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0년 김산 양사당기(養士堂記) 한산인 이상중(李商重,)
◾이화중(李華重) 본관 한산 *김산군수(1740~1743) 재직시 풍월루 건립. 흥학
◾이상중(李商重) 이화중의 동생
<김산군읍지>1899년 간행, <국역,김천역사지리지> p475 참고 김진곤 재번역
養士堂記(양사당기)
이상중(李商重,)
歲之庚申 家伯氏 來莅金陵, 邑士呂文周汝尙見曰, 郡治東南麓下有養士堂 堂之設殆三十餘年 境中人士 居接講述 徃徃有成就者, 嵗久不善守護 今至頹廢. 子盍爲多士 亟圖改建. 我是是堂任長 兹庸請焉. 仍出示一册子 所謂養士堂創設事跡.
경신년(1740년)에 백부께서 금릉군수로 부임하자 고을의 선비 여문주 여상이 와서 말하기를, “군의 치소 동남쪽 기슭아래에 양사당이 있는데, 당을 지은 지 30여년이 되었습니다. 지역의 인사들이 거접하며 강술하여 종종 성취하는 이도 있었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잘 수호하지 못하여 지금은 무너져 폐하였습니다. 당신이 많은 선비들을 위하여 다시 세우는 것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바로 이 당을 맡고 있는 장으로서 이것을 청합니다.” 하면서 책자 한권을 꺼내서 보여주는데 ‘양사당창설 사적’이었다.
*여문주(呂文周,1683~1767) : 본관은 星山, 호는 菊窩이다. 일찍이 문학에 뛰어났고, 계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사당을 중수하여 학풍을 진작시켰으며, 국내 명승지는 두루 편력하였고, 작고 후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便冝節目者盖是尹侯澤甫 與汝尙再從叔以鳴氏 相議創建 而玉吾齋宋公實記之. 又其財穀料理之方 儒生供億之規 俱有條式. 昭然可考 伯氏以尹侯之意 甚美 是堂不可終廢也. 遂以翌年春 出賦ᅟᅮᆼ鳩工 移構干校宮之西墻外. 汝尙汔汔董其役 未数月突兀以成. 噫 呂氏之於是堂 前後效力 不淺鮮矣. 况汝尙方指正論以張士風 此與習做工令 决摘科第者 功已相萬 玉吾公所謂末之末之目可以超免 而其議論趣舍之不同, 紛爭攻擊之患 庶幾乎不改作若是 而後之人診李某爲宰時得呂某重建 是堂不變, 儒習一之于正云爾 則是堂之關重有何如哉. 伯氏庶將有光於尹候 而汝尙亦不可謂善述其叔之事矣. 豈不休哉. 伯氏名華重 韓山人. 崇禎庚申 菊秋李商重 識.
편의한 절목은 군수 윤택이 보충하였고, 여상(여문주)의 재종숙 이명씨와 상의하여 창건하였으며, 옥오재 송공이 기록하였다. 또 그 재물과 곡식을 요리하는 방안과 유생들의 부족한 것을 마련하는 규정에 조식을 갖추어 두었다. 밝게 살펴 고찰하니, 백씨는 윤군수의 뜻이 매우 아름다워 이 당을 끝내 폐할 수 없었다. 이듬해 봄에 이르러 부역을 하고 공인을 모아 향교 서쪽 담당 밖에 옮겨 지었다. 여상(여문주)이 부지런히 그 공사를 감독하여, 몇 달이 되지 않아 우뚝하게 완성하였다.
아. 여씨들이 이 당에 전후로 바친 공이 적지 않았다. 하물며 여상(여문주)이 선비의 기풍으로 바른 논의를 두루 지적하고, 이것으로 함께 공부하고 힘쓰게 하여, 과거에 합격한 공이 이미 가득하다. 옥오공이 말한 하찮은 것에서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것을 완전히 면하는 것과 건물을 버리는 논의는 같지 않지만, 다투어 공격하는 근심 때문에 고치지 않고 있겠는가.
후인들이 이모가 군수로 있을 때 여모를 얻어서 중건하여, 이 당이 변하지 않게 하였기에 선비의 공부가 바르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이 당의 중요함이 어떠하겠는가. 백 씨는 장차 윤 후를 빛나게 하였고, 여상 역시 그 숙부의 일에 대해 잘 기술할 수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백씨의 이름은 화중으로 한산인이다. 숭정 경신년(1740년) 국추 이상중이 기문을 짓다.
*옥오재(玉吾齋) : 송상기(宋相琦,1657~17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 자는 옥여(玉汝) , 호는 옥오재(玉吾齋). *공억(供億) : 음식물을 준비하여 접대하는 것. 수요를 살펴 부족한 것을 공급하여 안정시킴.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여 안심시킴. ‘억(億)’은 안(安)의 뜻이다. *주공(做工) : 공부나 일 따위를 힘써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