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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장 開天 중원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알 수 없는 긴장이 대강남북에 흐르는 가운데 은거했던 군웅들이 하나 둘 출현했다. 그것은 천마해가 수천 년의 세월 속에 묻힌 문(門)을 열었다는 소문과 함께 일어난 일이었다. 각 문파들은 신비의 천마해를 얻기 위해 암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백 년 동안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환마루(幻魔樓)가 모습을 드러내고, 십팔군마채(十八群魔寨)와 검주어가(劍主魚家)가 천마해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세월(歲月)…… 무심한 것은 세월이다. 한달 두달 시일이 흐르더니 어느덧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있었다. * * * 휘이잉…… 북방(北方)의 눈보라는 유난히 거칠고 차갑다. 이곳은 대과벽. 자욱한 눈보라 속에 대과벽은 거대한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대자연의 장엄함은 인간의 마음에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 폭설 속의 대과벽 한 곳에 두 개의 눈사람이 세워져 있었다. 허나, 자세히 살핀다면 그것은 눈사람이 아닌 인간임을 곧 알 수 있으리라. "……" "……" 그들은 바로 곤명산과 백한아였다. 그들의 시선은 절벽 아래의 법신굴에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문득 곤명산이 고개를 들더니 하늘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우---!" 그의 거구에서 눈더미가 일시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벌써 이년(二年)이 흘렀다. 헌데도 한 번 들어간 위지제강이란 놈은 나올 생각을 않는다." 곤명산은 솥뚜껑같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이거 미치겠구나. 백소저, 이만 돌아갑시다. 오늘도 글렀소." "……" "백소저." "……" 백한아는 대답은 커녕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곤명산은 울분을 참을 수 없는 듯 쩌렁쩌렁 외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들어갈 수는 없고…… 귀신에게 붙들려 못나오는 건가. 아니면 굶어서 죽어버렸는가." 그는 주먹을 내흔들며 두 눈에 뇌전같은 광망을 폭사했다. "그놈. 나오기만 해봐라. 나 곤명산을 속태운 죄로 한 주먹에 박살……" 헌데,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백한아가 얼음장같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곤명산의 얼굴이 언뜻 붉어졌다. "허헛…… 농담이었소." 그는 내심 한탄성을 흘려냈다. (빌어먹을. 이 곤명산이 언제부터 계집의 눈초리에 주눅이 드는 신세가 됐지?) 휘우우…… 휘우우…… 눈보라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곤명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분분(紛紛)히 휘날리는 눈송이가 그의 동공 가득 모여든다. (그나저나…… 처음 볼 때부터 단숨에 내마음을 사로잡았던 놈…… 살아있다면 제발 빨리 나와다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위지제강, 대체 그는 어찌 되었는가? * * * 이곳은 법화불동 안, 더 이상 예전의 평범해 보이던 동굴이 아니었다. 고오오…… 천정에서는 은은한 서기(瑞氣)가 신비롭게 맴돌고 있었다. 위지제강은 미동도 않고 가부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그는 움직이지 않을 듯했다. "……" 그의 전신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혜광(慧光)이 감돌았다. 그의 머리는 허리 밑까지 자라 있었다. 이미 그의 당당한 모습에서는 소년의 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약간 창백해진 얼굴에 떡 벌어진 어깨…… 눈빛은 심해(深海)처럼 깊고 잔잔했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여 어떤 감동마저 느끼게 했다. 아아…… 그것은 성스러운 고요함이요, 만인을 압도하는 제왕(帝王)의 기도였다. 그렇다. 천하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 영웅은 탄생되고 말았다. 