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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일기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1-3. 병인 순교자 29위와 26위 약전
1) 1918년도 29위 약전
<안 안토니오 아콘 주교 조선 감목>
(12) 안 안토니오는 아미앵(Amiens) 읍내에서 무인년(1818년) 2월 10일(양력 3월 16일)에 태어나서 학교 공부를 매우 잘 하시고, 탁덕 위에 오르신 후에 르와예(Roye) 공소로 가셔서 보좌 신부 직분을 아주 열심히 채우셨다.
(13) 계묘년(1843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셔서 오래지 아니하여 외국으로 전교 가실 때에 페레올(Ferréol) 주교를 모시고 을사년(1845년)에 멀고 위태한 길을 행하신 후 조선에 들어오셨다.
(14) 조선에 들어오신 후 20여 년 동안 수고하시며 몸이 비록 성치 못하셨으나, 기력을 아끼시지 않으시고 도리 강론하시며 성서를 쓰시고 전교하시며 성사를 주심으로써 조선 성교회에 극히 유익하게 하시니 장 주교께서 교황이 주신 관면으로 부감목을 세우려하실 때에 안 안토니오가 제일 합당하였기 때문에 아콘 주교로 세우시고 주교품으로 축성하셨다.
(15) 병인 정월 25일(양력 3월 11일)에 거더리 동네에서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시니 구류간에 갇히셨다가 성교하는 죄로 죽을 결안(結案)을 받으셨다.
(16) 서울에서 법장으로 나아가실 때에 즐거운 빛을 드러내시며 민(위앵) 신부와 오(오메트르) 신부와 조선 교우 장 요셉과 황 루카와 함께 나아가셨다.
(17) 병인(1866년) 2월 14일(양력 3월 30일)에 수영 지방에서 칼을 세 번 받고 성교하는 죄로 이 위에 말한 두 분 신부와 교우 두 사람과 함께 참수 치명하셨다.
(18) 안 주교께서 죽으신 후 3일에 시신을 모래로 대개 덮었다가 병인 4월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임오년(1882년)에 백(Blanc) 부주교께서 찾게 하시고 준허(準許)하신 후에 일본으로 보내셨다가 갑오년(1894년)에 다시 조선으로 들여와서 오늘까지 서울 용산 신학교에 모셔 두었다.
<오 베드로 신부>
(45) 오 베드로는 앙굴렘(Angoulème) 교구 뤼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공소에서 정유(1837년) 3월 초4일(양력 4월 8일)에 나시고 기미년(1859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셔서 임술년(1862년)에 탁덕위에 오르시고 조선으로 오신 뒤 갑자년(1864년, 계해년․1863년의 잘못)에 조선에 임하시어 3년 동안 열심히 전교하셨다.
(46) 병인(1866년) 정월 27일에 피신할 수 없음을 보시고, 당신으로 하여금 교우들이 아무 해는 받지 못하게 배정하신 후에 거더리로 가시어 자원으로 경포에게 잡히셨다.
(47) 거더리에서 안 주교와 민 신부와 황 루카와 함께 서울로 잡혀 가시어 며칠 되기 전에 성교하는 죄로 죽을 결안을 받으셨다.
(48) 오 신부는 이 위의 안 주교 및 민 신부와 황 루카 등 외에 또 회장 장 요셉과 함께 서울에서 법장으로 나아가실 때에 즐거운 모양으로 행하셨다.
(49) 병인 2월 14일에 수영에서 칼을 두 번 받아 참수 치명하셨다.
(50) 그 시신은 죽으신 후 3일에 모래로 대개 덮어두었더니 병인 4월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한지라. 임오년에 백 부주교께서 찾게 하시고 알아보신 후에 일본으로 보내셨더니 갑오년에 다시 조선으로 들여와 용산 학당에 모셔두었다.
<민 루카 신부>
(51) 민 루카는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 공소에서 무술년(1838년, 병신년․1836년의 잘못) 9월 초4일(9월 11일․양력 10월 20일의 잘못)에 나시어 본 주교께 탁덕품을 받으시고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이태 동안 보좌 신부로 계시다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신 후 조선으로 전교 오신 뒤 을축년(1865년) 5월 초3일(양력 5월 27일)에 임하셨다.
(52) 안 주교께서 잡히신 후에 민 신부가 피할 수 없음을 아시고 편지로 민 신부를 부르시자, 병인(1866년) 정월 26일 쇠재에서 민 신부가 주교의 편지를 받아보시고서 즉시 순종하시고 포교들을 따라가셨다.
(53) 거더리 동네에서 안 주교를 만나시며 주교와 오 신부와 황 루카와 함께 서울로 잡혀가시니 며칠 되기 전에 성교하는 죄로 죽을 결안을 받으셨다.
(54) 병인 2월 14일에 수영에서 참수 치명하셨다.
(55) 그 시신은 죽으신 후 3일에 모래로 대개 덮어두었다가 병인 4월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임오년에 백 부주교께서 찾게 하시어 알아보신 후에 일본으로 보내셨다가 갑오년에 다시 조선으로 들여와 오늘까지 용산 신학교에 모셔 두었다.
<황 루카 재건>
(91) 황 루카는 본디 생활이 넉넉한 집 아들로 대개 갑술년(1814년, 계유년․1813년의 잘못)에 나시고 갑오년(1834년)에 입교하였고, 성교하였기 때문에 부모의 구박을 감수 인내하시고 배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부모를 성교에 돌아오게 하였다.
(92) 고 주교께서 루카의 열심을 보시고 비록 아내가 있었으나 그 아내와 갈려 혼자 살기로 허락한 즉 주교께서 공부를 시켜 탁덕품을 주실 마음이 있으셨다. 그러나 교황이 요긴한 관면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황 루카가 무오년(1858년)부터 여러 신부와 두 분 주교의 복사를 하였는데, 덕행이 아름다우므로 모든 이가 다 귀하게 여겼다. 또 그 때에 아내가 허락하므로 수정하셨다.
(93) 병인년 정월 28일에 안 주교께서 민 신부와 오 신부와 함께 거더리에서 서울로 잡혀가실 때에 포교들이 황 루카를 잡을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황 루카는 청하여 선생 안 주교를 따라가려고 하자 원대로 되어 주교, 신부와 함께 서울로 잡혀 갈 때 행로에서 모든 이에게 성교 도리를 벽파하셨다.
(94) 서울로 올라와 구류간에 갇혔다가 성교하는 죄로 죽기로 결안이 되어 수영에서 참수 치명하니 때는 병인 2월 14일이라.
(95) 시신은 죽으신 후 3일에 외인들이 모래로 대개 덮었더니 루카의 일가들이 찾아갔다.
