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곡 정연(松谷 鄭淵) 묘지명(墓誌銘) 작성
글: 안지 (安止)
정통 9년 갑자 (正統九年 甲子) 여름날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정공(鄭公)이 종기를 앓자, 임금은 그를 치료하도록 명하였고 주야로 그의 곁을 떠나지 말도록 하였으며 날마다 두서너 차례씩 사신(使臣)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이에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지만 그의 정신만은 어지럽지 아니하였고 어느 사람이 피방(避方:액을 면하는 비방)을 해보자 하니 그는 “오래 살고 못사는 것은 운명이다. 이를 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라고 하였다.
또한 어느 사람이 몸소 사당(祠堂)에 빌면 스스로 병이 낳는다고 말하자 그는 그를 꾸짖었다. “내 일생동안 무당(巫堂)을 가까히 하지 않는 것은 너희도 알고 있는 바일 것이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재주로서 외람되게 성상(聖上)의 은총을 입어 벼슬이 재상의 지위까지 이르렀으며 나의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죽음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살려고 하여야 하겠는가.”
그 이듬해 7월 갑인(甲寅) 그의 집에서 서거(逝去)하니 향년 55세였다. 성상(聖上)은 몹시 그를 애도(哀悼)한 나머지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보통 사람보다도 더한 조문(弔問)과 부의를 전하고 제사를 올렸으며 태상 봉상시(太常奉常寺)는 그에게 정숙(貞肅)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외삼촌 신분이라는 의례에 따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좌의정(左議政) 영경연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를 추증(追贈)하였고 그해 9월 임오(壬午)에 교하현서학당동(交河縣西學堂洞)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 우씨(禹氏)는 공(公)의 서거를 애통해하여 슬픈 울음을 그치지 않고 미음마저 입에 넣지 못한 까닭에 병이 악화되어 그 이듬해 죽으니 부군(夫君)을 따라 영춘현부인(永春縣夫人)으로 봉(封)하였고 3월에 공(公)의 묘소 왼편에 합장(合葬)하니 이는 예를 따른 것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나에게 그의 묘지문(墓誌文)을 부탁하니 어떻게 문장(文章)을 못 짓는다고 이를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이름은 연(淵), 자(字)는 중심(中深), 호(號)는 송곡(松谷)이며 연일정씨(延日鄭氏)의 훌륭한 집안이다. 증조(曾祖) 부중(俯中)은 현대부종부령(縣大夫宗簿令), 조부(祖父) 사도(思道)는 중대광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오천군(重大匡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 烏川君)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선고(先考) 홍(洪)은 자헌대부지의정부사 보문각대제학(資憲大夫知議政府事 寶文閣大提學)이며 시호(諡號)는 공간(恭簡)이며, 선비 오씨(先妣 吳氏)는 정헌대부 삼사우복사(正憲大夫 三司右僕射) 중화(仲華)의 따님으로 동복현부인(同福縣夫人)에 봉하였다.
홍무 기사 월 일(洪武己巳 月 日) 公을 낳으니 公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말씨가 적으매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을유(乙酉)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는데 그의 나이 17세였으며 그 이듬해 승도염주부(主簿)로 처음 벼슬하였고 뒤이어 승령직장부부가 되었으며 선무령북부로 승진되었고 을축년(乙丑年)에 이르러서는 선교로서 감찰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公의 나이 21세였지만 일처리가 정밀하고 민첩하니 사람들은 그의 노숙(老熟)함에 감복하였다.
경인년(庚寅年) 2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며 임진년(壬辰年) 겨울에 상복을 벗고 사직순금에 임명되었고 갑오년(甲午年) 봄에는 통선(通善)으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수상(首相)이 연루된 송사(訟事)로 인하여 이 사실을 파헤치려는 국문이 매우 준엄하여 순금부(巡禁府)에 압송을 명하였으나 공(公)은 이에 간절하고 지극한 논변으로 이를 밝혀 그 일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특별히 말감되어 그는 속죄되고 얼마 후 다시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을유년(乙酉年) 가을 통덕정랑으로 올라갔고 무술년(戊戌年)에는 호조(戶曹)로 전임되었으며 겨울에는 조봉소윤종부한성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후 봉열대부장령이 되었으며 이 이듬해 봄에는 태종(太宗)이 사냥을 나가려 하자 사헌부(司憲府)에서 임금에게 간(諫)하는 말이 매우 고조되어 태종(太宗)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외직(外職)으로 쫓겨났다가 한 달 남짓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여름엔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몸소 곁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예의(禮儀)를 다하였고 계묘년(癸卯年) 봄에는 내자소윤(內資少尹)에 임명되었고 한성경창양부로 전임되었으며 갑진년(甲辰年)에 또다시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가 중훈선공감정으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차례 공형병조판서(工刑兵曹判書)로 전임되었다.
