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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19절-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과 은혜, 이것은 우리가 계속 살피는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율법과 은혜는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내는 몽학선생이긴 하지만, 이 율법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은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임을 확인케 한다는 점에서 율법의 중요성이 감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율법은 죄를 죄로 인정하는 몽학선생은 될지언정, 사람은 모두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사망만이 여기서 왕 노릇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 아래 인생은 사망이 왕 노릇 할 수밖에 없으니, 더 이상 그의 생명에 대한 장래적인 보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율법 아래 사망이 왕 노릇을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우리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거저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율법 아래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면 이제 은혜 아래 생명이 바로 왕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나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진 믿음의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이 생명은 단지 인생의 육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영생이며, 따라서 율법은 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면, 은혜는 영원한 생명(영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19절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ἐγὼ γὰρ, διὰ νόμου νόμῳ ἀπέθανον)라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기 위하여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의 공로가 된다는 의미의 율법을 버렸다면, 그것은 내가 벌써 그것에 대하여 죽은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은 율법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이는 곧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왜 이렇게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일까? 사도는 이 질문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ἵνα Θεῷ ζήσω) 라고 답을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자가 이제부터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런 장벽 없이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영생(eternal life)이다.
우리는 사도가 19절 후반 절의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함”이 바로 영생임을 확인하였는데, 이제 20절에서는 이와 같은 영생에 이름에 대한 더 구체적이며 나아가 확실한 증거를 보여준다. 즉, 20절은 그 유명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한다.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Χριστῷ συνεσταύρωμαι)고 한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과 같이, 사도 역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죽음은 그 곳에 그리스도가 사심과 같이 그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요한 기초적 개념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말씀은 신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및 모든 참된 신자들의 몸인 교회로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는 로마서 6:1-6과 고린도전서 12:13과 같은 구절들에 기초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그분의 죽음, 장례, 그리고 부활에 동참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기록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못 박혔다”(συνεσταύρωμαι/ I have been crucified with)라는 동사는 문자적으로 “내가 지금까지 못 박혀왔고 지금도 못 박히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말 속엔 과거의 자기중심적이었던 사울이라는 존재를 죽이고, 이제는 자기 생애의 보좌를 그리스도께 양도함으로써, 자아통치를 종식시켰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의존적인 존재에서 예수 의존적인 존재로 바뀌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자신이 이제 과거의 사울이 아닌 예수 의존적인 사도 바울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지체인 사도는 예수 의존적인 존재가 됨으로 인하여 “그의 가슴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ζῇ δὲ ἐν ἐμοὶ Χριστός).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속에 살게 된 동인(動因)은 무엇일까? 사도는 이 질문에 대하여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ἐν πίστει ζῶ, τῇ τοῦ Υἱοῦ τοῦ Θεοῦ)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이며,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에 대하여 살피려면 또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리라 본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인 인식과 그것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정의하고, 나아가 이러한 믿음은 내가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성령 하나님께서 믿게 하심으로 믿음에 이르렀음을 잠시 부연하고 넘어가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믿음을 말함에 있어, 위와 같은 신학적인 논의를 떠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사도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문제를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사도가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ὃ δὲ νῦν ζῶ ἐν σαρκί)은 율법을 통한 행위나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이 육체 가운데서도 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은혜)이며, 이 능력을 끌어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τοῦ ἀγαπήσαντός με καὶ παραδόντος ἑαυτὸν ὑπὲρ ἐμοῦ)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 값없이 주신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그가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을진대, 그는 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사실 만큼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라고 감동하고 있는 것 같다.
이상의 율법과 은혜를 논하면서, 우리가 앞서 본 바와 같이(2:14) 사도는 베드로를 상당히 의식한 것 같다. 즉,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라면 자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율법과 은혜를 믿음과 구원에 대입하여 어떻게 보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될 것인가에 대한 죄종적인 답이 이제 마지막으로 볼 21절이다. 사도는 21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한다. 즉, 사도는 베드로에 대한 자기의 논지를 종합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Οὐκ ἀθετῶ τὴν χάριν τοῦ Θεοῦ)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율법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행위에 의한 칭의나 성화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말함에 있어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면,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ἄρα Χριστὸς δωρεὰν ἀπέθανεν)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한 것이며, 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게 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도는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Οὐκ ἀθετῶ τὴν χάριν τοῦ Θεοῦ)라고 한 것이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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