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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배꼽티를 입고 오는 젊은 청년 여성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얘기했습니다. “복장을 좀 점잖게 입고 올 수 없나요? " 그러자 "왜? 배꼽티가 어때서요?” “저는 성경말씀대로 합니다. 삼상16:7절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제 중심을 잘 보시도록 항상 깨끗하게 해서 옵니다.”했습니다. 이 예화는 말씀의 진의를 보지 못하고 표피적으로만 이해를 한 극단적인 예입니다. 오늘 본문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내로남불 잘 아시죠? 불이 들어가 불교용어는 아닙니다.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의 줄임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면서 남은 날카롭게 판단한다는 신조어입니다. 오늘날은 판단사회라 할 수 있죠? 특히 요즈음은 익명성을 이용한 인터넷 댓글, 악풀이 난무합니다. 악플로 남에게 상처 주는 예가 많습니다. 인간은 강하게 보이지만 약합니다. 특히 영혼은 금방 만든 순두부 같아서 쉽게 상처받습니다. 2000년대부터 악플 때문에 죽은 연예인 40명이랍니다. 판단의 마음 때문에 국가 간에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29절까지깁니다. 판단이란 단어와 이와 유사한 심판, 진노, 분노, 고발, 정죄라는 단어가 13회 나옵니다. 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러므로란 접속부사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장하고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을 4자로 줄이면 이신칭의입니다. 이신득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입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죠? 바로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는 것 자체로 이미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 여겼습니다. 유대인은 선민의식이 강해 이방인은 다 개와 돼지 취급합니다. 이방인의 집에는 발을 들여 놓으면 더럽혀 질까봐 발 한쪽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판단에 대하여는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유대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본문 1절은 이들의 문제를 바로 지적합니다.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 속담에도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검지 손가락으로 저 나쁜 놈하고 가리키면 손가락 네 개는 자신을 향합니다. 1:4의 비율입니다. 자기에게는 잘못이 네 개나 있으면서 한 개 있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우를 범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문제를 왜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는가 하면 인류의 불행은 선악을 판단하는 체계 속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게 된 것이 인류가 타락한 이유입니다. 인류가 불행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판단“은 원어로 ”크리노’라고 읽고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죄의 내용과 질, 형량 등을 선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오늘 본문 17-29절에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17-29절을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민족이고. 율법을 받은 민족으로 특권의식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자기들을 인도자, 빛, 교사, 선생, 하나님 뜻을 아는 자, 선의 분별자로 여겼습니다. 좋은 것은 다 같다 붙입니다. 또 이들은 할례를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받았고 할례는 그 이전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방인을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 부르면서 무시합니다. 이런 유대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외식주의입니다. 한식, 중식 할 때 외식이 아니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다 썩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이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죠? 겉은 깨끗한 척했지만 속은 각종 죄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민족이지만 하나님을 욕먹이는 역할을 합니다.
20절을 보면 주변에서는 다 욕하는데 자칭,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으로 도둑질, 간음, 우상숭배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할례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책망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가졌고, 가장 민감한 할례를 부정합니다. 표피에 할례를 표시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마음의 할례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육체의 할례인데, 육체에 할례가 마치 구원의 표로 사용하면 안 된다합니다.
본문에서 몇 가지 메시지를 배웁니다. 첫째 외식, 형식주의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이번 주에 침례가 있습니다. 침례라는 형식에 대단한 효험이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몸을 담글 바닷물, 강물, 수돗물에 구원을 주는 특별한 성분이 있지도 않습니다. 이미 마음에 일어난 구원, 마음에 일어난 성령님의 역사를 겉으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 속 마음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저는 성경쇼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유대인들은 특권의식 가지라는 구절이 없습니다. 만민을 품고 섬기라는 구절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았습니다. 우리도 성경에 좋은 부분만 쇼핑 하기가 쉽습니다. 오늘 로마서2장같이 계속 심판의 말씀만 나오는 부분은 그냥 건너뛰고 싶습니다. 마트에서 시식 코너를 가듯 지나가고 싶은 부분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볼 때 심판에는 귀를 막고 축복 말씀만 골라서 보기가 쉽습니다. 성경쇼핑 조심해야하고 말씀 골고루 먹는 자들 되어야합니다.
세 번째 당을 짓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8절을 보십시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당을 짓는다의 당자는 무리 당(黨) 자입니다. 주석에는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당을 지으면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 들입니다. 바벨탑이 첫 번째 당입니다. 하나님은 당을 더 이상 짓지 못하게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신약교회인 고린도 교회도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하고 당을 지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여당, 야당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도 끼리끼리 모이기 쉽습니다. 이는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친 예수님 당 하나만 있어야합니다.
