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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장 함정(陷穽) 속에서 피어난 사랑 [1] 홍오간의 제약소가 있는 묘안봉에 새벽부터 무인들이 모여있었다. 위강을 비롯하여 혁련달, 고일두, 장구안, 그리고 강서쌍웅은 불을 끄다 지쳐서 모두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수십 채의 전각은 오간 데가 없고 시커먼 잔재 속에서 연기만 모락 모락 솟아오를 뿐이었다. "대체 누가 불을 질렀소?" 혁련달이 옷에 묻은 검정을 털어 내며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이 새카맣게 변한 강서쌍웅은 소매로 얼굴을 쓱 문질렀다. "아마 그자들이 빠져나가려고 한 짓일 겁니다." "강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불길이 번졌으니, 원......." 불을 끄다 만난 그들은 유청풍 등이 탈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화재가 번져 비밀통로를 찾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일두와 장구안은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때 홍오간이 침중한 안색을 지은 채 다가왔다. 그는 이미 현장점 검을 마친 상태였다. 위강 등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혁련달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홍형, 무슨 단서를 얻었소?" 홍오간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제 일에 이렇게 관심을 두셔서 고맙구려!" 중인들은 모두 침묵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인을 막론하고 출입이 절대 불가능한 장소에 타인이 먼저 들어왔 으니 피차 겸연쩍은 상태였다. 홍오간은 강서쌍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은 이곳을 어떻게 알았나?" 그는 상대를 만만히 여기는지 불편한 심중을 그대로 나타냈다. 상야수 궁판이 얼른 주먹을 감싼 채 짤막하게 답변했다. "나무꾼에게 이상한 소문을 듣고 무작정 왔더니만......." 홍오간은 더 이상 들어볼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장구안 쪽으로 돌 렸다. "자네는?" 장구안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예,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히 노방과 유청풍을 보았나?" "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노방을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그는 미리 와 있던 유청풍과 시체를 가리키며 밀담을 나누더군요. 저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어 협조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요행히 강서쌍웅을 만나 함께 왔을 때는 이미 불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당 못할 고혜원이나 모염정 그리고 원개에 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홍오간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정해단과 확실히 손을 끊었는가?" "예." "자네야말로 무엇 때문에 이 부근을 배회했나?" 장구안은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요극초는 제 상관이었습니다. 과거행실을 떠나 시신조 차 보존하지 못한 그에게 향이라도 피워 줄 요량으로......."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 것처럼 말을 채 맺지 못했다. 홍오간은 잠시 심각한 상념에 잠겼다. '석연치 않지만 당장 꼬치꼬치 따질 형편이 아니라.......’ 그는 내심 장구안과 강서쌍웅을 불신하면서도 더 이상 다그칠 수가 없었다. 뼈만 남은 여인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가 자신의 제약소일뿐 더러 목격자를 다그칠수록 오히려 인식만 나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인들의 심중을 파악할 요량으로 질문을 던졌다. "특별히 조언하실 분 있으십니까?" 혁련달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뻔하오. 유청풍과 노방, 그 자들을 찾아야 실마리가 풀릴 것이오. " 그때 새우등처럼 허리가 구부정한 궁설이 음성에 힘을 실었다. "듣자하니 그 청풍이란 자는 조화산장 사건 때도 현장에 있었답니 다. 이번 기회에 음양야혼귀와의 결탁 여부를 밝혀야 합니다." 위강이 꾸짖듯 준엄하게 말했다. "함부로 의심하면 못쓰네. 공연히......." 장구안이 그의 말을 자르며 혀를 찼다. "공절의 말씀이 맞을 겁니다. 그들은 천락무예단에서 함께 지내는 것 같던데......." 일순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고......?" 특히 홍오간은 예리한 안광을 발산했다. '장구안, 저 놈이?’ 그러나 그 눈빛은 찰나지간이라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혁련달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대족삼, 자네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 장구안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이리 올 때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행여나 했더니......." 