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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종교개혁
루터나 칼뱅 모두 종교개혁을 열정적으로 추진했으나 로마교회의 신앙과 완전한 단절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마교회와의 완벽한 분리를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재세례파(anabaptist)는 가톨릭의 신앙 가운데 성서와 어긋나는 부분들만 제거하고 싶어 하는 루터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그들은 성서와 무관한 교리나 예배, 교회 생활을 부정했다. 그리고 통치자나 국가를 위한 일체의 행위를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는 칼뱅주의자들도 그 정도는 아니어서 재세례파는 결국 로마교회, 정부 그리고 심지어는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세례가 부른 박해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다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위기의 진원지는 로마교회가 아니라 개신교 진영에 속한 재세례파들이었다. 그들은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게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성만찬을 진행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라고 츠빙글리를 압박했다. 펠릭스 만츠(Felix Manz, 1500?-1527)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성만찬을 시작하실 때 알 수 없는 말로 하지 않았다. 그분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했다.” 츠빙글리가 시의회에 그들의 의견을 전했다. 그런데 만츠와 그의 동료들이 보기에 이것은 정부에 제기할 문제라기보다는 성서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들은 즉시 츠빙글리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붙였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성상과 미사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성서적 근거가 희박한 유아세례를 금지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유아세례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만츠는 가정에서 성서 공부를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덕분에 만츠와 초기 재세례파(오늘날에는 스위스 형제단이라 부르는)는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도달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유아세례를 베풀라는 규정이 없었다. 그 문제를 놓고서 츠빙글리와 논쟁을 벌이던 재세례파는 공개적으로 유아세례를 비난했다. 츠빙글리는 그들의 생각을 돌려놓지 못했다.
1525년 어느 모임에서 한 사람이 동료들에게 진정한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나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진정한 기독교 세례를 달라” 만츠를 비롯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에계 세례를 베푸는 식으로 연속적으로 세례를 주고받았다. 세례식이 모두 끝나고 간단한 성찬식으로 세례를 축하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재세례파라고 불렀다. 그날 밤 취리히 시의회는 만츠의 설교를 금지하고 재세례파의 추방을 결의했다.
재세례파는 가까운 마을로 피신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펠릭스 만츠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5개월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탈출했지만, 1526년 10월에 또다시 붙잡혔다. 취리히 시의회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만츠는 실컷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난 뒤에 림마트 강에서 죽임을 당했다. 사형 집행인들이 만츠의 두 팔을 잡은 채 얼음같이 찬 강물에 그의 머리를 밀어 넣었다. 세례를 강조하는 재세례파를 비웃는 처형이었다. 만츠는 찬송을 부르다 죽었다.
펠릭스 만츠는 개신교인이 개신교인에게 죽임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였지만 그가 끝은 아니었다.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가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정부나 가톨릭 종교 재판소는 말할 것도 없고, 개신교인까지 적극적으로 박해에 가세했다. 교육받은 지도자들이 속속 죽임을 당하자 구심점을 상실한 재세례파는 급속히 이단화되었다. 이 이단들은 재세례파 역사상 가장 왜곡된 비극으로 이끌어갔다.
뮌스터의 학살
독일의 북부 도시 뮌스터에서 진행된 종교개혁은 시작된 지 불과 한두 해 만에 로마교회를 압도했다. 1533년 뮌스터가 복음의 도시로 선포되자 네덜란드에서 재세례파들이 박해를 피해서 몰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민자들의 숫자가 뮌스터 시민들보다 더 많아졌다. 이민자 얀 마테이스존(Jan Mattijsjoon)이라는 빵 장사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언자이고 세상의 도시를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뮌스터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면서 성도들이 세상을 지배할 천년왕국이 멀지 않았다고 설교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재산을 모조리 시 당국에 귀속했다. 성서를 제외한 모든 서적들이 불태워지고 노동자들은 필요에 따라서 현물로 임금을 지급받았다.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목숨까지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마테이스존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개신교인까지 가세한 로마 가톨릭 군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마테이스존의 후임이 된 라이든의 얀(Jan of Leiden)은 가톨릭의 위협에 맞서 전쟁을 준비했다. 얀은 전제군주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구약성서의 일부다처제를 도입하고 다윗 왕을 자처했다. 이미 처음의 순수성을 상실해버린 재세례파는 종말을 강조하는 광신자들로 낙인찍혔고, 1535년 6월에 가톨릭과 개신교 연합군의 공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칼뱅마저도 통치자들에게 재세례파를 궤멸시키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칼뱅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옥에 가느니 두세 명이 화형을 당하는 편이 더 낫다.” 이후로 1600년까지 목숨을 잃은 재세례파는 거의 1만 명에 달했다.
