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1년 김항주(金恒柱,1722~) 중수봉황대(重修鳳凰臺記)를 남기다
1771년 1월 김항주(金恒柱,1722~)가 새로 군수로 부임한다.
김항주는 본관이 경주이다. 학주 김홍욱(金弘郁,1602~1654)[생,진1624][文1635]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한정(金漢楨)이며,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흥경(金興慶,1677~1550) [생1699][문1699] 이다. 5촌 당숙인 김한익(金漢翊)에게 출후하였다.
홍주에 거주하였는데, 추사 김정희의 종조부가 되니, 이분의 학문도 가학을 짐작하면 어느 정도인 가늠할 만하다.
한국고문서자료관에 소장중인 자료에 부친 김한정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 들이 남아 있다.
▲ 김항주(金恒柱) 서신 이미지 / 출처 ; 한국고문서자료관
김산에서의 많은 치적을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봉황대를 중수하고 찬한 중수봉황대(重修鳳凰臺記) 글이 <김산군읍지> 에 남아 있다.
1771년에 작성된 봉황대중수기문에서 다음 몇가지 사실이 확인된다.
- 1771년에 썩은 부재를 교체하고 단청을 새로 칠하였다.
- 연화지(鳶嘩池) 대신 연화지(蓮花池)로 표기하고 있다.
- 김산 읍치의 별호인 금릉지명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항주가 공식 지리지에 사용하는 연화지(鳶嘩池) 대신 연화지(蓮花池)로 표기한 까닭은 설명이 없으니 알 수 없다.
다만 굳이 추측을 더해보자면, ‘솔개 울음소리가 시끄러운 못’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연화지(鳶嘩池)에서, 이제 사대부들도 그 풍광을 보고 즐기고 있으니 ‘좀더 고상한 뜻을 가지는 이름인 연화지(蓮花池)’로 표기하여 품격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더해본다.
김항주는 김산 봉황대에 대한 김산 사람들의 자긍심과 주변 지명의 유래를 쉽고 간명하게 기술한다. 사실은 사실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전거가 미비함을 기술하고 금릉의 형승을 설명해 낸다.
郡曰金陵 門曰湧金 謂其臺曰鳳凰 謂其池曰錢塘者 何也. 噫, 兹郡僻處嶺陬 無江山泉石之勝, 又少遊覽之所 而天下第一佳麗地也. 古人命名 必有其由, 而今乃無志可憑 吾東方文献之貿貿 良足嘅也.
군을 금릉이라 하고 문을 용금이라 하며, 그 대를 봉황이라 하고 그 못을 전당이라 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아! 이 고을은 영남의 모퉁이 외진 곳에 있는데, 강산과 천석이 좋은 곳도 없고 유람할 만한 곳도 적지만, 천하제일의 아름다운 땅이라 한다. 옛사람이 이름을 지은 것에는 까닭이 있는데, 지금은 기댈만한 곳이 없고 우리 동방의 문헌이 무무하니 자못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앞서 이윤영이 금릉의 풍경과 봉황대, 용금문, 전당(연화지)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표현했다면, 김항주는 연유를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 연유를 찾지 못했음을 솔직히 기록한다.
김항주가 1771년 지은 ‘중수봉황대기(重修鳳凰臺記)’는 현존하는 최초의 봉황대 기문이다. 기문은 공식화한 글로 판상에 게시한다. 그런 까닭에 왜곡된 문장과 설명은 조선의 선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봉황대를 수선하는 사유와 과정을 기술한다. 원문과 함께 살펴보자.
臺凡大架 歲久荒廢, 上無所覆 下支以木, 失今不治 必將傾毁 而後己遂乃召匠僝工 剋期董役 仍舊而葺之 就其腐朽 易以新之 侈之以丹雘, 不數旬而告訖. 非敢爲一時遊息之所也.
대의 큰 도리들이 세월이 오래되어 황폐하고, 위에는 덮지 않고 아래를 나무로 지탱하고 있어, 지금 고치지 않으면 장차 넘어져 훼손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장인을 불러 공사를 갖추어서, 기일을 정해 일을 시켜 오래지 않아 수선하였다. 썪은 것은 새로운 것로 바꾸고 단청으로 꾸며 수십 일이 되지 않아 완공하였는데, 감히 한때의 노는 곳으로 하려고 함이 아니다.
