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17 왕룽은 넓은 땅을 갖게 되었다. 이젠 자기와 한 필의 소만으론 그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없었다. 추수를 하는 데도 손이 모자라 새로 말을 한 필 더 사들이고 또 집도 한칸 더 늘려 짓고 왕룽은 이 모든 것을 이웃 칭 서방과 의논했다. "자네 농토를 내게 팔아 버리고 혼자 외롭게 사는 것보다 우리 집에 와서 일이나 거들어 주며 같이 살지 않겠나?" 칭 서방은 이 말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 하늘은 계절에 맞추어 비를 내렸다. 모판의 모는 점점 자랐다. 보리를 거둔 뒤에 물을 끌어들이고 두 사람은 힘을 다해 모를 심었다. 왕릉은 올해만큼 큰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었다. 비가 넉넉히 내려서 물이 풍족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를 심지 못했던 밭도 훌륭한 논이 되었다. 마침내 가을이 되어 추수할 때가 되니 풍성한 곡식은 왕룽과 칭 서방 두 사람 손으로는 모자라서 다시 마을 일꾼을 두 사람 사서 추수를 끝내야 했다. 황부잣집에서 산 땅에서 일을 할 땐 왕룽의 머리에는 몰락해 버린 귀공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자식들은 건실하게 단련을 시키리라고 다짐했다. 아침마다 두 아이를 밭까지 데리고 나가서 소나 말의 고삐를 잡는 작은 일이라도 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햇볕에 몸을 쬔다거나 밭 이랑 사이를 오고 가고 하는 그 고된 것이라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밭에서 일을 시켰으나 오란은 들에 내보내지 않았다. 이제 그의 아내는 가난한 집의 아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풍년이 들었으므로 왕룽 자신도 손수 일하지 않아도 될 처지였다. 추수한 곡식이 많아서 곡식을 간수할 장소도 부족했다. 그는 부득이 곳간을 한칸 더 늘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집안이 좁아 몸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또 그는 돼지 세 마리와 닭 몇 마리를 사서 흩어진 곡식을 먹게 했다. 오란은 집안에서 식구들의 새 옷도 짓고 새 신도 만들고 침대에 덮는 이불 위에 꽃수도 놓았다. 여지껏 집안에 없던 세 옷들과 침구들이 풍성해졌다. 그리고 오란은 이번에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아이를 낳았다. 산파를 부를 수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역시 혼자서 낳겠다고 고집했다. 이번 해산은 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녁 때 왕룽이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늙은이가 문간에서 벙글벙글 웃음을 띠면서 서 있었다. "이번 알엔 노른자가 두 개야." 방안에 들어선 왕룽은 아내 침대에 두 아이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사내애와 계집애가 똑같이 생긴 쌍둥이였다. 벼톨처럼 꼭 같은 모양이었다. 왕룽은 얼마나 기쁜지 큰 소리로 한 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다. "옳지, 그래서 보석 두 개를 갖고 싶어했구먼." 그리고는 자기가 한 재치 있는 말이 유쾌해서 또 웃었다. 오란은 기뻐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을 띠었다. 왕룽에겐 아무 근심도 없었다. 구태여 마음 쓰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 난 계집애 걱정 뿐이었다. 그 계집애는 말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말을 할 줄도 몰랐으며 또 바보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도 어린애처럼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애를 낳던 해의 비린내 나는 흉년 때문에 몹시 굶주려 그런지 혹은 다른 까닭인지 모르나 왕룽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으나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 '엄마' 하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다만 방긋이 무의미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왕룽은 그 애를 바라보며 얼마나 한숨을 지었는지 모른다. "조그만 것이...... 불쌍한 것......" 그리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를 그때 팔았더라면 산 사람은 죽여 버렸을 게다." 왕룽은 이 계집애를 팔려고 했던 일을 생각하고 더욱 딸을 측은해 했다. 때로는 들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계집애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왕룽이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무슨 말을 하면 방글방글 웃기만 했다. 왕룽과 그의 아버지가, 또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대로 살아온 이 지방은 5년에 한 번씩 흉년이 들었다. 