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야기 ④
동빙고동(東氷庫洞)·서빙고동(西氷庫洞)에는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 창고가 있었다.
조선시대 한강진(한남대교 북단 부근)은 삼남지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나루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한강 상류에서 물길 따라 내려오는 농산물과 목재·장작 등이 많이 유통되었습니다. 그 한강진의 상류 쪽인 두모포에는 동빙고, 하류 쪽에는 서빙고라는 얼음 창고가 있었습니다.
동빙고는 조선 태조 5년(1396년) 서빙고와 함께 설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강 연안 두모포, 현재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다가 연산군 10년(1504년) 서빙고의 동쪽(오늘날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조선시대 얼음 창고가 있던 곳이 이제는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의 하나로 바뀌었습니다.
동빙고는 창고가 하나였는데 종묘·사직 등 국가의 제사용 얼음을 저장하였습니다. 동빙고에 저장할 얼음은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의 한강에서 채취했고, 얼음의 두께는 4촌(寸, 약 12cm) 이상이었어요.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1만 2,044정(丁)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2회씩 수신(水神), 우신(雨神) 동신(冬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사한제(司寒祭)를 봉행하였고, 매년 섣달에 사한제를 봉행한 후 얼음을 채취하여 동빙고에 저장하였습니다.
서빙고는 창고가 8개로 어주(御廚)와 백관(百官)에게 나누어주는 얼음 13만 4,974정을 저장하였습니다. 서빙고의 규모는 동빙고에 비해 열 배 이상 컸지만, 얼음의 품질은 동빙고가 훨씬 좋았다고 하지요. 제사용 얼음을 저장했기 때문에 얼음의 채취와 운반, 저장과정에서 매우 까다로운 품질 검사를 통과해야 비로소 동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대는 얼음이 귀하였습니다. 어렵게 채취한 얼음의 용도도 다양하였겠지요. 특히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동빙고에 저장해 둔 최고급 품질의 얼음을 가져와 얼음상자 안에 채워 유해가 부패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무덤에 안장될 때까지 무려 3개월에서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그동안 임금의 유해가 부패하지 않도록 얼음상자 위에 놓인 평상에 안치하는 것을 설빙(設氷)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동빙고의 얼음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설빙은 조선시대 냉동 영안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왕의 유해를 모셔 놓은 빈소에 얼음이 녹으면서 습기가 차게 됩니다. 이때 습기로 인한 유해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궁궐에서는 습기를 잘 빨아들이는 마른미역을 사방에 쌓아두고 계속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국장(國葬) 미역’이라고 불렀는데, 수개월에 걸쳐 쌓인 미역은 없애는 것이 마땅하지만, 시중에서 암암리에 싼 값에 팔렸다고 합니다. 물자가 부족하여서이기도 하겠지만 궁궐에서 몰래 반출된 것이라 하여 백성들은 좋아라하지 않았을까도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