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장 대혈륜궁(大血輪宮)
①
팔월 보름.
십오야(十五夜)의 교교한 달빛이 천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하남성(河南省)의 대별산(大別山) 망아봉(忘我峯).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망아봉 위에도 팔월 십오야의 월광이 교교히 쏟아져 내리는 시각이었다.
달빛을 한 몸에 받으며 망아봉 정상에 서 있는 혈의청년이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청년의 모습은 몹시도 고독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만월을 올려다보던 청년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달빛이 몹시도 밝군."
투명했으나 시리도록 차가운 음성을 가진 혈의청년. 그는 혈륜공자라고 불리우는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뒷짐을 지고 달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런 백천강의 뒷편에는 여섯 인영들이 무릎을 꿇고 부복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느낌이 달라보이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엄숙한 표정이 역력했다.
뒷짐을 진 채 만월을 올려다 보던 백천강이 입을 열었다.
"강호육기. 그대들은 모두 약속을 어기지 않았군."
백천강의 발아래 부복하고 있는 여섯 인영들. 그들은 바로 백천강이 굴복시킨 무림의 기인들이었다.
한동안 만월을 올려다보던 백천강은 문득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한 노인에게 향했다.
"만사지관, 그대는 그 장소를 찾아 내었소?"
백천강은 단호하게 물었다. 만사지관 구천서가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다행히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소이다. 그곳은 바로 이곳 대별산의 망혼애였소이다."
"망혼해라......."
백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소. 오래 전부터 괴이한 소리가 끊이질 않고 들려오는 곳......."
만사지관 구천서는 공손히 말했다.
"그 음의 출처까지 조사했으나 그것만은 알아내지 못하였소이다."
"수고했소."
만사지관 구천서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몸을 돌린 백천강이 고개를 들었다. 이어 그는 중천에 떠오른 만월을 올려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그의 눈동자에는 만월이 담겨 있었다. 문득 백천강의 눈 속에 담긴 만월이 사라지며 짙은 살기가 은은히 떠올랐다. 그는 냉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을 모은 것은... 이곳 대별산에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대역사를 벌이기 위해서요."
"......!"
강호육기는 일제히 흠칫 몸을 떨었다.
백천강의 냉혹한 음성 속에 실려있는 짙은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추측을 확인이라도 시키듯이 백천강의 차갑고 싸늘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과거 기환궁이 묻혔던 자리에 이제 본인이 대혈륜궁을 세울 것이오."
"아!"
강호육기는 몸을 부르르 떨며 탄성과 신음을 발했다.
"대혈륜궁은 무림사상 최강의 존재가 될 것이오. 뿐만 아니라 정도와 사도를 가리지 않고 위선을 일삼는 자들의 심판장이 될 것이오."
"......!"
강호육기는 고개를 들 염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은 백천강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전율한 것만 같은 혈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음성에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백천강의 냉막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대혈륜궁은 신을 능가하는 조화궁(造化宮)이 되어 영세(永世)를 군림할 것이오."
"......!"
"대혈륜궁은 하늘도 땅도 가둘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될 것이오. 대혈륜궁은 인간이 만든 최대의 영세제일궁(永世第一宮)이 될 것이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었다.
한 인간이 천하를, 아니 하늘을 상대로 도전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②
한 점 미풍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호육기의 옷자락들이 떨렸다. 그것은 격동과 흥분을 감추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한동안 만월을 올려다보던 백천강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이번에는 재보 화양금을 바라 보았다.
"재보. 그대는 황금장의 전 재력을 동원하라. 대혈륜궁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은 그대가 책임지고 조달해야 한다."
그 말에 화양금이 이마를 땅에 대며 말했다.
"복명(伏命)하겠소이다."
화양금의 톤 높은 음성이 가늘게 떨려나왔다.
재보 화양금.
아니 원래는 만금대인(萬金大人) 모용천기(慕容天期)의 딸이었던 모용란(慕容蘭)이었다.
그녀는 혈의공자에게 만변환신대법(萬變幻身大法)을 익힌 이후로 혈륜공자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는 혈륜공자의 존재가 너무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아아... 그리웠던 분. 하지만 내게서 너무도 멀리... 높이 계신분! 당신은 소녀의 마음을 알고 계신가요?'
모용란은 이마를 땅에 대었다. 그런 모용란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백천강의 차가운 음성이 다시 들렸다.
"신기자. 그대는 대혈륜궁을 설계하시오. 그대가 알고 있는 기관토목학을 총동원하여 대혈륜궁을 천라지망으로 만드시오."
"......!"
백천강의 말이 끝나는 순간 신기자 공손연은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그는 백천강에게 굴복은 하였지만 그때까지 마음으로는 승복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고금제일... 영세제일대궁을... 나 공손연의 힘으로 짓는다!'