강서쌍웅이 재빨리 나섰다. "아마 천락무예단이 가는 곳마다 살인이 벌어질 겁니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그런 자들을 용서하면 안 되지요." 묵묵히 얘기를 듣던 위강이 음성을 높였다. "나는 반대요. 추정에 의한 범인을 잡아 후유증을 남긴 사건이 많 소. 반드시 증거를 확보한 다음 범인을 찾도록 합시다." 하지만 궁설은 결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청풍은 두 사건에 연관된 만큼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저희는 범행을 타인에게 전가시킨 자를 절대 묵과하지 못합니다." 위강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침입자의 죄상과 은신처가 밝혀진 이상 정밀한 조사만 남았기 때문 이었다. 이리하여 유청풍은 이번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을 뿐만 아 니라 시체유기를 위한 무단침입죄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홍오간은 비로소 고일두를 응시했다. "자네도 왔군." 고일두는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예. 본장은 이번 일에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홍오간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문득 그는 고일두를 의심하게 되었다. '혹시 고헌부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이들 부자는 유청풍을 죽 이려고 벼르지 않는가? 하나.......’ 남을 의심하자면 끝이 없을뿐더러 와호장은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 도 얼마든지 간단히 죽일 능력이 있었다. 어쨌든 홍오간은 지금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내색을 하지 않아도 피 차 불신감이 팽배한 상태였다. 홍오간은 내심 이를 부드득 갈았다. '흥! 어떤 놈인지 절대 용서 않겠어. 평생 의술을 베풀어 모은 내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다니.......’ 그는 이내 자세를 가다듬은 다음 정중히 포권을 했다. "여러분, 신경을 써주셔서 고맙소. 그들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뒷말 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무림과 무관한 천락무예단원이 피 해를 입는 것은 원치 않소이다." 양쪽의 의견을 다 포용하면서 아량까지 베푼 말이라 중인들은 묵묵 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혁련달은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먼저 발길을 돌렸다. "자, 주인께서 바쁘실 테니 객들은 이만 물러갑시다." 그들은 홍오간의 불편한 심중을 아는지라 서둘러 제약소를 빠져나 갔다. 고일두는 돌아서며 입가를 말아 올렸다. '흥, 심지가 깊은 자야.’ [2] 홍오간은 숲 속을 향해 나직한 음성을 발했다. "됐소." 일순 붉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모염정이 엉덩이를 흔들며 사뿐 히 걸어나왔다. "누가 저지른 짓일까요?"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육체를 무기로 사용하면 역효과만 낳을 것이 다. 홍오간의 감각은 사냥개보다 더 무섭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조직력을 가진 자가 날 건드려 본 것이오." 그는 주위 지형과 자신의 출입주기, 그리고 여인들의 시체와 중인 들이 몰려 왔던 점을 예로 들어가며 날카롭게 분석했다. 그녀는 얼른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슬며시 틀어 보았다. "노방이나 청풍은... 범인이 아닌가요?" "현재로서는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소. 음양야혼귀와 동행한 사실 을 확인해야 하오. 더욱이 비등원주가 그를 주시하는 이상......." 비등원주라는 말에 모염정은 속이 뜨끔해졌다. '무서운 놈. 정확히 집어내는구나.’ 그녀는 능청스럽게 다시 물었다. "비등원주는 왜죠?" 혹시 비등원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음이 곧 드러났다. 홍오간은 기이한 논리로 사건을 추적했다. "아무런 의심을 할 수 없는 점이 의심스럽소." 그는 칼로 도려내듯이 정확히 지적해냈다. 그녀는 짐짓 말 끝을 흐 렸다. "글쎄, 일리는 있지만......." 슬슬 정신을 흩트려 놓는 것도 그녀가 지닌 또 다른 재주였다. 몸이 헤픈 사실을 만천하가 다 알아도 어쩌지 못하고 그녀를 상대 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홍오간도 부지불식간 걸려들었다. "혹 집히는 인물이라도 있는 거요?" 모두를 의심하는 판국에 묻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모염정은 건방진 수사관처럼 팔짱을 끼었다. "의심할 수 없는 점이 의심스럽다,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한 자가 있 을지 모른다는 거죠." 그녀 역시 몇 가지 타당성 있는 예를 들었다. 별안간 나타난 장구안과 엉성한 강서쌍웅이 유달리 설친 점, 그리 고 혁련달이 유청풍을 계속 물고 늘어진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었다. 논리 정연한 말에 천재적인 의원 홍오간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빙빙 돌아 원점으로 온 셈인가? 모두에게 심증이 가니.......’ 그의 시선이 주춧돌만 남은 허망한 건물 터를 쓸고 지나갔다. 하지 만 그는 당혹스런 면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모염정은 그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저러다 갑자기 뒤통수를 후려 패는 그의 장기를 말이다. 