지난 이 년 동안, 유마거사가 좌선암에 주입해 놓았던 미증유의 법화불력(法華佛力)이 그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마(魔)가 그의 몸 속에서 물러나고, 야혼십대마물로 기초를 이루었던 불사승만의 대법이 드디어 칠성(七成) 가량의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공할 내공을 지닌 무림의 초강고수로 변모해 있었다. 하늘은 위지단과 그 아들에게 고난을 준 대가를 한꺼번에 내린 것이다. 동굴 벽면에 새겨진 팔만사천 법구경(法句經)은 단순한 불경(佛經)이 아니었다. 그것은 암흑속에 찬란히 솟은 광명이요, 대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가공할 무공구결이었다. (육체와 마음…… 진아(眞我)와 무아(無我)가 하나임을 깨달을 때…… 무시무종(無如無終)의 거력(巨力)은 이루어진다.) 그의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떠오르고…… (삼라(三羅)의 모든 정기여…… 내 혼(魂)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아아……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몸이 가부좌 자세 그대로 찬란한 서기를 발하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순간 그의 두 눈에서 엄청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동시 법화불동 전체를 뒤흔들며 그의 음성이 장엄하게 울려퍼졌다. "일어나라…… 나 위지제강의 이름으로……" 삼매진화(三昧眞火)! 그것은 모든 것의 완성을 뜻하는 삼매진화의 현상이었다. "만마(萬魔)와 만사(萬邪)를 빛으로 다스린다." 번쩍! 찬란한 서기가 구름처럼 사방 가득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반야(般若)의 혜광(慧光)이었다. 지혜를 뜻하는 반야와 모든 악을 밝히는 혜광인 것이다. 그렇다. 사왕신상(邪王神相)의 저주는 소멸되고 전설의 불사승만 신체는 생명을 얻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나 위지제강의 이름으로…… 태고 이래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불사승만의 신체, 그 탄생은 이루어졌다. 그것은 이 시대를 주도할 위지제강이라는 거목의 탄생이기도 했다. -일어나라…… 나 위지제강의 이름으로…… 아아…… 위지제강의 이름으로…… * * * "주인!" "제강, 자네 살아있었군!" 백한아의 한 쌍 봉목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처럼 굴 안에서 걸어나오는 위지제강을 보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이 당당한 풍모에 고귀한 기도가 전신에서 흐르는 미장부는 누구인가? 진정 위지제강이란 말인가? 곤명산, 이 폭풍같은 사내는 한동안 넋을 잃고 위지제강을 바라보더니 와락 달려와 그를 껴안았다. "자네……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커버렸군." "……" 위지제강은 그의 팔을 마주잡고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명산, 고맙네." 나직한 한 마디…… 허나 곤명산은 태어나서 평생 이보다 더 감동적인 한 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그래……" 휘이이잉…… 휘이잉…… 눈보라가 세 사람의 몸을 휘감으며 쏟아지고 있었다. 위지제강은 백한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아, 내가 보고 싶었느냐?" "주인……" 백한아의 얼굴에 순간 당황의 빛과 함께 가벼운 홍조가 떠올랐다. 그것은 정녕 믿기 어려운 변화였다.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한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왔다. 그때 곤명산이 통쾌한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내 거처로 가세. 내 어찌 술 한잔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스윽……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위지제강은 그 모습에 신비롭게 미소했다. 그는 대과벽을 뒤덮은 백설(白雪)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독백했다. "겨울이군." 그것은 감회였다. 허나, 그의 감회는 오래 가지 못했다. 돌연 그의 검미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정남 방향에…… 위(危)의 기운이 흐르고 있다. 