김항주는 금릉의 형승인 봉황대가 ‘위에는 덮지 않고 아래를 나무로 지탱하고 있어,’‘봉황대가 낡아 부재를 고치고 단청을 다시 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어떻게 갑자기 구화산에 있던 봉황대를 옮겼다는 설명으로 변한 것일까.
어느 블로거가 소개하는 봉황대 안내문이다. 연도와 왕력도 일치하지 않아, 봉황대를 소개하면서 이 사진을 올려 놓았다.
‘군수 김항주(金恒柱)가 구화산에 있던 건물을 산 밑으로 옮기고, 봉황대(鳳凰臺)라고 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블로그 사진 캡쳐
국가유산청의 안내문을 살펴보자.
1771년에 고쳐 세우면서 봉황대로 하였다고 설명한다.
국가유산청 안내문 캡쳐
왜 이렇게 제각각 다른 설명을 하게 된 걸까. 아마 기록을 살펴보지 않은 오류가 아닐까 싶다. 오류를 수정하지 않으면, 다시 또 퍼나르고, 나중에는 옳고 그름을 수정할 기회를 잃게 된다. 올바른 지식 전달이 아쉽다. ‘서사는 비어있는 정원’이라는 지적이 떠오른다.
이윤영의 김산에 머물면서 봉황대를 기록한 1741년경 부터 김항주의 중수기가 있는 1771년까지 30년의 기간 동안 왜 봉황대에 대한 방문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김항주가 부임하는 1771년 사이 30년 동안에 김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수봉황대기(重修鳳凰臺記)
김산군수 김항주(金恒柱,1722~)
余治金山三月登郡所謂鳳凰臺者. 臺在郡南一里許 其創始年月 雖不得以詳焉. 臺之設固久矣. 郡曰金陵 門曰湧金 謂其臺曰鳳凰 謂其池曰錢塘者 何也. 噫, 兹郡僻處嶺陬 無江山泉石之勝, 又少遊覽之所 而天下第一佳麗地也. 古人命名 必有其由, 而今乃無志可憑 吾東方文献之貿貿 良足嘅也. 盖嶺南 雖不以山水名然 其地勢崇博, 大磅磚渾厚 往往爲深雄府名郡者 不可一二計 而若金陵則居大嶺之中 控兩路之交. 其山川之美麗 雖有不及於吳越. 而至如人才之輩出 髦士之蔚興 未必多讓扵吳越. 則又何可徒取其江山之美而己也.
*전당(錢塘) : 중국 절강성(浙江省) 절강을 말함. 이곳은 조수가 밤낮으로 두 차례씩 들어 주민들이 막심한 폐해를 겪어오다가 삼국(三國) 시대에 화신(華信)이 흙이나 돌 1곡(斛)을 날라오는 자에게는 1천 전을 주겠다고 상금을 내걸고 열 달 사이에 둑을 완축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전당이라 부르는 것은 돈을 내걸고 수축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讀史方輿紀要 浙江》 *모사(髦士) : 준수한 선비. 준재
내가 김산을 다스린 삼월에 군의 봉황대란 곳에 올라가 보았다. 대는 군의 남쪽 1리쯤에 있는데 처음 세운 연월은 상세하지 않으나 대를 세운 지는 오래되었다.
군을 금릉이라 하고 문을 용금이라 하며, 그 대를 봉황이라 하고 그 못을 전당이라 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아! 이 고을은 영남의 모퉁이 외진 곳에 있는데, 강산과 천석이 좋은 곳도 없고 유람할 만한 곳도 적지만, 천하제일의 아름다운 땅이라 한다. 옛사람이 이름을 지은 것에는 까닭이 있는데, 지금은 기댈만한 곳이 없고 우리 동방의 문헌이 무무하니 자못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대개 영남은 비록 산수로 이름나지 않으나 지세가 높고 넓으며, 크게 울퉁불퉁하고 두터워, 종종 깊은 웅부로 군의 이름을 지은 것이 한 둘이 아닌데, 여기 금릉은 큰 산줄기의 중간에 있으면서 양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그 산천이 아름다운 것은 비록 오월 땅에 미치지 못하지만 인재를 배출한 것은 오월에 이르고, 뛰어난 선비가 일어난 것은 오월에 뒤처지지 않으니, 어찌 강산의 아름다움만을 취한 것이겠는가.