그녀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제가 몰래 조사할까요?" 홍오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될 것 같소." 사실 그가 무림에 직접 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입과 머리로 남을 부리며 거뜬히 오절의 반열에 오른 그였 다. 그런 연유로 아무도 그의 무공실력을 모르고 있었다. 땅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이럴 때는 정중동(靜中動)의 계책을 써야 돼. 바쁘게 움직여야 할 내가 조용히 있으면 음모를 꾸민 자는 답답할 게야. 결국 참다못해 어떤 징후를 드러내겠지. 그때 결정타를 날려야.......’ 모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했어요. 욕심 있는 사람으로 오해받아 좋을 게 뭐 있나요? " 그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꼬집듯이 콱 비튼 마지막 말이 포승줄이었다. 그가 나섰을 때 그녀에게 득보다 실이 더 많아서 막아둔 것이었다. 홍오간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청풍을 먼저 찔러 보구려." 모염정은 흠칫 놀라 상체만 돌렸다. "무슨......?" "그가 혈광마검을 방치하는 이유를 알아 봐야할 시기요." 그의 머리 속에 차있는 집념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심중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의도는 그녀를 못 믿으면서도 악 착같이 부려먹으려는 술수였다. 모염정은 그런 면을 알기에 방긋이 미소 지었다. "저도 궁금해요. 하지만 무예단에 얽매인 그가 언제 개봉까지 갖다 오겠어요?" 홍오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모염정은 다시 걸으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흥, 네 뜻대로 될 것 같애? 이 악귀 같은 인간아!’ [3] 감하봉(甘夏峰)은 한때 군(軍) 초소로 사용했던 곳이며, 높이는 비 록 천척에 불과 하나 주위 평야지대를 한눈에 감제(瞰制)할 수 있는 요처였다. 안정을 찾은 왕조는 장강이 범람할 때 보급이 끊기는 점을 감안하 여 십여 명이 머무를 수 있는 이 암반 주거지를 폐쇄한 모양이었다. 음양야혼귀가 이러한 은신처를 선뜻 개방한 것은 하나쯤 노출시켜 도 지장이 없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엄희채는 약효가 사라지자마자 고마움을 표시했다. "저 때문에 피해가 많았겠군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건만 고혜원은 어쩐지 거리감을 느꼈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분위기는 자연히 냉랭해졌다. 엄희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청풍, 네 옷이 아니잖아?" 지금 유청풍이 입고 있는 옷은 제약소에서 모염정이 건네준 것이었 다. 그는 그저 씁쓸한 웃음을 띄웠다. 감하봉은 때묻지 않은 곳이었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바위산과 드넓은 장강이 조화를 이루어 대자연 의 오묘함이 저절로 느껴졌다. 옆에서 듣던 고혜원은 여인 특유의 감각이 살아났다. '저들은 따듯한 정을 나누고 있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가슴을 겨우 겨우 참았다. 미모야 구분하기 어렵다 치자. 가문과 사문, 부(富)와 권세, 보장 된 장래성 모든 면에서 그녀가 엄희채보다 월등히 나았다. 물론 유청풍이 그런 점을 고려하여 사람을 사귈 리가 만무했다. 단지 그가 막연산과 원화각에서 지냈던 날들을 잊은 것 같아서 하 나씩 꼽아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있는 자체가 무시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였다. 고혜원은 격해지는 심장 박동을 날카로운 억양으로 쏟아냈다. "야혼승, 대결할 준비가 되었느냐?" 햇살 때문인지 쌍륜화극의 끝에서 유난히 살기가 펴져 나갔다. 노방은 전혀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염려 마라.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 일순 고혜원의 시선이 주위를 좍 흩었다. "흥, 장소가 불리하다 이거야?" 그녀가 판단한 대로 들쭉날쭉한 암반지형은 노방의 흑명승을 무기 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한 곳이었다. 노방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녀의 예상을 깨트려 놓았다. "천만에, 나는 아직 유형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고혜원은 사리에 맞는 말조차 변명처럼 들려 눈을 부릅떴다. "비겁한 자식." 일순 노방의 삼각형 눈에서 싸늘한 빛이 흘러 나왔다. "욕먹은 김에 한 가지 더 말해 주지. 진기를 돋구면 너는 즉사한다 ." "뭐야?" 고혜원은 재빨리 진기를 운용해 보았다. 돌연 단전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바늘로 찌르는 듯 은은 하게 통증이 전해졌다. 그녀는 다급히 진기를 거두었다. 노방은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안심해. 일 각이 지나면 자연히 해소될 테니. 사매를 보호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거든." 순간 고혜원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이런 상황에서 누가 경계심을 늦추겠어?" 이때 유청풍은 의아스러워 엄희채에게 물었다. "저들은 왜 싸우지?" 조금 전 그는 원개로부터 화해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엄희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적이니까." 