<장 요셉 낙소 회장>
(96) 장 요셉은 본디 수원 사람이라. 대개 계사년(1803년, 계해년․1803년의 잘못)에 나시고 병술년(1826년)에 입교하시니, 병신년(1836년)에 가히 공경하올 나(Maubaunt) 신부께서 그 도리에 밝고 열심 수계함을 보시고 회장으로 세우신 뒤 그 직분을 죽도록 사람의 영혼 구할 열정으로 채우셨다.
(97) 을묘년(1855년)에 신부네가 장 요셉 사는 동네 배론에 학교를 세우시니 요셉이 학교의 주인이 되어 그 학교 사무를 죽을 때까지 독실히 보시되 상급은 한 푼도 받지 않으셨다.
(98) 장 요셉이 병인 정월 16일에 박(Petinicolas) 신부와 신(Pourthié) 신부와 함께 경포에게 잡혔다가 신 신부 덕택으로 놓였더니 여러 날 되기 전에 노럴골 동네에서 본읍 제천 포교에게 잡혀 본관으로 들어가셨다.
(99) 관장이 여러 번 배교하라고 하였으나, 배교하지 않으시고 서울로 올라가 구류간에 갇혔다가 성교하는 죄로 죽을 결안을 받으셨다.
(100) 안 주교와 오 신부와 민 신부 및 황 루카와 함께 수영에 가 참수 치명하실 때에 말씀하기를 “우리는 성교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죽는다”라고 하신 후 죽으시니 때는 병인 2월 14일이라.
(101) 시신은 죽은 후 3일에 모래로 대개 덮었다가, 병인 4월 초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임오년에 백 부주교께서 찾게 하시어 일본으로 보내셨다가 갑오년에 다시 조선에 들여와 오늘날까지 서울 용산 학당에 모셔 두었다.
2) 1922년도 26위 약전
<안 안토니오 아콘 주교 조선 감목>
(22) 안 안토니오는 아미앵(Amiens) 읍내에서 무인년 2월 10일에 태어나서 학교 공부를 칭찬 있게 다 하셨다.
(23) 탁덕위에 오르신 후에 르와예(Roye) 공소로 가셔서 보좌 신부 직분을 아주 열심히 채우시고, 계묘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셔서 오래지 아니하여 외국으로 전교 가실 때에 페레올(Ferréol) 주교를 모시고 을사년에 멀고 위태한 길을 행하신 후 조선에 들어오셨다.
(24) 조선에 들어오신 후 20여 년 동안 보좌 주교의 직분을 채우실 때 모든 이가 다 찬송하였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운운
(25) 안 주교의 열정이 불같으셔서 신공하는 곳에서나 또한 미사 지내는 곳의 규칙을 정하시어 교우들에게 검사하고 공경하는 도를 드러내게 하셨으며, 또한 규칙을 거스르는 자는 매우 꾸중하셨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운운.
(26) 안 주교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시는 것에만 온전히 힘을 쓰셨고 외교인을 많이 성교에 돌아오게 하셨으며, 또한 어린 아이에게 대세를 많이 주셨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운운.
(27) 여러 가지 병으로 신공하시는 중에도 저의 인내덕은 초월하시므로 천주께서 저로 하여금 이 모든 괴로움으로써 치명의 괴로움을 더욱 쉽게 참아 받게 하셨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운운.
(28) 장 주교는 교황이 주신 관면으로 부감목을 세우려 하실 때에 안 안토니오가 제일 합당하다고 판단하시고 아콘 주교로 세우시고 주교품으로서 축성하시니라.
(29) 병인 정월 25일에 거더리 동네에서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서 구류간에 갇히셨다.
(30) 안 주교께서 심문 받으신 것과 형벌 받으신 것은 공경하올 장 주교와 같이 하시고 또 옥에도 같이 계셨으며, 서울에서 4일간 계시는 동안에도 판관 앞에서나 옥중에서나 항구한 마음과 완전한 신덕의 빛을 잠시도 드러내지 아니하신 때가 없었다.
(31) 안 주교는 장 주교와 같이 자기는 조선에 와서 있는 것은 성교 도리를 가르치려 함이라 하시며 같은 이유로 죽을 결안을 받으셨다. 이 이유는 죽이기로 한 결안서에 기록하였으며, 또한 판에 기록하여 치명하실 때 옷에 붙였다.
(32) 옥에서 나와 공경하올 장 주교와 함께 치명하려 나가실 때 어떻게 좋아하시며 즐거워 하시는지 외교인이 서로 말하기를 “죽으러가는 사람이 이렇듯이 기뻐하는 것은 보기에도 이상하다”고 하였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운운.
(33) 안 주교는 장 주교 치명하신 다음에 하셨는데, 희광이가 자기하는 일의 값을 정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첫 번 칼에는 목에 상처만 내니 포교 관방이 모여 오랫동안 값을 논하다가 값이 정해지게 되자 이에 칼을 받아 치명하셨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운운
(34) 안 주교께서 죽으신 3일 후에 시신을 모래로 대개 덮었더니 병인 4월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임오년에 백 부주교 찾게 하시고 준허하신 후에 일본으로 보내셨다가 갑오년에 다시 조선으로 들여와 오늘까지 서울 용산 신학교에 모셔두었다.
<오 베드로 신부>
(72) 오 베드로는 앙굴렘 교구 뤼페크 본당의 에제크 공소에서 정유년 3월 4일에 나시고 기미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셨다.
(73) 임술년에 탁덕위에 오르시고 조선으로 오신 뒤 갑자년에 조선에 임하시어 3년 동안 칭찬 있게 전교하셨다.
(74) 오 신부께서 매우 열심하셔서 장 주교께 칭찬을 많이 받으셨으며, 장 주교께서 말씀하시길 “오 신부는 얼마나 신덕이 기묘하신지 말할 때마다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라고 하셨다.
(75) 오 신부께서는 열심이 비상하시어 쉬지 않고 시간되는 대로 아이들에게 문답을 가르치시어 영성체를 예비하시고 겸하여 다른 선공을 가르치셨다.
(76) 병인 정월 27일에 피신할 수 없음을 아시고 당신으로 하여금 교우들이 아무 해도 받지 못하게 배정하신 후에 거더리로 가시어 자원으로 경포에게 잡히셨다.
(77) 거더리에서 안 주교와 민 신부와 황 루카와 함께 서울로 잡혀가셨다.
(78) 오 신부께서 안 주교와 민 신부와 황 루카와 함께 문목과 형벌을 당하였는데, 옥에서나 형벌 중에나 다른 이들과 같이 용맹히 받았으며, 안 주교와 함께 성교하는 죄로 죽을 결안을 받고 함께 법장에 나가게 되었다.
(79) 오 신부께서 이 위의 안 주교와 민 신부와 황 루카 외에 또 회장 요셉과 함께 법장으로 나가실 때에 즐거운 모양으로 행하셨다.
(80) 병인 2월 14일에 수영에서 칼을 두 번 받아 참수 치명하셨다.