홰기가 흐려지고 범병(帆竝)이 강성하는 건……) 그는 놀랍게도 천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일전 천기성자가 준 냄새나는 짚신에서 남화천리보경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는 지난 이 년 동안 그것마저 통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한순간 그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아버님이 위기에 처해 있다!) 슈우욱! 갑자기 그의 신형이 눈보라 위로 비상(飛上)하더니 가공할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백한아가 그 모습에 놀라더니 지체없이 빛살처럼 뒤를 따라갔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곤명산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세상에……벼락이 지난간 것 같군." 그는 문득 자신이 혼자 대과벽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허허…… 나를 버리고 도망갈려고 하다니…… 어림없다." 파잇! 그의 거구가 믿을 수 없게도 허공에 붕 떠올랐다. "선부께서 그랬다. 마음에 든 인물을 만나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나 곤명산은 오늘부터 위지제강과 한 몸이다." 콰아아! 그의 거구는 정녕 못믿을 만큼 빨랐다. 집채만한 코끼리가 허공을 날아 다니는 것을 상상해 보라.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까마득히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장내는 차가운 눈보라 속에 조용히 침묵을 되찾았다. …… * * * 대초원(大草原). 광활한 대지, 끝없이 펼쳐진 갈대숲위로 백설(白雪)이 쏟아져 내린다. 그 은백색의 광야 한 곳, 낡고 거대한 성터 하나가 오랜 풍상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옛 영화가 찬란했음을 말해주는가. 잡초가 무성하게 성벽의 사방 십리(十里)를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은 들짐승들의 거처가 되어버린 이곳, 아직까지도 몇 채의 전각(殿閣)은 앙상한 골격을 유지한 채 눈보라 속에 서 있었다. 이미 오랜 세월 전에 붕괴된 성문(城門)의 윗단에는 낡은 황금색 현판이 걸려 있었다. <천황위지황가(天皇尉遲皇家).> 어둠이 천지에 조용히 깔릴 무렵, 눈보라 속에 세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남일녀(二男一女), 바로 제강 일행이었다. 제강은 곧장 성벽을 지나 낡은 몇 채의 전각 쪽으로 다가갔다. 사사삭! 어느 한순간 그의 신형이 우뚝 정지했다. 그의 시선이 한 쓰러진 대들보 위에 고정되었다. 대들보에는 독수리 형태의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저 문양은 뭔가?" 곤명산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위지제강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본가(本家)의 문양이네. 아버님과 나만 알고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렇다네. 바로 내 아버님이 새겨놓은 것이다. 지난 삼 일 동안 나는 저 문양의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음……" 곤명산은 매우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제강은 오른 쪽의 한 거대한 전각을 응시했다. "문양이 저 전각을 가리키고 있다. 명산, 한아, 그대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슉! 곤명산이 채 입을 열 사이도 없이, 위지제강은 섬광처럼 전각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곤명산은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사방을 돌아보았다. "대체…… 이 거대한 폐가는 무엇이지?" 전각 안, 수십 년 동안 쌓인 먼지가 내부를 가득 덮고 있었다. 헌데, 그 가운데 유독 먼지 한올 끼지 않은 물건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천향목(天香木)으로 만들어진 탁자였다. "……" 스윽…… 위지제강은 곧장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한 통의 서찰이 놓여져 있었다. 위지제강은 두 눈에 기광을 빛내며 서찰을 펼쳐들었다. "아버님……" <제강, 네가 올 것을 예상하며 이 글을 남긴다. 상황이 위급하여 길게 말하지는 않겠다. 여기 남해(南海) 팔만리 해도(海圖)를 남기니 천마해로 찾아오거라. 네가 지난 십팔 년 동안 고난 속에서 불사승만의 완성을 이룬 것도 모두 천마해 때문이니라. 그곳은 바로 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낡은 폐허의 성(城)은 이 아비와 선조들의 한(恨)이 서린 터전이다. 