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나타나는 고수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사방이 타는 듯 붉어져 단풍든 나무가 더욱 붉게 보였다. 인적이 끊어진 관도의 황토마져 저녁노을에 같이 타올라 천지가 핏빛 일색인 듯 했다. 하늘마져 장엄하게 침몰하고 있었다. 다만, 마무쌍의 주위에 버려진 사령여와 사령조객들의 시신만이 참혹한 형태로 시선을 휘저어 놓고 있어 어울리지 않았다. 걸음을 떼어놓는 마무쌍의 옷자락을 무심한 바람이 흔들었다. 문득 마무쌍이 입가에 냉소를 떠올렸다. "모두가 간 다음에도 여전히 버티고 있음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오호호호……" 그 순간에 맑은, 그러나 사람의 넋을 뽑아버릴 듯한 교소(嬌笑)가 들려왔다. 동시에, 한 채의 호화찬란한 가마가 바람을 가르며 나타났다. 그 가마는 웃통을 벗은 네 명의 교꾼들에 의해 받쳐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허공을 날아 마무쌍의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가마를 메고도 그런 경공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그런 고수를 일개의 가마꾼으로 부리는 가마의 주인은 대단한 자인 것이다. 가마의 장식은 실로 화려했다. 날아오를 듯 좌우로 장식된 봉황은 그 자체가 금은상감으로 조각되었고, 붉게 반짝이는 눈은 홍옥이며 가마에 새겨진 무늬 또한 금이었다. 마무쌍은 늘어진 가마의 주렴 사이로 은은히 홍의를 입은 미녀가 앉아 있음을 보았다. '내 안력이 투시하지 못할 정도이니 저 주렴도 보통의 물건이 아니군……' "마중지존의 출현은 천하 마종인의 숙원…… 그대에게 과연 그런 힘이 있나요?" 이루 말할 수 없는 달콤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하하하…… 절세마교(絶世魔嬌)! 너에게 그것을 확인할 능력이 있느냐?" 마무쌍이 크게 웃었다. 가마 안에서 놀란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신의 안력은 천하독보(天下獨步)로군요……" 절세마교(絶世魔嬌). 염혼사루(艶魂死樓)의 주인이며 당금 천하오미의 한 명이다. 천마요희 이래 최대의 요부라 일컬어지며 그녀의 치마폭 아래서 살아남은 자는 없다. 백골이 될 뿐. "당신은 참으로 추측키 곤란한 사람이로군요? 어떤 때에는 장난기어린 어린애 같다가 지금은 미친 마두같으니 말이예요." 가마 안에서 농염한 웃음소리가 요동쳤다. "당연하지. 미친 개의 눈에는 미친 것만 보이는 법이니까!" 마무쌍의 태연한 어조에 가마 안의 절세마교는 일시지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오호호호…… 멋지군요! 본 누주는 아직 나를 면전에 두고 그렇게 매도(罵倒)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미친개는 사람을 무니까." 마무쌍이 낭랑히 웃었다. 절세마교가 날카롭게 웃었다. "오호호…… 마무쌍! 네가 무엇을 믿고 그토록 대담한가? 본 누주는 네가 정상이 아님을 알고 있다!" 돌변한 그녀의 음성에는 분노와 살기가 은은히 어려있었으나 여전히 교태로왔다. "너는 내가 정상이 아님을 믿고 나타났나? 겨우 졸개 몇을 데리고?" 마무쌍이 코웃음쳤다. "큰소리는 대단하군! 그 졸개 몇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위력이 있는지 한 번 시험해 보아라!" 절세마교가 깔깔 웃었다. 동시에, 기이한 향기가 퍼지며 마무쌍의 사방에 수십 명의 미녀가 나타났다. 모두가 갓 이십 대의 농염한 미녀들인데, 매미날개와 같은 엷은 경사(輕紗)를 걸치고 있어 터질 듯 무르익은 육체가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그 호의(縞衣) 속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아 모든 굴곡이 완연히 드러난 상태인 것이다. 탄력있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과 그 모든 것들이…… 코끝을 스치는 기이한 향기는 바로 그녀들의 늘씬한 몸에서 풍겨나오는 체향이었다. "노을 속에 나녀도라, 내게 이토록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무쌍이 그녀들을 둘러보며 태연히 말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춤이나 감상하면서 생각해 보시지? 천욕대염무(天慾大艶舞)를 구경시켜 드려라!" 절세마교는 마무쌍의 태연함에 내심 불안해져 급히 외쳤다. 마무쌍의 가공할 위력을 그녀는 방금 전에 보았던 것이다. 딩! 디디--- 딩! 어디선가 기이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미녀들이 마무쌍의 주위를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매가 펄럭이며 옥같은 팔이 드러나고, 엷은 치마가 젖혀지며 눈처럼 흰 허벅지 사이로 검은빛이 서리는 비역(秘域)이 드러났다. 가슴 떨리는 육향(肉香)이 하늘 끝까지 퍼져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마무쌍의 안색은 시종 태연했다. "아아…… 공자, 이리…… 이리로……" 비음이 귀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공자…… 어서…… 제발! 제발……" 탄력으로 빛나는 허벅지사이에서 검은 꽃잎이 처절한 유혹이 되어 신음을 토하며 마무쌍 앞에서 경련했다. 드디어 얇은 호의마져 나풀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심신을 진동하는 향기가 숨막힐 듯 짙어졌다. 