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사자의 수가 늘지 않는 이유는,
사자의 새끼가 성장하기 전까지
다른 동물에게 먹히거나, 죽거나 해서,
그 증식률은, 초식동물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무에게도 습격당하지 않고 성장한 사자는 바로 왕자이며,
우아하며, 특권계급의 레테르를 붙여도 좋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연은, 결코 불공평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아라고 하는 고통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먹이를 잡을 때는 굉장히 고생을 합니다.
때로는 수십 일이나 기아와의 싸움을 (자연으로부터) 강요당합니다.
그래서, 기진맥진 녹초가 되어서,
겨우 먹이를 얻게 되는 것이 그들의 숙명입니다.
그들의 일생은, 기아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사자뿐만이 아니라, 육식동물의 숙명입니다.
케냐의 사자는 먹이에 곤란하지 않을 정도로,
초식동물이 많지만, 함부로 초식동물을 먹지는 않습니다.
나이먹은 동물이나, 병들어 약한 놈만 노립니다.
말하자면 자연도태하는 동물만 잡아먹습니다.
동물에 따라서는 동족을 잡아먹는 것에 의해,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동족을 잡아먹는 것에 의해, 그들의 전체의 생존을 유지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결코 특권계급도 아니며, 우아하지도 않습니다.
한편 초식동물은 어떤가 하면,
이들에게는 초목이 충분히 주어져 있으니까 굶주림으로 곤란한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대로 놓아두면, 그들의 종족은 점점 늘어납니다.
늘어나는 것을 방치하면, 이번에는 초목이 없어집니다.
초목이 없어지면, 그들의 생존은 어렵게 됩니다.
거기에서 초식동물과 초목과의 조정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사자를 비롯한 육식동물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초목은, 무리 생활하는 초식동물의 배설물이 비료가 되어,
초목 자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합니다.
비슷한 예로는, 꽃과 벌이랑 나비의 관계입니다.
벌이랑 나비는, 꽃의 꿀을 먹고,
꽃은, 벌이랑 나비가 옮겨주는 화분을 얻어,
꽃을 보다 아름답게 꽃 피웁니다.
이처럼, 동물과 초목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서로 보충하면서, 자연의 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따로따로 독립해서, 마음대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체의 생존을 가능하도록
각자의 입장에서 살려지며, 자기 몸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바로 살신공양의 모습이지요)
약육강식이라는 처참한 것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그림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전체를 살린다'고 하는 전체에의 조화이며,
각 종족이 몸을 던져 (희생함으로써) 각 종족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들은 절대로, 무익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습격당하는 것을 모르는 사자도,
일단 먹이를 구해 배가 부르면,
결코 그 이상의 먹이를 잡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눈앞으로 먹이가 지나가도, 그것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섭리입니다.
만약 그들이 장난으로, 약한 것을 함부로 죽이는 짓을 한다면,
머잖아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것만 잡습니다.
배고픈 것이 해결되면, 그들은 거기에서 만족합니다.
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하기보다도, 하늘이 내려 준 그들의 본능입니다.
자연이 그들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석탄이나 석유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이 지상계의 진보와 조화의 초석이 되기 위한 것이며,
인간이 이 지상에 내려와,
이 세상에 불국토를 만들기 위한 선구자로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에 따라 (살신공양),
그들 자신의 혼의 진보가 촉진되어,
이윽고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침범당하지 않는 혼으로 성장해 갑니다.
한치의 벌레도 오푼의 혼이 엄연히 존재하며,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며, 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연계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자비로운 자연계 속에서,
서로를 위하여 살신공양하는 사랑의 행위)
표면에 나타난 모습만을 보고,
이것을 사회에, 인생관에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부조화밖에 없습니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결과는 끔찍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옛날에, 자주 메뚜기나 개미의 이상 발생이 일어나,
경작물이랑 인간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상한 상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간사회의 부조화가 원인입니다.
경계를 긋고, 영토분쟁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피로 피를 씻는 무익한 전쟁으로,
그 (인간의) 존엄한 생명을 버립니다.
이럴 때, 이러한 곤충의 큰 발생을 일으켜,
작물을 먹어버려 황폐시켜, 인간들의 추악한 싸움의 종지부를 찍으려 합니다.
먹거리가 없어지면 전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황폐화된 경작지를 인간들은 정성을 들여 복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대자연은 일체(一體)입니다.
그 위에 인간은 그 자연을 보다 좋게 조화시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식물은 (자연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 것,
인간은 (자연에 의해) 살려지고 있음과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끼리 자연을 훼손하는 싸움을 하면,
살려지고 있는 동식물의 생태에도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동식물의 생태, 실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우리 자신의 혼의 향상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