이곳에 경배하는 것을 잊지마라. 아비는 먼저 떠나겠다. 정무 십삼년 정월 초닷새, 부(父).> "천마해…… 대체 어떤 곳인가?" 위지제강은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서찰은 불과 칠 일 전에 쓴 것이었다. 위지제강은 어떤 불길하고도 무서운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친이 말한 해도(海圖)를 찾았으나 탁자 위에는 없었다. "이곳은 내 가문내력이 깃든 곳이라 하셨다. 분명…… 중요한 물건들을 따로 두는 곳이 있을 것이다." 위지제강은 예리한 시선으로 사위를 살폈다. 그의 시선은 곧 벽면에 걸려있는 하나의 낡은 액자에 머물렀다. <황가(皇家)의 혼(魂).> 용필휘지의 글귀가 쓰여진 액자, "바로 저것이다." 위지제강은 신속하게 다가가 액자를 벽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액자 뒤에서 하나의 단추가 나타났다. 위지제강이 단추를 누른 순간, 그긍---! 굉음과 함께 벽면이 쩍 갈라지며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은 먼지 하나 없이 호화롭고 깨끗했다. 석실의 중앙에는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 맨 위쪽에는 자색으로 휘황찬란하게 광휘를 뿌리는 독수리상이 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자보옥(紫寶玉)을 세공한 것으로 그 가치를 따질 수조차 없는 신보였다. "……" 스윽…… 둘째 제단에는 피에 젖은 하나의 낡은 책자가 놓여져 있었다. <천황위지황가력(天皇尉遲皇家歷).> 그것은 바로 천황위지황가, 그 가문 내력을 수록한 것이었다. 허나, 부친의 위급함을 아는 위지제강은 그것을 펼쳐볼 여유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세 번째 마지막 제단에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세 가지 물건이 놓여져 있었다. 해도(海圖). 검(劍). 비급(秘 ). 위지제강은 재빨리 해도를 품 속에 갈무리했다. 이어 그는 비급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비급의 겉장에는 단천기서(丹天奇書)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섬마광혼 위지단의 필생무학이 수록된 비급이었다. 무림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가공할 비급이 드디어 위지제강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이어 위지제강은 단천기서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검(劍)을 향했다. 순간 흔들림없던 그의 눈빛이 크게 파문을 일으켰다. "묵룡인(墨龍引)……"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투박해 보이는 묵빛 철검(鐵劍), 그것은 이 시대의 거목 섬마광혼 위지단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희대의 명검이었다. 묵룡인이라는 아호를 지닌 이 검은 위지단의 생명이자 혼과도 같았다. 위지단은 그만큼 이 묵룡인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묵룡인마저 남기신 뜻은…… 소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뜻입니까?" 위지제강의 음성은 심하게 떨려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묵룡인을 집어들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을 타고 그의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천천히 검신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검음(劍音)이 용틀임하듯 장내를 진동했다. 서리가 서린 듯한 검신에서 뿌연 묵광(墨光)이 뿜어져 나왔다. 아아…… 그것은 진정 명검이었다. 위지제강은 진한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뽑아 든 묵룡인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제단 앞에 엄숙히 부복했다. "본가(本家)의 선조들이시여…… 제단 뒤쪽에 선조님들의 위패가 모셔진 조사전이 있음을 알면서도…… 불충한 후손은 참배를 드리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웅웅…… 묵룡인이 창백한 묵광을 뿌리며 울기 시작했다. "천마해…… 이 후손이 떠나는 길은 아버님을 구하는 길이요, 곧 본가와 천하를 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위지제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석실 밖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그긍---! 