여인의 체향은 어찌 이다지도 남자에겐 무서운 유혹인가? 나녀들이 서로의 나신을 탐하기 시작했다. 붉은 꽃잎이 마주치는 음향은 넋을 앗아가고, 검은 꽃잎이 수풀 속에서 토해내는 신음은 무서운 욕화를 일으켰다. "호호호…… 오호호호……" 어디선가 아득히 혼백을 후려내는 교소가 물결쳤다. "아--- 고…… 공자아……" "아…… 아파……" 나녀들이 서로를 탐하며 토하는 교성과 아득한 교소는 가공할 조화를 이루며 군무(群舞)속에 물결쳤다. 실로 천하에 다시 없는 유혹이고, 부처님 같은 정력(精力)을 지닌 자라도 정력(精力)이 고갈되어 쓰러지고 말 육욕의 제전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엉거주춤 서 있던 마무쌍이 어깨를 쭉 펴며 하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 아함, 염혼사루의 사십구염혼(四十九艶魂)의 춤이 천하제일이라더니 이거야 지루해서 보겠나……' 이 얼마나 기막힌 말인가? 너무도 어이가 없는지 가늘게 들리던 교소가 멎고 천욕대염무조차 주춤했다. "춤이란 그렇게 추는 것이 아니지! 웃어도 그렇게 소름끼치도록 방정맞게 웃는게 아니다. 내 시범을 보여주마!" 마무쌍이 낭랑히 웃으며 기묘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웃음은 이미 평소의 웃음이 아니었다. 사람의 혼백을 모조리 앗아가는 가공무쌍(可恐無雙)의 염정탈혼환희소(艶情奪魂歡喜笑)인 것이다. 그의 소매가 천천히 펄럭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에도 가공할 마력을 품은 호선이 그려졌다. 쳐드는 발끝 하나에 아득한 대해(大海)가 치밀어 오르고, 으쓱하는 어깨짓 하나에 창천의 운해(雲海)가 피어났다. "으하하……" 낭랑히 터지는 웃음은 시체의 넋까지라도 빼앗을 듯 있었다. 천욕대염무를 펼치던 사십구염혼의 동작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눈동자에 욕념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무쌍의 손짓 하나에 가슴이 나락으로 철렁, 곤두박질하고 몸짓 한 번에 하체에서 체액이 스며나왔다. 남자를 익히 아는 그녀들이었다. 천마요희의 천마소혼무(天魔消魂舞)를 마무쌍이 펼쳐내는데 견뎌낼 리 없었다. "아하하하……" 염정락혼환희소가 넋을 앗아가고 천마소혼무가 그녀들의 정력(精力)을 고갈시켰다. 사십구염혼들의 움직임은 이미 멎었다. 하나 둘, 그녀들은 윤기를 잃어가는 자신의 나신을 땅 위에 눕히고 있었다. 기막히고 가공할 일이었다. 염혼사루의 정예인 사십구염혼이 어이없게도 남자의 춤에 의해서 전멸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춤에 의해 죽어간 고수의 수가 그 얼마이던가? 그런데 이제 불과 반각만 마무쌍의 춤이 계속되면 그녀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머…… 멈춰요…… 제발……" 그때, 신음하는 듯한 외침과 함께 가마 안에서 한 가닥 홍영이 뛰텨나왔다. 마무쌍의 앞에 한 절세의 미녀가 나타나 있었다. 아아! 그녀의 우미(尤美)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더 한층 요염하며, 욕정이 일렁이고 있는 봉목(鳳目)은 천하의 장부라도 뇌쇄시키기에 족했다. 그녀야말로 절세마교의 칭호를 받을만한 우물(尤物)이었다. '대단하군! 의모(천마요희)를 방불케 하도록 지독히 요염하다!' 그녀를 본 마무쌍의 눈에 놀람이 스쳐갔다. "하하하하…… 절세마교, 내 춤이 가까이서 보고 싶던가? 얼마든지 보여주지! 하하하……"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의 소매가 펄럭이며 그 속에서 우람한 그의 팔뚝이 드러났다. "제…… 제발! 그만…… 그마안……!" 그 손짓 하나에 절세마교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흐트러진 홍의 사이로 수밀도와 같은 젖가슴이 거의 다 드러나 출렁였다. 그녀도 속옷은 입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한 가닥 선혈이 흘러내렸다. 염정탈혼환희소와 천마소혼무의 그 가공할 위력에 타오르는 욕정을 억제하느라 생긴 결과였다. 남자가 시전하는 음공(淫功)은 여인에게 무서운 위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마무쌍이 옷을 모조리 다 벗는다면 그녀들은 욕화(慾火)에 가슴이 타 죽고 말 것이다. "머…… 멈추…… 란 말이…… 다!" 절세마교가 이를 악물며 손을 들어 일장을 쳐왔다. 손바닥에서 괴이한 홍운(紅雲)이 이는 것으로 보아 필시 악독한 장공일 것이다. "하하하…… 절세마교! 이곳을 치고 싶으냐?" 마무쌍이 웃으며 옷을 젖혀 자신의 가슴을 드러냈다.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 어쩌면 그토록 가공할 마력이 숨어 있는가? 막 마무쌍의 가슴을 후려치려던 절세마교의 옥장이 멈칫 하더니 힘이 빠지고 말았다. "아아……!" 그녀는 은어와 같은 팔을 마무쌍의 허리에 감으며 얼굴을 마무쌍의 가슴에 대고 격렬히 부볐다. 그녀의 전신은 터질 듯 달아올라 출렁였고, 가쁜 숨이 토해지는 붉은 그녀의 입술은 미친듯 마무쌍의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얼굴이 화로와 같이 달아올라 있었다. "하아…… 하아아…… 제발…… 이젠 더 이상 못 참…… 아요…… 제발 그만……" 이미 한 가닥 남은 이성마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토록 격렬히 마무쌍의 가슴을 더듬으면서도 그녀의 눈은 마무쌍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염정탈혼환희소. 천마요희가 어떻게 신주팔대마존의 하나가 되었는지는 이 웃음 하나가 증명하고도 남으리라! 