마침내 찾아온 평안
재세례파는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지도력 상실로 궤멸 될 처지에 놓였다. 그런 재세례파의 와해를 막아낸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 메노 시몬스(Menno Simmons, 1496?-1561)였다. 시몬스는 사제로 안수를 받았지만 3년간 한 번도 성서를 만져본 적이 없는 28세의 아마추어 성직자였다. 그런데 그는 미사 시간에 빵과 포도주로 성찬례를 집례하다가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서 갈등하게 되었다.
시몬스는 그런 생각을 악마의 시험이라고 간주했다. “나는 자주 그것을 고백하며 한숨을 쉬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 없었다.” 시몬스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카드놀이에 탐닉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신약성서를 읽고서 자신의 의심이 정당했다는 것을 알고 크게 안도했다. 빵과 포도주는 고난의 상징이었고 유아세례는 성서적인 근거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재세례파에 관해서 알게 된 시몬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참했다.
시몬스는 재세례파에 참여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추적자들의 눈을 피해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와 같은 고통을 달게 받아들였다. 시몬스는 즐겨말했다. “내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얻고 천년을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된다면 그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그는 뮌스터 대학살 이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거나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는 잔존자를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조직해서 각각의 모임이 책임을 지는 회중교회 방식으로 그 성격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재세례파식으로 세례를 주고 공직을 멀리하고 무저항주의를 신봉했다. 마침내 평안이 찾아왔다.
영국의 종교개혁
대륙의 교회들처럼 영국교회 역시 대변혁을 경험했지만, 그 원인은 헨리 8세의 애정행각에 있었다. 영국 왕실은 본래 교황의 충실한 지지 세력이었다. 1520년에 마틴 루터를 공격한 소책자 표지에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황은 그런 헨리의 열심에 보답하는 뜻에서 오늘날까지 영국 동전에 새겨져 있는 ‘교회의 수호자’(Fd, Def)라는 칭호를 수여하기까지 했었다. ‘천일의 앤’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앤 불린(Anne Boleyn, 1501/7-1536)과 사랑에 빠진 헨리는 왕비인 카타리나(캐서린)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빌미로 이혼을 강요했다.
1529년 헨리는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523-1534)에게 ‘그 스페인의 암소’와의 결혼 서약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헨리의 요구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던 인물이었는데, 그 황제가 바로 카타리나의 조카였다. 황제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교황은 제의를 거절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의 교리였다. 헨리의 욕심 때문에 불거진 왕실의 소동이 엉뚱한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헨리 8세의 스캔들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역사학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교황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묘안을 찾으려고 부심했다. 유럽 대학의 법학자들에게 질의서를 보냈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1533년 1월 헨리는 임신 중인 앤 불린과 결혼했고, 5월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크랜머는 카타리나와의 결혼 서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에 맞서 교황이 헨리를 파문하자 헨리는 자신이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하고 맞섰다. 이로써 영국교회는 로마교회와 재정으로나 법적으로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종교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 앤 불린, 주교 총대리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크랜머 등이 앞장섰다. 크롬웰은 개신교 방식을 수용하고 수도원들을 폐쇄했다. 크랜머는 기도서를 제정해서 로마식의 예배를 탈피하고 나중에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이 세 사람 모두 최후는 좋지 않았다. 앤은 간통 혐의로, 크롬웰은 헨리의 넷째 부인을 잘못 중매했다는 이유로 헨리에게 참수되었고, 크랜머는 카타리나의 딸 메리의 손에 화형을 당했다.
헨리의 종교개혁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은 왕의 친구이자 재상이었으며 ‘사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였다. 문학가이며 법학자, 그리고 정치가였던 모어는 다재다능했지만, 별명을 완성하기에는 한 가지가 부족했다. 평소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 같은 개신교인들에 대해서 사뭇 적대적이던 그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한 헨리의 이혼과 국교회 창설에 반대했다. 헨리는 모어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자 런던탑에 가두었다. 감옥을 찾아온 딸과 아내가 신앙을 포기하고 살길을 찾도록 간청하자 “영혼을 파는 자는 세상을 다 얻어도 덧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토머스 모어는 우울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단두대에 오르면서 두려워하는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아주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도록 하게.” 1534년 모어는 단두대에서 참수되었고, 교황은 1886년에 시복했다가 사후 400주년이 되는 1935년에 성인으로 시성했다. 모어의 별명은 그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틴들의 성서 번역
헨리의 결혼은 교황과 카타리나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개신교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헨리가 사랑하는 앤 불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지낼 때부터 개신교에 호의적이었다. 앤은 윌리엄 틴들이 번역한 신약성서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틴들은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기회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일찍이 틴들은 루터의 성서 번역과 출판에 자극을 받아서 영어 성서를 번역했다. 그는 독일의 비텐베르크로 건너가서 열 달 동안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나서 1526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비밀리에 6천 부를 인쇄했다. 그의 번역은 나중에 국왕 제임스 1세의 지시로 제작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 90% 이상이 수용되었을 만큼 문체가 힘차고 간결하고 아름다웠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 틴들이 제작한 성서가 밀수업자들의 손을 거쳐서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토마스 모어는 상황을 바꿔보려고 수천 권의 신약성서를 구입해서 불태웠다. 하지만 그런 조처로는 틴들을 막을 수 없었다. 틴들은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많은 돈을 지신의 성서를 수정하는 데 다시 사용했다.
