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建國紀元四千二百四十四年一月
義捐金総决算公告
大東偉人安重根傳
<해제>
「대동위인 안중근전(大東偉人 安重根傳)』
장세윤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얼삔 역에서 일어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 의거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더욱 고무되었으며, 일제 침략자와 부일배들을 응징하고자 하는 일련의 의열투쟁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사건 직후부터 현장인 만주지역과 국내는 물론 중국 본토와 연해주, 미주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들과 해외 동포들에게도 널리 전파되어 동포들의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단결을 촉진하는 주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안의사의 거사와 순국 직후부터 국내외 각지에서는 전기류가 많이 저술 · 출판되어 광범위하게 읽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는 비록 일제의 부당한 재판 결과 1910년 3월 26일 중국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지만, 그는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을 상징하는 대표적 애국지사로 길이 청사에 남게 되었다.
『대동위인 안중근전』은 1911년 1월 미국 하와이의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에서 발행하였다. 지은이는 홍종표(洪宗杓)이다.
표제는 한자이지만 내용은 한글로만 서술 되었기 때문에 최초로 출판된 안중근 의사의 한글전기로 판단된다.
이 책은 독립기념관 건립공사와 자료수집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84년 12월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에 기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는 독립기념관 제2전시관의 안중근 의사 전시공간에 전시되어 안의사의 고난에 찬 투쟁과 구국활동을 증언하고 있다. 이 책의 크기는 가로 17cm, 세로 24cm로 지질은 당시 미국에
서 많이 쓰이고 있던 모조지이다.
지은이 홍종표는 홍언(洪焉)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동해수부(東海水夫) 또 는 리처드 홍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미주지역 동포사회의 언론기관과 민족운동계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이다. 그는 1880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중국과 간도 등지를 전전한 뒤 1905년 형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갔다. 그 후 1909년 2월 창간된 하와이
교포신문 『신한국보』 (주간)의 주필이 되어 한인사회의 계몽과 조국의 국권회복, 기타 동포들의 인권보호와 민족교육 장려 등 언론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홍사단(興士團)의 창립 멤버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을 맡아 미주지역 한인들의 단합에 노력하였으며 김구(金九)의 한인애국단을 성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국민회역사(國民會歷史)』와 『추정(秋) 이갑전(李甲傳)』, 『동국명장전』등 역사서를 저술한 역사가이기도 했으며, 『동해시초(東海詩抄)』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했다.2)
특히 그가 주필로 있던 기간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신한국보』
1909년 11월 2일자(제35호)에 이 소식을 즉각 대서특필하는 등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 신문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할 때까지 그에 관한 논설과 소식 등을 계속 게재하여 안의사의 활약상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동포들의 애국심과 단결을 고취하였다.>
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13권, 1996, 774쪽. 그는 해방 후에도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로 활약하는 등 미주지역 언론에 종사하다가 1951년 3월 미국에서 서거하였다. 1995년 한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尹炳奭,『安
종합적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제9집(1998), 119~120쪽.