이윽고 석실이 원래대로 굳게 닫힌 순간, 태산처럼 우뚝 멈추어선 위지제강은 타오르듯 강렬한 눈길로 먼 허공을 응시했다. 천마해…… 그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데…… 이제 그곳을 향해 가는 내 마음이 왜 이리 무겁단 말이냐…… 아니 무겁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구나…… 너 천마해여…… 대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느냐…… * * * 위지제강은 한 대의 마차를 마련했다. 그는 곧장 중원을 가로질러 남해로 향했다. 백설은 천지를 온통 뒤덮어 종종 길이 막히곤 했다. 그때마다 곤명산은 괴력을 발휘하여 마차를 눈 속에서 끌어내곤 했다. 밤이 되면 말(馬)들은 쉬어야만 했다. 위지제강은 밤마다 부친이 남긴 단천기서(丹天奇書)를 펼치고 무공을 익혔다. 곤명산은 모닥불 앞에 거구를 움츠린 채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 섬마광혼 위지단 최고의 무학은 단천삼식(丹天三式)이었다. 그 위력은 이 세상에 나온 후 단 한 번도 패배를 모른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게다가 신마 뇌어양의 건홍풍운선 속에는 마도 최극의 비학(秘學)이 숨겨져 있었다. 이름하여 혈잠곤양(血潛崑陽)! 비록 단 한 초식 뿐이었으나 그 난해함과 경천동지할 위력은 하늘도 두려워할 정도였다. 위지제강은 단천삼식과 혈잠곤양 중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시대 최고의 정(正), 마(魔)의 무학이 한 몸에 익혀지고 있음을…… 게다가 위지제강이 무공을 익히는 속도는 거의 믿을 수 없을만큼 빠랐다. 그것은 곤명산이나 백한아조차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시일이 흘러 대초원을 출발한 지 칠 일째 되는 날, 위지제강은 하나의 엄청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지상의 낙원 천마해(千馬海)가 억겁의 신비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그것은 중원을 발칵 뒤집어 놓고도 남을 엄청난 소문이었다. 무림인들은 천마해로 가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천마해에는 선인(仙人)들이 살고 있으며 병에 걸리지도 늙지도 않는 낙원임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천마해로 가면 못고칠 병이 없고, 천마해로 가면 기화이초(奇花異草)와 금은보옥이 가득하고, 천마해에는 이 세상 최고의 무공이 있다고 믿었다. 천하인들은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출발이 죽음의 저주 속을 향한 것임을…… 그렇다. 위지제강은 불길한 예감으로 인해 거의 밤잠을 자지 못했다. 그는 부친의 급박한 상황도 이 대혼란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했다. 오오…… 하늘이시여! * * * 드디어 위지제강이 남해의 검푸른 바다 앞에 당도한 것은 꼭 보름 만이었다. 그는 그 사이 대강남북의 정, 사 양대산맥의 초절정고수들이 이미 천마해로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소림(少林) 수좌 명보대승(明寶大僧), 무당(武當) 장로 천련진인(天蓮眞人), 개방( ) 공령신개(空靈神 ). 정파를 대표하는 세 거두가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십방세맥(十方勢脈)의 일천정예를 대동하고 천마해로 향발했다. 뿐인가? 구천마성(九天魔城)의 새로운 성주 증손궁과 쌍벽을 이루는 마도의 거목인 혈잠혈제(血潛血帝) 합돈(合豚), 평소 증손궁과 성주의 권좌를 놓고 암투를 벌이던 그가 이천여 마도고수를 이끌고 천마해로 향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중원(中原)의 신진고수 가운데 무적의 삼대거봉이라는 금룡(金龍) 금무풍(金武風)과 은호(銀虎) 사마백수(司馬白水), 그리고 혈봉(血鳳) 단목홍(丹木紅)의 이름도 들려왔다. 일컬어 중원의 미래라고 찬양받던 중원삼재(中原三才) 이천 오백 고수와 함께 향발한 것이다. -중원백대문파(中原百大門派)의 인물 도합 사만 오천이 천마해로 향발(向發)! 오오…… 그것은 고금미증유의 전무후무한 대준동(大蠢動)이었다. 그야말로 내노라 하는 기라성같은 고수들은 단 한 명도 중원에 남아있지 않은 듯싶었다. * * * 촤아아…… 철썩…… 위지제강은 석상처럼 미동도 않은 채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오만에 달하는 중원고수들이 어떻게 천마해의 위치를 알아내고 떠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그를 괴롭혔다. (정작 그 야심에 찬 증손궁만은 떠나지 않은 것도 괴이하다!) 