 痛恨해 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만나 나라가 위급할 때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돕고, 관직에 나아가서는 失政을 바로잡았다. 만년에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정계에서 뜻을 펼 수 없음을 알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여 志節을 지켰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감수재는 광해조 연간 내암문인으로서 함양지역 및 중앙정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따라서 『감수재선생문집』은 광해조 연간 내암문인의 활동과 역할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를 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李政喜]
4. 歸鄕 潛沈期의 활동
57세 때 柳永慶·寄自獻 등의 죄를 성토하여 바로잡을 것을 10여 차례 啓請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체직을 요청하였다. 또 당시 寃死한 李潑 등의 伸寃을 수차례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 때 광해군이 所生母를 祔廟하려 하므로, 이의 환수를 5차례 啓請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자 병을 칭하면서 遞職을 세 번 청하고 고향 감수재로 돌아왔다.
이 해 8월에 박명부와 정경운·노륜과 함께 지리산 金臺庵에서 함께 놀면서 시를 읊었다. 또
함경도 감사에 취임하지 않고 가야산 白雲庵으로 들어가 곽재우를 만났다.
교006 11월에 司諫院 獻納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또 獻納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辭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또 持平으로 불러 身病으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부득이 상경하였다. 이 때 任叔英이 對策文에서 戚臣들의 무모함을 공박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삭직된 것을 다섯 차례나 啓請하여 복직시켰다. 얼마 후 侍講院 文學에 제수되었다. 1611년 9월 2일 58세에 숙환으로 京齋에서 임종하여, 함양 加省으로 返葬하였고, 12월에 桃川에 安葬하였다. 1613년에 超贈輸城結義奮忠定運功臣 資憲大夫 吏曹判書兼知徑筵義禁府事 春秋館 成均館事 陟平君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