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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순교자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생활
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Ⅰ. 여는 글
Ⅱ. 이성례에 관한 사료 검토
Ⅲ. 이성례의 생애와 신앙
Ⅳ.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
Ⅴ. 그들의 신앙과 ‘죽음’에 대한 검토
Ⅵ. 닫는 글
수리산에서 살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는 1830년대 천주교 신앙을 지킨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이성례는 최양업 신부의 모친이며, 그 순교의 장면이 극적이어서 인구에 많이 회자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본고에서는 우선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성례에 관하여는 모방 신부의 편지를 비롯하여 모두 15개의 사료가 있으며, 이 에메렌시아에 관하여는 모두 4개의 사료가 남아 있다.
관변측 사료를 이성례가 철저한 천주교 신자로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음을보여 준다. 교회측 사료에서는 그가 모성애에 의해 배교했다가 나중에 당당히 순교했음을 전한다. 이 에메렌시아는 상대적으로 자료가 빈약하지만 그러나 두사람의 생애와 순교를 찾을 수는 있었다.
기존의 이해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최경환은 1804년생이어야 하고, 이 에메렌시아는 1800년생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례가 경주이씨라고 생각되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이성례는 전주 이씨일 수 있다. 또한 이 에메렌시아는 그의 묘가 현재 명동 지하성당에 있게 된 과정까지를 보면서 최양업 신부네와 외척간일 것임도 추적했다. 그리고 수리산이 최경환을 중심으로 하는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던 교우촌일 가능성도 보았다.
이어 이성례가 회장의 부인으로서, 신학생의 어머니로서 신앙생활을 해 나간 과정을 보았다. 그는 남편을 절대로 존경했으며 남편과 함께 사회에 애긍을 베풀었다. 모방 신부로부터는 신학생의 모친이 되기에 충분한 모범적 신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가 가정박해를 딛고 남편을 개종시켰으며, 과부가 된 뒤에는 친정쪽 교우촌을 찾아가 사는 모습도 살폈다. 1830년대 전형적인 조선여교우들의 생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성례의 순교가 당대 시성대상에서 빠지게 된 이유들을 살폈다.
최양업은 본인의 모친이며, 다블뤼는 동료 신부의 어머니의 순교라는 사실에서 무척 고려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교란 회두하면 용서되는 것이지만, 사회적 영향이 크게 고려되고 있는 점을 보았다.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는 그 행적이 뚜렷한 만큼 시성대상에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Ⅰ. 여는 글
조선후기 사회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여 실천하던 사람들은 일반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인들과는 동떨어진 집단인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오면서부터는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신앙을 실천할 수 있었고, 일반 사회 안에서 비신자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우촌은 점차 사라져 갔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교회의 발전이라고 받아들이며 당연시해 왔다. 그러나 박해가 사라지고 신자들이 비신자들과 섞여 살게 되고, 아울러 생활이 풍족해지면서 신앙 자체는 해이해져 갔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초기교회사의 특성을 파악하고. 신앙의 못자리를 이해하기 위해 교우촌을 주목하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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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우촌이나 공소에 대한 기존의 연구업적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김옥희,《박해시대 교우촌》, 계성출판사, 1983 농촌공소실태조사 연구위원회,《천주교 농촌공소(公所) 실태보고서》, 분도출판사, 1984, 451쪽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 대구본부,《産地旅情》, 1996 구본식․마백락,《옛 공소의 어제와 오늘》, 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영남교회사연구소, 2000 劉仁實,〈19세기 언양 천주교 교우촌 사례분석〉《釜大史學》25․26 합집, 2002, 23~60쪽
하성래,〈성 김대건 신부와 굴암 및 은이-그 주변 교우촌들〉《敎會史硏究》23, 2004, 165~208쪽
윤선자,〈일제 강점하 천주교 회장의 현황과 교육〉《한국사회와 천주교 ; 김진소 신부 고희기념 논총》, 2007, 369~397쪽 金貞淑,〈尙州 물미 敎友村 會長의 인적맥락과 그 영향 -1899~2007-〉, 위의 책, 2007, 245~299쪽
김혜숙,〈19世紀 ‘甕器 敎友村’의 信仰生活과 甕器紋樣〉《敎會史硏究》30, 2008, 75~104쪽
방상근,〈19세기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敎會史硏究》31, 2008, 27~46쪽_____, <수리산 공소와 최양업 신부〉,《한국사회와 천주교 ; 김진소 신부 고희기념 논 총》, 2007, 109~129쪽 이창언,〈옹기교우촌의 분포와 특성-경상북도 칠곡지역을 중심으로-〉《民族文化論叢》 42, 2009, 91~124쪽그 외 식민지시대의《경향잡지》는 공소활동을, 현재에는 교우촌 마을을 찾아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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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교회는 많은 수의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순교사실과 순교 순간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어도 그들의 생애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서 교회사적 인물들에 대한 개별연구가 학자들 간 공동연구의 방법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2)
또한 천주교의 가르침은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현재 교회에서도 여성신자들의 비율이 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대 여성신자들의 교회활동은 창조적이기보다는 정해진 범위 안에 머물거나, 보조적인 역할에 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초기 천주교 여성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들이 시도되었다.3) 이러한 작업은 전통사회의 변화를 일깨운 여성신자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오늘날의 교회에서 여성들의 위치에 상응하는 역할을 창출하려는 실천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해시대 여성신자들에 대한 이해는 당시 교회사의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839년의 기해박해 과정 중 수리산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이 두 여성 순교자는 당대 여성들이 실천했던 천주교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회장의 부인 이며, 신학생의 어머니인 이성례와 교우촌 생활을 한 과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사(生涯史)는 초기 교회 여성의 생활과 활동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이성례의 배교와 순교, 이 에메렌시아의 옥사는 초기교회 신자들이 살았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교회사연구에서는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 및 사상과 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아직 본격적으로 천착된 바가 없다.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에 관한 연구는 사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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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교회사 연구소,《敎會史硏究》8 -李承薰(베드로) 연구 특집호-, 1992
한국교회사 연구소,《敎會史硏究》14 -최양업 신부 연구 특집호-, 1999
조광 외,《순교자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 가톨릭 출판사, 2007
3) 조광 외, 2007, 위의 책
김정숙 외,《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350쪽
김정숙,〈조선후기 천주교 여성신도의 사회적 특성〉《교회사연구》19, 2002, 9~60쪽
김정숙,〈조선후기 서학수용과 여성관의 변화〉《한국사상사학》20, 2003, 35~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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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착수되어야 한다. 이들에 관한 제한된 사료들도 출입이동(出入異同)이 허다하다. 그 때문에 이들과 관계되는 사실을 서술하는데 있어 큰 혼선이 빚어져 왔다. 따라서 이들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는 사실을 확정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한다. 특히 당대 교회사의 주요 사료들은 서양언어를 통해서 남아있다. 그리하여 서로다른 언어관습에 따른 혼란도 적지 않다. 가령 연령을 계산하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 그 관계인들의 연령조차도 일치하지 않고 있다. 날짜를 표시함에도 음력과 양력을 구분해야 한다. 나아가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는 박해시대 튼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순교했다. 그러나 함께 순교한 사람들은 이미 시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례는 늦게서야 시복 절차에 착수되었고, 이 에메렌시아는 아직도 시복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는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삶을 추적하여 그 생애를 복원하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우선, 그들의 삶을 추적하는 데에 요청되는 관련사료를 찾아내고, 이를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그들이 살아온 평소 신앙생활을 살펴보겠다. 물론, 그들 일생의 결정체인 순교에 대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검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료는 순교증언 기록, 다블뤼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비롯하여 선교사들의 편지,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및 관변기록 등을 망라했다. 그리고 직접 당사자인 이성례나 이 에메렌시아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이성례의 남편인 최경환이나 그 아들인 최양업에 관한 기록까지 폭넓게 검토하고자 한다.
본고의 구성에는 몇가지 제한성이 있었다. 이성례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는 각각에 대한 사료의 양이나 행적이 비등하지가 않고, 두 사람의 삶도 서로 달라서 한편의 논문으로 묶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첫 번째 장에서는 이성례에 관한 사료를 검토하고 2장에서 이성례의 생애를 살피겠다. 그런데 이 에메렌시아는 그 사료의 양이 적고, 생애에 관해서도 서술할 내용이 충분치 못하여, 사료의 검토와 생애를 함께 다루겠다. 이어 수리산에서의 생활과 순교에서 보이는 그들 삶과 ‘죽음’을 검토하겠다.
이들의 삶과 죽음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여성 순교자들이 살았던 사회적 특성 등에 대한 분석과 검토가 요청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별고를 통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Ⅱ. 이성례에 관한 사료 검토
역사의 모든 사실은 역사적 자료에 의해서 찾아진다. 사료에 대한 이해와 비판은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불가결한 작업이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이성례에 대한 사료비판을 먼저 시도하고자 한다. 이 사료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연구대상이 되는 이성례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성례에 관한 사료는 적지 않게 확인되고 있다.4) 이 사료들을 작성된 연대순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모방(Maubant, Peirre Philibert, 羅伯多祿: 1803~1839)의 1836년 12월 3일자 서한
②《일성록(日省錄)》헌종5년(기해), 8월 7일, 12월 11일, 12월 13일, 12월 27일자 기사
③《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헌종 5년(기해), 12월 27일자
④《기해일기》정리번호 61번
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서한 1843년 1월 15일자5)
⑥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서한, 1851년 10월 15일자
⑦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安敦伊, 1817~1866),
〈조선 순교사 비망기;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407~408쪽, 492~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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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 특별위원회가 발간한《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5집, 2008, 317~345쪽에 걸쳐 이성례에 관한 자료를 모아 번
역 제시하며 주석을 해 놓았다. 본고에서는 이 번역 자료들을 다시 원문과 비교하여 검토
했다. 그리고 이 자료집에서는 다루지 않은 모방 신부 편지와《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증
언록》의 해당사료를 함께 검토했다.
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8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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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다블뤼,〈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14쪽
⑨ 달레(Dallet, Claude Charles, 1829~1878),《Histoire de l'Eglise de Corée》Tome second, 1874, 164~165쪽, 234~235쪽 (안응렬․최석우 역, 달레 저,《한국천주교회사》중 권, 432, 434~435쪽, 531쪽)
⑩《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한국교회사연구 자료 21집), 20046)
⑪ 최양업 가승(家乘) 자료 : 〈宋 아가다 履歷書〉,〈崔 바시리오 禹鼎씨 履歷書〉,〈최 신부 이력서〉
위의 사료들 중 모방 신부의 편지는 자신이 선택한 신학생들을 외방전교회 교장신부에게 보고하면서, 그들의 부모를 소개하는 짧은 내용이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Bruguière, Barthelemy, 蘇,1792~1835)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는 1836년 조선에 입국하여 기해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3년간 조선에서 사목을 했다.7) 그는 최양업 외 두 명의 신학생을 선발해서 마카오의 경리부로 보냈다.
그의 편지에서 신학생 최양업 부모에 대한 부분은 이성례 마리아의 생전의 기록이며 평가가 된다. 김대건 신부의 서한(1843.1.15.)은 그가 1842년 말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중, 변문에서 북경으로 들어가는 사신 일행 중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들은 소식을 보고한 편지이다. 즉 이성례가 순교한지 3년이나 지나서야 그의 ‘참수치명’에 관한 간단한 보고를 김대건 부제가 접수하게 되었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조선입국을 시도하던 중 다섯 차례만에 성공하여 1849년 말 변문을 통하여 입국하였다. 최양업은 입국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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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882년 시복조사가 시작되자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지시로 뮈텔(Mutel, 閔德孝) 신부와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위임판사가 되어 1883년부터 1887년 사이에 기해 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들에 대해 증언을 듣고 정리한 자료들로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에 보관되어 있다.《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해제(홍연주), 7쪽.
