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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自然
풍수는 곧 자연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에는 어떤 의미가 내재하고 있을까?
아래 글을 통해 자연의 대강을 이해하면 풍수를 공부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노자』에서 ‘자연’은 명사가 아니고 ‘스스로(저절로가 아님) 그러하다’의 뜻이다. 남(=타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 스스로의 힘에 의해 그렇게 생성, 발전, 변화, 전개해 가는 것을 형용한 형용사(혹은 형용동사)이다. 예컨대, 천지자연(天地自然: 천지가 스스로 그러하다)처럼 천지만물에 내재하는 힘(작용, 활동)을 말한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자연(nature), 즉 우리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의 ‘자(自)’는 ①스스로와 ②저절로의 두 뜻이 있다. 이 두 가지를 보다 엄밀하게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스스로’는 (타자의 도움 없이) ‘자신의 손을 써서 무엇인가를 하는 경우’이다. 여기서는 ‘의식・노력’이 동반된다. 다음으로 ‘저절로’는 ‘자신의 손을 쓰지 않아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운행되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의식・노력이 불필요하다. 타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그 자신에 내재한 힘에 의한 것을 말한다. 보통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두고 볼 때, ‘스스로’는 노자 사상의 경향(→개체에서 바라보는 것, 자율・자치에 중점)이고, ‘저절로’는 장자 사상의 경향(→전체에서 바라보는 것, 될 대로 된다는 숙명론에 가까움)이다. 노자에게서 타자는 인위(人爲)(=作爲, 人工)이며, 이것을 배제하는 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이런 사상을 충실히 전개한 것이 왕필(王弼)이다. 이러한 무위자연에 대해서 진(晉)의 곽상(郭象)은 무위자연의 입장에서 철학을 수립한다. 다시 말해서 ①만물의 주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만물은 자유(自由), 즉 主宰性 부정). ②사물의 생성에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인과율의 부정). ③무(無)는 유(有)를 낳을 수 없다(노장사상의 근본은 ‘유생어무(有生於無)’이지만 이러한 ‘유생어무’의 입장을 부정)고 본다.
노자의 자연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에서 자연에 대해 좀 더 설명하기로 하자(이하, 최재목, 『멀고도 낯선 동양』 (서울; 이문출판사, 2004), 135-136쪽을 참조하여 정리하였음).
자연이라는 것은 두 자로 된 한어(漢語)이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인 자연은, 매우 새로운 것으로서 우리가 사용하기 시작한 지 약 백 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럽어의 번역이며, 영어의 ‘nature’에 대한 번역어이다. 지금의 자연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에는 ‘천지(天地)’라든가 ‘천연(天然)’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네이처(nature)’의 번역어로서 사용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자연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천지(天地)’는 중국 고대로부터 있던 말이며, ‘자연(自然)’도 네이처의 번역어로서 사용되기 이전부터 있던 말이다. 네이처라는 말은 라틴어로 나투라(natura)에서 왔다. 나투라(antura)는 ‘태어날 때부터의 성질(本性)’이라든가 ‘타고난 그대로의 것(自然)’이라는 의미에서 나스코르(nascor, 태어나다)의 완료분사 나투스(natus)에서 왔다. 이것은 키케로(Marcus Tulius Cicero, BC 106-43)의 조어(造語)인데, 그는 그리스어 퓨시스(Phisis)의 역어(譯語)로써 만든 것이다. 자연이란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노자(老子)』 쪽의 해석)는 개체적 의미와 ‘저절로 그러하다’(『장자』 쪽의 해석)는 전체적 의미의 두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자연의 자(自)는 ‘저절로’・‘스스로’ 이외에 원자(原自)・본자(本自)・고자(固自)라는 결합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본래’・‘원래’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연이란 ‘이렇게 되어 있는’ 자연적 상태임과 동시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본래적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溝口雄三,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 김용천 옮김(동과서, 1999, 33-34쪽 참조). 이것은 주자가 “이(理)는 능히 그러함[能然], 반드시 그러함[必然], 마땅히 그러함[當然], 저절로 그러함[自然]의 뜻을 겸하고 있다.[理有能然, 有必然, 有當然, 有自然處, 皆須兼之]”(『朱子大全』 권57, 「答陳安敬」 (3))고 말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어쨌든 중국 고대의 자연이란 말은 현재의 자연물, 자연현상의 의미에 가까웠던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차츰 현대적 의미의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은 위진(魏晉) 이후의 일이다.(이에 대해서는 日原利國 編, 『中國思想辭典』(硏文出版, 1984), 171쪽을 참조. 보다 구체적인 것은 小尾郊一, 『中國文學과 自然美學』, 윤수영 옮김(도서출판 서울, 1992)를 참조 바람).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에는 자연의 자(自)는 ‘스스로’보다는 ‘저절로’ 쪽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예컨대 김인후(金麟厚. 호는 河西. 1510-1560)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자연가(自然歌)』에서,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난 몸이라 늙기조차 절로 절로(靑山自然自然綠水自然自然/山自然水自然山水間我亦自然/已矣哉自然生來人生將自然自然老)”(정재도 엮음, 『산 절로 수 절로-河西 金麟厚 略傳』(河西出版社, 1981), 70쪽에서 재인용)라고 할 때의 ‘절로(=저절로=자연히)’에 해당하며 ‘인공, 인위가 가해지지 않은 것’을 형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덧붙여서 ‘자(自)’에 대한 보충설명을 좀 해두기로 하자, ‘스스로’・‘나’의 뜻인 한자 ‘자(自)’라는 글자는 원래 숨을 쉬는 코 ‘비(鼻)’자의 형상에서 왔다.