유청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부딪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끼리 적이라니......?" "우리 외조부께서는 와호장을 제일 혐오하시거든. 살루문에 있던 자를 총관으로 임명한 저의가 뻔하지 않아?" "외조부? 그 분이 누군데?" 엄희채는 예쁘게 입술을 오므려 전음을 날렸다. "독혈." 순간 유청풍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그는 의혹에 찬 눈으로 노방과 엄희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투검 영감이 부탁한 자들은 모두 독혈의 하수인 아닌가? 그런 그 가 살아 있다면......?’ 독혈 방시굉이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은 뻔한 이치였다. 자칫 유청풍은 어쩔 수 없이 엄희채와 노방과도 검을 겨누어야 할 처지가 될 것이다. 그가 묻기도 전에 엄희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사형은 외조부의 전인이야." 그 순간 노방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노방이오. 사매를 구해준 일을 잊지 않겠소." 짧은 말 속에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뜻과 그가 엄희채를 얼마나 위하는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유청풍은 엄희채가 계약서를 소각한 광경을 상기하게 되었다. "엄단주와 이미 해결했오." 노방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좋소, 우리 입장을 말하리다. 요극초와 갈상태는 한발 늦었음을 인정하오. 하지만 차후 우리 표적에 손댈 경우 묵과하지 않을 거요." 공교롭게도 유청풍과 노방은 동일한 대상을 놓고 살인해야할 기이 한 경쟁 상대였다. 유청풍은 투검법을 배운 대가로 투검 영감의 부탁 을 이행하는 중인 반면 노방은 원수를 갚으려는 것 같았다. 도전적인 발언을 들은 유청풍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각자 알아서 합시다." 그는 또다시 커다란 의구심이 일었다. '이상하다. 왜 독혈은 자신의 하수인들을 죽일까? 그것도 버젓이 제자를 시키다니......?’ 독혈 방시굉은 하수인들의 입을 막으려는 것일까? 더구나 이십 년 이상이 지난 오늘에서야 말이다. 또한 음양야혼귀는 어째서 은밀히 처리하지 않고 독혈의 후인임을 자신 있게 밝히는가? 이러한 사안은 해답이 선뜻 떠오르지 않을뿐더러 여러 사람 앞에서 묻기도 난처했다. 이때 노방은 최후의 경고를 보냈다. "우리는 적이 될 수밖에 없구려." 유청풍은 단호히 받아쳤다. "나도 피할 여지가 없소."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갈길 바쁜 사람처럼 산 밑으로 날아갔다. 어느새 그의 모습은 작은 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편 진기가 회복된 고혜원은 원망스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냉정한 자식! 누가 먼저 말을 거나 보자 이거야?’ 사실 그녀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엇 때문에 유청풍과 노방이 암살 대상자를 놓고 살벌한 언쟁을 벌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태연한 엄희채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남자 대 남자 관계와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왠지 다를 것만 같았다 . 보나마나 엄희채는 갈수록 유청풍을 더 따듯하게 대할 것이다. 그것이 알 듯 모를 듯한 여심이 아니던가? 고혜원은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차제에 음양야혼귀와 결판을 내야겠어!’ 그녀는 쌍륜화극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저 미모의 살수 엄희채를 처치한다면 그의 마음도 돌아올 것 같았 다. 이때 노방이 따지듯 물었다. "와호장이 탈명색혼대와 무관함을 규명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고혜원은 안색을 굳혔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아라." 하지만 그녀는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이 의구심을 갖는 터에 타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엄희채가 우려의 목소리를 발했다. "청풍도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고 오전공 연을 생략할 수도 없으니......." 고혜원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아차, 연극준비 때문에 서둘렀구나.’ 유청풍은 천락무예단에서 주역이라 빠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한데 이곳 감하봉에서 남창에 있는 천락무예단까지 가면 거의 공연 시간에 임박하게 된다. 그가 의문점을 지닌 채 황급히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혜원은 엄희채를 향해 매섭게 쏘아붙인 후 신형을 날렸다. "청풍을 어찌할 생각은 버려!" 그녀가 이리 온 목적은 무뚝뚝한 그 사내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였다. 뒤에서 엄희채의 통렬한 반박이 들려왔다. "내가 할 소리야." 그녀 역시 유청풍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4] '분명히 이리로 들어갔는데......?’ 