(81) 그 시신은 죽으신 후 3일에 모래로 대개 덮었다가 병인 4월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임오년에 백 부주교께서 찾게 하시어 일본으로 보내시더니 갑오년에 다시 조선으로 들여와 오늘까지 용산 신학교에 모셔 두었다.
<민 루카 신부>
(82) 민 루카는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공소에서 무술년 9월 초4일에 나시어 본 주교께 탁덕품을 받으시고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이태 동안 보좌 신부로 계셨다.
(83) 파리 외방전교회에도 들어가시어 조선으로 전교 오신 뒤 을축년 5월 초3일에 조선에 임하셨다.
(84) 민 신부는 열심하시며 또한 인자하신 고로 교우들을 대하 때에 모친과 같이 하시며 또한 교우들은 신부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85) 안 주교 잡히신 후에 민 신부가 피할 수 없음을 아시고 편지를 써 민 신부를 부르시자 병인 정월 26일에 쇠재에서 주교의 편지를 받아보시고 즉시 순종하시어 포교들을 따라가셨다.
(86) 거더리 동네에서 안 주교를 만나시니 주교와 오 신부와 황 루카와 함께 서울로 잡혀가셨다.
(87) 안 주교와 같이 문목과 형벌을 당하고 성교하는 죄로 죽을 결안을 받은 후 주교와 함께 법장으로 나가시는 동안 노래하시며 즐거운 마음을 드러내셨다. 또한 악독한 형벌 중에 귀를 뚫는 형벌까지 당하셨고, 병인년 2월 14일에 안 주교와 오 신부와 함께 참수 치명하셨다.
(88) 시신은 죽으신 3일 후에 모래로 대개 덮었다가 병인 4월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임오년에 백 부주교께서 찾게 하시어 알아보신 후에 일본으로 보내셨더니 갑오년에 다시 조선으로 들여와 오늘까지 용산 신학교에 모셔 두었다.
<황 루카 재건>
(139) 황 루카는 본디 생활이 넉넉한 집 아들로 대개 갑술년에 나시고 갑오년에 입교하여 성교하는 연고로 부모의 구박을 감수 인내하시고 배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부모를 성교에 돌아오게 하셨다.
(140) 고(페레올) 주교께서는 루카의 열심을 보시고 비록 아내가 있으나, 그 아내와 갈려 혼자 살기로 허락하고 공부를 시켜서 탁덕품을 주실 생각이 있으셨다. 그러나 교황이 요긴한 관면을 주시지 않으셨다.
(141) 황 루카가 무오년부터 여러 신부와 두 분 주교께 이어 복사를 하였는데, 덕행이 아름다우므로 모든 이가 다 귀하게 여겼다. 또 그 때에 아내가 허락하므로 수정하였다.
(142) 병인 정월 28일에 안 주교께서 민 신부와 오 신부와 함께 거더리에서 서울로 잡혀가실 때에 포교들이 황 루카를 잡을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황 루카는 간청하여 선생 안 주교를 따라 가고자 하였고, 원대로 되어 주교, 신부와 함께 서울로 잡혀 갈 때 행로에서 모든 이에게 성교 도리를 벽파하셨다.
(143) 서울로 올라와 구류간에 갇혀 있으면서 악독한 형벌을 많이 받고 성교하는 죄로 죽기로 결안이 되었다.
(144) 수영에서 용맹한 마음으로 참수 치명하니 때는 병인 2월 14일이라.
(145) 그 시신은 죽으신 후 3일에 외인 둘이 모래로 대개 덮었더니 루카의 일가들이 찾아갔다.
<장 요셉 낙소 회장>
(146) 장 요셉은 본디 수원 사람이다. 대개 계사년에 나시고 병술년에 입교하시니 병신년에 가히 공경하올 라(Maubaunt) 신부께서 그 도리에 밝고 열심 수계함을 보시고 회장으로 세우신 뒤 그 직분을 죽도록 사람의 영혼 구할 열정으로 채우셨다.
(147) 을묘년에 신부네가 장 요셉이 사는 동네 배론에 학교를 세우시니 요셉이 학교의 주인이 되어 그 학교 사무를 죽을 때까지 독실히 보시되 상급은 한 푼도 받지 않으셨다.
(148) 장 요셉이 병인 정월 16일에 박(Petinicolas) 신부와 신(Pourthié) 신부와 한 가지로 경포에게 잡혔다가 신 신부 덕택으로 놓였다가 여러 날 되기 전에 노럴골 동네에서 본읍 제천 포교에게 잡혀 본관으로 들어가셨다.
(149) 관장이 여러 번 배교하라고 하였으나, 배교하지 않으시고 서울로 올라가 구류간에 갇혔다가 성교하는 죄로 죽을 결안을 받으셨다.
(150) 안 주교와 오 신부와 민 신부 및 황 루카와 함께 수영에 가 참수 치명하실 때에 말씀하기를 “우리는 성교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죽는다”라고 하시고 죽으시니 때는 병인 2월 14일이라.
(151) 그 시신은 죽은 후 3일에 모래로 대개 덮었다가, 병인 4월 초 그믐께 교우들이 찾아 장사하였다. 임오년에 백 부주교께서 찾게 하시어 일본으로 보내셨다가 갑오년에 다시 조선에 들여와 오늘날까지 서울 용산 신학교에 모셔 두었다.
2. 치명일기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2-1. 치명일기
1) 721번 안 주교
병인 정월에 홍주 거더리 손 회장 집에 계실 때에 민 신부, 오 신부, 안 주교 복사 황 루카와 함께 잡혀 서울로 와 구류간에 가둔지라. 이미 배론 회장 장 요셉이 자원으로 잡혀 다섯 분이 함께 고마 수영에 가 참수 치명하니 때는 병인 3월 예수 수난 본날이러라.
2) 722번 민 신부
안 주교와 함께 서울까지 오셨다가 이에 수영으로 가 참수 치명하시니라.
3) 723번 오 신부
안 주교와 민 신부와 함께 수영에서 참수 치명하시니라.
4) 724 황 루카
본디 연풍 병방골 사람이라. 주교와 함께 잡혀 아무리 저를 놓아주려 하여도 종래 사양하고 주교를 모시고 서울로 왔다가 수영으로 가서 주교와 함께 참수 치명하니라.
5) 725 장 요셉 회장
본디 수원 담안 사람이라. 이미 배론 회장이러니, 박 신부와 신 신부께서 잡히실 때에 자원으로 따라가 잡힌지라. 이에 서울로 와 안 주교와 함께 수영에서 참수 치명하니라.
2-2.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1) 정리 번호 25번
치명일기 721의 안 주교, 724의 황 루카는 고마 수영 관속의 말이 안 주교와 황 루카는 곧 죽일 터라서 다담을 차려드리니 잡수시고 매우 즐거운 마음이요, 보는 사람들이 별일이라 하더라. 이 사정을 들은 사람은 홍주 원머리 사는 문 회장 마티아, 또 아는 사람은 아산 감찰안(감찰언의 잘못) 사는 권 요셉으로 두 사람의 말이 한결 같더라.