그렇다면 헨리 왕의 스캔들은 윌리엄 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530년 틴들은 소책자를 발행해서 카타리나와 이혼하고 싶어 하는 헨리 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사실 틴들은 헨리와 앤 불린을 반대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악화되는 영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책무를 느낀 것 같다.
문제는 틴들이 당시 정치 환경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성서를 기준으로 진단하고 나름의 의견을 제시했지만 돌아온 것은 헨리의 분노였다. 틴들은 자신의 책에서 왕의 결혼이 무효화 되어야 할 이유를 성서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썼다. 카타리나와의 결혼 생활이 타당하니 더 큰 수치를 당하기 전에 앤 불린과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요구했다. 이 일로 틴들은 자신의 지지자들과도 갈등을 빚었지만, 의견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틴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왕비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나중에 윌리엄 틴들이 이단의 혐의를 받아서 구금되자 앤 불린과 달리 헨리는 그에게 별다른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1536년 8월 틴들은 이단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성직을 박탈하는 절차를 거치고 나서 같은 해 10월에 처형되었다. 틴들은 사형수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도 시간에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틴들이 묶여 있던 기둥 바로 뒤에 서 있던 사형집행관이 힘껏 올가미를 죄고 나서 화형대에 불을 붙였다. 이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화형 전에 교수형을 집행하는 것은 죄수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물론, 틴들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국왕 헨리는 그로부터 두 해 뒤에 틴들이 완역한 마태복음을 승인했다. 그리고 1539년에는 크롬웰의 후원을 받아서 파리에서 발간된 「그레이트 바이블」을 영국 내 모든 교회에 일괄적으로 배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 성서는 틴들의 마태복음을 개정한 것이었다.
블러디 메리
영국의 종교개혁은 간단하지 않게 전개되었다. 1541년에 헨리의 셋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가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얼마 뒤에 제인이 세상을 뜨자 헨리는 이후로 세 명의 왕비를 더 맞이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왕비만이 운 좋게 헨리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의 뒤를 이어서 아홉 살의 나이에 국왕이 된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47-1553 재위)를 위해서 「성공회 기도서」를 편집했다. 이것은 정교하고 복잡한 라틴어 기도문을 보다 간단한 영어로 대체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크랜머의 기도문은 영국교회가 로마교회와 명확하게 선을 그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에드워드를 등에 업은 크랜머는 마음껏 독자적인 행보를 계속했다. 교회음악과 성찬식이 변화되었고, 영국교회의 신조가 새롭게 제정되었다. 하지만 크랜머의 개혁은 거기서 마침표를 찍었다. 기도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카타리나가 헨리 사이에서 유일하게 남기고 간 딸 메리 튜더(Mary Tudor, 1516-1558)가 왕좌를 차지했다. 그녀는 얼마 뒤에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예고했다. 메리는 영국을 과거처럼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개신교인들에게는 메리의 반동이었고, 가톨릭 교인들에게는 메리의 종교개혁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3백 명이 넘는 개신교인들을 화형대에서 처형하는 바람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다.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는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와 주교 휴 래티머가 있었다. 병사들이 화형을 준비하자 래티머 주교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오늘 결코 꺼지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는 촛불을 하나님의 은혜로 밝히게 될 것이다.” 나머지 개신교 지도자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독일과 스위스 등지로 급히 망명을 해야 했는데, 그 덕분에 취리히와 제네바를 비롯해서 기타 종교개혁의 중심지와 자연스럽게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영국이 오늘날처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앤 불린 왕비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때문이었다. 메리는 왕위에 오른 지 6년 뒤에 자식 없이 죽었다. 그녀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영국은 영원히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58-1603)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녀는 교황파의 기대와 달리 개신교적 성향을 숨기려고 들지 않았다.