생각해 보면 ‘나’・‘스스로’는 호흡(呼吸)하는 존재이며, 호흡할 때 비로소 ‘나’・ ‘스스로’는 성립하는 것이다. 호흡의 호(呼)는 날숨(내쉼)이고, 흡(吸)은 들숨(들이마심)이다. 이러한 호흡 활동이 정지하면 생명을 다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을 ‘숨이 넘어갔다’・‘숨이 멎었다’・‘숨을 거두었다’・‘숨이 끊어졌다’ 등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우리말에서도 생명은 숨(=호흡)과 관련이 깊다. 삶은 ‘숨쉼’이며, 죽음은 ‘숨 거둠’・‘숨 멎음’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어에서는 생명, 목숨을 이노치(いのち)라 하고 죽는 것을 시누(死ぬ)라고 한다. 먼저 생명, 즉 ‘이노치’의 어원은 이노우치(イノウチ)[息內]’・‘이키노우치(イキネウチ)[生內]’・‘이노치(イノチ)[息路, 息續, 息力]・이키네우치(イキネウチ[生性內]’・이노치(イノチ)[息靈, 生靈]’ 등이다.
또한 죽는다는 뜻의 ‘시누(しぬ)’는 ‘시이누(シイル)[息去)’・‘시이누루(シイヌル)[息逝]’・‘스기누루(スキイヌル)「過往)’・‘시보무(シボム)[萎]’・‘시나우(シナウ)[靡う]’등이다. 이처럼 생명은 숨을 쉬는 것[息, 呼吸作用]이며, 죽음[死]은 그 숨 쉬는 것을 정지한 것이다.
인도의 고대에 성립한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우주의 근원(궁극적인 실재)인 브라흐만(brāhman, 梵(=大我), 전체 우주적 원리)과 개인에 내재하는 아트만(ātman, 我(=小我). 개체적 원리)을 동일시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나온다. 나(小我=小宇宙)의 본체인 아트만은 본래 호흡(呼吸)을 의미하고, 생기(生氣), 신체(身體), 자신(自身), 본체(本體), 영혼(靈魂), 자아(自我)의 뜻을 가지며, 결국은 창조주와 동일시된다. 인도에서는 숨=생명체는 외부의 무언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호흡(=숨쉼) 그 자체로 바로 생명으로 간주된다.
이 관점은, 예컨대 히브리어로 ‘인간’이라는 뜻의 ‘아담(Adam)’ 탄생신화에 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즉 『구약성서』 「창세기」 2장 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되어 있다. ‘생기’란 하나님의 생명력, 곧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숨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자(自)’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나’는 생명을 의미하며, 생명은 바로 ‘호흡작용이 있는 것’이다. 즉 숨을 쉬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생명을 흔히 ‘목숨’이라고 한다. 목숨이란 ‘목+숨’이다. 사전에는 명사로서 ‘사람이나 동물이 숨을 쉬며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명(命), 생령, 생명, 성명(性命)과 동의어’라 하고 있다.
『장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을 보면, 숨을 쉬는 자연의 소리, 즉 자연의 피리 소리를 천뢰(天籟)로 표현했다. 이 자연의 피리 소리는 사람들이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마음[機心]을 잊는 것, 즉 자기를 잊는 것[忘我]으로써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사람의 피리 소리를 인뢰(人籟)라 한다. 인뢰는 사람이 내는 숨소리 등 온갖 소리로 보면 된다. 땅의 피리 소리를 지뢰(地籟)라고 하다. 지뢰는 바람이 불어 대지의 갖가지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 등 숨 쉬는 대지의 모습을 말한다. 이렇게 천지인은 숨 쉬며 살아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이 천지인의 숨쉼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살아 있음의 환희이자. 교향악이며, 전생명의 교감이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천지인이 하나가 되어 숨쉬는 조화로운 원리는 도(道)이며, 도는 바로 ‘저절로 그러한 것[自然]이다.
* 출처: 최재목, 『노자』, 을유문화사, 2006, 116-119쪽.
첫댓글 천지인의 숨쉼, 모든 만물이 숨쉬며, 명당의 혈도 마찬가지로....
좋은 글입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