순간, 욕정에 불타던 절세마교의 눈빛이 몽롱해지며 그녀의 동작이 멎었다. 마무쌍의 웃음이 사라지고 그의 춤이 멎은 것이다. 처절하도록 요염한 그녀의 모습, 가쁜 숨을 토해내는 그 붉은 입술에서 흐르는 핏줄기가 마무쌍에게 한 가닥 측은지심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아!" 절세마교는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 듯 그대로 풀썩 무릎을 꿇었다. 붉은 홍의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가 눈이 부시도록 희게 빛났다. 사십구염혼이 사지를 내던진 채 노을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토록 아름답던 그녀들의 모습은 어느 새 추하게 보였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그 광경은 무엇인가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마무쌍은 가볍게 탄식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시오니까?" 그의 뒤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마무쌍!" 마무쌍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단 한 마디,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다. 절세마교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지존! 지존이시여!" 그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무쌍의 모습은 이미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ㅉ는 절세마교의 눈에는 괴이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원한도 아니고, 살기도 아니었으며, 공포는 더욱 아니었다. 다만, 무엇인가를 ㅉ는 여인의 빛이었다. 설마…… 절세마교에게 순정(純情)이 있단 말인가? * * * 마무쌍이 걸음을 멈춘 곳은 관도에서 벗어난 숲속, 한적한 곳이었다. "윽!" 그가 걸음을 멈춘 순간에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바닥에 쏟아진 선혈을 보고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는 마무쌍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맴돌았다. "그들을 얕보았음이 실수였다! 사령신군도, 절세마교도 모두 이갑자 이상의 공력을 가진 고수였다……" 그는 강호무림이 최강성기(最强盛機)라는 말을 드디어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실수는 않게 될 것이다. 마무쌍은 옆에 있는 밋밋한 바위에 기대앉으며 천천히 대유무극선공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담담한 서기가 어리는 가운데 그의 안색은 급격히 정상이 되고 있었다. 심한 내상도 아니고 과도한 공력소모일 따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구대문파가 흑심을 품었다면 마무쌍은 상당한 대가를 치뤘어야 했을 것이었다. "누구…… 단주인가?" 문득, 마무쌍의 몸에서 서기가 사라지며 입을 열었다. "예, 지존! 속하입니다. 상처가 심하십니까?" 천랑마효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마무쌍이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끝없이 맑았다. "이 정도가 상처일 수 없지. 무슨 일인가?" 천랑마효가 고개를 숙였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역과 새북 등지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중원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일단의 무리?" "예, 여기……" 천랑마효가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내밀었다. 의아한 빛으로 그것을 읽어가던 마무쌍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들이 정말 소뢰음사(少雷音寺)의 고수와 대막 백타궁의 고수인가?" "구류방의 정보는 틀림 없습니다." "여기 적힌 진로대로라면 소뢰음사와 백타궁의 고수는 이미 중원에 들어왔을 것이다. 지난 백 오십 년 간 강호는 조용했는데 이들이 나타난 시기는 너무 공교롭다……" 천랑마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백 년 만에 새북대막을 통일한 백타대제(白駝大帝)와 마승의부 이래 소뢰음사 최강이라는 살가륵(薩伽勒)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자들…… 구류방의 정보망도 그들에 대해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다……" 마무쌍의 눈에서 맑은 광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주!" "예." "명을 전하라!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내도록. 인원, 행적, 목적, 그들의 진로와 중원으로 들어온 전력(戰力)까지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한다!" "명심 거행하겠습니다." 