그때였다. 그의 등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성이 터져울리기 시작했다. "이천 냥 내겠소!" "나는 금화로 삼천 냥 내겠소! 배를 나에게 파시오!" "금화 일만 냥!" "이만 냥!" 근 천여 명에 달하는 중원 각지의 인물이 그나마 남은 배를 발견한 것이었다. 이 포구에는 이미 사흘 전부터 배 한 척 보이지 않았다. 배를 구하기 위해 살인은 예사로 행해지고 믿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 뿌려졌다. 위지제강은 그 소란을 음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곤명산과 백한아는 그 군중 속에 끼지도 못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품속에는 은전 한 냥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지제강은 씁쓸히 미소했다. 그는 곤명산과 백한아를 불렀다. "명산, 이리오게. 산에 가서 뗏목을 만들어 타고 가는게 훨씬 빠르겠네." "옳구나. 그 생각을 왜 못했지?" 곤명산은 거구를 쿵쿵거리며 달려왔다. 바로 그때 군중들 속에서 칼부림이 벌어졌다. "으아악!" "끄윽!" 위지제강은 한탄성을 흘려내며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가 막 장내를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슉! 그의 앞에 유령처럼 한 노인이 내려섰다. 노인은 마른 고목처럼 앙상하게 마른 체구에 낡은 무명옷을 걸치고 있었다. "네놈은 왜 저들처럼 아귀다툼을 하지 않느냐?" 노인은 대뜸 냉막한 어조로 물었다. 위지제강은 첫눈에 상대가 예사노인이 아님을 직감했다. 노인의 전신에는 어딘가 괴괴하면서도 묘한 기운이 풍겼다. "노인장은 뉘시오?" "앞으로 관(棺) 장사를 할 사람이다." "관 장사라고 했소?" "천마해에 시체가 가득 쌓일 텐데 어찌 관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지 않겠느냐?" "……" 위지제강의 두 눈에 순간 예리한 신광이 스쳤다. 그는 한참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서는 뭔가 알고 있는 듯 하구려." "흐흐…… 당연하지. 노부는 장이괴수(葬異怪 ) 사도패(司徒牌)이니까." "들어보지 못했소."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극소수만이 노부의 이름을 알고 있다." 장이괴수 사도패는 괴이하게 웃더니 위지제강을 비수같은 시선으로 살폈다. "흐흐…… 자네는 노부의 이름을 아는 다섯 번째 인물이다." "영광이오." "착각하지 마라. 자네가 노부의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고 느껴지면 죽이고 말테니까." "항상 그렇게 해왔소?" 위지제강은 물처럼 고요한 어조로 물었다. 사도패는 대답대신 소리없이 괴소를 지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위지제강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노인장께서는 어떻게 중원의 오만고수(五萬高手)가 천마해의 위치를 알고 떠났는지 아시오?" "안다. 허나 노부가 왜 대답해야 하느냐?" "본인의 앞을 가로막은 죄(罪)로 대답하시오." 위지제강의 이 대답은 걸작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패는 기묘한 표정이 되더니 클클거리며 대답했다. "말해주지. 천마해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천마해경이 갑자기 세 개나 나타났다." "……!" "하나는 구천마성에, 하나는 십방세맥(十方勢脈)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중원삼재(中原三才)의 손에 들어갔지." 사도패는 두 눈에 무시무시한 광망을 폭사하며 말을 이었다. "결국…… 나머지 사만여 고수들은 그들의 뒤를 미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흐흐……" "이것은…… 음모일 뿐이오!" 위지제강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도패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해경이 동시에 세 개가 나타났을 때부터 노부는 이미 이 일이 가공할 음모임을 깨달았다." "……" "허나, 세상에는 바보들이 의외로 많은 법이다. 그 바보들은 노부보고 미쳤다 하더군." 어둠…… 천지에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다. 바다는 어둠에 물들자 괴괴한 정적을 흘려내었다. 그에 따라 위지제강의 준수한 얼굴도 어두워지는 듯했다. 촤아아…… 촤아……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