7) 그는 이 사목생활동안 약 15통의 편지를 남겼다. 모방 신부의 사목활동에 대하여는 조현범,〈모방 신부의 전교〉《교회사연구》22, 200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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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고 있을 때, 페레올(Ferreol, Jean Joseph. 高, 1808~1853)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의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번역하는 일을 했었다.8) 부모가 순교했을 때 그 순교의 대열에 자신이 참여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던 최양업 신부는 사목활동의 과정에서도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총 19통의 편지를 남겼는데,9) 그중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은 자신의 부모에 대한 순교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이성례에 대한 가장 풍부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다블뤼 주교는 박해기간 가장 오랫동안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10). 이러한 긴 생활체험 외에도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했다. 그는 1856년부터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Simeon Francois. 張敬一, 1814~1866) 주교의 명에 따라 신심서및 교리서의 편찬에 착수했다. 또한 동시에 1856년부터 그는 순교사를 편찬하기 시작했다.11)
다블뤼 주교가 남긴 한국교회사 관계 기록들은 모두 5책의 자료집으로 정리되었다. 제1권은〈다블뤼 주교의 사한(私翰)〉, 제2권〈다블뤼 주교의 공한(公翰)〉, 제3권〈조선사 서설 비망기; Notes pour l'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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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최양업 신부 서한 1847년 4월 20일자, 당시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이 작업을 했다. 그 문서의 원명은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이다.
9) 최양업 신부 서간집은 다음과 같이 여러 번 출간되었다. 林忠信․최석우 역주,《崔良業 神父 書翰集》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 정진석 옮김,《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바오로딸, 1995 ; 배티 사적지 편,《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1집 ‘최양업 신부의 서한’》천주교 청주교구, 1996 ; 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엮음,《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09. 본고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에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분석했다.
10) 김정숙,〈대구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분석- 프랑스어 사료를 중심으로〉《대구순교사연구》, 2001, 31~35쪽 ; 崔奭祐,〈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 1,2〉《교회와 역사》284, 285호, 1999, 참조. 다블뤼 문서는 현재《교회와 역사》에 번역 연재되고 있다.
11) 다블뤼 서한 1857년 11월 21일자. 다블뤼 주교는 자신이 본국에 있을 때 이미 1839년에 순교한 사람들의 시복(諡福) 관계 자료를 읽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후 그는 시복 수속이 진행 중이던 인물들의 전기 자료를 정리하여 완성되는 대로 파리로 발송했다. (김정숙, 위의 논문. 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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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 l'histoire de la Corée〉, 제4권〈조선 순교사 비망기;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제5권〈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이다. 다블뤼는〈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지으면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도 함께 저술했다. 이들 자료는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기초 자료였다. 그러나 다블뤼가 저술한 이 원자료들은 한국교회사 연구에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활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연구자들은〈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작성할 때 사용된 기초 사료에 대한 추적 작업을 1981년부터 시작했지만, 이 자료는1998년에 이르러서야 확인되기에 이르렀다.12)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은 그 동안 각각의 기록으로 알려졌던 〈가려 뽑은 조선의 주요 순교자〉와〈순교자들의 사형선고문(結案)〉13) 등 다블뤼가〈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작성하면서 인용했던자료들을 묶어 놓은 것이었다. 〈조선 주요 순교사 약전>은 총 287쪽 분량으로 6개의 서류로 구성되어 있다. 이 6개의 서류는 〈가려 뽑은 조선의 주요 순교자 : Choix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157쪽),〈순교보완사료〉(158~166쪽),〈임군집에 관한 새로운 약전: Nouvelle notice sur Nim Joseph〉(168~173쪽),〈순교사 비망기: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173~196쪽),〈순교사 증빙문서철: 순교자들의 옥중서한, Notes et pièce justificatives de l'histoires des Martyrs〉(197~241쪽),〈순교사 증빙문서: 순교자들의 사형선고문(結案),Pièce justificatives de l'histoire des Martyrs〉(242~276쪽),〈다블뤼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보완자료, Lettre de Mgr. Daveluy à Albrand〉(277~280쪽),〈연대순 순교자 명단〉(281~287쪽)으로 되어 있다.14) 이 중〈조선 주요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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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정숙, 2001, 앞의 논문, 33쪽 ; 최석우,〈Dallet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교회사연구》3, 1981, 115쪽 각주4 ; 122쪽 각주24 ; 135쪽 각주84 ; 136쪽 각주87 ; 137쪽 각주98 참조.
13) 최석우는 이를 〈증빙문서철〉이라 불렀다. (김정숙, 위의 논문 33쪽 각주17 ; 최석우, 위의 논문, 135쪽 각주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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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은 이성례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한편, 다블뤼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해 그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앵베르 주교의 일기(〈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보고(Relation de la Persécution de Sehoul en Corée en 1839)〉)를 그대로 옮기고 다소의 내용을 손질한다고 했다. 즉, 당시까지 발견된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고, 앵베르의 수기에 중국식 발음으로 기록한 고유명사를 한국식 발음으로 고쳤다. 그런데 앵베르의 수기에는 수리산에 포졸들이 도착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15) 그러므로 포졸들이 도착했던 이후의 사건에 관한 기록은 다블뤼 자신이 수집한 것이다.
이러한 다블뤼의 작업은 달레에 의해《한국천주교회사》라는 책으로 엮여 나왔다. 달레의 저서와 다블뤼의 자료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 그에 대한 상호 비교 및 비판이 일부 진행된 바 있었다.16) 대체적으로 달레신부는 다블뤼의 자료로《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료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을 찾는 일은 교회사 연구를 심화하는 데에 좋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외에도 이성례에 관한 사료로는 증언 기록들이 있다. 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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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정숙, 2001, 앞의 논문, 33~34쪽
15) 김정숙, 2001, 위의 논문, 76쪽
16) 김정숙, 2001, 위의 논문, 27쪽
崔奭祐, Dallet가 인용한 정약용의 한국복음 전래사〉《이해남 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70;《韓國敎會史의 探究》(한국교회사연구소, 1982)에 재수록, 98~109쪽
최석우,〈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박상일 회갑논집》, 1974;《韓國敎會史 探究》(한국교회사 연구소, 1982)에 재수록, 221~239쪽
최석우,〈Dallet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교회사연구》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113~159쪽 ;《 韓國敎會史 探究》(한국교회사 연구소, 1982)에 재수록
최석우,〈Daveluy 주교의 “한국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1~2)〉〈교회와 역사〉 284-28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조광,〈우리교회사의 보배로운 기록 ;한국 천주교회사〉《경향잡지》1993년 3월호
조광,〈역사를 위한 증언 ;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경향잡지 1992년 1월호
조광,〈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金壽泰,〈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교회와 역사〉30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7~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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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에서 유 바르바라 증언(1883.7.10 회차42), 오 바실리오 증언(1884.2.23 회차69), 김 프란치스코 증언(1884.5.23 회차80), 최 베드로 증언(1866.11.2 회차99), 이 마리아 증언(1887.4.2 회차102)등의 사료가 있다. 이 중 최 베드로는 최양업 신부의 첫째 아우인 최희정(야고보, 1827~?)이다. 그의 이름은 ‘희정’(犧鼎)으로 나오며, 세례명은 ‘야고보’ 혹은 ‘베드로’로 나온다.17)
마지막으로 최양업 신부 집안의 가승을 볼 수 있다.18) 이중〈송아가다 이력서〉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제수인 송 아가타(1838.7~1930.4)의 회고에 기초하여, 1927년에서 1933년 사이에 누군가가 대필한 기록이다. 주로 그의 집안과 유년시절, 최신정(崔信鼎)과의 결혼, 그리고 사망하기까지의 생애를 썼다. 이를 통해 최양업 신부가 식구들과 한 일을 볼 수 있다. 제일 끝부분에 ‘뒷날의 덧붙임’이라고 하여, 성인 최경환(崔京煥)의 천묘식 때 송 아가타가 묘장소를 증언하였다고 부기되어 있다. 그리고〈최 바시리오 이력서〉는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인 최우종 바실리오의 전기이다.
최우정의 아들 최상종(崔相鐘)이 아버지의 전기를 적은 것인데 여기에 최양업 일가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최 신부 이력서〉도최상종이 기록했다.19)
그런데 이성례에 대한 자료는 엄격히 말하면 모방의 편지와《일성록》《비변사등록》등의 기록을 제외하면 모두가 증언에 의한 자료들이다. 증언은 사건을 목격한 목격증인이나 이를 전해들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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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증언자 최 베드로에 대해 기존 연구들은 그를 최양업 신부의 첫째 아우인 최희정(또는 최의정) 야고보로 추정하였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2008,《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제5집, 2008, 322쪽 각주23; 방상근,〈수리산공소와 최양업 신부〉《한국사회와 천주교》, 흐름, 2007, 122쪽 각주 24. 그러나 원재연은 증언 기록들을 재검토하여 최 베드로를 최희정 야고보가 아니라 그 다음 동생인 최선정 안드레아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원재연,〈최경환 성인 가문의 삶과 신앙〉《교회사학》6, 2009, 182쪽, 각주69.
18) 조광,〈박해시대의 믿음과 삶 ; 최양업신부 일가의 전기〉《경향잡지》 1995년 3월호
19) <최 바시리오 이력서>는 1939년 필사되었다. 현재 그 원본은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에 소장되어 있다. 전체문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순교자와 증거자들》, 1982, 179~240쪽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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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傳聞證人)들의 기억을 문자화한 자료이다. 그런데 증언의 경우에는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섞이거나 희미해져가게 된다. 그러므로 증언들을 사료로 택하는 데는 특별한 검토가 요구된다. 다만 이성례에 관한 사료들은 최양업 신부의 가승자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성례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성례에 관한 목격증언이었거나 제1차 전문증언들이다. 이러한 증언자료들은 그 사료가치가 상대적으로 풍부하다고 하겠다. 또한 최양업 신부 일가의 행적을 밝혀주는 가승자료들의 경우에도 당시의 상황과 견주어 볼 때 상당히 가치 있는 사료로 평가된다.
한편, 사료의 외적(外的)비판 과정에서는 사료를 분류하는 일을 중요시한다. 이는 사료의 연원을 밝히는 작업과도 직결된다. 그런데 이성례에 관한 사료들을 크게 분류하면 관변사료와 교회측 사료로 나눌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헌사료와 구술자료로 나눌 수 있다. 위에서 제시된 사료 가운데 관변사료로는《일성록》과《비변사등록》의 기록이 있고(②③), 그 외는 교회쪽에서 조사를 해서 쓴자료들(①④⑤⑥⑦⑧⑨⑩)이다.
이성례에 관한《일성록》과《비변사등록》의 기록에서는 사람이 름과 처형된 날자만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료를 통해서는 이성례가 순교한 사실만은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교회측 사료는 이성례의 생활 등 여러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의 서한과 구술자료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생활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사실과는 서로 어긋나는 진술들도 간혹 확인되고 있다. 구술자료에 대한 사료비판을 통해서 확인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 보완작업이 요청된다.
이들 자료를 당시 사회상황에 비추어 세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첫째는 박해당시의 기록이라 하겠다.《일성록》,《비변사등록》, 모방 신부 서한, 김대건 신부 서한 등은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최양업 신부 서한부터 다블뤼 주교의 작업, 달레 신부의 저술은 ‘교회’가 주축이 되어 조선 내에서 정리한 작업들이다. 이 두 번째 단계의 자료들은 첫 번째 단계와는 달리 교회의 판단과 평가가 들어갈 여지가 있다.20) 마지막으로 가승의 저술 단계는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신앙을 지켜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시기에 집필되었다. 우리는 이성례에 관한 이상 세 종류의 사료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성례에 관한 각 사료의 내용과 성격을 일별할 수 있도록 정리 해보면 다음 쪽에 나오는 <도표1>과 같다.21) <도표1>의 내용을 보면, 그 내용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15개의 사료 중에서는 동일한 특정 사실에 관하여 간략하게 서술하거나 자세히 설명하는 등의 차이를 드러내는 자료들이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내용상 충돌되는 부분으로 보기는 어 렵다, 그러나 동일한 주제에 관한 서술에서 출입(出入)이 크거나 상호 어긋나는 설명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을 각 사료가 가지고 있는 차이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료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우선 제기되는 문제는 이성례의 본관이다. 기존에 이성례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 집안이라고 하여 경주 이씨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 베드로는 이성례가 전주 이씨라고 했다. 이로써 이존창 집안과 최양업 집안의 연결 내지는 친밀도에 문제가 제기된다.
이성례의 가족상황에 대해서도 각기 다르게 전하고 있다. 최양업은 이성례의 맏아들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오 바실리오는 최양업을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남편인 최경환의 형제에 대해서도 3형제의 막내(최양업 신부 서한), 6남매의 막내(달레) 등 엇갈리고 있다.
