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대낮에 전등을 켠다 불빛이 햇볕에 가려졌다 말을 해 놓고 잊어버리는 건 기억이 하얀 창고에 갇혀 버린 것 하얀 벽이 사방으로 단단하지만 너머 하얀 은사시나무를 볼 수 있다 발끝 통증은 흰 머리카락을 쭈뼛쭈뼛 서게 하고 사시나무 떨듯 흔들어 정신을 하얗게 잃게 한다 통증은 있지만 흔적은 없어 하얀 거짓말 같다 창 너머 흰 구름이 뭉개면서 간다 지난날이 하얗게 뭉개졌다 백지 위에 흰색 줄을 그었다 보이지 않지만 다짐한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자고 하얀 거짓말에 하얗게 속을지 모르지만 하얀 마음이 되어 하얀 기분이다
나이 / 김미경
밀지 마! 내 걸음으로 갈 거야 흙냄새에 머물 수도 있고 나무에 기대기도 할 거야
풀꽃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돌멩이들 만지기도 할 거야
부러진 나뭇가지 줍기도 하고 지나가는 개미 줄에 따라가 볼 거야
산까치 소프라노 소리에 산비둘기 베이스 듀엣 노래 느낄 거야
세월 빠르다고 밀지 마! 내 걸음으로 갈 거야
산길에 취했어요 / 김미경
산길을 걸어요 흙냄새가 좋아요 오솔길이 좋아요 큰 나무 기둥을 보다가 줄기 따라 하늘을 올려 보아요 바위를 덮은 초록 이끼에 새싹이 나왔어요 흔들리며 피는 꽃은 부러지지 않아요 노란 생강나무 꽃이 알싸한 향기를 품었어요 진달래는 입을 쭉 내밀고 곧 터트릴 것 같아요 산까치 두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도돌이표를 만들고 있어요. 단풍나무 새잎은 처음부터 붉은 끼를 갖고 나와요 바닥에 누워버린 별꽃은 하얗게 작은 미소를 지어요 애기똥풀은 노란 꽃을 열심히 피워요 노루귀꽃이 화사하게 웃고 있어요 보고 또 봐도 화사한 웃음 여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