2) 정리 번호 180번
백 신부(블랑 신부) 주 전 상사리[上白是]
하서(下書) 받자오니 복이 만만이로소이다. 삼가 문안드리지 못한 이후 신부님 주 기체후 안녕하옵심을 원모구구(願慕句句) 무임하침(無任下沈)이로소이다.
죄인(즉 김 요한)은은 복몽하휼지택(服蒙下恤之澤)하여 완명(頑命)을 근보(僅保)하오니 감사하옵나이다.
분부하신 사단(事端)은 처음 죄인이 치명하신 주교․신부의 시체를 염장하올 마음이 간절하였사오나, 교우들이 다 위험하다 하기에 중지하였습니다. 마침 남포 땅에 사는 이 바오로라 하는 교우가 죄인더러 주교․신부 장사할 마음이 있다 하여 우리 둘이 하자고 하고, 돈 걱정을 하온즉 돈 걱정은 말라 하고, 이 바오로의 말이 “논 십 두락 문서 전 권하고 돈 90냥을 내었으니 쓰자” 하기에 장사날을 4월 초8일로 정하였는데, 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이 장 회장의 아들이라 하고 찾으나, 죄인은 외인 중에 장종비적(藏蹤秘迹)하여 있삽고, 교우 상종은 없고, 근처 교우를 약간 아는데 근 2백 리에 사는 사람이 찾아왔기에 연고를 물은즉 “내 부친이 꿈에 와서 아무 곳 사는 아무 사람이 내 시체를 거두려고 하는데, 너는 무심히 왔느냐?” 하고 재삼 발현하기에 “그대 성명을 알고 찾아 왔노라” 하기로 그러면 우리가 4월 초8일 장사하겠으니 오라고 하였더니, 그 날 왔기에 함께 장사하였습니다.
6월에 이 바오로가 죄인에게 와서 여러 신부의 시체가 침노하였으니 이장을 하자고 하기에, 죄인은 교우들을 수합하여 4냥을 가지고 이 바오로는 자비 50냥을 가지고 7월 초4일 시체를 파내어 배에 싣고 나포(남포의 잘못인 듯)로 오려 하는데, 선가(船價)를 50냥으로 정하였으나 사공이 마다하기에 “우리는 천주 성교하는 사람이다. 선생의 시체를 거두러 왔는데 너희들이 마다하니 만일 일후에 누설이 있으면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온즉 마지못하여 싣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엿새를 괴롭게 지냈습니다. 상금으로 10냥을 주고 돌아와 남포 땅에 장사하는데, 일좌(一座)에 안 주교, 이좌(二座)에 민 신부, 삼좌(三座)에 오 신부, 사좌(四座)에 장 회장이오나 위로 보면 봉(峯)이 한 분산(墳山)이로소이다. 자세한 말씀 다 못 아뢰오니, 일후 뵙고 소상히 여쭈오리다.
이후 신부님 기체 만강하심을 천만 복망하옵나이다.
임오년(1882년) 3월 15일 김 요한 상서(上書)
3) 정리 번호 181번
백 신부 주 전 상사리[上白是]
일전에 하서(下書) 받자오니, 복이 만만이로소이다.
복불심(伏不審) 이래 신부님[主] 기체후 안녕하심을 복모(伏慕)하옵나이다. 죄인(방 프란치스코)은 하휼지택(下恤之澤) 입사와 완명(頑命)을 보존하고 있사오니 감사하옵나이다.
하교하신 사단은 주교․신부의 시체 거둘 마음이 처음에 간절하였사오나 위험한 시절이라 생각만 하고 있다가 병인 3월에 장 회장의 아들(즉 장노첨)이 와서 가자고 하기에 4월 초에 장 회장의 아들과 함께 수영에 들어가 시체 있는 곳에 둘이 다 가는 것이 불길하다고 하여 장 회장의 아들이 혼자 시체소에 가보고는 나와서 하는 말이 “나는 타처에 심방할 사람 있어 가니, 곧 나아가 장치선(張致善)과 상의하여 사람 3, 4명과 염포(殮布)를 구해 가지고 초일에 장사하게 오라” 하였습니다. 나와서 장치선을 보고 연유 말을 하온즉 염포 외 사람 네 명을 구해 함께 가라 하기에, 초8일 미처 가서 각처 사람이 함께 한 패는 광중을 역사(役事)하옵고, 한 패는 시체를 모셔오고 분주하게 하오나, 날이 평명(平明)이 되오니 황황급급하여 장사도 못하옵고, 날이 밝은즉 다 주인에게로 갈 수 없으니 이곳에서 산으로 나가라 하기에 손자중(바오로)과 장 회장의 아들과 남포 사람만 장사하라 하고, 죄인은 데리고 간 사람들과 함께 왔사오며, 그때에 쓰는 돈은 장 회장의 아들 말만 듣고 쓸 데 염려 말라 하기에 그런 사단은 아는 체 아니하였습니다. 그 후 이장(移葬)은 죄인이 모르오며, 그때 왔던 사람도 혹 모르는 사람이 있사오나, 피차 인사도 못한 이도 있은즉 죄인이 똑똑히 아는 사람만 후록(後錄) 하옵나이다.
수다하온 말씀 필설로 다 못 여쭈오니 뵈옵고 자세히 사뢰리다.
신부님[主] 기체후 만강하심을 바라옵나이다.
임오 3월 15일 방 프란치스코 상백(上白)
장 회장 아들, 외인 임중심, 손자중, 죄인 방시영, 방순오, 김성도, 서도심
4) 정리 번호 192번
① 치명일기 721의 안 주교, 722의 민 신부, 723의 오 신부, 724의 황 루카 함께 잡힌 사정
홍주 아문에서 떠나 서울로 가실 즈음에 신창 읍에서 숙소 정하고 안 주교께서 강론하신 말씀이 신창 관속(官屬)더러 “내가 죽어도 후세에 내 말을 전할 것이요, 내가 살아도 이후 내 말을 하리라” 하시고, 황 루카는 본국 사람인 고로 성교의 밝은 도리를 다 말씀하시니, 관민이 다 듣고 말씀 정대함을 찬송하지 않는 이 없더라.
이곳에서 떠나 서울로 가신 후 4일 후에 도로 내려오실 때 다시 보니, 올라가신 네 분외에 725의 장 요셉 회장이라 하는 이와 다섯 분을 신창 연봉정이에서 다시 보았는데, 내용 일을 아는 사람은 해미 마새 사는 김 요한․김 안드레아 형제더라.