수리산에서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체포된 인원수에 대한 언급 도 각각 다르다.《기해일기》에서는 ‘10명이 도망가고 60여명이 체포되었다’고 하고《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약 60명이 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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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만,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는 이성례 마리아에 대해서는 그 순교 사실에 대한 언급만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지막 장에서 검토하겠다.
21) 순교자들의 삶은 강론을 통해서, 그리고 성지순례, 사이버 공간 등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은 일부 원자료에 전승들을 적절히 가감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이성례의 생애와 순교 사실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졌다. 이 도표는 이성례에 관한 내용들이 서로 다르게 서술되어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상이점을 드러내주는 사료에 대한 비교 검토는 각 사료의 성격을 파악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에서 40명이 체포되었다’고 했다. 한편, 유 바르바라는 ‘40여명이 체포되었다’고 증언했고, 이 마리아는 40여인, 최 베드로는 100여명이 붙잡혔다고 했다.〈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30여명이 포착되었다’고 하여 그 출입이 매우 심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리산 마을의 규모와 신자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내용이다.
이성례가 배교했다가 순교한 점에 있어서는 모든 사료가 일치하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차이가 드러난다. 즉 이성례는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는 기록과 배교했음에도 형조로 이송 되었다는 별도의 기록이 있다. 최양업은 그의 서한에서 이성례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아들이 신학생이 된 사실이 알려져 다시 체포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다블뤼나 달레의 자료에서는 배교했음에도 형조로 바로 이송되었다고 전한다. 이성례의 배교를 이야기하는 다른 증언자들은 석방과 재체포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또한 갓난아기는 이성례가 회개한 뒤에 죽었다고 하는데,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갓난아이가 죽고 나서 배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성례의 옥살이 기간도 6개월(〈조선 순교사 비망기〉)과 9개월(《기해일기》)이었다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성례 마리아를 옥바라지 한 사람이 최희정과 최 야고보로 다르게 쓰여 있다. 이러한 사료간 차이가 나는 내용들은 다음 장에서 이성례 생애를 밝히면서 검토하겠다.
한편, 순교자들은 관변기록을 통해서 그들의 순교를 확인하게 된다. 반면에 그들 생애에 관한 다양한 정보는 교회측 자료에서 찾게된다. 이성례의 순교 사실도 관변기록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가 순교한 뒤 대략 10여년의 기간을 간격으로 하여 그에 관한 자료들이 편찬되었다. 즉, 이성례에 관한 기록은 1851년 최양업의 편지를 통해서, 1860년 다블뤼의 저서에서, 1870년대 달레에 의해, 그리고 1880년대 순교 증언기록에 의해 그 내용이 전달된다. 그런데 이 오랜 세월에 걸쳐 서술되어 왔던 이성례의 순교 사실과 생활에 대한인식이 동일했다면 그 사실은 그만큼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성례의 생애와 순교사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교회사 자료는다블뤼의 기록과 달레의 기록이다. 이 두 기록에 전해지고 있는 이성례 관계 서술들을 내용적 측면에서 비교해 보겠다.
달레(1829-1878)는 다블뤼(1818-1866)보다 11년 늦게 태어났다. 더욱이 다블뤼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자신의 자료들을 보낸 해는 1860년 무렵이므로 달레의 ‘한국교회사’ 편찬은 다블뤼가 〈조선순교사 비망기〉를 작성했던 때보다 10여년 늦은 작업이었다.
그러나 달레의 편찬작업은 다블뤼가 〈조선순교사 비망기〉의 작성을위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던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약 20년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또한 달레의 책자가 간행될 때까지 적지않은 사회변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이성례와 관계되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살피는 작업은 의미 있는일이다. 이성례에 관한 두 사료의 내용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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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표 2>는 다블뤼 주교의〈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407~408 쪽, 492~493쪽과 달레 신부의《Histoire de l'Eglise de Corée》Tome second, 164~165쪽과 234~235쪽을 비교해 작성했다. 〈조선순교사비망기〉의 필기체 판독은 디디에(Didier) 신부의 작업에 의존했다. 달레의 책은 번역본이 있으나, 비교를 위해 필자가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여 비교한다. <도표2>의 원문은 부록으로 본 논문 뒤에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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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2>에서 이성례에 관해서 두 사료가 말하는 내용을 비교해 보면, 두 기사는 순서와 내용, 문장흐름이 완전히 일치한다. 이 점을 감안하면, 다블뤼의〈조선순교사 비망기〉를 바탕으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쓰여 졌음이 거듭 확인된다. 달레가 새로 넣거나 빼놓은 문장은 대부분 말을 이어가기 위해서나 문장을 다듬기 위해서 수정된 부분이었다.23)
달레의 책은 1839년 기해박해 내지는 1845년 페레올 주교의 입국 때까지는 다블뤼의 두〈비망기〉를 충실히 옮기거나 그가 제시해 놓은 요건을 채워 놓은 정도에 머물고 있다. 다만 달레는 마치 편집자가 원고를 수정해 주듯이 몇 군데를 바로 잡았을 뿐이었다. 달레는 오히려 이 책의 구성에 있어서 편집장의 의견을 쫓는 기자의 태도로 다블뤼의 주문에 응하고 있었다.24) 이성례의 자료부분에서도 동일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만 달레의 책에는 최양업이 르그레즈와(Legrégois, Pierre Louis, 1801~1866) 교장 신부에게 쓴 보고편지가 더 들어 있다.
그러나 달레는 최양업의 편지 중에 최경환에 대한 내용은 인용했으나 이성례에 대한 부분은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고의 내용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한편, 다블뤼도 최양업이 르그레즈와에게 보낸 편지를 볼 수 있었을 개연성이 있지만, 다블뤼의 기록에는 이성례에 대한 최양업의 증언이 인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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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러한 이유로 최석우는 《한국천주교회사》는 달레와 다블뤼의 공동저서라고 해야 한 다고 주장했고(최석우, 1981, 앞의 논문 116쪽). 金壽泰는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김수태, 2000, 앞의 논문, 7쪽) 한편, 김정숙, 2001, 앞의 논문 37~42쪽과 72~75쪽에 다블뤼 주교가 사료를 수집하고 서술하는 태도에 대하여 정리했다. 그리고 다블뤼의〈조선순교사비망기〉와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의 상호 관계에 관해서는 이미 다루어져 왔다.(본고 주 16참조).
24) 김정숙, 2001, 앞의 논문,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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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이성례 마리아에 대한 자료는 증언자료를 포함하여 15여종 되는데, 그 내용에는 출입이 있다. 다만 순교자에 대한 교회의 복합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다블뤼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는 그 전하는 내용이 일치한다. 따라서 다블뤼의 기록을 중심으로 사료간 차이가 나는 내용을 검토하는 방법이 작업을 수월하게 할 것이다.
Ⅲ. 이성례의 생활과 신앙
수리산 뒤뜸이에서 살았던 이성례는 1839년 기해박해를 당하여 체포되었고 순교했다. 이성례의 가족이 체포된 때는 7월 13일이었다. 이 날 날이 밝기도 훨씬 전에 서울포교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이성례 가족은 포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지니고 있던 옷가지도 포졸들에게 나누어 주고,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그러니까, 순교할 각오들을 한 사람이라 하겠다. 약 40명이25) 한꺼번에 끌려갔다. 그러나 신문과정에서 전부 배교하고 오로지 최경환, 이성례, 이 에메렌시아 세명만 남았다.26) 이중 두 명은 옥사하고 한명은 참수치명 하였다.
사료들에 의하면, 이성례(李聖禮)는 이성례(李性禮)로도 나온다.27) 그는 1801년 순조1년에 태어나서, 1840년 헌종6년에 순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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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30명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맨 앞에는 남자들이 큰 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그 뒤에는 엄마들이 젖먹이들을 업고 걸으며, 포교들은 맨 뒤에 따라갔습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이들을 포함한 숫자와 제외한 숫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2쪽;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AMEP Vol.577, ff.1085~1089). 최 베드로는 100여명이 체포되었다고 증언했는데, 마을 전체가 약 70명이었다고 하므로(다블뤼)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한편, 방상근은 최경환이 수리산으로 오기 이전에 약 60명 되는 교우촌이었다가 기해박해때는 약 100명정도 되었다고 보았다.(방상근,〈수리산 공소와 최양업 신부〉, 127쪽)
26)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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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내포의 사도 단원 이존창의 집안이라고 한다.28) 이존창은 충청도 여사울29) 출신으로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에 입교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뒤 ‘내포 교회’를 창설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달레는, “내포(內浦)는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 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30)고 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그가 그 때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내포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는 그의 기억을 우러르고 있다.”라고 평가했다.31)
즉, 이성례 마리아는 신앙적으로 전통있는 이존창의 집안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성례와 이존창은 어떻게 연결된 사이일까를 밝혀야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김대건, 최양업 집안이 모두 이존창에 의해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이존창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최양업은,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들이 탄생된 것입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고,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32)” 라고 소개했다. 달레도, “이상한 우연의 일치이지만, 조선 최초의 신부 두 사람이 그의 집안이었으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그의 조카딸의 손자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의 조카의 손자였다”33) 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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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성록(日省錄)》기해 8월 7일자에는 ‘性禮’로 나온다.
28) 최양업 신부 편지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과. 교회측 기록. 「崔(英煥) 프란치스꼬의 아내 李(聖禮) 마리아는 洪州 고을에서 태어났는데, 1801년에 순교한 李(存昌) 루이․ 곤사가의 집안 출신이었다.」 (《한국천주교회사》중, 434쪽) ; 「홍주에서 태어난 최 프란치스코 의 아내 이 (성례) 마리아는 1801년에 순교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집안 출신이었다.」 (다블뤼의《조선 순교사 비망기》, 407~408쪽, 492~493쪽)
29) 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30) 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 321쪽
31) 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 454쪽
32)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33) 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 454~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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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세히 보면 위의 두 자료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 우선 최경환의 어머니, 즉 이성례의 시조모(媤祖母)가 이존창의 누이라는 설이 있다. 1791년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인 이존창의 누이를 모시고 다락골로 피난해 들어왔다고 한다.34) 이렇게 되면 최경환은 이존창의 조카의 아들이고, 최양업은 조카의 손자가 된다.35) 이와 같은 가족관계는 달레의 기록과 일치된다. 다만, 이존창과 김대건과의 인척관계는 차이가 난다. 최양업은 김대건을 이존창 딸의 손자라고 했고, 달레는 이존창 조카딸의 손자라고 했다.36) 일단 최양업이 세례명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 최양업의 설명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한편, 최양업은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라고 했다.37). 즉 이존창의 육촌 조카딸이다. 이렇게 되면 최경환은 이존창의 조카의 아들이고, 이성례는 이존창의 육촌 조카딸인데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이상한 결혼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열쇠가 되는 사료가 있다.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방지거 영눌(榮訥, 경환)은 15세에 신문교우(新聞敎友) 전주 이씨 가문으로 성혼하였다”38)고 했다. 구술자료는 전적으로 믿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본 향정도는 기억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여기서는 새로 제기된 ‘전주 이씨’에 주목하고자 한다. 최양업은 이성례가 이존창의 사촌누이의 조카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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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다락골 줄무덤 홈페이지(http://www.daracgol.or.kr)에는 주평국,《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1996)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김민수, 〈길 위의 목자, 땅의 순교자〉45쪽에는 단지 최경환이 어머니 경주이씨를 모시고 왔다 고만 되어 있다.