천랑마효는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한데 또 다른 무리들이 중원으로 들어오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또 다른 무리?" "예, 이들은 매우 소수인데 그 행적이 매우 신비합니다." "신비? 그들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단 말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벽옥향거(碧玉香車), 서장(西藏) 일대에 어디선가 홀연히 벽옥으로 된 향거가 나타났다. 주먹만한 벽옥이면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데, 그것으로 수레를 만들다니? 이 기이한 벽옥향거가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따르는 사람은 시녀 둘과 괴이한 노파 한 명, 향거 안에 누가 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향거 안의 사람은 단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 호기심 많은 무림인들이 그냥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한 자는 없었다. 서장 일대의 고수들이 벽옥향거의 시녀에게 맞아 내ㅉ길 뿐이었다. 노파도 아니고 한낱 시녀에게, 그런데 그 신비의 벽옥향거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두 번째는 일단의 신비흑의인들인데, 그 수효는 불과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나타난 곳은 남쪽 광서(廣西)일대 였고 그 행적은 극도로 은비(隱秘)하여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다. 그러나 구류방의 이목은 그들 중 하나가 광서의 강력한 문파인 광무관(廣武館)을 단 반시진만에 개새끼 하나 남기지 않고 몰살한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가 한 마디 물어본 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살인멸구 수단임도 밝혀냈다. 그러나 그것을 밝혀낸 구류방 분단도 그날로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을 그 이후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위방주는 이 두 신비인들이 이미 중원무림 안에 들어왔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랑마효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흑의신비인들의 수법이 마교의 것과 닮았다고 전언했습니다." "마교?" 마무쌍의 눈에 경악의 빛이 드러났다. 마교라니?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그 두 신비인들은 제각기 무엇인가 탐문하는 듯 했다고 합니다." "……" 마무쌍은 묵묵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에서는 맑은 신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 단주!" "예." "그들의 움직임을 결코 놓치지 말도록…… 그리고 그 흑의신비인들을 반드시 찾아내라! 어쩌면 거기에……" 말끝을 흐리던 마무쌍은 자르듯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찾는 바가 무엇인가도 알아내도록, 어쩌면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것이라시면……?" 마무쌍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발설치 않는 게 좋겠지! 하지만 내 추측이 맞는지는 곧 밝혀지겠지." 마무쌍의 말은 끝났다. 천랑마효는 허리를 굽혀 예를 한 후 사라졌다. 천랑마효가 사라진 후에도 마무쌍은 눈을 감은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마무쌍의 얼굴에는 미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만큼 엿들었다면 되었지 아직도 엿볼 것이 더 남아있소?" 낭랑한 그의 음성이 숲속을 울렸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요?" 그 순간,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전면의 고대(高大) 한 거목에서 녹영이 떨어져 내렸다. 내려 올 때는 비할 바 없이 빨랐으나 막상 땅바닥과 이장여의 거리를 두고는 거미가 내려오듯 느려졌다. 절정에 이른 경공이 아니고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타난 녹영은 뜻밖에도 이제 십 칠팔 세 가량의 절세미녀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한 마디로 장미와 같이 발랄하고 화사한 미모였으며, 등에 꽂힌 장검에서 펄럭이는 검수(劍綬)가 그녀와는 매우 잘 어울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았지요?" 녹의미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태도는 매우 꾸밈없고 활동적이어서 호감을 주고 있었다. "아까 관도에서 내 뒤를 따를 때부터……" 마무쌍의 대답에 녹의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수가……? 아니 그러고도 태연히 운기조식했단 말이예요?" "하하하…… 그럼 남궁가의 금지옥엽이 운기조식하는 사람을 암습하겠소? 오히려 보호하리라 믿고 안심했었소!" 