아버지 헨리와 달리 ‘교회의 수장’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교황의 권위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국 기도문 안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사상을 모두 포함시킴으로써 우리가 성공회라고 부르고 있는 영국교회만의 독특한 신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청교도들(Puritans)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반종교개혁
16세기에 로마교회의 갱신을 바란 것은 루터나 칼뱅만이 아니었다. 가톨릭의 일부 지도자들 역시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반박문을 붙이기 몇 해 전부터 이미 나름대로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센을 중심으로 급속히 진행된 종교개혁의 속도와 세력 확산에 경악한 그들은 자신들의 개혁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재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개혁자들은 개신교인들과의 재결합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1541년 루터의 대리자들과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이 독일에서 만났다. 5백 년 뒤에 있게 될 교리적 합의를 예고하듯이 양측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과 구원하는 믿음은 선행을 낳는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문제는 성만찬의 해석이었다. 가톨릭 대표자들은 화체설에 동의해달라고 요구했다. 루터 진영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주장이었고, 결국 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이후로 로마교회는 또 다른 종교개혁을 진행했다. 스페인 출신의 어느 병사가 그 일에 간판으로 나섰다.
로욜라의 예수회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이냐시오 Ignatitus de Loyola, 1491-1556)는 1523년 32세의 나이에 예수님의 무덤을 둘러보고 무슬림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넝마를 걸친 그에게서 십자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그나티우스는 한쪽 다리가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구걸하고 길 위에서 자면서 한 달 반을 걸어서 당시 사람들이 지구의 배꼽이라고 부르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의 의심스러운 눈총을 받으면서 예리코, 베들레헴, 겟세마네를 차례로 순례했다. 그리고는 다리가 다 나오는 짧은 바지에 어깨가 드러난 검은 웃옷, 낡은 짧은 외투 차림을 하고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그곳을 떠나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그나티우스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1521년 전투에서 입은 심각한 부상이 계기가 되었다. 심각한 상처 때문에 한쪽 다리를 잘라낸 그는 요양을 하다가 성자들의 전기를 접하고서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그나티우스는 만레사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신비체험을 하고 난 뒤에 「영신 수련」(Spiritual Excercise)의 초고를 집필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글을 통해서 무엇보다 신비주의와 영성 훈련을 강조했다. 그는 30일간 영적 지도자와 일대일로 진행되는 영성 수련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헌신하도록 안내했는데, 지성을 강조하던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지도와 달리 시각은 물론 청각까지 영성 수련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요구했다.
성지를 떠나서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그나티우스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33세의 나이에 학생이 되었다. 라틴어를 공부하며 스페인의 여러 대학을 전전하다가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한 이그나티우스는 동료를 규합했다. 그들은 1534년 8월 보름 몽마르트 언덕의 성당에 모여서 청빈, 순결, 교황에 대한 충성을 서원했다. 교황은 1540년에 그들의 모임을 승인했고, 예수회(Societa Jesu)라는 이름의 종단은 그렇게 해서 결정되었다.
예수회는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1640년까지 5백 개 이상의 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했다. 예수회는 학교를 통해서 중부 유럽 귀족들의 자녀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켰을 뿐 아니라 개신교가 유럽 남부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냈다. 게다가 예수회는 로마교회의 최대 선교 세력이 되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는 개신교보다 무려 150년을 앞서 인도와 일본에 선교하고, 다시 중국으로 향하다가 세상을 떴다. 로마교회를 변화시킨 것은 예수회처럼 개혁적인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종교개혁의 영향과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 바오로 3세는 내부 개혁에 동의하는 새로운 주교단을 임명하고 종교재판을 새롭게 운영하면서 교황권을 회복해나갔다. 긴급한 정치적 현안이 해결되자 교황은 북이탈리아의 트리엔트에서 공회를 소집했다. 1545년에 시작되어 1563년까지 진행된 공회는 개신교 진영이 참여하기를 거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변화를 가져왔다. 면죄부 판매와 교회의 직무들이 대폭 폐지되었다. 그리고 성직자의 결혼 금지나 연옥의 존재와 같은 중세적 교리와 실천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트리엔트 공회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 오직 신앙으로만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루터의 주장은 오류이며, 사랑과 희망 역시 구원에 필요하다. 그리고 미사는 라틴어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결정은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회가 열릴 때까지 4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중세 유럽은 교황을 정점으로 결집된 하나의 기독교 세계였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유럽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자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은 곧장 증발했다. 유럽 곳곳에서 신·구교 간의 군사적 충돌이 빚어졌다. 독일에서는 1546년에 루터가 세상을 떠나자 신·구교 군대가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개신교 진영은 황제 카를 5세의 요구대로 가톨릭의 의식을 재건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에 따라서 가톨릭과 루터파 교회를 모두 합법으로 인정했다. 군주들은 백성들을 위해서 어느 쪽이든지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만일 군주가 가톨릭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신교를 믿는 군주가 있는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길 수 있었고, 그 반대도 물론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특혜는 루터파에게만 가능했다. 칼뱅이나 츠빙글리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재세례파와는 무관했다. 16세기의 유럽은 종교적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