하느님의 자비로 7년, 8년 때로는 10년에 한 번씩 흉년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흉년의 원인은 장마가 지거나 가물거나 혹은 북쪽에 있는 강이 터지거나 하는 것이 원인인데, 먼 산에 큰 비가 내리거나 겨울에 쌓였던 눈이 갑자기 녹아 버려서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고생하여 쌓은 제방을 무너뜨리고 전답을 쓸어 버리는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흉년을 당할 때마다 멀리 떠나갔거나 이듬해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흉년이 들어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난 해에 쌓아둔 곡식으로 다음해까지 먹을 수 있도록 열심히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이러한 그의 결심을 하느님도 도왔는지 10년 동안이나 풍년이 계속되었다. 해마다 1년 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곡식을 거두었다. 머슴도 이제는 일곱 사람으로 불어났기 때문에 그의 집 뒤에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 뜰을 내다볼 수 있는 큰 방과 그 양쪽에 두 개의 작은 방을 달았다. 지붕은 기와를 이고 벽은 밭에서 떠온 흙을 이겨서 쌓아 올리고 겉에 회를 발라 깨끗하게 보였다. 그의 가족은 이 새집으로 옮기고 앞에 있는 헌집에는 칭 서방과 머슴들을 들게 했다. 이즈음에 와서 왕룽은 칭 서방을 여러 가지로 다루어 본 결과 그가 정직하고 충실하다는 것을 알고 그로 하여금 머슴에 대한 감독을 하게 하고 그 대우도 후하게 했다. 따라서 먹는 것 외에도 매달 은전을 두 닢씩 손에 쥐어 주었다. 왕룽은 항상 그에게 많이 먹기를 권했으나 칭 서방은 언제나 살이 오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말라 있어서 생기가 없어 보였으나 일에는 지극히 열심이었다. 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묵묵히 일만 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나지막이 말할 뿐 묵묵히 일만 할 때가 그는 가장 행복하게 보였다. 그는 몇 시간이라도 가래를 움직이면서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과 해질녘엔 물이나 거름통을 져다가 밭에 뿌렸다. 칭 서방은 아무 말 없이 일하면서도 일꾼들에 대한 감독을 잘 한다는 것을 왕룽도 알고 있었다. 머슴들 중에 누가 매일 대추나무 밑에서 너무 낮잠만 잔다거나 여럿이 같이 먹는 밥상에서 두부를 보통 사람의 두 몫이나 먹는다거나, 타작하는 날 자기 여편네나 자식들을 오게 해서 도리깨질 하는 밑에 떨어진 곡식을 슬쩍 집어 가게 하는 것을 보면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추수가 끝나 왕룽과 일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하는 자리에서 왕룽에게 귀띔해 주었다.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내년에 쓰지 맙시다." 하고 칭 서방은 충고했다. 두 사람 사이의 정은 이제 형제 이상이었다. 보통 형제와 다른 것은 나이 적은 왕룽이 형이 되고, 또 칭 서방은 그가 남에게 고용되어 남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5년이 지난 무렵부터 왕룽은 직접 밭에 나가서 일할 틈이 없었다. 토지가 너무 많아져서 농사 관리라든가 생산물의 판매라든가 일꾼들을 지휘하는 일만 해도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탓이다. 이즈음에 그가 가장 불편을 느끼는 것은 글을 모르는 일이었다. 종이에 붓과 먹으로 씌어진 글자를 읽을 수 없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특히 그가 곡물을 매매하는 상점에서 쌀이나 밀을 파는 계산을 할 때는 그렇지 않아도 코가 높은 장사치들에게 허리를 굽신굽신 하면서, "미안하지만 이것 좀 읽어 주시오. 난 일자무식이라 글을 모릅니다." 하고 부탁해야 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계약서에 서명할 때 이름을 대신 써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그러했다. 하찮은 점원들까지도 그런 대필을 할 때면 그를 아주 경멸하듯이 마구 내갈기었다. 더구나 대필하는 사람이 짓궂게 농담을 걸면 더욱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왕룽, 룽자가 용 룽(龍)자인가, 귀머거리 룽(聾)자인가?" 그럴 때면 왕룽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쓰시죠. 난 무식해서 제 이름조차 모릅니다." 어느 해 가을에 곡물 가게에 간 왕룽은 거기에서도 이와 같은 조롱을 받았다. 마침 한낮이라 거래도 끊어져 점원들은 시간을 보내기가 무료한 판이므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모두들 웃어 대는 것이었다. 왕룽의 아들 같은 놈들까지도 웃어 대는 것을 본 그는 매우 불쾌해져서 집에 돌아왔다. 그는 밭을 지나면서 중얼거렸다. "성안 놈들은 한치 땅도 못 가진 주제에 내가 종이에 쓴 그놈의 글자를 못 알아본다고 거위 같은 소리로 비웃었지...... 어디 두고 보자." 그러나 분노가 가라앉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무튼 내가 못 읽고 못 쓰니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제부터 큰 놈은 농사일을 시키지 말고 성안 서당에 보내자. 그래서 내가 곡물 가게에 갈 때면 데리고 가서 내 대신 쓰게 하고 읽게 하자. 그러면 나 같은 부자를 보고 비웃지는 않을 게다."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는 그 날 곧 큰아들을 불렀다. 큰아들은 올해에 열두 살인데도 키가 퍽 컸다. 광대뼈도 크고 손발이 큰 것은 자기 어머니를 닮았지만 눈은 아버지를 닮아서 날카로워 보였다. "넌 오늘부터 들에 가지 말고 서당에 가서 글을 배우도록 해라. 글을 배워야 계약서도 쓰고 내 이름도 대신 쓰게 되니까." 