35) 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 454쪽 ; 김수태는 최경환을 이존창의 조카라고 보았다. (김수태,〈조선후기 내포지역 천주교의 확산과 이존창(李存昌)〉《지방사와 지방문화》7권1 호, 2004, 105쪽)
36) 김수태는 달레를 따라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이존창의 조카딸이라고 했다.(김수태, 위 의 논문 참조)
37)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38) 〈최 바시리오 이력서〉,《순교자와 증거자들》,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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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자료를 통해서는 이존창의 조카딸의 부모가 남성편인지, 여성편인지 판단할 수가 없다. 만약에 이 경우 이존창 사촌누이의 형제가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자 쪽이라면, 이성례가 이존창의 사촌의 여자형제의 딸이 된다. 그렇다면 이성례는 전주 이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양업 신부가 편지에서 누구의 딸이라고 하지 않고, 사촌누이의 조카딸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여성쪽이 이존창의 인척이며 다른 쪽으로 시집가서 얻은 아이를 지칭할 가능성이높다. 또한 이성례는 교리에 밝지 않다고 했는데,39) 이 표현으로 볼 때 이성례는 이존창의 직계 쪽이라기보다는 신문교우였던 쪽이 었음이 더 타당하겠다. 이해를 위하여 도표를 그리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이존창 사촌의 사촌의 夫 | 이존창4촌의 사촌 (女) | 이존창 사촌의 조카딸(이성례) |
이존창 사천의 夫 | 이존창4촌(女) | |
이존창의 夫 | 이존창 |
이존창은 경주이씨 집안인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성례를 이존창 집안이라고 하여 경주이씨 집안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원전이 된 사료에는 이성례를 경주이씨라고 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최양업 신부는 그의 편지에서, 모친이 이씨이며, 단원의 집안이 라고만 했지, 경주이씨라고는 하지 않았다. 실제 경주이씨라고 한것은 원문이 아니라 역주자의 주석을 통해서 제시된 의견이었다.40) 그러므로 이성례는 이존창의 여성 형제쪽의 딸이며, 그 자신은 전주이씨였다고 생각된다. 즉 이존창과 이성례는 성이 이(李)로 같이 표기되어 같은 집안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이존창과 이성례는 외가 쪽의 연결인 것 같다. 그러면 이성례 마리아와 김대건 신부와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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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최양업 신부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40) 林忠信 ․ 최석우 역주,《崔良業 神父 書翰集》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45쪽. 한편, 경 주를 본으로 따진다면 최경환이 경주최씨이다.(최 베드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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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까? 실제로 한국에서 계산하는 인척관계로는 굉장히 옅어지게 된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기록은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41) 신부님의 조모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 의 조카딸입니다.42)” 라는 표현이다. 이에 해당하는 원문인 최양업 신부의 편지는 아래와 같다.
(IIIa familia I primum falso sacerdotio privata, dein vero sacerdotio fuit decorara) : duos enim progenuit sacerdotes per filias, per Melaniam quippe I aviam Patris Andreae et Mariam I quae fuit neptis Melaniae sobrinae I Tsontshang.43)
(이단원 집안이 비록 가짜 신부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신부를 둘이나 내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44)위의 문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료 자체를 해석하여 “나(최 토마스 신부)를 낳은 이(성례) 마리아는 멜라니아의 질녀”45) 라고 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진외 6촌간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46) 그러나 이성례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와 조카가 되는 사람의 딸이며, 그 조카는 이존창 사촌의 시가쪽을 일컬 을 수도 있는 사이다.
결론적으로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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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원순은 이멜라니아는 이존창의 딸로 보고(〈김대건 家門의 信仰來歷과 殉敎傳統〉《교
회사연구》12, 1997, 67~82쪽), 김수태는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가 이존창의 조카딸이라
고 보았다. 최양업 신부 편지에 의해 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42)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
회, 앞의 책, 323쪽)
43)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2008,《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
료 123위》제5집, 322쪽
44) 해석은 필자가 예수회 박종구 신부에게 문의하여 확인하였다.
45) 林忠信․최석우 역주,《崔良業 神父 書翰集》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45쪽
46) 최석우,《한국가톨릭대사전》, ‘최양업’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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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가와 최양업 신부가 인척으로 맺어진다는 것이지 이성례와는 깊은 관계가 있는 사이가 아니다. 즉 이성례 입장에서는 이존창가는 외가 쪽으로 연결된 아버지가 있다는 결론이 된다. 이존창의 누나가 최양업의 할머니이고, 이존창의 딸이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라는 것과 나중에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가 이존창 딸네의 자녀라는 관계가 있다. 최양업은 당대 두 명밖에 없는 방인사제가 서로 집안끼리 관계가 있다는 연고를 찾고자 한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은 교회측의 기록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에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다 이존창과 관계가 있음을 언급하는 원문은 아래와 같다.
Par une coincidence assez singulière, les deux premiers prêtres étaient de sa famille : le P. André Kim, petit-fils d'une de ses nièces, et le P. Thomas T'soi, petit-fils d'un de ses neveux. Sa descendance direct est aujourd'hui éteinte.47)
달레는 결국 김대건 신부는 이존창의 조카딸들 중 어느 한명이 결혼해서 얻은 조카딸의 손자(petit-fils d’une de ses nièce)이고 최양업은 이존창의 조카 중의 한명이 결혼해서 두게 된 이존창 조카의 손자(petit-fils d’un de ses neveux)라고 했다. 그런데 프랑 스어의 조카(nièce, neuf)는 태어난 조카의 성별은 알 수 있으나, 그 부모가 자신의 형인지, 또는 누나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는 형의 자식은 보통 자신과 같은 혈통으로 치지만, 누나의 자녀는 자신의 혈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성례가 경주이씨가 아닐 가능성이 크며, 이존창과 이성례의 관계는 외가 쪽 관계일 수 있다.
한편, 이존창은 초대교회에서 활동 범위가 넓은 사람이었다. 평창을 본관으로 하는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일찍부터 권일신(權日身), 최창현(崔昌顯), 유항검(柳恒儉)과 함께 신부로 임명받고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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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Dallet,《Histoire de l'Eglise de Corée》Tome premier, Paris, 1874, 126~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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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승훈은 이가환(李家煥)․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 약용(若鏞)․이벽(李檗) 등과 멀고 가까운 친척이었고, 윤지충(尹持忠), 황사영(黃嗣永), 이윤하(李潤夏) 등과도 관계가 깊었다.48) 그러므로 이존창 집안과 연결을 가진 최양업, 김대건 두 집안의 선대도 초기교회에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과 일정 관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이성례의 고향은 홍주이다. 그 부근 덕산, 예산 일대는 교회 초기부터 신앙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일찍이 강완숙은 홍주 옥에 갇혔던 신자들 뒷바라지하다가 남편으로부터 소박을 맞고 서울로 올라가서 활동하게 되었다49). 김진후(金震厚) 비오도 4,5차례나 붙잡혔다가 놓여났다가 하며 홍주, 전주, 공주 등지에서 문초와 고문을 당했다.50) 따라서 이성례는 신앙적으로 뿌리가 깊은 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성례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51) 이성례의 신앙실천과 교육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성례는 부모가 다 교우인 고로 어려서 대세를 받았다.52) 다블뤼도 그녀가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실천하였다고 했다53) 그런데 최 베드로는 그가 신문교우였다고 증언했다.
이는 앞의 평가들과는 크게 어긋난다. 한편, 이성례를 교리에는 어두웠다고 한다. 최양업은 이성례가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다고 하면서도, 교리에는 어두웠다고 했다.《기해일기》에도 이성례는 교리에 밝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가 배교했기 때문에 결과를 두고 한 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성례는 글은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이성례 부부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하루는 포교들이 와서 교리서를 읽어 보라고 했다. 최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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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趙珖,〈辛酉敎難과 李承薰〉《敎會史硏究》8, 1992, 61쪽
49) 김정숙,〈강완숙의 인적, 경제적 맥락〉《순교자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 2007
50)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6~47쪽
51) 최양업 신부 서한 1851년 10월 15일자.
52) 성황석두루가서원 편,《기해일기》, 1986, 131쪽
53) 다블뤼 주교,《조선 순교사 비망기》, 407~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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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읽는 소리를 듣고 감동한 포교들은 이성례 보고 읽으라고 했다. 그때 이성례는 글을 모른다는 핑계로 읽기를 거절했다.54) 또 하나 이성례에 관한 관(官)의 기록이 ‘聖禮’ 또는 ‘性禮’55)로도 표기되어있는 점도, 이성례가 글을 몰라서 그의 이름자를 정확히 불러주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다.
이성례는 18세에 최경환과 결혼했다.56) 그런데 신랑 최경환은 결혼할 당시 몇 살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최경환은 1839년 9월 12일, 서른 다섯살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1804년생이어야한다.57) 우리 나이로 하면 1805년생이지만, 이것은 서양인이 조사하고 서술한 책이므로 서양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성례보다 3세가 어리다.
그러니까 그는 결혼할 당시 겨우 15살이었다. 최 베드로도 최경환이 15살에 결혼했다고 증언했다.58) 현재 일반 전승에 최경환을 1805년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결혼할 때의 나이가 14세가 되어 더욱 어리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자료에서 1840년 초에 죽은 이성례는 39세에 죽었기 때 문에 1801년을 출생년으로 환산했다. 따라서 최경환도 서양식으로 계산해서 1804년생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성례와 최경환 부부는 결혼한지, 2년 후, 1821년 3월 1일에 첫아기인 최양업을 낳았다.59) 최경환은1804년생이므로 그가 17세되던 해였다. 두 번째 아이는 터울이 퍽 길었다. 1839년 부모들이 체포되었을 때, 최양업 신부의 형제들은 최희정 야고보 12세60),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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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3쪽
55)《日省錄》, 기해 5년 8월 7일자
56)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다블뤼의《조선 순교사 비망기》, 407쪽 등. 본고 도표1 참조
57) 현재 최경환을 거의 모든 자료들이 1805년생으로 소개하고 있다.(《한국가톨릭대사전》 에는 그의 생몰년을 1804~1839로 소개한다.)
58) <최 베드로 증언>《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회차 100
59) 오 바실리오는 최양업이 둘째아들이라고 증언했다,(위의 책). 이성례 부부에게 첫아기가 있었는데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서 죽었을 수도 있겠다.
60)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는 ‘열네 살’로 나오는데 이는 12세(음력13세)라야 맞는다고 하고 있으나, 생일에 따라서는 14살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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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안드레아가 8세, 우정 바실리오가 7세, 신정 델레신포로가 5세였다. 두 살짜리 스테파노는 옥에서 죽었다.61) 그런데 최희정은 스스로 ‘정해생(1827년생)’이라고 하였다.62) 그러므로 결국 최양업 신부는 6살 아래의 동생이 있다. 그 사이에 한명쯤 낳았다가 죽었는지, 아니면 어떠한 이유에서 아이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최희정 야고보가 1827년생이라고 하니, 최양업의 동생들은 각각 1830년, 1832년, 1834년, 1837년생이 된다. 최양업의 옥에서 죽은 동생은 결국 최양업이 본 적이 없는 동생이었다.
이 사이에 이성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를 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성례에 관한 기록이 너무나 적으므로 그의 남편이나 아들의 행적을 더듬어 그 편린을 찾을 수밖에 없다.
최경환63)의 집안은 증조부 최상진(崔相鎭)이 음서로 진보 현감을 지냈다. 1787년(정조11) 서울에 거주할 때 조부 최한일(崔漢馹)이 아우 최한기(崔漢驥)와 함께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64) 그후 최한일은 이존창의 누이인 경주이씨 멜라니아와 혼인하여 아들 최인주(崔仁株)만을 둔 채 사망했다. 1791년 신해박해때 최인주는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다.65) 그후 그는 모친과 함께 청양 다락골로 피신하여 이후 3대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는 동안 최인주의 활동으로 다락골의 입구 새터가 경작되었다.66)
이때 인근에 살던 이성례가 최경환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1821년 다락골 새터에서 최양업이 태어났다. 최양업의 생애를 크게 성장기(1821년 3월~1836년 2월), 해외 유학기(1836년 2월~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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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최 바시리오 이력서〉, 앞의 책
62) <최 베드로 증언>《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회차 100
63) 달레에서는 최치운, 증언자들은 영환 또는 영눌로도 불렀다. 최경환에 대해서는 본서 김수태의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에 자세히 나온다.
64) 김수태, 앞의 논문, 105쪽 참조
65) 차기진,〈충청도 남부의 성지와 사적지〉《사목》248호(1999년 9월호), 117-119쪽
66) 차기진,〈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교회사연구》14, 1999, 21-24쪽.