유청풍을 뒤따라가던 고혜원은 부지불식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 속은 상수리와 잣나무 등 고목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마치 캄캄 한 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어두웠다. 사방 어디에도 유청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생각한 찰나 음침한 가성(假聲)이 들려왔다. "흐흐, 겁도 없이 흑림(黑林)으로 들어오다니......." 고혜원은 소리가 난 쪽으로 재빨리 돌아섰다. 오 장 앞, 전신에 긴 흑색 피풍을 두른 사내가 섬뜩한 귀면(鬼面) 탈을 쓴 채 흉소를 날리고 있었다. 그는 음욕이 가득 서린 시선으로 고혜원의 전신을 빠르게 흩어 내 렸다. 고혜원은 눈 꼬리를 말아 올리며 덮쳐갔다. "정체를 밝혀라!" 교구가 죽 뻗치는 순간 윙! 소리를 내며 쌍륜화극이 허공을 갈랐다 . 하지만 귀면탈의 사내는 가볍게 상체를 휘어 공격을 피했다. "앙칼진 계집, 오늘 버릇을 톡톡히 고쳐 주마." 순간 진기를 머금은 뿌연 가루가 허공을 뒤덮었다. 고혜원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흑, 미혼약(迷魂藥)!’ 더구나 바람은 그녀 쪽으로 불고 있었다. 이곳 흑림은 남창과 파양호 사이에 있는 울창한 숲으로 쌍륜화극처 럼 긴 무기를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장소였다. 이를 아는 그녀는 처음부터 병기를 두 자로 줄인 채 사용하고 있었 다. 자연히 행동반경이 좁아 그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반면 그 자는 신법과 공력이 보기 드물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고혜원은 전신진기를 끌어 올려 쌍륜화극을 휘둘렀다. "차앗!" 위맹한 강기에 밀려 다가오던 미혼약 가루는 주춤했다. 하나 고수간의 대결에 있어서는 작은 틈이 곧 승패와 직결되는 법 이다. 미혼약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귀면탈의 손 끝이 그녀의 하복부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구부린 채 신형을 뒤로 날렸다. 그녀는 고목을 박차며 재빨리 다시 튀어나왔다. "받아라!" 간발의 차이로 쌍륜화극이 귀면탈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서진 귀면탈 가면의 일부가 조각나서 떨어졌다. 하지만 이미 비스듬하게 피한 귀면탈은 비행하는 고혜원의 엉덩이 를 힘껏 돌려 찼다. "에잇, 영악스런 계집!" 쾅! 피를 토하면서 날아간 고혜원은 고목과 강하게 충돌했다. "악!" 하체가 온통 피로 물든 그녀는 쓰러지자마자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 다. 귀면탈은 살기를 드러내며 다가갔다. '후환을 없애는 게 좋겠군. 어차피 손대지 못할 계집이라면....... ’ 그가 막 고혜원에게 장풍을 떨칠 찰나였다. "나쁜 놈!" 짧은 고함과 함께 예리한 파공음이 귓전을 때렸다. 귀면탈은 재빨리 자세를 낮췄다. 쉭! 소리를 동반하며 단검 두 자루가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귀면탈은 놀라며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청풍! 하필 탈이 부서졌을 때 나타나다니.......’ 그는 단숨에 유청풍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유청풍 정도의 고수라면 흑림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교묘히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귀면탈은 지체없이 달아났다. 달리는 속도가 더할수록 금이 간 귀면탈이 점점 벌어졌다. 숲을 벗 어난 순간 깨진 탈을 벗은 그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의절 홍오간이었다. 홍오간은 탈과 피풍을 숲 속으로 집어던진 후 이내 사라졌다. 그런데 그는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을까? 이곳 흑림은 장구안과 강서쌍웅이 납치한 여자들을 즐기던 장소였 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홍오간은 그들의 증언을 의심하던 참에 몰래 증거를 잡기 위해 왔던 것이다. 그가 모염정에게 유청풍을 감시하라고 시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편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청풍은 깨진 탈조각을 주워 들었다. '이 탈은 천락무예단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홍오간은 그 탈을 투검 영감을 통해 획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청풍은 그렇게까지 자세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한 가면은 소품실에서 누구나 훔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눈앞에 쓰러져 있는 고혜원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 는 하체가 온통 핏물로 물든 채 호흡마저 불규칙했다. 그의 눈에서 갈등이 교차되었다. '원수의 딸이 아닌가?’ 그의 뇌리에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던 선친의 비참했던 모습이 아 스라이 떠올랐다. 그가 고혜원을 멀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득 쌍륜화극이 그의 시선을 파고들었다. "일단 살리자. 나도 혜원이에게 신세를 졌으니......." 불현듯 고혜원이 막연산에서 귀홍부 엽기를 물리치고 자신을 구해 주던 광경이 되살아났다. 당시 그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그 는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 이유야 어찌 되었던 그녀 덕에 사곡환자들을 살리지 않았는가? 고혜원이 입고 있던 경장 치마를 들춰 본 유청풍은 혀를 찼다. "이런... 