② 치명일기 721의 안 주교, 722의 민 신부, 723의 오 신부, 724의 황 루카, 725의 장 요셉 다섯 분의 치명 사정
보령 수영 관원이 치명하실 임시에 차반을 차려 올리니, 안 주교는 음식을 잡수시며 네 분을 권하여 먹으라 하시고 즐기신 후 주교 말씀하시기를, (예수) 수난 본날 오시(午時)에 치명하시겠다고 미리 정하시더니, 희광이가 마침 없어서 보령 백정을 명하여 죽이라 하시니라. 그놈이 말하기를 “제가 죽을지언정 못 하겠다” 하고 물가로 달아난 것을 다시 붙들어다가 유(諭)하여 죽이라 할 때, 안 주교가 죽을 시(時)가 늦는다고 호령을 하시니, 군사들이 정신을 잃고 백정이 칼을 들어 목을 쳤으나 다 베지 아니한 고로 두 번 만에 다시 치니, 세상을 버리시니라.
이 위의 네 분은 주교와 한 칼에 참수 치명하시니라. 치명시에 본 이는 임 토마스요, 들은 이는 그 아들 임 베드로요, 살기는 해미 마새라.
③ 치명일기 721의 안 주교, 722의 민 신부, 723의 오 신부, 724의 황 루카 함께 잡힌 사정
본래 홍주 신리 본 공소에 계시다가 군난을 당하여 수원으로 피신하였다가, 도로 본 공소로 오셔서 모든 교우들을 깨우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하고 본동 다른 집에 숨어 계시니라. 신품 공부하던 박(만억) 필립보가 경포를 몰고 앞장서서 동네를 가리키니, 포졸이 들어와 모든 교우에게 묻기를 안 주교와 민 신부를 찾되 모든 교우들이 대답하길 이곳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하니, 포졸들이 집집마다 찾다가 마침 조그만 집 부엌 나무 속에서 잡히시고, 민 신부와 오 신부는 주교 명령 없이 자원으로 오셔서 그 이튿날 잡히셨습니다. 포졸이 말하기를 민 신부와 오 신부는 스스로 찾아온다고 박장대소하며 안 주교와 민 신부, 오 신부를 함께 잡아 가지고 홍주 아문으로 가고, 또 황 루카는 본디 안 주교 복사로서 포졸이 한사코 만류하되 주교․신부 모시고 포졸 앞에서 성교회 밝은 도리를 입이 그칠 새 없이 강론하시며 자원으로 주교와 두 분 신부와 함께 홍주 아문으로 가시니라.
지금까지 이 일을 아는 이는 해미 마새 사는 강 가롤로요, 친히 보았노라.
5) 정리 번호 193번
장 요셉은 본디 경기 수원 담안 사람이라. 정해년에 문교하여 수계할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여러 곳으로 이사하였더니, 후에 제천 배론으로 옮겨 박 신부와 신 신부를 모시고 열심 수계하였다. 신부 살림을 착실히 도와 매사를 주밀하게 돌보고 날을 보내며 회장인 고로 동네 모든 교우까지 잘 교훈하여 자주 성사를 타당히 받게 하고 여러 해를 지냈다. 병인년 군난을 당하여 서울에서 장 주교가 잡히시고 경포들이 내려가 양위 신부를 잡으니, 요셉은 그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오다가 7세 된 손자는 수풀에 의지하여 산에 두고, 신부를 잊지 못하여 다시 집에 들어가니 손자는 그곳에서 얼어 죽고, 요셉은 신부와 함께 잡혀 서울로 갔더라. 마침 국혼(國婚)을 당하여 서울에서 안 죽이고 안 주교와 오 신부와 황 루카와 요셉은 함께 충청도 고마 수영으로 가서 네 위(位)가 함께 치명하니, 평생에 열심히 성교 규계를 지키어 자녀 3남매를 잘 교훈하여 부지런히 성사를 받을 때에 항상 하는 말이 “치명하여 예수의 구속하신 은혜를 보답하기가 나의 원이라” 하더니, 천주의 특별하신 성총을 주사 원의대로 치명 대은을 입어 신부 치명하신 다음에 칼 받을 때도 입에 기구하는 말이 떠나지 아니하였다. 좌우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렇듯이 죽음은 성교회의 광영이라 하고 머리를 숙이매 군사가 즉시 칼을 내려 베니, 나이 57세요, 때는 병인 3월 예수 부활 첨례 전날 미시(未時) 때니, 증인은 여럿이나 직산 돌실에 사는 장 안드레아니, 나이 65세라.
6) 정리 번호 194번
병인년치명자면례(丙寅年致命者緬禮)
죄인(이치문 힐라리오)이 남포 서직골에서 살다가 병인년 정월에 군난을 당하여 보령(保寧) 수청고지의 처가로 피신하였더니 2월 15일에 안 주교와 오 신부와 민 신부와 황 루카와 장 회장이 수영(水營)으로 내려와 치명하신다는 말을 듣고 십리쯤 되는 곳에 사는 연고로 가서 뵈올 마음은 간절하나 육정에 갈 마음이 없었나이다. 17세 된 죄인의 처남 최 안드레아에게 가보고 오라 한즉 죄인의 넷째 동생 (이) 그레고리오와 처고모 최 바르바라와 돌돌(도로테아) 누나와 종6촌 종수(從嫂) 임 마리아 등 합 다섯 사람이 16일(음력, 2월 14일의 자못)에 일찍 수영으로 가서 따라 다니며 보니, 대접하는 법은 사부양반(士夫兩班)과 같이 하여 아전과 노령(奴令)들이 주교 신부 앞에서는 말 한마디를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주교와 신부 세 분은 장청(將廳) 아랫방에 앉으시고 조선 교우들은 윗방에 앉히고, 다담(茶啖)을 올린즉 두 교우는 먹지 아니하고 안 주교와 오 신부는 떡국을 잡수시고 민 신부는 얼마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주교가 교우 둘이 먹지 아니하는 것을 보시고는 “어찌하여 아니 먹느냐? 이리 달라” 하시고 오 신부와 함께 더 잡수시고, 그 날이 수난 대재 날이라 주교 말씀이 “내가 오늘 오전에 죽을 터인즉 한낮이 다 되어 가니 어서 결박하고 어서 죽여 달라” 하며 호령하매 그 말을 듣지 않는데, 말들 하기를 “지금 죽을 놈들이 어서 죽여 달라 한다” 하고 참소(讒訴)에 나갈 때, 거리가 거의 십 리 상거가 되는지라. 집둥우리를 타고 나가다가 중로에서 술재라 하는 고개에서 민 신부가 슬픈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흥흥 소리를 내며 우시고, 참소에 이르러 주교께서 먼저 치명하시므로 공주 희광이가 내려와 거행할 때 반쯤 벤즉 몸을 움직여 뒤틀고, 희광이가 “예전(禮錢)을 달라” 하고 베지 아니한즉 보령 원이 4백량을 주기로 정한 후 신부와 교우는 한 칼에 다 베고, 들리는 말이 보령 원이 그것 저것 쓴 돈이 8백량이라 하고 그 때 목도(目睹)하여 본 교우는 이 다섯 사람 외에 홍주 다래골 임 회장이 지나다 보았으며, 또 지금 이 다섯 사람 중에 살아있는 이는 죄인의 누이 돌돌 누나 하나뿐이옵고 지금 살기는 임천(林川) 칠산이로소이다.