야인추장 범찰동창(野人酋長 凡察童倉) 등이 대대로 북쪽 변방에서 살아왔었는데 경신년(庚申年)에 이르러서는 멀리 도망가면서 그의 부락민으로서 그를 따르지 않는 자가 수백 가구였는데 범찰(凡察) 등은 우리가 그들을 강제로 붙잡아 보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여 중국 황제에게 이 사실을 가지고 여러 차례 무고하니 황제는 금의위(錦衣衛) 지휘(指揮) 오량(吳良) 등과 함께 범찰수하인(凡察手下人)을 파견하여 왕경(王京)에 이르러 야인(野人)들의 거취 실정을 묻게 되었다. 이때 공(公)은 그들을 맞이하는 사신(使臣)으로 천거되었었는데 公은 그들의 사이에서 주선하는 일마다 온화한 말씨와 화기(和氣)스러운 기상으로 그들을 잘 대하니 모든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를 존경하고 감복되어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량(吳良) 등이 일을 끝마치고 돌아갈 무렵 임금이 公에게 그들과 함께 중국에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중국의 병부(兵部), 예부(禮部) 양부에서 그 정상을 따져 물을 때 공(公)은 그에 대한 전모를 답함에 있어 빠뜨림없이 논변과 해석으로 이 사실을 밝히자 병부(兵部), 예부(禮部) 양관리들은 모두들 “범찰(凡察) 등의 보고는 과연 거짓이었다.”라고 명쾌히 말하였고 또다시 이어서 “사신(使臣)으로서의 일을 잘 처리하니 참으로 훌륭한 재상(宰相)이다”라 칭찬하였다.
이에 다시 의금부종부사복상의사례조를 역임하였는데 그가 사복(司僕)이 되었을 때 팔도(八道)의 섬과 유휴지에 목장을 설치하여 말을 번식시키자고 건의한 바도 있었다. 이는 公이 벼슬을 역임하면서 이룩한 행정(行政)의 대가(代價)이다.
公의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민첩하고 마음가짐은 과감하면서도 단정하였으며 일찍이 원반(鵷班:조정에 늘어선 官吏의 序列)에서 그 화려한 명성은 나타났고 백부(柏府:司憲府)에서는 기강을 크게 떨쳤으며 은대(銀臺:承政院)에서는 왕명(王命)의 출납을 진실하게 하였고 따라서 재부(宰府)에 오름에 이어서는 총애와 예우가 날로 융성하여 옛사람에 부끄러울 바 없는 찬란한 공적이었다.
사람이란 부귀(富貴)에 취하게 되면 교만하거나 인색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는데 공(公)은 부귀와 높은 영화(榮華)는 당세(當世)에 비할 바가 없었지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나날이 더하였으며 이미 덕(德)이 있었으니 당연히 그는 장수(長壽)를 누려야 할 사람인데도 어찌하여 그의 목숨을 갑자기 앗아가 그의 일을 끝맺지 못하게 하였는가? 참으로 하늘이란 아득하고 아득하여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임금은 몹시 슬퍼하였고 사림(士林)에서는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하였다.
부인의 성은 우씨(禹氏)다. 고려 공양왕 부마 (恭讓王 駙馬) 단양군(丹陽君) 성범(成範)의 딸이며,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 형조판서 진현관제학(奉翊大夫知密直司事兼都評議使司刑曹判書進賢館提學) 홍수(洪壽)의 손녀(孫女)이며, 특진보국숭록대부 단양백 보문각대제학 충정공(特進輔國崇祿大夫丹陽伯寶文閣大提學忠靖公) 현보(玄寶)의 증손녀(曾孫女)이다.
선비(先妣)는 ○○의 딸이다. 일찍이 부인(夫人)으로서의 행실을 닦아 가내의 규범을 이룬 바 있었으며 40년간의 우애로운 부부금실로 자손이 번창하였으며 왕실(王室)과 혼인(婚姻)을 맺었던 것이다. 아! 이는 장한 일이다. 공(公)이 죽자 부인(夫人)은 항시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드디어 병을 앓은 지 얼마 후 서거하니 그의 어질고 곧은 절개는 공강(共姜: 周나라 衛共伯의 妻)을 이을 만하며 야박한 세상의 풍속을 두터히 하기에 남음직하다.