중료혈(中 穴)이 완전히 깨졌구나." 그 부위는 골반을 이루는 엉덩이뼈로써 여인에게 치명적인 요처였 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넝쿨이 우거진 풀밭으로 갔다. "이쯤이면 안전하겠지." 그녀를 내려놓은 후 그는 숲 속을 이리저리 다니며 도토리와 벌집 그리고 질경이를 따왔다. 흑림에는 상수리나무와 과실수는 물론이고 풀이 무성해 그런 것들 을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그는 껍질을 벗겨낸 도토리를 으깨 가루로 만들었다. 이어 그는 상 수리 잎에 꿀을 털어 낸 다음 도토리 가루와 섞었다. 그렇게 묵처럼 만든 덩어리는 모두 세 개였다. 이것이 바로 바스러진 뼈를 낫게 하는 특효약인 것이다. 만일 뼈가 약한 사람이 이를 장기 복용할 경우 강철같이 단단해져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이상이 없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한때 단궐이 사곡환자들을 치료했던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었다. 그는 한 덩어리를 입에 넣더니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세 덩어리가 전부 그러한 방법으로 소모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질경이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진한 물이 우러나오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질경이야말로 비상시 하혈을 신속히 멈추게 하는 특효약이다. 잠시 후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아 경장 치마를 걷어 올렸다. 피에 젖은 짧은 바지와 속곳이 벗겨진 순간 신비스런 계곡이 드러 났다. "......." 하지만 다급한 그의 눈에는 오직 으스러진 상처로만 보일 뿐이었다 . 그는 신궐혈(神闕穴)과 회음혈(會陰穴)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이는 체온이 떨어진 환자를 따뜻하게 함으로써 약효를 촉진시키는 일방 끊어진 뼈와 신경을 신속하게 잇는 비법이었다. 또한 혈압이 불규칙한 환자의 단전과 폐에 부담을 주지 않은 채 환 부에 직접 진기를 넣어 치료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몸에서 땀이 수증 기로 변할 즈음 그녀가 사지를 조금씩 떨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추신경을 통하여 기가 정상적으로 흐른다는 증거 였다. 잠시 후 고혜원은 악몽에서 깨어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점차 그녀는 의식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시 대략 반 각이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숨이 막힐 정도로 기겁을 했다. '청풍?’ 놀랍게도 그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곳을 꽉 누르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옥용이 화끈해지면서 은밀한 부위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아.......’ 뜻 모를 안도감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순간 점차 그곳은 촉촉이 젖 어들었다. 실로 그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신체반응이었다. 그러한 현상에 그녀는 다시 한번 놀랐지만 움직이거나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유청풍이 그곳을 더욱 힘껏 누르며 검미를 무섭게 일 그러트리는 것이었다. 그런 표정은 잡념을 버리고 빨리 진기를 운용하라는 재촉이었다. 비록 그녀는 정신을 차렸지만 심신이 피로하여 탈진한 상태나 마찬가 지였다. 더구나 밑에서 맹렬히 솟구쳐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느낀 그녀는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세 번의 일주천을 마쳤을 때 주위는 고요한 적막이 흐를 뿐 이었다. 갑작스런 경험에 그녀는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어지러웠다 . 어느새 그는 저 만치 떨어져 돌아서 있었다. 옷과 머리를 추스린 그녀의 옥용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뭐라고 한 마디 해주면 속이 편하련만 저 고집 센 사내는 절대 먼 저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단호히 말했다. "부담 갖지 말고 가." 나지막한 음성 속에는 혼자만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덤덤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심해." 그는 무심히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한데 그 목소리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벌판의 모닥불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찡해진 그녀는 얼른 달려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너무 늦었지?" "저쪽에... 내가 벗어 놓은 옷이 있어." 그는 천락무예단을 떠날 때 입었던 옷을 이곳에 벗어 두었는데 갈 아입고 나오다 대결 광경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피로 물든 경장을 입고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메마른 사내의 말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지난 이십 사 년 동안 고이 간직했던 소중함, 그것을 공개한 장소 에서 다시 헤어져야 하니 말이다. [5] 홍오간의 제약소를 떠난 후 고일두는 일부러 위강을 따라 나섰다. 