유대인들과 같이 특권의식에 빠져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2절부터 11절까지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흥적이고 엿장수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대로 합니다. 그리고 16절 보면 은밀한 것을 심판합니다. 은밀한 것은 마음 먹은 죄까지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살인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도 살인할 마음만 먹어도 심판합니다.
심판의 형태에 대하여 본문6,9,10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이 받습니다. 집단으로 받지 않습니다.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서 받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을 참고합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보응은 착한 행위는 착한 행위대로, 악한 행위는 악한 행위대로 선과 악으로 되갚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한 구절이 요한복음5장29절입니다. “선한일을 행한자는 생명이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다 심판을 받습니다.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위한 심판입니다. 신자들은 상을 주기 위한 심판입니다. 이 상은 이땅에서 쌓은 선한 행위의 마일리지가 얼마냐에 따라 차등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마일리지가 땅에서 이미 사용된 것은 하늘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사용되었다는 뜻은 나의 믿음의 행위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받은 일입니다. 이 행위는 불타 없어집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은밀하게 카운트한 마일리지만 보응 받습니다. 이중 마일리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밀한 행위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조차도 모르게하라 합니다. 기도도 남들 모르게 골방 기도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은밀한 마일리지를 많이 쌓는 성도가 되길 기도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함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현재로 댓가가 따릅니다. 본문9절을 보면 이런 자들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습니다. 환란은 고통 고초 압박이 있다는 뜻입니다. 타작 마당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콩, 들깨 이런 털 때 도리깨로 세게 때리는 모습 연상하면 됩니다. 이렇게 영에 환란과 곤고가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본문 14,15절에 나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 양심이란 재판관을 하나님이 두셨습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행하면 양심이 마구 찌르고 괴롭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양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양심은 선천적입니다. 학습되거나 후천적으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본문에 회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성경에 회개라는 단어가 56번 정도 나옵니다. 예수님, 세례요한, 제자들, 베드로, 바울 설교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입니다. 회개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자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으로는 3개지 뜻입니다. 첫째는 라틴어로 repent로 “다시 생각하다.”입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서 멈추고 다시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나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헬라어로 마음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어떤 주제를 살펴보면서 마음을 바꾸고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회개는 반드시 행동을 수반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예로 들면 마트를 찾아 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운전자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먼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춰 서서 뉴턴해야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합니다. 그러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운전대를 돌려서 뉴턴하여 E마트 쪽으로 가는 것까지가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면 삶의 방향과 습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삶이 조금씩 바뀌어야 정상입니다.
어떻게 바뀌는지는 본문7절과 10절에 나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구하는 자는 추구하는으로 번역합니다. 회개하면 추구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 영광, 자기 영광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영적인 것, 존귀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영생과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마6:33절을 참고하면 회개하면 우선적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합니다. 마태복음5장23,24절은 예배보다도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함을 말씀합니다. 예배드리기 전에 형제와 불화관계에 있다면 먼저가서 화해 해야합니다. 회개한 자는 형제 사랑을 먼저합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문제에서 벗어나는가에 대하여 결론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마태복음7장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남의 죄를 들여다 보기 전에 먼저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줍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고 빼라 합니다. 들보는 집 지을 때 지붕을 가로로 떠받치는 큰 나무기둥입니다. 대들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대자를 뺀 것이 들보입니다. 티는 우리가 입는 옷이 아닙니다. 재나 흙 그밖에 온갖 물건의 작은 부스러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남에게서 티처럼 작은 잘못이 보이면 자신에게는 대들보같이 훨씬 큰 죄가 있다고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내 속을 먼저 들여다 보고 깨끗하게 하고 나서 남의 티를 보라고합니다. 나에게 들보가 빠지면 남의 티를 빼주려고 하기 보다는 용서하고 덮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예가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는데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꼭 물 안 내리는 사람 있습니다. 남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유아적인 발상 때문인지 꼭 있습니다. 이런 경우 먼저 본 사람이 물 내리면 됩니다.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안 내린 놈 누구야?하며 비난하고 찾고 발본색원 할 일은 아닙니다. 물 안 내리는 님은 또 나타납니다. 세상어디에도 있습니다. 판단, 비난으로 세상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비난함으로 사람과의 관계만 나빠집니다. 교회에서 휴지가 나뒹굴고 있으면 먼저 본 사람이 치우면 됩니다. 휴지 버린 님 찾아서 비난하고 혼낼 일 아닙니다. 흙먼지가 있으면 본 사람이 걸레로 닦으면 됩니다. 하나님이도 인간의 죄를 심판으로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라는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숙한다는 것은 점점 내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또 타인의 죄에 민감하기 보다는 내 죄에 민감해지는 사람입니다. 세상 탓, 남 탓 환경 탓 하기 보다는 내 탓하는 사람입니다.
필자의 로마서 이외 원고는 블러그 "빛고운구슬" [성경탐구 및 강의원고]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