마무쌍은 낭랑히 웃었다. 녹의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이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웃음이다!' 일순, 가슴속에서 미묘한 출렁임이 일어남을 느낀 녹의미녀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보니 당신은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군요? 어떻게 알았지요?" "남궁가의 금지옥엽인 운해비봉(雲海飛鳳)의 경공이 일절이며, 그 대담한 재지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녹의미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당신은 남을 가지고 놀 줄도 아는군요?" 그러나 그녀의 모습에 그것을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운해비봉 남궁하려(雲海飛鳳 南宮霞麗), 남궁세가의 무남독녀인데다 재지가 뛰어나 이름이 높다. 거기에 천하오미(天下五美) 중의 하나이고, 남궁가의 창궁십팔검(蒼穹十八劍)은 물론이고 아미파 전대장문인 금정신니(金頂神尼)의 애제자로 그 무공은 절세고수급이다. 특히 그녀의 운해부주신법(雲海浮舟身法)은 강호일절이라고 일컬어진다. 운해비봉 남궁하려가 정색을 했다. "당신은 혼자인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엄청난 조직을 갖고 있는 것 같더군요? 지금부터 무엇을 하려 하나요?"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마무쌍은 어이가 없었다. "낭자는 강호의 금기를 범했소! 내가 가만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운해비봉 남궁하려는 배시시 웃었다. "물론이지요. 당신은 시시한 마두는 아니잖아요? 마무쌍이 아니던가요?" 마무쌍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통쾌했다. "명불허전이군! 기가막힌 말씀이오.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군……" "말을 돌리지 말고 대답해 보세오. 당신이 정녕 마중지존인가요?" "어떤 것 같소?" 마무쌍이 담담히 웃었다. 남궁하려는 또 다시 마음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마중지존이 나타나면 천하가 피에 잠기고 마교가 부흥하며 마도가 천하를 지배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요?" "오늘만 해도 나는 단숨에 백여 명을 죽여 피를 보았소. 그것이 피바다의 서곡 이라 생각지 않소?" "그거야……" 마무쌍은 그녀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마교가 부흥한다고 했소? 내가 마교지존이면 어떻게 하겠소?" 남궁하려의 얼굴빛이 멍청해졌다. "설마?" 그 순간, 그녀는 이미 저만큼 멀어져가는 마무쌍의 모습을 발견했다. "극선(極善)과 극마(極魔)의 차이를 아오? 내가 바로 당대의 마교지존이라오…… 하하하……"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마무쌍의 모습은 남궁하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궁하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럴 수가? 그가 정녕 마중지존이란 말인가?" 남궁하려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그럴리가 없어! 그토록 맑은 눈과 신비한 미소를 지닌 사람이 그럴 리가! 내 꼭 밝혀내고야 말겠어!" 그녀는 세차게 발을 굴렀다. 휙--- 그녀의 신형은 마치 번개와 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무쌍의 뒤를 따라 몸을 날린 그녀의 앵두와 같은 입술은 꼭 깨물어져 있었다. 뭔가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그가 정말 마교지존일까? 그렇다면 본궁이 강호에 나타난 것은 참으로 시기적절한 것이되겠군!" 차가운 빛이 어린 음성이 담담히 들려왔다. 동시에 남궁하려가 있던 곳에는 어느 새 백의여인이 나타나 있었다. 늘씬한 키에 탄력이 넘치는 몸매는 그녀가 절세려인임을 능변하는 것이었으나, 아깝게도 그녀의 용모는 면사로 가리워져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한 가닥 고고하고도 차가운 기운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소궁주께서 궁을 떠나심은 그것 때문이 아니고 본궁 신물인 한빙옥차(寒氷玉 )와 이십 년 전에 실종되신 삼궁주의 행방을 찾기 위함이 아닌가요?" 정감이라곤 담기지 않은 차가운 음성이 들리며 백의여인 옆으로 흑의노파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 누구라도 그 노파를 보면 괴이하도록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검은 옷을 걸친 백발의 그 얼굴은 마치 눈으로 빚어놓은 듯 차고 무표정했다. 절로 찬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마교가 나타난다면 뵨궁이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어요? 이미 천 년이 지났는데……" 백의여인의 말은 기이한 여운을 끌며 퍼지고 있었다. 이미 천년이 지났는데……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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