의사의
3) 상세한 내용은 199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자료총서 제11집
신한국보』 1909년 11월 9일자(제36호)부터 이듬해 3월 29일자(제88호)에 실린 기사 참조. 특히
1910년 3월 8일자(제85호) 및 3월 15일자(제86호) 신문에는 안중근 의사의 공판기 및 최후진술이 비교적 소상하게 보도되고 있어 이 신문의 관심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의 지은이 홍종표는 안의사의 거사 당시 신한국보』 주필이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에 관한 정보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리고 풍부히 접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해외 거주자라는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에 대한 전기를 비교적 빠른 시기에 간행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 책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서술은 단지 16쪽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름대로 비교적 정확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고 안의사의 법정투쟁과 주장을 상세히 서술함으로써 미주지역 동포사회에 안의사의 활약상을 신속히 전파했다는 점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의 뒷부분에는 하와이 각지 교민들의 의연금 출연 내역을 정리한 '의연금 총결산공고서'가 부록으로 25쪽이나 실려있다. 결산보고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의 변호비용 등 기타 지원활동비 명목으로 1909년 12월부터 이듬
해 3월까지 모두 2,916 달러라는 비교적 많은 자금이 모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거의 모두가 날품팔이 노동자로 일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하와이 한인 교민들의 놀라운 성원과 응집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록에 밝혀져 있는 성금 출연자 명단은 무려 1,583명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거주지역 단위로 성금을 낸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사실상 하와이 교민 대다수가 안중근 의사의 투쟁에 동조하고 그의 구명활동을 지원하는 등 대부분의 동포들이 지원비용을 갹출하는 형식을 통해 안의사의 투쟁을 성원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는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동포들에게 강한 구심점을 형성케 하고,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주요 전환점
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국내외에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새삼 그 의미를 재확인하게 된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을 응징하고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 · 순국한 안중근 의사를 '대동위인(大東偉人)'으로 매우 높이 평가하고 그의 생애와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를 감동깊게 서술하였다. 물론 한문이 섞인 고졸한 문투와 만연체 문장때문에 우리들이 읽기에 약간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니는 가치는 적지 않다.
미주지역 동포들에게 안의사의 의거가 '한국독립전쟁의 일부분'으로 전개된 것이라는 사실과 안의사가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투쟁하다가 포로가 되었으므로 국제공법과 만국공법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안의사의 당당한 논리를 그대로 대변한 부분은 지은이의 안의사 의거에 대한 평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지은이의 혜안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특히 지은이가 미주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계와 언론계의 안중근 의사 의거에 대한 평가를 서술한 부분은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장점이라고 하겠다.
즉 구체적으로 열거한 미국 신문만 하더라도 뉴욕의 써 신문, 시카고 이브닝 포스트, 밴쿠버 세계일보, 하와이 자유보, 그리고 미주발행 일본인 신문인 노동신보, 미국 각지에서 발행되던 중국인 신문 등을 언급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의 의거 직후 곤경에 처한 안중근 의사와 그 유족의 구제비용으로 하와이 각지에서 많은 동포들에게 2,916달러를 모금한 뒤, 정재관(鄭在寬)·차석보(車錫甫) · 유진률(兪鎭律) 등이 주도하던 블라디보스톡의 안의사 구제공동회에 1,700달러를 송금한 사실을 기록한 것과 성금 갹출 동포들의 명단을 수록한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사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대동위인 안중근전』은 이처럼 나름대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책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지은이 홍종표가 국내에서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료부족 등의 이유로 사실에 어긋나는 서술이 일부 있는 것은 사소한 한계라고 해야 하겠다.