한편 혁련달과 장구안은 그와 동행을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사라졌다 . 한적한 산길. 고일두는 위강과 나란히 걷다 걸음을 멈추었다. "도절 선배님." 위강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 그러나?" "다름이 아니라 예전에 말씀하신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위강은 일 년 전 무이산으로 그가 찾아왔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고일두는 살루문의 탈명색혼대가 공격할 시기와 야심편 반서귀에 관 한 약점을 알려 주었다. 그는 그 대가로 부탁을 한 가지 할 테니 반드시 들어달라고 요구했 었다. 위강은 자신과 제자인 등조민의 안전을 위해 수락할 수밖에 없 었다. 결국 그는 암습을 피했으며 반서귀를 쉽게 물리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강과 고일두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실상 와호장주 고헌부가 꾸민 계략이었으나 위강은 그 내막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았네." 고일두는 넌지시 물었다. "그럼, 지금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편한 대로하게." 고일두는 서슴없이 말했다. "청풍을 죽여주십시오." 순간 위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고일두도 태연자약하게 마주 바라보았다. 이윽고 산전수전 다 겪은 위강의 입에서 정답이 흘러나왔다. "친구지만 무림의 공적이라는 뜻인데, 나는 못하네." "약속을 어기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고일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위강은 무거운 음성 을 토해냈다. "다른 것을 부탁하게." 당시 이들은 구체적인 내용을 약속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일두는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철파류를... 배우고 싶습니다." 위강은 넌지시 물었다. "호성검이 자네에게 반서귀의 무공을 말한 적이 있는가?" 호성검은 와호장주 고헌부의 별호였다. 갑작스런 질문에 고일두는 내심 당황하게 되었다. '제길, 그때 아버지가 약점만 알려 주었는데.......’ 그는 오래 생각할 수가 없어 얼른 둘러대고 말았다. "글쎄요. 제가 자세한 사항을 묻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위강의 눈빛이 섬광처럼 이글거렸다. '거짓말! 고헌부는 상대를 절대 살려주지 않아. 적어도 약점을 알 고 있을 정도의 인물을.......’ 지금까지 와호장주 고헌부는 대결상대를 확실하게 죽였으며 그러한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유지해왔었다. 그 때문에 세인들은 그의 인간 성이나 행적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위강은 안광을 갈무리하며 다시 물었다. "호성팔품은 천하무적인데 굳이 도법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와호장은 검을 병기로 사용하는 가문이며 그 절기의 명칭이 호성팔 품이었다. 모든 병기들이 그러하듯 검과 도는 무기 특성상 엄연히 차 이가 나서 절기를 구사하는 동작부터 그 장단점이 너무나 다르다. 따라서 평생을 도법에 바친 위강이 의문을 제기한 것은 당연했다. 고일두는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좀 이상할지 모르나 저는 특이한 것을 좋아합니다. 기관학도 그래 서 배웠습니다." 그의 말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달랐다. '청풍과 대결하려면 한철파류가 필요해. 등조민을 꺾기도 좋고.... ...’ 언젠가 유청풍이 혈광마검을 사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와호장의 호성팔품을 가지고 뇌전검법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한철파류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에 적격이었다. 또한 유청풍을 제거했다고 가정하면 오절과 등조민이야말로 가장 부담이 가는 상대였다. 고일두는 적이 될 만한 자를 제압할 방책을 지금부터 서서히 준비해 둘 작정이었다. 위강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속셈을 왜 모르겠는가? 그는 우직한 성격대로 정곡을 찔렀다. "내 제자를 적으로 여기는군." 달리 표현하면 오절을 죽일 작정인가? 라는 물음과 같았다. 고일두는 내심 투덜거렸다. '젠장, 꼬치꼬치 캐묻기는... 도와준다고 약속했으면 그냥 알려줄 일이지.......’ 그는 다시 부언 설명을 곁들였다. "본가의 검법으로 청풍을 상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 배님의 절기를 구사할 계획입니다." 언뜻 솔직한 말 같아도 유청풍이 해를 당할 경우 결국 위강이 죽인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와호장은 위강을 충분히 활용한 격이 며 위강은 본의 아니게 협조한 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위강은 너무나 뻔뻔스러운 말에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비를 꼭 닮았어. 악랄한 점을.......’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바람에 밀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고 있었 다. 