차기진은 이때 교우촌으로 변모하였다고 하는데, 교우촌이 되었다면 굳이 이 집안이 신앙을 지키러 이곳을 떠났던 이유가 설명되기 어렵다. 교우촌은 나중에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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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5월), 사목활동기(1849년 5월~1861년 6월)로 구분하는데,67) 이중에서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있는 시기는 1836년 2월 6일 신학생으로 추천되어 모방 신부가 거처하던 서울 후동(后洞)68)에 도착한 이후부터이다.69) 따라서 최양업의 생애는 이성례의 생애를 비추 는데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최양업이 15세가 되어 신학생으로 선택될 때 그들은 수리산에 살고 있었으리라고 간주되었으나, 최 베드로의 진술에 따라 수리산으로 이사한 것은 1838년 경의 일임이 밝혀졌다.70) 기존에 그들이 1832년 경 71) 내지는 1837년 수리산으로 들어 왔다고 했었다.72)
따라서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택될 때 그들은 수리산에 살고 있지않았다.
최경환은 삼형제 중에 막내였다. 앞서 본바와 같이, <최 바실리오 이력서>에는 3형제의 막내로 되어 있는데, 달레는 “(崔永煥) 프란치스꼬는 홍주(洪州) 고을 다래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했다73). 아마 최 바실리오는 여자 형제를 꼽지 않았고, 달례는 여자 형제까지 셈한 숫자인 것 같다.
그의 집은 매우 부유하였었고 복음이 조선에 전하여졌을 때에 제일 먼저 입교한 집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고향을 떠났다. 최양업이 7살이나 8살 되었던 무렵인 것 같다. 그들이 고향을 떠난 것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74)
최경환은 이후 가족들과 함께 다락골 새터를 떠나 서울의 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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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차기진, 위의 논문, 23쪽
68) 서울 후동(주교동 즉 낙선방[樂善坊]의 후동[後洞]인 듯)은 일찍이 정하상이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 비용으로 매입해 놓은 집이었다.당시 그 집에는 정하상의 모친과 여동생, 남이관 부부 등이 생활하고 있었다.(차기진, 위의 논문, 23쪽)
69) 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華城面 農岩里 樓谷)
70) 방상근, 2007, 앞의 논문, 122-125쪽
71) 차기진,〈충청도 남부의 성지와 사적지〉《사목》248호(1999년 9월호), 117-119쪽
72) 청양 다락골 줄무덤(http://www.daracgol.or.kr)에서 주평국, 앞의 책을 인용하여 설명
73)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29쪽
74) 달레, 위의 책, 430쪽, 최경환 가족의 이동 상황은 본서 김수태의 논문에서 자세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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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회현동)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서울에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겠다는 것은 아마도 성사를 보거나 교회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쉬운 것을 말했을 것 같다. 그들은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외교인들에게 들볶이었고, 그 재산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최경환과 그의 형들은 그들이 다락골에서 서울로 이사했다가 강원도 김성(金城),75) 경기도 부천을 거쳐 마지막에는 산골로 물러가 살기로하였다.76)
그런데 식구가 한 곳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 세월에 수상도 하고, 생활방책도 될 수 없다’하고, 각각 교우촌을 찾아 흩어지는데, 맏이는 목천(木川) 서덜골로, 둘째는 용인(龍仁) 한덕골로 가고, 최경환네는 수리산 뒤뜸이로 갔다.77) 후에 최경환 부부의 자녀들은 이 연고를 찾아 흩어져 살게 되었다.78) 최경환은 1839년에서야 수리산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79) 그리하여 이성례는 이 시기 회장의 부인이며 신학생의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았다. 모방 신부는 최양업 토마스(2월 6일), 최(방제) 프란치스코(3월 말), 김대건 안드레아(7월 11일)를 신학생으로 선정하고나서 그들의 부모는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교우들(leurs parents sont des meilleurs chrétiens de Corée)이라고 했다.80) 이로 미루 어 이성례와 최경환 부부가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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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최 바시리오 이력서〉, 앞의 책, 213쪽.
76) 김수태,〈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교회사학》6, 17-19쪽
77) 〈최 바시리오 이력서〉, 앞의 책, 214쪽.〈본디 山農은 생소하여, 農形은 부실하고 식솔은 수다하니, 불과 수삼년 간에 洪州 땅에 있는 토지도 모두 팔아 없어졌다. 그러나 거주하는 토지가 협촌유벽(峽村幽僻)하나, 생곡(生穀)은 하므로, 점점 교우들이 모여 담배농사로 수십호가 생업하게 되었다.〉
78) 〈최 바시리오 이력서〉, 앞의 책. 「이때에 놓여 나온 동중(洞中) 교우들은 친소(親疎)와 거지(居地)를 찾아 각방으로 헤어지고, (최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목천 서덕골과 용인 한덕골 삼촌 댁에 분배하여 의탁하고, 넷째 아우 (최우정) 바실리오는 진천 동골 어떤 친척의 집에서 양육할 때, 불행히 단복고창(單腹鼓脹)이란 병에 걸려서 위경(危境)이더니, 당약(唐藥)을 만나 회생하여 10여 세에 이르니, 그동안의 고초는 불가형언 (不可形言)일러라」
79) 차기진,〈충청도 남부의 성지와 사적지〉《사목》248호(1999년 9월호), 117-119쪽
80) 모방 신부가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르그레즈와(Legrégois) 신부 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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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최양업을 추천한 사람은 당대의 교회 지도자 정하상 등이었으니, 신자들로부터 평판을 받고 있는 집안이라 하겠다. 일단 신학생의 어머니로서는 합격점을 받았던 것 같다.
다블뤼 주교는 이성례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실천하였고, 18세에 프란치스코와 혼인을 하여 그를 따라 서울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곳으로 이주를 하면서 그와 함께 온갖 고통을 나누었다. 궁핍하여 배고픔 시절을보낼 때나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는 피로 속에서도 그녀는 절대로 불평하는 소리를 낸 적이 없었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이 모든 고통을 기쁘게 인내해서 참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보화처럼 받아들였다.
어린 자식들이 배고픔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잦은 이사 길에서 기진해 있는 것을 볼 때면, 그녀는 이 세상살이의 젊음과 영원한 다른 세상에 대해 말해 줌으로써, 그리고 우리 주님 예수님의 본보기를 들면서 아이들을 강하게 했고 격려하였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으로 남편과 단단히 하나가 되어 두사람은 함께 영혼의 일과 집안 일들을 돌보았다. 사순 시기에는 얼
마간의 돈과 단식하면서 따로 떼어놓았던 곡식을 남편과 의논하여애긍을 했다.81)
이성례는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곳곳에 이사 다니며 곤핍함을 기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바른 가르침과 격려를주었다. 또한 남편을 통해서 이성례의 생활을 알 수가 있다. 최경환은 애덕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으나, 살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좀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최경환은 장을 보러가서는 싸고 나쁜 것만을 골라서 가져왔다고 한다. 흉년이 들면 여러 사람의 곤란을 돌보아주고, 수확기에는 좋은 것은 불쌍한 사람을 위해 두었다.82) 다음과같은 사례도 있다.
한 번은 가계치패(家計致敗)하여 홍주(洪州) 몇 두락 토지를 팔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서, 어떤 두어 사람이 악독히 싸우는지라, 연고를 물은즉, 채무자가 빚갚지 못하는 연고라 하였다. 그 채무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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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다블뤼,《조선 순교사 비망기》, 407쪽
82)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1~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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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겨 갚지 못한 채금을 갚아 주어 화목케 하였다. 또, 한번 은 시변(市邊)을 지나시다가 떡장수가 파 하나를 실수하여(밟아) 떡그릇을 진흙개천에 엎디려 울고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감발(感發)하여 물은즉, 노파가 울며 말하되, “이 떡을 팔아야 어린 자식과 생명을 보존할 터인데, 이 지경이 되었나이다”하였다. 이에 그 가문(價文, 값)이 얼마이냐 물어, 값을 다 물어 주셨도다.83)
위와 같이 최경환은 모든 일을 천주께 맡기고 화평한 얼굴로 생활했다지만, 살림하는 부인에게는 짐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부인으로서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같은 일이 계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성례도 때로는 묻기도 했던 것 같다.84) 그러나 설명을 듣고는 언제나 남편의 뜻을 따랐다. 최양업은 어머니는 나이가 더 많으면서도 언제나 아버지 뜻을 따랐다고 전했다.85) 이성례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을 남편과 하나가 되어 처리하였다.86)
그러므로 이성례는 위와 같은 모든 일을 옳게 여기고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부인과의 생활이기 때문에 최경환은 ‘비록 끊임없이 자선의 일을 하면서도 자식과 부인을 소홀히 하지 않을 수’있었을 것이다. 또 그들 부부는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모은 돈으로 애덕을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하인과 집도 소중히 여길 수 있었 을 것이다.87)
한편, 교우촌에서는 신앙생활과 함께 경제생활도 공동으로 했다.
이것을 회장들이 책임져 나갔다.88) 어느 날인가 최경환은 그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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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최 바시리오 이력서〉, 앞의 책, 214쪽
84) <유 바르바라 증언>《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회차 42
85) 최양업 신부 1851년 10월 15일자 편지 : 다블뤼 〈조선 순교사 비망기〉, 407-408쪽
86) 최양업 신부 1851년 10월 15일자 편지
87)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2쪽
88) 김승주,〈韓國敎會指導書들을 통하여 본 公所會長의 位置와 役割〉, 大建神學大 석사논
문, 1979
김정환,〈귀스타브 뮈텔(Gustave Mutel)의 사목활동〉, 충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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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里正)격이 되었다. 이 마을은 약 70여명 되는 교우촌이었던것 같다.89) 혹은 50여명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는 1839년 회장으로 임명되었다.90) 최경환은 박해 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성적으로 일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박해와 기아로 서울에서 많은교우들이 죽자, 이들을 거두었다. 또 동네 교우들을 권고하여 함께 순교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고, 불쌍한 교형들을 구원하기 위해 분주했다.91) 그러나 최경환은 죽을 당시 회장이어서 회장의 역할을 그리 오래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성례가 회장의 부인으로 무엇을 하였는가는 뚜렷치 않다.
한편 신학생의 어머니로서 이성례는 어떻게 살았는가? 우선 첫째로 이성례 부부는 신부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도 잘 모르는 시절, 자식을 내놓을 만큼 신앙이 강했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부모는 신학생에게, 신학생은 부모에게 연락하지도 못하고 산 것 같다. 모방 신부는 1836년 12월 3일에 써서, 1837년 6월 7일에야 도착한 편지에서 “(우리 신학생을 받은) 교장보고 우리들에게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편지를 쓰라고 부탁해 주십시오”92)라고 말하고 있다. 즉 신학생들을 파견한 모방 신부가 그들을 맡을 교장신부에게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편지를 보내달라는 청을 하는것으로 보아 신학생이 부모에게 편지를 쓰기는 어려웠다고 보인다.
이는 부모가 순교한 뒤 그 아들 최양업이 1842년 김대건 신부를 통해서야 그 소식을 들었음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즉 신학생의 모친은 당대 신앙이 아주 깊어야 했고, 아들을 바쳤지만, 교회로서는 어떤 대우도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는 신학생과 부모간에도 연락 이 없는 세월이었다. 단지 당대의 신학생의 어머니는 학생을 오직 다 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관변에서는 그것 때문에 더욱 심하게 처벌받는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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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앵베르 주교의 일기(〈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 1839
90) 다블뤼,〈조선 순교자 비망기〉, 407~408쪽,
91)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2쪽
92) 〈Je prie Mr. leur supérieur de nous écrire au moins une fois chaque année〉모방 신부 1836년 12월 3일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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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이성례는 집안 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갔고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내게 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 동안 거듭하였는데도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다. 또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최경환을 진심으로 공경하며 같이 애긍시사를 했다. 그리고 자식을 신부로 내놓았다.
Ⅳ.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
한국교회는 1801년부터 1834년까지 신부가 없었다. 따라서 이 에메렌시아는 당시 공식적인 집회장소인 교회도 없고, 신자들끼리 모이지도 못하던 상황에서 외교인 가정에서 홀로 천주교를 배우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장 끈질기다고 할 수 있는 가정박해를 극복하고 남편을 신자로 이끌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는 교우촌을 찾아가서 살다가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배교하는데, 최경환, 이성례와 함께 감옥에 남았다. 이 에메렌시아는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킨 세 사람중에 한명이었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겪다가 옥사하였다.
