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감상
왕방연 :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2007. 8. 21. 3:21
<천만리 머나먼 길에>
【시조】-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빔길 예놋다.
【어구 풀이】
<고운 님> : 사랑하는 임. 여기서는 단종(端宗)을 가리킴.
<여의옵고> : 이별하옵고.
<내 안> : 내 마음.
<예놋다> : 가도다. 가는구나. ‘놋다’는 힘줌을 나타내는 ‘도다’의 옛말.
【현대어 풀이】
천만리 머나먼 길에서 떠나와 고운 님(단종)을 이별하고,
내 마음을 매어 둘 곳이 없어 혼자 흘러가는 냇물가에 앉아 있으니,
아! 저 시냇물도 내 마음속 같아서 울면서 흘러가기만 하는구나.
【해설】
1457년(세조3) 폐위된 노산군(단종)을 왕방연이 영월로 호송하고 오는 길에 어린 임금을 적소(謫所)에 홀로 두고 오는 비통한 심정을 읊은 노래라 한다.
작자 왕벙연은 세조의 심복지신(心腹之臣)이며, 폐위된 단종(端宗)을 호송하는 금부도사(禁府都事)로서, 장릉지(莊陵誌)에는 영월 서강(西江)의 청량포(淸凉浦)에 갔다가 달밤에 곡탄(曲灘) 언덕 위에 앉아 단종의 비운(悲運)을 슬퍼하며, 냇가를 방황하니, 감회가 깊어서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후세에 금강(錦江)가의 여자들이 불렀다 하며,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로 기록하였다.
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川流亦如我 鳴咽去不休
【개관】
▶지은이 : 왕방연(王邦衍)
▶갈래 : 평시조, 단시조, 서정시, 정형시, 연군시(戀君詩)
▶형식 : 연군가(戀君歌), 절의가(絶義歌).
▶성격 : 감상적, 여성적, 애상적(哀傷的).
▶표현 : 의인법, 감정이입.
▶제재 : 임과의 이별. 단종의 유배(流配)
▶주제 : 임(단종)을 여읜 슬픔.
▶출전 : <가곡원류(歌曲源流)>
【감상】
작자가 의금부도사가 되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는 단종을 압송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작품을 지었다 한다. 의금부 도사로서 세조에게 충성을 다해야만 하는 신분이면서도, 사람이면 누구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인지상정으로서의 애달픔을 읊었다는 데 그의 인간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어린 임금을 유배지에 남겨 두고 되돌아 와야만 했던 죄책감과 가련한 심정을 냇물에 의탁하고 있다.
초장에서 단종과의 사별, 중장에서의 슬픔, 종장에서의 감정 이입의 순으로 전개된 이 작품은, 비록 의금부 도사로서의 직책은 다했지만 인지상정(人之常情)은 어쩔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뒤 느끼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폐위되었을 때 금부도사로 알려져 있는, 이 시조의 지은이인 왕방연이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의 압송 책임을 맡았다. 바로 그 당시 어린 임금을 유배지인 두메산골 강원도 영월에 두고 돌아오면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읊은 노래가 이 작품이다.
어쩔 수 없이 어린 그 가슴 아픈 마음을 둘 곳 없어 하는 슬픈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어린 임금을 두메산골인 영월 유배지에 남기고 되돌아 와야만 했던 죄책감과 가련한 심정을 냇물에 의탁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불의의 희생이 된 단종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최대의 공경의 뜻을 표하는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임을 남겨 둔 채 떠나니 내 마음 가눌 길 없어 잠시 냇가에 앉아 괴로움을 달래 본다.
여기서 앉아이다. 즉, 앉았나이다로 경칭(敬稱)을 쓴 데 유의해야 하겠다. 말하자면 세조의 명을 받아 의금부도사라는 벼슬의 몸으로서 단종을 영월(寧越)에 유배시킬 때, 호송의 책임을 맡았던 왕방연으로서는 죄 없고 어린 임금인 단종에 대해 단장(斷腸)의 아픔을 가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영월에서 호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죄책감으로 길이 어둡고 염세의 기운이 그의 머리에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심정은 '여희옵고'라든가 '앉았나이다' 또는 '고운 임금'이라는 경칭(敬稱) 속에 두드러지게 풍기고 있다.
종장에 나오는 '저 물도 내 안(내 마음 속)같아서 눈물이 흘러 어두운 길에 흘러가는구나!' 에서 더욱 고조되어 나타난다. 집권자의 심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종에 대한 애절한 노래를 읊을 수 있었다는 것은, 비록 벼슬은 세조가 준 것이지만 마음은 군신유의(君臣有義)의 대강(大綱)에 살았던 것 같다.
이 시조는 그 벼슬과 사람의 도리와 신하의 도리 사이에서 불의에 봉사한 자신의 죄책감에 우는 심회(心懷)의 표현이었기에,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눈물을 흘리며 흘러 내려간다로 표현되어 있다.
고대에 산 사람들은 죄책감에 괴로워지면 인적이 드문 자연을 찾아가는 버릇이 있었다. 여기서 자기를 달래고, 죄의식을 씻어서 마음을 다시 가누는 보금자리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자연은 그 많은 사연들을 귀담아 들어 주는 '어머니의 품' 구실을 했던 것이다. 남몰래 가슴 아팠던 괴로운 귀로(歸路)의 감회, 삼강오륜의 한 모서리가 자신의 세계에서 찢어져 나간 듯한 괴로움들을 밤길에 흘려보낸 정신의 정리.
이 시조엔 그러한 君臣有義의 정리가 자책하는 감정의 세계에 새삼 부각되어 나온다. 그것은, 새 임금을 모시는 입장에서의 고민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조는 어린 단종을 재위 3년만에 폐위시키고,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킨 왕실 비극을 배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벼슬이 위세 당당한 의금부 도사요, 일의 성질로 보아 당시 집권자의 심복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듯 애절한 노래를 불렀다는 데에 그의 정서의 깊이가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은 강원도 영월길이요, 주제의 핵심은 ;고운 임‘에 있다. 이 ’고운 임‘의 개념은 분명히 군신유의(君臣有義)의 대강(大綱)에, 인신(人臣)으로서 불의의 희생이 된 어린 인군(人君)에 대하여 바친 최대의 애정과 공경의 뜻까지를 아울러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심정은 ’여의옵고‘의 말씨에서 더 명확해진다.
다음 중장은 우리의 비분을 참말로 멀고 깊은 곳으로 끌고 간다. 그가 벼슬로서는 단종을 유배시키는 일을 맡아 직분을 다하였지만, 사람으로서는 죄에 종사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그 ‘벼슬’과 사람 사이에 실로 마음 둘 데가 없었으리라. 그런데 시조의 표현에서 ‘냇가에 앉았으니’가 우리의 심금을 치는 까닭은 웬일일까. 그것은 근원적으로는 ‘사람의 일에서 죄를 의식할 때 자연으로 간다’는 심리 사실에 있다. 그리고 냇물의 영원한 흐름 속에 씻을 수 없는 죄책을 흘려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로 이 시조가 중세 윤리인 군신 관계를 얼마나 절실한 한계에서 읊었는지를 알 만하다. - 이상보: <명시조감상>(1970) -
☞ 1988년 최장수(崔長洙)설 : 영월 호송은 어득해(魚得海)가 했다. ‘천만리 머나먼 길’은 호송길이 아니라 사약(死藥)을 내리고 쓴 ‘죽음의 세계’를 가리킨다.
☞ <장릉지(莊陵誌)> :
[禁府都事 失其名 侍置上王于寧越西江淸凉浦 同補遺云 都事夜坐曲灘岸上 哀而作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