예를 들면 맨 앞에서 밝힌 안의사의 출생연도는 건국기원(단기) 4211년 즉 1878년이 아니고 1879년(단기 4212년)이며,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건양(建陽) 2년 (1897년)이 아닌 1894년인 것이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최근의 역사인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평가를 반영한 결과라 생각된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 역에서 이토를 처단한 시기도 건국기원(단기) 4200년이 아닌 4202년(1909년)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또 안의사가 중국 여순(旅順) 감옥에서 일제의 불법재판으로 순국한 날짜는 이 책에서 서술한 3월 25일 이 아니고 3월 26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 책은 다른 종류의 안중근 전기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투쟁상을 널리 알리고, 그 의미를 반추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1910 년대 하와이 지역 한인동포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도 유익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4)
4) 최근 윤병석 교수와 홍선표씨에 의해 대동위인 안중근전(大偉人 安重根傳)』에 대한 간단한 해제와 자료소개가 있었다. 즉 윤병석 교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양주 문서에 소장되었던 이
책을 열람하고 앞의 2에서 인용한 논문과 논문집을 통해 이 책에 대한 탁견을 피력하는 한편, 부록에서 그 내용을 영인 · 소개하였다. 그리고 독립기념관에 재직하고 있는 홍선표 연구원 역시 1998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 미주지역 수집자료를 토대로 발간한 미주한인 민족운동자료(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미주편 4) 의 해제에서 이 책을 간단히 소개하고 다른 자료와 함께 그 자료집에 전문을 영인 수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제에 이 책을 영인 · 발간하는 이유는 이 책을 단행본으로 펴냄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생애와 구국투쟁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大東偉人安重根傳
한국의 독립을회복ㅎ며 동양의평화를 유지려면 일본을 벌ㅎ야 국치를씨슨후에
야 가히웅도를 베풀줄노 인명 였고, 임군이 욕을음에 신하가죽는것이 당연한일이니
엇지몸을 약 리오호야 강지격렬한 마음을 결단흐던 날 국가에 되호야는 헌신
부터
덕정신을 품고 회의에 나와서는 동포를 달하여 흉군입국 고취
을
년은 의병으
로 왜적과 전투ㅎ고 유년은 교육을베푸러 후비에 보고 일본으로 실업을 면려놓야
국민의무를 깨닫게 기로 반성을 노력 엿노라고 려슌구법당에서 세계사의게 큰소리
로 선언ㅎ던 안의사의 일홈은 중근이 적은순흥이니 한국의 위인이오 동양의 영결이라
팔을 잡고 세상에 나온후에 국가를홈에 집을이고 동양을위ㅎ야 몸을발엿스니 공의
스업은 곳국가요 공의 곳동양이라 구축히 적인가를 말힐것이 업거니와 거금
는
삼십삼년 건국기원
히쥬동문의에서 성
이빅십일년에
구간이고 면목이
괴ㅎ며 흥회가 뢰락ㅎ야 어려서브터 막연히 에뛰여는 미지가잇더라 일찍이 가
의 복이원만약 어진 부모의 가르침이 형제가 심인이니 중근이 그맛이더라 가업
며
이자못 ㅎㅎ 야 유년성가 극히평온하고 집에잇셔 당샹감지를 이바지는 여가에
문학을연구ㅎㅎ니 다른날 동양평화론의 일편문이 실노이에 엇은바이더라 대기전투비
략은 영웅의 본령이라 ㅎㅎ 장군이 엇지 하에 늙기를 즐기리오 이에 붓을던지고
군략상에뜻을 기우려 궁마를 조화더니 슬하에 의지 쟈가 부모를따라 신에
르러 경계동에서야 갈건복으로 원을 다스리며 울ㆍ히 슈년월을 보닉니 중근의
대동위인 안중근
複製不許
一九四六年 四月 四日 印刷
1946년 4월 4일 인쇄
一九四六年 四月 八日 發行
1946년 4월 8일 발행
【臨時定價 貳拾五圓】 임시정가 25전
서울市 明洞二丁目一番地
編輯乘 發行人 朴性綱 (박성강)
서울市明洞二丁目一番地
印刷所
發行所 京鄕雜誌社
발행소 경향잡지사
안중근의사자료집
인쇄 1999년 2월 25일
발행 1999년 3월 5일
발행처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충남 천안군 목천면 남화리
(0417)560-0401-0407
배포처 : 국학자료원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28-7 성우B/D407호
(02)2293-7949, FAX 02)2291-1628
값 30,000원
*안중근의사
중국 랴오닝성 뤼순감옥에 수감 중이던 안중근의사의 생전 모습이다.
출생-사망1879.9.2 ~ 1910.3.26본관순흥별칭아명·자 응칠, 세례명 도마(토마스, 다묵)활동분야독립운동출생지황해도 해주주요수상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주요저서《동양평화론》
본문
출생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청년기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안태훈이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으며,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의병활동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동의단지회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거사하기로 ᆢ
중략.
[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영인·교양총서 [5] 안중근의사자료집 1. 대동위인 안중근 2. 안중근선생 공판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국학자료원|작성자 다큐문 맹순이 맹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