치명하신 후 황 루카는 그 사람들이 즉시 시체를 찾아가고, 세 분 신부와 장 회장을 묻기는 사장(沙場) 근처 갈매못이라 하나이다.
장 회장의 아들 (장)노첨이라 하는 이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시체를 찾으러 경영하고 다래골 와서 물은즉 모르겠다 하기에 왔노라’ 한즉 죄인의 부친이 말하기를 “그리하면 일을 시작하자” 하여 몇 사람과 의논을 한즉, 누가 “어떻게 된 줄도 모르고 돈도 어디서 나서 쓰느냐” 하고, 장노첨이 데리고 온 사람도 대개 네 다섯인 듯하나 그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왔는지 모르고, 노첨이 데리고 온 사람들 중에 똑똑히 아는 사람이 방시영과 임중심과 서 필립보 뿐이라. 죄인의 식구와 질서(姪壻) 이 바르나바 성여와 함께 시체 묻은 곳을 4월 초8일에 가 본즉, 잔돌로 봉분을 쌓아 놓았기에 주막이 가까이 있는 고로 소리나지 않게 손으로 차차 헐어 들어갔습니다. 시체 하나가 드러나기에 보니, 적신(赤身)으로 묻고 또 목은 다 각각 제 몸에 맞추어 놓고 칡으로 허리를 둘러 묶고 칡 틈에 나무로 패를 만들어 언문으로 쓰기를 오가(吳哥)라 하였기로 오 신부이신 줄을 알고, 또 다음에 안 주교 시체가 또 그 모양이고, 그 다음은 민 신부이고, 그 다음은 장 회장이라. 밤에 시체의 모양을 본즉 빛깔은 희유스럼하고 물은 내왕하는 모양이고 냄새는 독하지 아니하여 시상(屍床)을 가지고 가서 올려놓고 마포로 감아서 지게에 넷이 지고 나선즉, 장사하여 일 시키는 곳이 멀리 10리가 되는데 날이 밝아 위험하자, 공론이 아무 곳이나 사패(사태?)난 곳에 묻고 가자고 하기에 죄인이 ‘안 된다’ 하고 주교의 시체가 그 중 무거운 고로 죄인이 지고 앞서 가며 “나만 따라오라” 하여 급대참에 일하는 곳으로 가서 묻었나이다. 봉분은 하나이나 광중(壙中)은 넷이고, 이 일할 때 주인은 수청고지에서 사는 죄인의 장인 최 안드레아이고, 이 때 손자중이 왔으나 일을 다하고 쉬는 날 와서 다녀가고, 신창 남방재에서 살던 김백원이라 하는 사람은 죄인의 처고모의 사위 되는데 홀아비로 다니다가 죄인의 처가에 와 있는 고로 함께 일은 하였으나 삯을 주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난 뒤에 산소에 가본즉 여우가 구멍을 뚫은 고로, 죄인의 부친이 돌로 막고 와서 또 들리는 말이 “혹시 수상한즉 그냥 둘 수 없다” 하여 홍산 도앙골에서 사는 김순장(김 요한인 듯)에게 그 말을 한즉, 김순장의 말이 “내가 돈을 얼마든지 대겠다” 하더니 공주 국실점에 가서 그 동네 신 회장과 함께 왔을 때에 돈 40량을 가지고 왔으나 김순장이 그 돈 40량 중 얼마나 댔는지는 모르고, 죄인의 형 이냐시오가 죄인의 셋째 형 요한 크리소스토모(뀌수)와 함께 오 좌수라 하는 집에 가서 돈 50량을 얻어왔으나 이 돈을 나중 7월에 썼는지 처음 4월에 썼는지는 모르고, 또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돈 40량 대고, 죄인의 부친이 27량을 대서 수청고지로 가서 외인의 배를 삯을 내되 두 물거리(두 물길 거리)에 삯 40량을 정하였다가 나중에 여러 날이 되매 20량을 더 주었습니다. 사공은 그 동네에서 사는 서성학 형제인데 이 형제는 죄인의 처의 일가요, 최 요한의 계모의 손자라. 성교를 봉행하지는 않으나 성교일은 다 알고 죄인의 의부 동서되는 안일삼이라 하는 사람과 죄인의 장인 최 안드레아와 사공 넷이 오르고, 죄인의 3형제와 질서 이 바르나바와 조카 (이)영화가 배에 오르고, 가서 무덤을 파본즉 시체가 거의 썩고 이미 여우가 침노한 흔적이 있어 민 신부의 왼쪽 발가락이 상하였으나 그냥 붙어 있고 아주 떨어지지는 않았고, 냄새는 감당하기 어려우나 칠성판은 그 칠성판으로 쓰고, 베는 새로 바꿔 가지고 염하니 때는 7월 13일 밤이라.
다하여 가지고 나선 즉 또 날이 밝은지라. 급히 배에 올리고 수로로 5리 쯤 되는 여수애 큰 강어귀로 가 있다가 바람이 일어나며 비와 뇌성이 크게 일어나니, 이때는 밤이라 모두 겁을 내고 도로 가패라 하는 곳으로 두 번을 쫓겨 들어가서 또 나아가다가 슬섬이라 하는 곳으로 쫓겨 밤에 풍랑을 겪어 거의 죽을 뻔하더라. 아침에 밥을 시키고 사공이 나서 보더니 “오늘은 더 큰바람이 일어날 터이니 진작 녹안이뿌리로 가자” 하여 행선을 시작하매, 바람이 크게 일어나 화살같이 달아나니 수로로 20리를 가서 녹안이로 가매 떠날 때 앉힌 밥이 겨우 끓었으니 그 급하게 달아난 사정은 가히 알만하다. 물에 떠있기를 8일로 하고 12일 만에 집에 돌아온 즉 김순장은 죄인의 집에서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신 회장도 함께 있어 남포 서재골 담배밭 한 가운데에 광중 넷을 파고 봉분 하나를 만들 때에 산 주룡(主龍)으로 동남쪽을 향하여 서서 말하면 좌편은 민 신부요, 그 다음은 안 주교요, 그 다음 우편은 오 신부요, 그 다음은 장 회장이라. 장사하고 헤어질 때에 모은 재물은 다 없어져 국실 사람들이 갈 노비가 없어서 남포 평바위골 사는 최이경이라 하는 최 요안의 8촌에게 돈 7량을 내어 노비하여 보내고 그 후에 모두 그 지방을 떠나 각처로 헤어져 살더라.