소년을 햇볕에 그을은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반짝였다. "아버지, 저도 2년 전부터 서당에 가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어요." 그러자 이 말을 엿들은 작은 아들이 뛰어들어와 자기도 서당에 보내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작은 놈은 말을 배우고부터 아주 고집에 세고 무엇이든 형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터뜨린 울음을 그치는 법이 없었다. 이 날도 아버지에게 억지를 부리었다. "그러면 나도 들에 안 나갈테야. 형은 서당에 가만 앉아서 글을 배우는데 나만 머슴처럼 일하란 말이야? 난 아들이 아닌가 뭐." 왕룽은 이 둘째놈의 고집엔 언제나 백기를 들곤 했다. 그래서 얼른 승낙해 주고 말았다. "응, 그래, 그래. 같이 가거라. 어느 때 어떤 놈이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땐 어떤 놈이든 쓰일 테니......" 왕룽은 아내를 성 안에 보내 두 아들의 두루마기 감을 떠 오게 하는 한편 자기는 문방구점에 가서 종이와 붓, 먹, 벼루 등을 마련했다. 사실 그는 이런 것들을 갖추어 주고 또 서당에 찾아가 입학에 대한 절차까지도 끝냈다. 서당은 서문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선생은 옛날에 과거에서 떨어진 어떤 늙은 노인이었다. 그 훈장은 그의 집 가운데 방과 책상 몇 개와 걸상을 갖다 놓고 명절 때마다 약간의 곡식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이 공부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배운 글을 잘못 읽을 때면 언제나 커다란 접는 부채로 사정 없이 때리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침부터 늦도록 공자왈 맹자왈 하고 정신 없이 읽었다. 그러나 따뜻한 봄날이나 여름날에는 아이들도 좀 쉴 수 있었다. 점심 때쯤 되면 나이 많은 훈장은 꼬박꼬박 졸고 마침내 그 조그마한 방이 떠나가도록 코를 고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때를 만나 것처럼 소곤거리고 가만가만 장난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떤 놈은 제멋대로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려서 서로 보여주곤 하였다. 어떤 놈은 늙은 훈장이 코를 골면서 아무렇게나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파리가 날아드느니 안 드느니 하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늙은 훈장은 이렇게 졸다가도 갑자기 눈을 뜨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졸지 않았다는 듯 슬그머니 눈을 뜨고 아이들이 눈치 채기 전에 곁에 두었던 부채로 때리는 소리와 맞은 놈의 우는 소리가 이웃까지 들렸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이렇게 칭찬했다. "거참, 열심히 가르치는 훈장이야." 왕룽이 그의 두 아들을 이 훈장 밑으로 보낸 것도 그런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처음 서당에 데리고 가는 날 왕룽은 아이들보다 앞서서 걸었다. 부자(父子)가 나란히 걷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는 푸른 보자기에 달걀을 싸 가지고 가서 훈장에게 내놓았다. 왕룽은 그 훈장의 큰 놋테 안경과 품 넓은 검은 두루마기와 겨울에도 커다란 부채를 들고 있는 위엄에 기가 질려서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넙죽 절을 했다. "훈장님, 여기 제 자식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 자식놈은 머리가 둔해서 먹물을 넣자면 자주 때려야 하실 겁니다. 아무쪼록 많이 때려서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두 아이는 한쪽에 서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이 신입생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두 아들을 서당에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왕룽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 서당에 있는 여러 아이들 중에 그의 아들들처럼 키가 크고 건장한 얼굴을 한 아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성문을 지나올 때 마을 사람을 만났다. 어디 갔다 오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식놈들을 서당에 보내고 오는 길이오." 하고 자랑하였다. 마을 사람이 깜짝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왕룽은 더욱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덧붙여 말했다. "이젠 자식놈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글이나 많이 가르쳐 볼 작정이오." 그러나 그 마을 사람과 지나친 뒤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큰놈이 공부를 잘 해서 높은 벼슬을 할 지도 모르지." 오늘날까지 두 아이는 다만 '큰애', '작은애' 라고만 불려왔다. 훈장은 그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훈장은 아이들의 아버지의 직업을 물은 뒤에 형을 눙언(農恩), 작은 놈은 눙운(農溫)이라고 했다. 돌림자인 눙(農)자는 땅을 갈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