바람은 점점 강해졌지만 구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위강은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알았네." 두 사람은 숲 속에 있는 공터로 들어갔다. 위강은 나뭇가지를 넉 자 길이로 꺾어 쥔 다음 천천히 한철파류를 펼쳐 보였다. "잘 보게." 고일두는 기분이 잡쳤다. '젠장, 구령은배도를 사용하지 않다니.......’ 무공은 초식과 병기가 지닌 특성이 조화를 이룰 때 위력이 달라지 는 것이다. 신체부위를 무기로 활용하는 외공도 마찬가지다. 지금 위강처럼 나뭇가지로 초식을 전개하면 고일두는 한철파류의 진정한 위력을 모른 채 동작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안광 을 번뜩이며 위강과 나뭇가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동작을 마친 위강이 물었다. "알겠는가?" 고일두는 한철파류의 요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짧게 끊어지는 동작을 연결했군요. 동영(東瀛)의 일도류(日刀流) 와 유사합니다." 위강은 내심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네." 사실 그는 왜(倭)로 건너가 그들의 검법을 본 후 도법의 묘리를 깨 우쳤던 것이다. 고일두는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한 후 먼저 길을 떠났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위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쯧, 재주는 뛰어난데......." 비등원주 등인탁의 별각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밖에는 환한 아침 햇살이 비치는 반면 접근이 차단된 실내는 어둡 고 끈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상해요. 노방 등이 이번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한 차례 뜨거운 열정을 받아 낸 모염정은 땀에 젖은 그의 가슴을 쓸어주었다. 두 사람은 모로 누운 채 마주 바라보았다. 이번 제약소 사건을 꾸민 장본인인 등인탁은 계획을 성공시켰어도 왠지 불안했다. '서로 반목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기는 했는데.......’ 내심과 달리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들보다는 와호장을 견제해야지. 뇌운진기를 얻으려면......." 모염정은 우려의 음성을 토해냈다. "피이, 그걸 누가 모르나요? 자칫 그들과 정면 대결을 벌일까봐 고 민하는 거죠." "수리마제의 전인을 해친다고 소문을 내면 되지." 그럴 경우 무림은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와호장이 어째서 수리마제를 죽이려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모염정은 답답했다. "혜원이란 계집을 반드시 청풍과 떼어놓아야 해요." 그녀가 하물을 살며시 말아 쥐자 등인탁은 덥석 그녀를 끌어안았다 . "아암, 우리 미인을 모함한 자를 가만둘 수야 없지." 그는 이미 다음 단계까지 구상을 끝내 놓았다. 모염정은 기대에 찬 눈빛을 발했다. "좋은 계책이 있나요?" "잘 알잖아. 계단식 정리를....... 우선 장구안을 처치해야 돼." 그의 눈에서 노골적인 살광이 이글거렸다. 모염정은 그의 하물 중간을 힘주어 꽉 눌렀다. "홍오간이 저지른 것처럼 장구안을 이렇게......?" "천만에." "흐응, 자세히 말해봐요." 재차 음욕이 동한 등인탁은 손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여자라면 환장하는 놈 아닌가? 원화각으로 유인하면 끝이야." 모염정도 덩달아 밑으로 쳐진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혜원 그 계집아이가 언제 있을 줄 아나요?" "사내가 처녀의 방에서 죽었는데 있건 없건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모염정은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와호장에서 그까짓 시체 하나쯤 처리하지 못할까?" 어디 그뿐이겠는가? 비등원이 그러하듯 와호장에도 무서운 절진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 다. 등인탁은 밑으로 쳐진 손을 돌려 그녀의 둔부를 움켜쥐었다. "출입요령을 알아낸 후 덤으로 몇 개를 더 갖다 놓아야지. 제약소 사건처럼......." 와호장의 원화각은 고혜원이 거처하는 별각이었다. 장구안을 그곳에서 죽여 고혜원을 난처하게 만들자는 음모였다. 모염정은 환하게 웃었다. "정말 멋져요. 장구안이 수하들을 데리고 강제로 범하자 고혜원은 어쩔 수 없이 살인한 것으로 소문이 나겠군요." 만일 이러한 흉계가 성공할 경우 아무리 고혜원이 떳떳함을 증명해 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등인탁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흐....... 그 여아는 창피해서 두문불출할 게야. 세인들은 일 년도 채 못 가서 다 잊을 테고, 그때 혼담을 슬쩍 넣으면 허겁지겁 응할 수밖에....... 잘하면 금황옥진비결도 알아낼 수 있으리라.’ 또다시 몸이 달아오른 모염정은 벌떡 일어나 그를 반듯하게 눕혀 놓았다. "흐응, 역시 믿을 사람은 당신뿐이군요." 커다란 둔부가 내려간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분풀이 하듯 심하게 요동쳐댔다. '청풍, 이 무정한 자식아!’ 튼튼한 단목 침상조차 그녀의 동작을 못 이겨 삐걱거렸다. 등인탁 은 박진감 넘치는 율동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허허허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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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