작년에 백 신부의 분부에 그 일 한 사람들이 다 죽으면 나중에 산소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으니 죄인의 형 이냐시오에게 분부하여 면례를 하고 오라 하기에 금년 정월 21일 밤에 죄인의 형 이냐시오와 죄인의 조카 안드레아와 질서(姪壻) 이 바르나바와 김 안드레아와 조카 프란치스코와 토다리 최 서방 등 합 일곱 사람이 함께 산소를 파본즉, 횡대(橫帶)하였던 나무가 아래로는 모두 썩어 없어지고, 뼈가 흙에 혼합되어 해골 위만 홍대 쪽이 남아 있어서 조심하여 낱낱이 백골을 모아올 때에 흘릴까 조심했으나 작은 뼈가 다 삭아 없어진 것도 있더라. 계골(計骨)을 하여 보매 혹 없어진 것도 있어, 모두 삭아 없어졌는지 혹은 흙에 묻혀 잃어버렸는지 자세히 모르고, 남아있는 것은 해골과 팔과 다리와 갈비뼈는 각 위를 분간하여 종이로 각각 봉하여 백 신부께 바치는 사정으로 전후의 일장 일을 아는 대로 사실을 따라 기록하여 바치나이다.
임오(1882년) 2월 초4일(양력 3월 22일) 죄인 이(치문) 힐라리오
김순장과 국실 신 회장 40량
이 이냐시오 50량
이 요한 크리소스토모 40량
이 바오로 27량
최이경 7량
합 164량
<안 주교>
두골(頭骨)
후퇴(後腿), 방광(膀胱) 명뼈
왼쪽 갈빗대
오른쪽 갈빗대
왼팔 아래 웃마디
오른팔 아래 웃마디
왼쪽 다리 아래 웃마디
오른쪽 다리 아래 웃마디
발가락
손가락
<오 신부>
두골
왼쪽 갈빗대
오른쪽 다리 아래 웃마디
왼쪽 다리 아래 웃마디
후퇴, 방광, 명뼈
왼팔 아래 웃마디
손가락, 발가락 동봉(同封)
오른팔 아래 웃마디
<민 신부>
두골
왼쪽 다리 아래 웃마디
오른쪽 다리 아래 웃마디
왼팔 아래 웃마디
오른쪽 갈비뼈
왼쪽 갈비뼈
후퇴, 방광, 명뼈
손가락, 발가락
<장 회장>
두골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
오른팔
왼팔
후퇴, 방광, 명뼈
손가락
발가락
다짐[侤音]
아뢰는 바는 죄인들이 이번 신부님의 분부대로 병인년에 치명하신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장 회장의 시체를 면례하여 오라 하시기에 이 달 20일 밤에 파지 못하여 본즉, 전에 죄인들이 장사한 모양으로 그냥 있으나 17년이 지났으매 백골이 혹시 없어진 것도 있고, 밤에 흙에 섞인 백골을 줍자 한즉 아무리 조심스럽게 낱낱이 살폈으나 혹시 서실(閪失)될까 염려되어 각 위의 백골을 각각 봉하여 왔으며, 백골이 혹시 바뀌었는가는 일정 의심이 없기로 천주대전에 아무 의심 없는 줄로 맹세하며 갔던 일곱 사람이 납고(納侤)해온 일.
임오 2월 초3일 죄인 등이 천주대전에 고상을 모시고 미사 경본 위에 손을 얹고 백 신부 앞에 허원 다짐하옵니다.
이 힐라리오
이 이냐시오
이 안드레아
이 프란치스코
이 바르나바 (이 다섯은 처음부터 주장)
김 안드레아
최 바오로 (이 둘은 이번의 일군)
필집(筆執) 송 바오로
백 신부
“1887년 3월 23일 조선 부주교 블랑(G. Blanc) 같은 사본 및 위에 서명한 사람들의 증인을 위하여” 조선 부주교 블랑
7) 정리 번호 201번
죄인 헤르메네질도. 세속 이름 광호
천안 여사울 살 때 병인년을 당하여 병인 2월 18일에 안 주교 계신 곳이 신리 신 회장(손 회장의 잘못) 치호의 집에 계시옵기에, 그 날 죄인이 가서 군난이 위황(危慌)하오니, 피신하심이 좋을 줄로 여쭈었다. 주교 말씀이 “아직 알 수 없다. 서울 간 사람이 오면 어찌할런지 천주의 명은 어기지 못한다. 치명 예비를 잘하여라. [그리고] 바삐 가거라” 하신 분부 듣자오니, 신창에 경포교가 많이 왔다하기에 신리를 가며 본즉, 포교는 먼저 그 동네 들어가고 신창에서 배론 가서 공부하던 학동 박만억이가 앞서서 손 회장 집을 아는 고로 들어온즉, 즉시 급하므로 부엌 나무 쌓은 곳에 가서 숨으셨다가 잡히셨나이다. 곧 황 루카와 두 분은 잡히시고, 그 날 바로 손 회장과 포교와 같이 나서서 오 신부가 홍주 통포안(통포원의 잘못)이라는 홍 회장 집에 계신 고로 그곳에서 잡혀 신리로 오시고, 민 신부님은 덕산 높은뫼에 계시고 주인은 신여실의 집에 계시다가 잡혀서 그 이튿날 홍주로 가서 상경하시고, 3월 열하룻날 신창으로 지나가실 때에 잠깐 뵈옵고, 그 해 부활 주일은 스무날인지 스무 이튿날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옵니다.
다섯 분이 한 날 치명하신다는 말 듣고 가다가 부활 주일 오후 중로에서 오 서방이라 하는 교우가 만나 치명하셨다고 하고 그때 사정을 말하옵는데, 고마 수영 수사가 좌기(坐起)하고 차반을 차려 드렸습니다. 황 루카는 천주가 내신 만물을 오늘 망중에 먹으라 하시며 주신다하고 흔연히 잡수시고, 안 주교님은 국만 한 그릇 잡수시고, 두 신부님과 장 회장은 조금 집배(執杯)만 하더란 말 듣사옵고, 그 후에 시체는 그놈들이 모래장에 깊이 파서 장사 지내었고, 그 날 햇빛이 없어 마치 일식하는 날과 같았으며, 외인들이 하늘보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사옵나이다. 그 오 서방은 죽고, 그 아내와 자식과 그 아우는 살았사옵나이다. 수원집의 오 회장 군문
8) 정리 번호 209번
본 사람에게 듣고 증거하는 증인 이 안토니오의 증거라.
황 루카의 사적
․일정한 기록은 알지 못하나, 충청도 서천군 산막골에서 권 신부(페롱 신부)의 복사로 있던 것은 확실하고, 포교한테 잡히기는 충청도 거더리에서 잡혔느니라.
․일평생을 착히 살고 또 항상 복사를 하는데 덕행이 있는 고로 교우들이 그를 대단히 사랑하였느니라.
