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부르는 것 중 하나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금수강산이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산하가 있는 것일 게다. 거기다가 최근에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으로 먹거리 또한 풍부하니 금상첨화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강우량이 적당하고 삼면이 바다로 둘려 쌓여 명실공히 산 좋고 물 좋은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우리나라의 여름을 나는 넓은 여름이라 표현하고 싶다. 여름은 겨울에 비해 활동이 자유롭다. 살평상은 물론이고 돗자리 한 장 펴면 어디든 몸을 눕혀도 잘못됨이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일손이 바쁜 어머니들은 풀잎사귀 몇 줌 뜯어놓고 밭머리에서 잠투정하는 아이를 눕히곤 했다. 그러한 풍경이 익숙한 마을에는 전설 아닌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전하여 내려오기도 했다.
“ 도금물 댁 둘째는 밭머리에 눕혀 놓았더니 구렁이가 목을 감고 있었다.” 는 이야기는 소름끼치는 전설이 되었다. 이렇듯 여름은 활동이 넓어서 생활 범위도 넓었지만 할 일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 탈이 났다고 하기 보다는 사건 사고가 엄청스럽게 많은 계절이 되었다. 백여 호가 넘는 동네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성된 농업용수용 커다란 호수에 목숨을 잃는 소식이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들려 왔다. 할머니 생신을 맞아 어른들이 분주한 틈을 타 사촌 여동생 둘과 팔촌 여동생을 한껏 번에 잃는 사고도 있었다. 이 소식은 라디오뉴스를 타고 전국에 보도 되었고 전화가 없던 시절 객지에 살던 친 인척이 안부가 궁금하여 마을을 다녀갔다.
어쨌든 그 일이 있은 후 동네에서 최장수 어른으로 수복을 누린 할머니이지만 돌아갈 때 까지 변변한 생일상 한번 받지 못하고 돌아 갔다.
시골의 여름은 나무 그늘 마다 쉼터요 웅덩이 마다 목욕탕이요 골골마다 먹을 물이요 산딸기며 생으로 먹기에 곤란한 망개나무 열매가 지천으로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청머루라 불렀다. 어린 우리들은 소고삐를 잡고 소에게 풀을 뜯어 먹게 하기 위해 골골마다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이산 저산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호기심이 발동하면 우리는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온 산을 누비고 다녔다. 피곤한 몸은 저녁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잠이 들기도 했다. 마당 한쪽에 펴 놓은 멍석에서 떨어져 지펴 놓은 모깃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 모기는 극성이었다.
모기에 물려 앓는 학질을 속칭 당학이라고 하였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말라리아인 도둑놈 병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것에 걸리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 열 명 중 네다섯은 사망할 뿐 아니라 힘이 장성한 장년들도 수년 동안 폐인이 되기 일쑤였다. 당시 신문을 찾아보니 금계랍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이후 1전어치의 양만 먹어도 학질이 즉시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매천야록>에는 ”우두법이 들어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金鷄蠟)이 들어와 노인들이 수(壽)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나왔다.” 고 전하고 있다
어머니는 금계랍을 금계란 이라고 불렀다. 계란을 팔아 약을 사서 금계란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았다. 한여름인데도 양지 바른 쪽을 찾아 사시나무 떨 듯 하는 죽음을 앞둔 아들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병든 닭이 죽음을 기다리듯 땡 양지에서 꼬박 꼬박 졸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심경이 어떠하셨을까?
“금계란 한 알이면 씻은 듯이 나을 터인데” 아버지에게 원망하듯 혼자 말을 하곤 하였다.
우리 집 입구에는 커다란 개 복숭아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학질에 걸리면 아침 일찍 환자를 동향으로 앉히고 복숭아 가지로 등을 때리면서 “ 초학 귀신아! 학질 귀산아! 어서 썩 물러가라” 하며 쫓았다는 ‘초학뱅이’를 아셨는지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는 복숭아 가지를 꺾어 앙상한 뼈만 남은 나의 등짝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솜이불을 덮어도 한기가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매일을 오후가 되면 삼발사발 떨며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 재가 되었다. 내가 먹여야 할 소를 밭 근처 언덕에 매어 뒀다가 몰고 오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뒤집어 쓴 이불이 움직이는지를 살펴보는 듯 했다.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멈추는듯하더니 쥐죽은 듯한 고요 속에 다시 들렸다. 이불이 움직이는 모습에 한숨을 돌린 어머니가 소를 마구간 쪽으로 몰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해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솜이불을 덮어써도 한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솜이불을 벗긴 것은 강풍이 아니라 따사로운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