그런데 이 에메렌시아에 대한 기록은 이성례에 비하면 빈약하기 그지없다. 우선 그에 대한 사료는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408~409 쪽과 Charles Dallet,《Histoire de l'Eglise de Corée》Tome second, 1874, 165쪽(번역본 중권, 435~436쪽)와 〈기해․ 병오박해 증언록〉가운데 최 베드로(회차 101, 1886.11.4)의 증언, 그리고 〈최 바시리오 이력서〉 등에 약간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부모의 순교기록을 따로 남긴 최양업 신부도 그들과 같이 순교한 이 에메렌시아에 대하여는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더욱이 1886년 기해․ 병오박해에 대한 증언을 수집할 때 이 에메렌시아에 대해서는 아예 질문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에메렌시아의 사료가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사라져간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 그에 관련된 사료의 내용들을 서로 비교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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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한국천주교회사》의 자세한 내용 비교는 본고 <도표4>에 다시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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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3>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에메렌시아에 대한 문헌자료는 다블뤼의〈조선 순교사 비망기〉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는 다블뤼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2007년에 발간된《명동성당사》는 달레의 기록을 옮겨 놓고 나중 그의 묘가 명당성당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덧붙인 것뿐이다. 따라서 이 에메렌시아에 관한 자료는 세 자료가 동일계통이다. 다만,《명동성당사》에서는 달레의 기록 중 ‘오빠들 집(de ses frères)’으로 갔다는 말을 ‘오빠네 집’으로 갔다고 단수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오빠들 집이 한곳에 있었다고 하는, 즉 동네를 가리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나머지 자료로는 최 베드로가 이 에메렌시아를 ‘자신들의 외척’이라고 한 언급. 참수치명했다는 증언뿐이다. 그렇다면 이 에메렌시아는 어떤 삶을 살은 사람일까? 이성례 마리아의 경우에서처럼. 순교자들의 종합기록이라고 할 다블뤼의 〈조선 순교자 비망기〉와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내용을 비교하면서 그의 생의 편린을 찾아보겠다. <도표1>에서와 같이 〈조선 순교자 비망기〉와《한국천주교회사》에서 문장까지 일치하는 것을제외하고 도표를 만들면 아래와 같다. 도표는 이성례의 경우와 같은 원칙으로 작성되었다. 이 에메렌시아에 관한 달레의 기록은 다블뤼의 〈조선순교사 비망기〉를 전적으로 옮겨 놓았다.
최경환, 이성례 부부와 함께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포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이 에메렌시아는 1800년에 태어나서 1839에 옥사 순교했다.94) 현재 교회에서는 그의 출생연도를 1801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순교자 나이를 계산하던 방법으로는 맞지 않는 다. 1839년에 순교했는데, 39살이었으니, 그의 출생연도는 1800년 이 된다.95)
한편, 기록들을 통하여 볼 때 이 에메렌시아가 최경환 가족과 어떤 관계가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우선 이 에메렌시아와 최경환 부부는 인척관계에 있었다. 최 베드로는 그가 외척이 된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96) 다만, 최 베드로는 ‘외척되는 이(李) 마리아’ 라고 했는데, 다블뤼의 비망기에는 그의 이름이 이 에메렌시아이다.
여기서 세례명은 최 베드로가 착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에메렌시아의 묘는 명동성당 지하경당에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이름을 잃어서인지 명동성당 지하묘에 무명순교자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묘가 명동성당으로 옮겨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최경환 가족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박해기 이 에메렌시아 유해는 최경환의 유해와 같이 거두어졌다.
즉 이 두 사람의 묘는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의 묘는 1930년 최경환묘가 수리산에서 중곡동 묘지로 옮겨질 때, 같이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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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참수치명했다고 하나, 여러 사료를 종합할 때 이메렌시아는
옥사했음이 분명하다.
95) 다블뤼는〈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저술할 때, 음력과 양력을 전부 구분하여 놓았다. 그
러한 필자라면 서양의 나이 계산법과 조선의 나이계산법이 틀림을 정확히 알았을 것이다.
필자는 다블뤼가 제시한 나이가 서양식 나이계산법으로 기록되었다고 본다.
96)《기해․ 병오 순교자 증언록》최 베드로 증언, 회차 101(188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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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5월 26일 교구에서는 수리산에 있는 최경환 묘소의 천묘식(遷墓式)을 거행하였는데, 이 때 최경환 분묘 좌우에 있던 이 에메렌시아와 치명자인 듯한 묘도 함께 발굴하여 중곡동에 있는 교회 묘지로 이장하였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70년 5월 19일 명동 본당에서는 중곡동 묘지에서 이 에메렌시아와 무명순교자의 묘를 발굴하여 5월 28일 지하 묘역에 안치하였다.97)
그런데, 박해기 최경환의 묘는 비교적 정확히 관리되어 왔다. 즉 최양업 신부는 귀국한 뒤, 동생 부부에게 최경환의 묘에 성묘하고 관리하도록 했으며 본인도 성묘를 했다.
부친께서 합당하고 어진 가문에 출가시키고자 두루 고르시다가 마침 우리 조선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의 한분이신 최 도마 경주 후 인(慶州後人) 정구(鼎九)의 말째(끝) 계씨 멜렌신포로 신정(信鼎)에게로 허혼하시어, 살아 가다가(1853~1868) 15년 만에 시숙되는 도마 최신부를 모시고, 광주 소리울이라는 지방에서 몇해를 지내다가 신부의 명령으로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뒤듬이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곳에서 옛날 기해(1839)년에 위주 치명하사 복자승품(福者昇品)되신 방지거 영눌(榮訥, 京煥)은 아가타의 시부이신데 기해(1839)년에 이 뒤듬이에서 살다가 경성(서울) 포교에게 붙잡히어 순교하셨다. 그 시부님 사시던 고장에 집을 짓고 3~4년을 지낸 때에, 신부 께서 오시면 가정 식구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데리시고 동리 건너 태향산(수리산)에 올라가사, 부친 산소 앞에서 정성으로 신공을 바치실 때에 가족들도 한편으로는 울음소리요, 그 북바쳐진 슬품은 말할 수 없었다.98)
이 이야기를 증언하는 최양업의 제수(弟嫂) 송 아가타는 최양업이 선물한 묵주 한 채에 성모 포시 통고패를 육십여년 동안 줄곧지니고 있었다는 사람이다. 그들이 살길이 막막하여 걸식을 떠나기로 하고, 몸에 지녔던 성물까지 땅을 파고 묻기로 했을 적에 송 아가타는 최양업이 손수 걸어 준 묵주 한 채에 성모 포시 통고패를 달아 속옷 속에 넣고 남편이 없애라고 하는데도 듣지 않았다.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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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명동본당,《명동본당사》, 제2권 6장 지하묘역의 성인·순교자들: 이 에메렌시아·무명순교
자들, 2007, 233쪽.
98) <송 아가다 이력서>, 앞의 책,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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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타는 “관전(官前)에 잡혀가도 옷 속에 있는 물건은 관계없다(법률로는 여자 피의자에게는 옷을 벗기는 법은 없었다.)”하고 단단히 지녀 수십 년이 되어서 묵주는 삭아 버렸고, 성모포시패는 육십년이 지날 때까지 지녔었다.99) 물론, 박해시대 옥사한 최경환의 유해는 정확히 수리산으로 옮겨졌었다. 최 베드로는 자신이 부친의 유해를 거두었다고 증언했다.
기해 8월 초5일에 옥중에서 임종할 때 죄인 부친의 말이 “내가 예수의 표양을 따라 법장으로 나가 칼 아래 죽자 하였더니 옥에서 죽게 되니 막비주명(莫非主命)이라”하고 선종하였습니다. 죽은 3일만에 죄인 형제와 다른 교우 2~3인이 시체를 찾아 애오개100)(에) 토감(土坎: 임시 가매장)하였다가 그해 가을에 수리산으로 이장(移葬)할 새 성교회 예절대로 장사하여 지금껏 그곳에 있습니다.101)
한편,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대로 잘 찾아져서 모셔졌던 최경환의 묘도 한동안은 방치되었다. 송 아가타 가족은 최양업 신부 선종 이후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광주군 함박동으로 이사하여살았다. 이 무렵이 약 1864년 경이었다.102) 그러니까 묘는 몇십년동안 방치되었던 것 같다.
본래 한국순교성인들은 1850년대 이미 페레올 주교에 의해 서류가 준비되어 교황청에 보내졌었다. 그리고 1857년 시복심사는 어렵지만 그 조사의 엄격함을 인정받아 일괄하여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드디어 한국가경자 82명중 79명이 복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가경자들의 사적조사를 하면서 최경환 순교자의 천묘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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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송 아가다 이력서>, 위의 책, 192-193쪽. 송 아가타는 1838년 7월생으로 최양업 신부가 활동할 때에는 한창 젊은이였다.
100) 서울 마포구 아현동.
101)《기해․병오박해 증언록》, 최 베드로 증언, 회차 101(1886.11. 4), 한편,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노고산에서 지석(誌石)으로 최경환묘를 찾아 수리산으로 천묘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102) 일을 당한 뒤 2년 후가 1866년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로 추정했다. <송 아가다 이력서> 앞의 책.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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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되었다. 그러나 서력 1928~29(무진~기사)년간에 조선 순교 복자의 분묘를 찾았을 적에 복자 최경환의 산소가 어디인지 몰랐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양업이 들어와서 성묘를 할 때 모셨던 송 아가타가 생존해 있어 묘를 분별해 주었다.103) 이때 교구청과 시복 관제기관에서는 송 아가타를 찾아내어 불러들였다. 송 아가타의 시집조카인 최상종(崔相鍾)이 92세 된 송 아가타를 모시고 지금의 안양시의 뒤듬촌에104) 이르러 분묘를 찾아내었다. 서울교구청 신부들은 송 아가타의 길잡이와 증거하는 모습을 보고 최경환의 묘가 확정적이라고 인정하고 천묘하였다.105)
따라서 최경환의 묘는 매우 정확히 기억되고 이장되었다. 그런데 후손들의 증언에는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에메렌시아의 묘가 같이 이장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렇게 여러 번 묘를 옮겼는데 이 에메렌시아의 묘가 같이 따라다녔다는 사실은 일정한 연고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최경환이 옥사한 이후 그 후손이나 인척들이 와서 시신을 찾아 옮길 때, 그들은 거의 같은 무렵 옥사한 이 에메렌시아의 시신도 수리산으로 함께 옮겨 묘를 썼다. 또 수리산에서 중곡성당 묘지로 천묘할 때도 이 에메렌시아의 묘는 최경환의 묘와 같이 옮겨졌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 에메렌시아는 수리산에서 체포되었던 최경환 가의 사람들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최경환은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다.106) 그러므로 이러한 당시 교회의 전통에 익숙했던 최경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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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최경환 천묘식에 대한 자료는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송 아가다 이력서>, 앞의 책, 203쪽
104) 당시는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였다.
105) 송 아가타는 이 일을 마치고 1930년 4월 24일(음력 3월 26일)에 선종하였다. <송 아가다 이력서>, 앞의 책, 204쪽
106) 최양업 신부 1851년 10월 15일자 편지,《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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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과 교우촌 사람들은 시신을 찾아 묻어주는 일을 정확히 했을수 있다.
그러므로 이 에메렌시아가 수리산에 최경환과 함께 묻히게 된 과정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이성례 마리아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비해 이 에메렌시아는 잘거두어졌다는 사실이 주목된다.〈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이성례 처형 당시) 시간이 당도하매, 여러 죄수 치명자들을 당고개(堂峴)로 나수(拿囚: 죄인을 끌고 옴)하여 회합하고, 차례로 행형(行刑) 참수하여 한곳에 시체를 모아 구렁에 넣고 먼가래로[정식 매장 절차나 물품을 갖추지 않고] 시체를 묻는지라.”107) 최 야고보가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한 구덩이에 묻었으므로 유해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에 옥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에메렌시아의 시신은 거두어질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에메렌시아와 최경환 일가는 어떤 연고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하나 여기서 주목되는 상황은 수리산이 최경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마을이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이 에메렌시아는 과부가 되자 ‘오빠들집’에 가서 머물렀다108). 앞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이 단어의 복수형태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의 복수관념은 비교적 명확하다. 따라서 오빠가 여러 명이며 같은 곳에 살고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는 그곳에 살게 되었다.
달레는 ‘수리산에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붙잡혔다’고109) 하여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블뤼는 체포될 당시 이 에메렌시아가 수리산 뒤듬이에 살고 있었다고 써 놓았다.110) 즉 그 오빠들의 집이 있는 곳이 수리산이었다. 따라서 이 에메렌시아는 과부가 되자 혈연적 연고가 있던 수리산으로 와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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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최 바시리오 이력서〉, 앞의 책, 221쪽.