4남 4녀를 낳으니 장남 자원(自源)은 경상도사(慶尙道事), 차남 자반(自泮)은 형조좌랑(刑曹佐郞), 삼남 자제(自濟)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남 자숙(自淑)은 아직 어리다. 장녀는 내첨판관(內瞻判官) 신중주(申仲舟)에게 차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권담(權聃)에게 출가(出嫁)하여 그는 태조(太祖)의 셋째 부마(駙馬) 길창군(吉昌君) 규(跬)의 아들이며 삼녀는 안평대군의 부인(夫人)으로서 ○○부인에 봉하여졌다. 손자(孫子) 남녀(男女)는 모두 15명이며 증손남(曾孫男)은 2명이며 딸은 1명인데 모두 어리다.
이에 명(銘)을 붙이는 바이다.
유공지성(維公之性) 공의 성품(性品)은
영민온량(英敏溫良) 빼어나 민첩하고 온화하고 어질며
유공지조(維公之操) 공의 지조는
청개단방(淸介端方) 청렴하고 절개는 단아하고 방정하며
업승구기(業承裘箕) 선친의 업을 계승하여
조섭영전(早躡英躔) 일찍이 벼슬에 올라
명진오대(名振烏臺) 사헌부에서 명성을 떨쳤고
세추기현(世推其賢) 대대로 그의 어짐을 추앙하였도다.
탁치은대(擢寘銀臺) 승정원에 발탁되어
취승재부(驟承宰府) 갑자기 판서에 오르니
휘황지적(輝煌之績) 빛나는 업적이여
무양우고(無讓于古) 옛 사람에 부끄러울 바 없어라.
거부흥귀(居富興貴) 부귀를 누리게 되면
혹교혹인(或驕或吝) 교만하거나 인색하는데
공독불연(公獨不然) 공만은 유별나게 그렇지 않고
목가경신(目加敬愼) 나날이 공경과 근신을 더하였네.
호비기덕(胡卑其德) 어찌하여 그의 덕에 보답하여 주지 않고
이색기년(而嗇其年) 천수 내려 줌에 인색하였는가
욕문궐리(欲問厥理) 이 이치를 묻고 싶지만
황망호천(慌忙乎天) 아득하기만 하는 저 하늘이여
진극도상(震極悼傷) 슬픈 마음 더 할 뿐이로다.
사림차상(士林嗟傷) 이에 선비도 모두 슬퍼하였도다.
애영종시(哀榮終始) 슬픔과 영화의 전말이
기숙여사(其孰如斯) 이처럼 무상한 자 그 누구인가
의재영춘(懿哉永春) 아름다워라 화창한 봄 날씨에
귀우연백(歸于延日) 연일정씨 집안으로 시집오신 부인이여
숙정규칙(夙整閨則) 일찍이 규문의 법칙을 바로 잡으니
비의양절(非儀兩絶) 잘한 일도 못한 일도 없이
금슬지화(琴瑟之和) 화기로운 부부금슬
실가지의(室家之宜) 온 집안이 평온하네
상의보수(詳疑寶樹) 이 상서 자손에게 정해지고
경연금지(慶衍金枝) 경사는 후손에게 미치네
백주지풍(柏舟之風) 백주의 기쁨이네
천재가적(千載可績) 천년의 훌륭한 일
견정지절(堅貞之節) 굳고 정결한 절개에
가돈부속(可敦薄俗) 야박한 세상을 두려워하였도다
생동기거(生同其居) 살아서는 함께 살으시고
사동기혈(死同其穴) 죽어서는 함께 안장하니
유미천원(有美川原) 아름다운 산천이여
만세지실(萬世之室) 만세의 아늑한 집
안동순 附記: 본 묘지문(墓誌文)의 주인공인 송곡 정연공(松谷 鄭淵公)의 후손인 정일태(鄭日泰) 선생은 우연하게도 순조(純祖) 12년 임신(壬申: 서기 1812년)에 그 묘지문을 쓰신 안지(安止)께서 배향되신 조곡서원(早谷書院)의 소재지인 자인현감(慈仁縣監)으로 도임(到任)하자 그 서원(書院)의 현액(懸額)은 자필(自筆)하여 게판(揭板)하였으니 묘지문을 쓰셨던 368년 만의 기연(奇緣)인지라 서로 간의 선조들의 정의(情誼)를 상기하면서 오늘날까지 교유(交遊)가 이어져 오고 있으니 이는 속담설(俗談說)인 당세지연(當世之緣)이면 만세지교(萬世之交)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