况登斯臺而望之 西有則黃嶽 雄盤十里, 北有九鳯 蔚然蒼秀. 起而伏戈 馳而突 迤邐爲高城之山 環拱樓或前. 南有鑑湖之水 汗漫平浦 澄光如鏡 或縈而廻 或清而澈 襟帶扵高城之下. 樓下又有蓮花池 周可爲三百餘尺 深可爲七八尺. 微風作動 錦浪成紋, 天水相徹 上下一色. 汀花媚紅 岸柳舒綠 則是宜於春也. 八窓軒暘 大野莽濶 則是宜於夏也. 荷香襲人 素月流輝 則是宜於秋也. 積雪封山 層氷疂玉 則是宜於冬也. 地名旣符 風景若此 則亦不可謂 全無山水之勝也. 好名者以金山鑑湖之偶 同於吳越, 倣而名之 鍚兹嘉號者 豈徒然哉.
*한만(汗漫) : 물이 질펀하여 아득한 모양 *천수(天水) :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라는 뜻으로, ‘빗물’을 이르는 말.
이 봉황대에 올라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황악산이 십리너머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구봉산이 울창하고 푸르게 우뚝하다. 일어나다 웅크리고 치달리다 솟구치며 비스듬히 고성산에 이어지며 루 앞을 감싸 안는다. 남쪽에 흐르는 감호의 물은 너른 포구에 아득하고 거울같이 맑으며, 굽이굽이 돌면서 맑게 흘러 고성산 아래까지 띠를 이룬다.
봉황대 아래에는 연화지(蓮花池)가 있는데 둘레는 300여척이고 깊이가 7~8척이 된다. 미풍이 불면 비단 물결이 무늬를 이루고, 비가 내리면 하늘과 땅이 일색이 된다. 물가를 붉게 물들이고 언덕 버들이 녹음을 펼치니 봄의 좋은 모습이고, 팔창을 열어두면 너른 들이 확 트이니 여름의 좋은 모습이다. 연꽃향이 묻어오고 하얀달이 흘러가며 빛나니 가을의 좋은 모습이고, 쌓인 눈이 산을 덮고 두꺼운 어름이 옥 같이 쌓이니 겨울의 좋은 모습이다.
지명이 부합하고 풍경 또한 이와 같으니 산수의 승경이 없다고 말 할 수 없다. 김산과 감호가 짝이 된 좋은 이름이 오월과 같고, 모방하여 이름을 지어 땅이 이렇게 아름답게 불리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臺凡大架 歲久荒廢, 上無所覆 下支以木, 失今不治 必將傾毁 而後己遂乃召匠僝工 剋期董役 仍舊而葺之 就其腐朽 易以新之 侈之以丹雘, 不數旬而告訖. 非敢爲一時遊息之所也. 不揆蕪拙 畧掇文字 俾後之人知金陵有鳳凰云. 崇禎紀元後 二辛卯 四月 下澣 月城 金恒株 記
대의 큰 도리들이 세월이 오래되어 황폐하고, 위에는 덮지 않고 아래를 나무로 지탱하고 있어, 지금 고치지 않으면 장차 넘어져 훼손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장인을 불러 공사를 갖추어서, 기일을 정해 일을 시켜 오래지 않아 수선하였다. 썪은 것은 새로운 것로 바꾸고 단청으로 꾸며 수십 일이 되지 않아 완공하였는데, 감히 한때의 노는 곳으로 하려고 함이 아니다. 거칠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문자로 대략 엮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금릉에는 봉황대가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숭정기원(1728년)후 두번째 신묘년(1771년) 4월 하순 월성인 김항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