108) 본고 <도표4> 13번 참조
109)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6쪽
110) 다블뤼,〈조선 순교사 비망기〉, 본고 <도표4> 15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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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희정 베드로는 이 에메렌시아를 외척이 된다고 했다111). 또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달레는 모든 일가친척(Tous les membres de familly)112)이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수리산이 최경환과 혈연적 연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집성촌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 에메렌시아는 이성례 쪽의 친척일 수도 있고, 최경환의 외가 쪽의 친척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앞서 이성례가 전주이씨일 것임을 확인했다. 따라서 이 에메렌시아는 전주 이씨이거나 경주 이씨였으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튼실히 살다가 순교한 이 에메렌시아는 1839년에 순교했다. 1830년대 가장 평범한 조선여인으로 살았던 이 에메렌시아의 신앙은 절대적이었다. 이순빈 베드로의 누이인 이 에메렌시아는 예산(禮山) 고을의 양가 출신으로 외교인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20세 가량 되었을 때에 오빠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믿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늦게 천주교를 듣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에메렌시아는 혹시 전주이씨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만일 이존창과 같은 경주이씨였다면 비교적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메렌시아는 입교를 결심한 이후부터 미신 행위를 끊어버리고 성교회의 모든 대소재(大小齋)를 지키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것을 알고 몹시 분노하여 학대하였다. 가끔 몹시 매를 때려 손발을 쓰지 못하게 하는 수도 있었다. 하루는 겨울 추위에 눈 속에서 옷을 벗겨 여러 시간을 한데에 매달아 두었다. 이런 시련이 5,6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에메렌시아는 불굴의 신앙을 가지고 모든 것을 조용히 참아 받으며 겸손하게 순종했다. 그는 시부모에게 대한 효성을 충실히 다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남편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하여 마침내 그를 입교시켰다. 그후 부부는 천주교를 더 자유로이 봉행하기 위하여 함께 산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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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기해 ․ 병오박해 증언록》, 최 베드로 증언
112) Dellet,《Histoire de l'Eglise de Corée》,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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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피해 들어갔는데, 에메렌시아의 남편은 죽을 임시에 세례를 받고, 신덕(信德)을 지니고 숨을 거두었다. 과부가 된 그는 그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오라비들의’ 집으로 가서 살았다.
1830년대는 평신도 여성이 교회에 많이 들어오는 때였다. 그러니까, 이때 가장 힘든 박해는 가정박해였다. 이 에메렌시아는 가정박해 속에서 스스로 신앙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전부 천주교로 귀의하게 만들었다. 즉 그의 신앙은 대단히 확고했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바른 길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남편이 죽자 오빠들이 사는 친정 쪽 교우촌으로 찾아들어 갔다. 아마 수리산이 개발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당시 여성들은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과부가 되면 교우들 사는 곳으로 가서 공동으로 일하며 신앙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에메렌시아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옥사하게 되었다.
Ⅴ. 그들의 신앙과 ‘죽음’에 대한 검토
마지막으로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순교와 그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을 순교자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일찍부터 이러한 순교자와 증거자를 기렸다.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가 왕 요셉을 시켜 조선신자들 에게 순교자들의 유해를 가지고 있냐고 했을 때 신자들은 그렇다고 답했다.113) 김대건 신부도 군난을 당하여 성인들의 본을 따를 것을몇 번이나 강조했다.114)
그러나 교회에는 분명히 순교했으면서도 그 순교를 인정받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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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294쪽
114)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회유문 편지,《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384-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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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나 공경대상에서 소홀히 취급되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103위 성인이 시성될 때 시성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시복시성작업을 하고 있다. 그 좋은 사례 중 하나가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일 것이다. 1839년 이전의 순교자들이야 전부 시성대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는 그들과는 다른 경우이다. 그러나 이 작업과정에서도 이성례는 새로운 시복대상자로 선정했던 124위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 에메렌시아는 여기에도 들지 못했다. 그후 보완으로 시성대상자를 선정하는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이성례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는 신문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했다. 이 에메렌시아는 체포되어 서울로 오는 도중에 아들을 탈주시켰다. 관청에 출두하여서는 입 한번 벌리지 않고 가혹한 형벌을 여러 차례 견뎌내었다. 그의 육체는 무서운 상태가 되었었는데 다른 교우들이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힘으로야 무엇을 참아 받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천주의 도우심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큰 괴로움이 큰 행복을 마련해 준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오래지 않아 멍이 든 그의 살이 썩어 구더기가 우굴거리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허기와 목마름이 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는 마지막 신문이 있은 지 3일 후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여름에 체포된 그는 옥안에서 살이 썩고 목이 타는 괴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다. 그의 나이는 39세였다.115)
앞서 이 에메렌시아가 평소의 삶에서 바른 신앙을 지켜왔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아름답게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현재 명동성당 지하묘에 있다. 이렇게 순교사실이 분명한 순교자를 시복 대상자 중 하나로 모시지 않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이성례의 순교 또한 안타깝다. 그는 잡혀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포도청으로 출발하던 날 일행은 벌서 떠났는데, 이성례는 어린 것들을 데리고 먼 길을 걸어가야 하므로 그 준비를 위해 집안에서 물건을 챙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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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Daveluy,〈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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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포졸 하나가 마리아에게 접근하여 치근거리며 안가도 되는 것같이 굴었는데 이성례는 그의 야비한 행동을 나무랐다. 그리고 포졸이 떠나가자 마리아는 아기를 팔에 안고 일행을 뒤쫓아 갔다.116) 그리고 이성례는 신문과정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치명하였다. 뒤늦게 어머니의 순교 사실을 전하는 순교자의 아들 최양업은 이렇게 보고했다.
(이성례) 마리아는 형조에서 관례대로 세 차례의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날이 가까워 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이 십자가 형틀을 만들고 감옥 전체가 형구들로 가득찼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 (최희정)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함께 감옥에 갇혀있는 증거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나가라고 명했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최희정) 야고보에게 최후의 형벌을 행하는 형장에 따라 오지 말도록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나이 어린 (최희정) 야고보는 아무 보호자도 없고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아로 남겨질 아주 어린 세 동생들을 거느리고 살아야 될 처지에 있었는데, (이성례) 마리아가 형장에서 그 어린 (최희정)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서 그 순간에 모정에 끌려 허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최희정) 야고보는 어머니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최희정) 야고보는 최후 의 형벌을 받고 순교하는 현장에 있어야 하는 감옥의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지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성례) 마리아는 다른 6명의 증거자들과 함께 순교로 개선할 십자가 형틀에 올라갔고,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형장에 이끌려 나아갔습니다. 그녀는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에 39세의 나이로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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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최양업 신부 서한.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117) 최양업 신부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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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보고뿐만 아니라 이성례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사실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가장 적대적 기록이었던 관변문서에도 잘나타난다.
① 좌․우 포도청에서 아뢰기를, “… 죄인 이성례가 진술하기를 ‘ 자신은 과천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 (최)양업이 사학을 배우기 위해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것은 이제 3년이 되었는데, 이는 남편이 지시한 것으로 아들이 서양 나라에 들어갔는지의 여부를 자신은 실로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일성록》, 현종 기해 8월 7일)118)
② 해조(즉, 형조)에서 아뢰기를, “사학 죄인 … 여인 이성례는 몰래 서양놈과 결탁하여 요사한 계율을 삼가 받았으며, 이미 죽은 남편이 천당에 있음을 스스로 기약한다고 하니, 지극히 교악합
니다. 어린 아들을 이역 땅으로 보내 인간의 정을 끊어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일성록》, 헌종 기해 12월 11일)119)
③ 형조에서 아뢰기를, “죄인 박종원, 여인 손소벽, 여인 이인덕, 여인 권진이, 여인 이성례, 여인 이경이, 홍병주 등은 예에 따라 결안했는데, 이들은 부대시(不待時)로 참수할 죄인들에 해당하
므로 의정부에 보고하니 자세히 복심해서 시행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허락하였다.(《일성록》, 현종 기해 12월 13 일)120)
④ 형조에서 아뢰기를, “사학 죄인 박종원, 여인 손소벽, 여인 이인덕, 여인 권진이, 여인 이성례, 여인 이경이, 홍병주 등을 오른 사장(沙場, 즉 당고개)121)에서 참수형에 처했습니다”라고 하였다.(《일성록》, 헌종 기해 12월 27일)122)
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사학 죄수 중 이미 자세히 조사한 자들의 수가 적지 않으며, 모두 부대시(不待時)의 죄인들입니다만, 일찍이 섣달 그믐이 멀지 않았을 때는 도성 밖(즉 서소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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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日省錄》, 憲宗 己亥 八月七日, “左右捕廳啓言 … 罪人李女性禮口招 以爲渠居生于果川
渠子良業爲習邪學 出渠不歸者 今爲三年 此是渠夫所指揮者 其人去西洋國與否 渠實不的之
云”
119)《日省錄》, 憲宗 己亥 十二月 十一日, “該曺啓言 邪學罪人 … 李女聖禮 則潛結洋漢 拜
受妖戒 己誅之夫 自期天堂 狡惡極矣 年幼之子 治送異域 人情絶矣”
120)《日省錄》, 憲宗 己亥 十二月 十三日, “該曹啓言 罪人 朴宗源孫女小碧李女仁德權女珍伊
李女聖禮李女璟伊洪秉周等 依例結案 而係是不待時斬罪人 請報議政府 詳覆施行 允之”
121) 서울 형장의 하나였던 ‘새남터’ 즉 ‘노량사장(鷺粱沙場)’이 아니라, 새남터 앞의 ‘사장’
즉 ‘당고개’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122)《日省錄》, 憲宗 己亥 十二月 二十七日, “該曹啓言 邪學罪人 朴宗源孫女小碧李女仁德權
女珍伊李女聖禮李女璟伊洪秉周等 依例結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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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미안해서 특교(特敎)를 내려 초기(草記)로 사장(즉 당고개)에서 집행하도록 한 예가 있습니다. 지금도 이에 근거해서 해당 관서에 분부하는 것이 어떠할지요”라고 하니, 윤허하였다. (《비변사등록》, 헌종 기해 12월 27일)123) 《조선왕조실록》에는 8월 7일에 앵베르 주교 등을 처형했고,124) 헌종 5년 12월 28일에는 홍영주 등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러나 이들은 서로 따로 취조, 처벌받았던 것 같다125) 그리고 이성례와 수리산의 관한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이성례의 이 아름다운 순교가 어찌하여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었는가? 이성례는 페레올 주교가 만든 순교자 명단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최석우는 이성례가 가경자가 되었다가 복자가 되는 과정에서 빠진 것으로 이해했으나,126) 82위 가경자에서 복자가 되는데 빠진 사람은 정 아가타, 한 안나, 김 바르바라였다. 한국 교회는 1857년에 처음으로 82명의 가경자를 갖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란127) 문헌을 교황청에 보냄으로써 시복 조사가 시작됐다. 1847년 예부성성은 이 문헌을 접수하고, 박해로 인해 한국 교회가 교구적 차원의 시복 조사를 할 수 없으나 이 문헌 자체가 순교자를 선정하는 데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교회법에서 요구되는 교구 조사를 대치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1857년 9월 23일 한국교회의 시복 조사를 공식으로 접수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로써 82명의 가경자(Venerabilis)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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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備邊司謄錄》, 憲宗 五年 己亥 十二月 二十七日, “司啓曰 邪囚之已詳覈者 其數不少 而俱係不待時罪人也 曾於歲除不遠時 以都門外用法未安 因特敎 有草記擧行於沙場之例 今亦依此 分付該曹 何如 答曰 允”
124)《朝鮮王朝實錄》, 憲宗 5年 己亥 八月 七日, “命西洋漢范世亨等 設鞫嚴覈”
125)《朝鮮王朝實錄》, 憲宗 5年 己亥 十二月 二十八日, “誅邪學罪人洪永周等三人”
126) 최석우,〈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시복 추진의 의미〉, 15~20쪽.