․혼배 후에 아내를 버리고 학당에 들어갔으나, 그 후 집에 와서 그 아내더러 등을 긁어 달라 한 고로 퇴학을 당하였으나, 그 후에는 일절 수절하고 독신으로 살았느니라.
․치명은 일정하였으니, 그의 시체를 치명한 후에 교우들이 가져왔는데 나도 그것을 보았느니라.
․특별한 표적으로 치명할 때에 다른 신부와 다른 교우들은 두려운 모습이었으나, 황 루카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하며, 또 죽이기 전에 차담상을 차려주니 다른 교우들은 안 먹으나 황 루카는 팔을 걷어 부치고 다른 교우들을 향해 “천주께서 주시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읍시다” 하고 먹었느니라. 어떤 신부인지는 모르나 황 루카와 같이 치명하는데 희광이가 그 신부의 목을 치다가 반만 치는 것을 황 루카가 보고 “네 이놈, 단칼로 치지 못하겠느냐” 하였느니라.
․또 잡혀갈 때에 사방에서 성교 도리를 잘 강론하여 그의 강론에는 외인들도 탄복하더라. 또 그의 인심을 살펴보면 어떤 이가 빼낼 수 있으면 빼 내겠다 하였으나 아마 자기가 싫다고 한 듯하다. 그가 치명한 때는 대략 병인년 4월 달 즈음 잡혀서 어디론지 경능네였는지는 모르나, 오래지 않아 수영 수사 있는 곳에 와서 죽었으니, 대략 4월 보름께나 될 듯 하오니 위에 말한 것은 우리 동네 교우들이 친히 보고 말한 것을 듣고서 말하였습니다.
이 증거는 이 안토니오의 증거임.
증인 박 요셉․윤 고스마
9) 정리 번호 210번
서천 산막골 사는 황 루카는 나이 60세에 치명하셨는데, 젊었을 때 성교 도리에 밝아 강론도 잘하고 신부의 복사로 다니다가, 병인년 군난을 당하여 경포한테 홍주 거더리에서 안 주교와 민 신부와 장 회장과 같이 잡혀 갈 때, 길을 가면서 도리를 강론하니, 도처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찬성 안 하는 이가 없었으며, 수영 수사 전에 들어가니, 수사가 각기 차담상을 드리거늘 주교와 신부와 회장은 안 잡수시되, 팔을 걷고 “세상 물건을 마지막으로 먹읍시다” 하고 권면하며, 또 주교․신부․회장을 권면하여 치명케 한 후에 자기도 또한 참수 치명하니 광채 생전보다 더 하더라.
10) 정리 번호 215번
치명자의 증거
증인은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대평리, 박 안드레아 나이 91세.
안 안토니오 아곤(다블뤼 주교의 주교 명의인 ‘아콘’) 주교 조선 부감목
안 주교 사건은 이미 사기(史記)에 기재됨과 같이 충청도 홍주 거더리 손 회장의 집에서 민, 오, 두 신부와 황 루카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가셨다가 고마 수영으로 이수되어 치명하셨는데, 당시에 관장이 자리하고 여러 군사를 나열시키어 위엄을 늠름하게 떨친 중에 안 주교 각하는 제일 먼저 대령되어 장대 아래서 참수 치명하심을 죄인 (박) 안드레아는 친히 목도하였사옵나이다.
민․오 양위 신부와 더불어 배론에서 잡혀 온 장 회장 요셉은 안 주교 뒤를 따라 같은 형벌에 치명함도 보았습니다.
황 루카는 죄인과 함께 한 동네 살지 아니하고 상거가 10리쯤 되고, 그 형님이 이웃 동네 살고, 권 신부(페롱 신부) 계신 본 공소가 같은 한 마을인 고로 축일 상봉하여 그 훈계를 듣고 겪어 보았으니, 그 수계하는 법이며 규구지키는 법이 엄중하시고 신부 모시고 거행하는 것도 변통 없이 법도에 맞고, 평생에 언어와 행동이 착하시므로 다 흠모 찬성하였습니다.
11) 정리 번호 220번
병인년에 위주 치명하신 황 루카 재건의 부친은 서울에서 살다가 부친이 유리사(由吏使, 지방 관아의 이방 아전) 벼슬을 하여 충주로 와서 살 때 3형제를 낳으니 황 루카가 셋째 아들이라. 어려서부터 총명․양순하더니 15세에 성혼한 후 첫날밤에 부부 동정으로 수정하기로 맹세하고 고신극기하시며 착한 표양을 많이 세워 교우들의 표양이 되시니라.
기해년 풍파에 놀라서 그 부친이 배교하라 하여 무수히 형벌함 다짐을 받으려 하매, 벙어리가 되어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으니, 부친이 벙어리가 되었다고 하여 의원을 불러 목에 침을 무수히 꽂고 여러 가지 약을 썼으나 도무지 말을 아니하다가 군난이 침식한 후 3년 만에 말씀하시니라. 서천 산막골로 가서 권 신부(페롱 신부) 복사로 3년 동안 있다가 그 조카 (황) 요한을 양자로 삼아 가사를 맡기고, 서울로 가서 치명하실 때까지 안 주교 복사로 있었고 안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잡히셨는데, 대원군의 부인(즉 여흥 부대부인 민씨)과 그 딸을 영세줄 때에 안 주교가 친히 주신 후 즉시 잡혀서 고마 수영에 와서 치명하셨는데, 안 주교와 신 신부(?)와 박 신부(?)와 장 베드로(장 요셉의 잘못) 복사와 합 5위가 치명하셨다.
문초한 것은 모르나 치명하시기 전에 각위(各位)에게 큰 상을 드려 잡수시게 하니, 주교 잡수시지 아니하매 황 루카가 권면하여 가로되 “천주 내신 만물을 오늘 마지막 잡수시라” 하여 함께 잡수신 후에 얼굴에 회칠을 하고 귀에 살을 꿰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구하신 후에 주교 칼을 받으신 후, 민 신부 칼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오 신부 칼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황 루카 칼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장 요셉이 치명하셨는데, 치명하신 날은 정월 13일(2월 14일의 잘못)이더라. 시체는 각각 묻고 성명을 써서 무덤 앞에 박았더라. 4월 13일에 시신을 본집으로 모셔올 때 사체가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고 얼굴 화색이 생시 같아 매맞은 상처는 다 나아서 딱지가 있고, 귀에 살 박았던 흔적이 있더라. 시신을 홍산 삽티에 안장하였고, 치명하시던 해에 56세(음력, 54세의 잘못)더라. 치명하실 때에 친히 본 외인의 말이 흰 무지개 다섯이 하늘을 뚫고 나감을 모든 외인들이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하니라.
정읍군 내장면 신서리 황 마르타는 위에 치명하신 사실을 친히 보지는 못하고, 친히 본 사람에게 듣고, 또 들은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음이요, 평생 행위는 여러 번 분명히 들었으며 치명하신 후 시체는 친히 보았기로 증인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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