127) 최양업 신부가 번역했다. 즉 페레올 주교가 정리하고 최양업 신부가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순교자 자료는 1857년 가경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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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복을 위해 교황청은 1905년 7월 26일 한국교회에서 보낸 〈기해ㆍ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 내용을 심의한 후, 1910년 7월 ‘교황청 수속의 유효성’을 발표했다. 그리고 1921년 추기경 회의 첫 단계인 전(前) 예비회의를 열었고, 1923년 3월에 예비회의 개최했다. 그러나 1924년 3월 18일 순교 사실과 기적에 관해 심의하는 추기경 본회의에서 82명 가운데 17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특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1925년 4월 29일 열린 특별위원회에서 17명 가운데 14명의 순교 사실은 인정되었으나 정 아가타, 한 안나, 김 바르바라는 자료부족으로 제외되었다. 1925년 5월 10일 어전회의에서 드디어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기적 심사 면제령과 79위시복이 확정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성례는 이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즉 이성례 에게는 배교했던 사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적어도 최양업 신부는 배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성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극도의 고문을 받은 끝에 마침내 죽고, 또 어린 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운 것을 볼 때, 자식에 대한 그릇된 자비심에 의하여 (이성례)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이와 핏덩이들이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성례) 마리아가 배교하여 자유로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에 그녀의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가 모방 신부님의 주선으로 마카오에 보내져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났습니다,
이 때문에 (이성례)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 즉 형조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에 갇혀 잇던 용감한 신자들이 (이성례) 마리아에게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 말에 감동되어 (이성례) 마리아는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불충실한 배교를 용감히 취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또 모정에서 오는 모든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습니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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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최양업 신부 서한 1851년 10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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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을 전하는 최양업의 가슴이 무척 아팠음을 짐작케 한다.
그는 이성례의 배교를 남편을 잃고 남을 아이들 생각, 또 젖먹이의 위험 등을 생각한 거짓배교였다고 길게 설명했다. 또한 이성례가 회두했음도 길게 적고 있다.
다블뤼와 최양업은 이성례에 관한 순교사실 조사를 매우 엄격하게 진행시켰을 것이다. 최양업에게는 신부인 자신의 어머니이고, 다블뤼에게는 동료 신부의 모친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다 이성례의 순교를 인정했다. 기해박해 당시 순교사실을 정리한 사람들은 순교자들과 같이 활동했고 나중에 본인들도 순교한 앵베르 주교, 현석문(玄錫文)이었고,129) 이들 이외에 최양업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순교를 인정함에는 매우 엄격했을 것이다. 특히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부모의 기록에 대해 조사, 정리하게 된 것이다.
최양업은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부모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그해 12월 3일 조선을 떠나 마카오로 출발했다. 객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 1842년 김대건 안드레아를 통하여 자신의 부모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30) 1847년 초,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 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그의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 사실만 들어 있었다.131)
최양업은 1849년 12월 3일 조선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그는 사목활동을 시작하면서 순교자들에 대한 행적을 정리했다. 아들 최양업이 모친 이성례에 대한 순교사실을 조사할 때 그는 안타까웠을것이다. 동시에 신부인 그는 순교사실에 무척 엄격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조사한 어머니의 순교사실을 1851년 10월 15일에 스승 신부인 르그레즈와(Legrégois)에게 써서 보냈다.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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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조광,〈역사를 위한 증언 ;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경향잡지》, 1992년 1월호
130) 김대건 신부 1943년 1월 6일자 서한
131) 이성례 마리아는 82위 순교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103위 시성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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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보고는 엄정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다블뤼의 자료 가운데〈조선 주요순교자 약전〉이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 자료가 시복조사를 염두에 두고 의식적으로 정리․ 작성된 순교록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곳에서 다블뤼 주교는 이성례의 순교를 보류해 두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날 같이 순교한 6명의 명단을 적고 마지막으로 이성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다.
La 7ème de ce jour serait Ni Marie femme de T’soi françois appellé t’si oun i_ je l’omets à dessein à cause de son apostasie, retractée, dit-on, dans la prison, il est vrai, mais je m’en tiens pour le moment sur la réserve.(1840년 1월 31일[음력 기해년 12월 27일])133)
다블뤼 주교는 왜 이성례를 보류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분명〈조선순교자 약전〉에는 이성례의 순교사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모성 때문에 유혹에 빠질까봐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잘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는 이성례를 순교록에 올리는데 주저해야했는가? 다블뤼는 이성례가 배교했음에도 형조로 이송된 면을 크게 보았을 수도 있다. 즉 회두 여부와 관계없이 옥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최양업이 이성례가 배교하고 풀려났다가 다시 체포되었다고 하고 있는 면을 보면 이 점이 가볍게 처리되지 못할 것같다.
두 번째로는 사회적인 이유를 들어야 할 것이다. 배교에 대한 해석은 이미 초대교회부터 일어났다. 초대교회도 박해를 받으면 배교를 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해 고민을 했다. 그리고 박해시대 선교사들에게 가장 힘든 문제는 배교자를 어떻게 대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배교한 사람들은 회두함으로써 이미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들을 그대로 대할 때 다른 신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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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133) 다블뤼,〈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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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교우들은 배교자가 많았다. 40명에서 단지 3명만이 남았다. 그때는 이미 형리들의 취조술이 교묘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때 배교자를 양산하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초주검이 되고 자기들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된 그들은 관원들이 불러 주는 배교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것을 관리들은 배교로 인정하고 사람들을 풀어주었고, 이 배교는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 신자의 무리는 모두가 낙담하였고, 아직 관청에 출두하지 않은 자들의 대부분은 고문을 당하기도 전에 마음이 약해졌다. 포장(捕長)은 그들에게 모호한 질문 밖에는 하지 않았고, 신자들은 또 애매하거나 무의미한 대답을 하였는데 포장 서둘러 그것을 정식 배교로 해석하였다.”134)고 했다.
또한 수리산에서 이때 배교가 많았던 이유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포함되었던 점, 그리고 최경환 회장이 순교하자는 권면에 따라 체면과 정의상 본의 아니게 포도청까지 동행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135)
이성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최석우 신부는 1999년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의 순교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새로운 시복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36) 사실, 배교하고 다시 그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해서 성인품에 오른 사람이 여러명 된다. 남경문(南景文, 1796~1846)은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 첩까지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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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최양업 신부 서한, 1851년 10월 13일자.
135) 포교들이 자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순교하자고 교우들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 주고 …
대열은 천천히 발을 옮기고, 대열 속에서는 지쳐빠진 어린이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 마치 잔치에 가듯이 형장으로 나아가는 이 용사들과 그 연약한 팔로 어머니의 목을 끌어나고 있는 이 어린이들을 보자, 외교인들은 악담을 하며 증거자들에게 몽둥이와 돌과 욕설을 퍼부으며 소리쳤습니다. “이 극악 무도한 놈들아, 이 인정없는 놈들아, 어떻게 감히 그 어린 것들을 데리고 죽으러 나간단 말이냐.” (달레,《한국천주교회사》중, 432~433쪽)
136) 최석우,〈다블뤼 주교의 “한국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교회와 역사》, 286 호, 1999,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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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한 생활을 3년 동안 계속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았고, 또 지난날의 생활을 뉘우치고 그 죄를 보속하기 위해 순교를 결심하고 다시 열심히 수계하였다.
다블뤼는 하느님의 종을 선정하기 위해 그 일차 작업이라 할 수있는 ‘배교 여부’를 정확히 가려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배교를 취소하고 처형된 순교자들을 선정 대상으로 꼽은 경우도 있고, 제외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의 예를 들면서 “혁혁한 상황을 동반하지 않은 배교 취소들을 모두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137) 이성례의 경우에는, 모성애 때문에 배교했으나 후에 모성애를 극복하고 배교를 취소한 뒤에 용감하게 순교에 응하였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는 이를 혁혁한 행위로 보지 않았으니, 모성애를 극복한 것이 어찌하여 고문을 이겨낸 경우보다 덜 혁혁한 상황이라는 것이지 이해하기 어렵다.138)
다블뤼 주교는 분명히 이성례의 순교를 인정했다. 그러나 다만 이렇게 쓰고 있다. “(이성례가) ‘감옥에서는 증언을 번복했다‘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그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보류해 두려고 한다.”139)
본고에서는 앞서, 다블뤼가 엄격하게 순교기록 찾고 기록했음을 보았다. 그런 그가 이성례의 순교사실을 비망기에 자세히 설명한점은 중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블뤼가 이성례의 순교 인정을 보류한 것은 교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였을 것이다, 그가 이성례의 경우를 보류하 려 했던 것은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었을 것이다. 당시 활동하고 있는 신부의 어머니의 배교이기에 더 크게 생각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순교로서 배교 행위를 기워 갚았다. 따라서 이제라도 그의 배교가 제대로 인식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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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최석우, 위의 글, 15쪽,
138) 위의 주 참조
139) Mgr. Daveluy, vol 5,〈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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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닫는 글
수리산에서 살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는 1830년대 천주교 신앙을 지킨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이성례는 최양업 신부의 모친이며, 그 순교의 장면이 극적이어서 인구에 많이 회자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 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우선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성례에 관하여는 모방 신부의 편지를 비롯하여 모두 15개의 사료가 있으며, 이 에메렌시아에 관하여는 모두 4개의 사료가남아 있다. 이들 사료들의 내용을 전부 분석하여, <이성례에 관한사료 내용 비교> <이성례에 관한 조선순교사 비망기와 한국천주교 회사의 내용> <이 에메렌시아에 대한 사료비교> <이 에메렌시아에 대한 조선 순교사 비망기와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등 4개의 도표를 만들었다.
관변측 사료를 이성례가 철저한 천주교 신자로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음을 보여 준다. 교회측 사료에서는 그가 모성애에 의해 배교했다가 나중에 당당히 순교했음을 전한다. 여러 사료간 사실에있어 출입이동이 있음을 낱낱이 검토했다. 이 에메렌시아는 상대적 으로 자료가 빈약하지만 그러나 두 사람의 생애와 순교를 찾을 수 는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출생과 생애를 정리하면서 몇가지를 찾았다. 우선 순교자들의 나이에 대하여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기존의 이해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최경환은 1804년생이어야 하고, 이 에메렌시아는 1800년생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례가 경주이씨라고 생각되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이성례는 전주 이씨일 수 있다. 또한 이 에메렌시아는 그의 묘가 현재 명동 지하성당에 있게 된 과정까지를 보면서 최양업 신부네와 외척간일것임도 추적했다. 이것은 이 에메렌시아와 이성례의 밀접성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를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수리산이 최경환을 중심으로 하는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던 교우촌일 가능성도 보았다. 순교자의 본향을 아는 일, 인척관계를 밝히는 일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교자의 본향을 언급하지 않으려면 모르지만, 틀리게 서술되는 것은 일단 수정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은 세계에서 드물게 족보가 잘 보존되어 있는 나라이다. 그 있는 자료들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우선, 이러한 기본 사실이 확정되어야 한다. 같은 본향도 파(派)를 알아야 자료를 이용할 수가 있다. 앞으로 교회사쪽 연구를 할 때에도 이것까지 신경쓰면서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제 이성례나 이 에메렌시아는 전주 이씨나 경주 이씨의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는 범위로 넓혀갈 수 있는 것이다.
이어 이성례가 회장의 부인으로서, 신학생의 어머니로서 신앙생활을 해 나간 과정을 보았다. 그는 남편을 절대로 존경했으며 남편과 함께 사회에 애긍을 베풀었다. 모방 신부로부터는 신학생의 모친이 되기에 충분한 모범적 신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는 신학생의 부모에 대한 어떤 다른 배려는 없었던 것 같고, 아들과 연락이 되었던 것도 같지 않다. 그리고 가정박해를 딛고 남편을 개종시켰으며, 과부가 된 뒤에는 친정쪽 교우촌을 찾아가 사는 모습도 살폈다. 1830년대 전형적인 조선여교우들의 생활 모습이 었다.
마지막으로 이성례의 순교가 당대 시성대상에서 빠지게 된 이유들을 살폈다. 최양업은 본인의 모친이며, 다블뤼는 동료 신부의 어머니의 순교라는 사실에서 무척 고려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교란 회두하면 용서되는 것이지만, 사회적 영향이 크게 고려되고 있는 점을 보았다.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는 그 행적이 뚜렷한 만큼시성대상에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투고일 : 2009.10.30
심사일 : 2009.11.16
게재확정일 : 200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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