불현듯 그의 가슴이 들끓었다. 뒤이어 그는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관토목지술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손으로 천하제일의 대혈륜궁을 짓는다는 사실이 불현듯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신기자 공손연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그런 기회를 놓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노부. 심혈을 쏟겠소이다!"
공손연은 격동하는 가슴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뒤에 공손연은 이마를 땅바닥에 박았다.
백천강의 눈이 옮겨갔다. 그의 눈에 교활하게 눈알을 굴리고 있는 귀진자 서문량이 보였다.
"귀진자."
"네!"
귀진자는 흠칫 떨었다.
"대혈륜궁과 그 궁 주위에 설치할 고금제일의 절진의 설치를 그대에게 맡기겠소."
"아... 알겠소이다."
귀진자 서문량은 급히 대답했다.
일순 그의 눈에 음흉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백천강의 기에 눌려 급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백천강은 이번에는 활사묘인 사마방을 돌아보았다.
"활사묘인. 그대에게는 대혈륜궁의 화원을 천하제일의 화원으로 만드는 일을 맡기겠소. 사해팔황(四海八皇), 새외변방(塞外邊方)을 비롯한 해외의 모든 곳의 화목을 모두 대혈륜궁에 옮겨 심으시오. 대혈륜궁은 그 어떤 궁보다도 아름다워야 하오."
"......!"
사마방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장춘곡을 천하제일의 화원으로 만드는 데 한평생을 허비했다. 그런데 또다시 그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마방의 마음 속에 한 가닥 욕망이 일어났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만약 천하제일의 재력을 소유한 자가 밀어준다면!'
그렇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마방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마침내 사마방이 고개를 땅에 박았다.
백천강은 마지막으로 무유생 상무효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백천강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나타났다.
그 표정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였던 표정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뜻밖에도 무유생 상무효를 바라보는 백천강의 얼굴에는 깊은 신뢰가 어렸다.
"대혈륜궁 각처의 벽화와 조각상들을 당신에게 맡기겠소. 그리고 특별히 당신에게 차후 맡길 것이 있소."
"......."
상무효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눈으로 승낙의 뜻을 던졌을 뿐이었다.
강호육기에게 일일이 지시를 내린 다음 백천강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필요한 인력은 이미 확보하였소. 일백대 표국의 삼천 표사들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오."
"오!"
모용란을 제외한 다섯 노인이 모두 탄성을 발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중원 곳곳의 백대표국이 문을 닫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대혈륜궁을 짓기 위한 혈륜공자의 치밀한 안배였다니!'
백천강의 발 아래 부복하고 있던 강호육기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천강은 다시 등을 돌렸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맡은 바 일을 시작하시오. 모든 일에 한 가지도 착오란 일을 수 없소. 오직 성공만이 있을 뿐이오."
그 순간 신기자 공손연이 물었다.
"기간은 언제까지 입니까?"
백천강은 차갑게 말했다.
"육 개월."
"오오... 반 년이라니?"
"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육기는 모두 대경실색했다.
"반 년. 반 년 안에 모두 끝내야 하오. 단 하루라도 늦어지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
백천강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의 냉혹무비한 음성은 여섯 사람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본인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복치 않소. 그대들은 더이상 이의를 제기치 마시오."
그는 말을 마친 후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중원에는 피바람이 불리라. 그러나 그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지. 시작... 후후훗!"
그는 말을 마쳤다.
스스스.......
그 순간 백천강의 신형이 유령처럼 흩어졌다.
백천강이 사라지자 고개를 든 강호육기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오로지 재보로 화신한 모용란의 눈만이 안개가 어려 있을 뿐이었다.
'야속하신 분... 한 마디쯤... 하실 일이지.......'
그녀는 백천강이 사라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새벽이 오려는 것인가. 서편으로 넘어가는 월광이 망아봉을 뿌옇게 흐려놓기 시작했다.
③
불혼애(佛魂崖).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불상은 아직도 미완성이었다.
석불은 뚜렷한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어려있어야 할 미소가 없었다. 미소를 잃어버린 석불.
석불은 미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소를 지을 입이 없었다.
입을 가지지 못한 부처가 고해를 헤매는 중생을 위해 어떤 위로의 말을 해주겠는가?
절대적인 진리란 세월의 무상함뿐이라는 뜻일까? 미완성인 채로 세상을 굽어보는 석불에는 푸른 이끼가 끼여 있었다.
"......."
그런 석불의 연꽃과도 같은 발치 아래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중년인이 먼저 보였다. 중년인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는 낡을 대로 낡아버린 회포승의를 입고 있었다. 무릎에는 녹슨 정과 쇠망치가 놓여 있는 중년인. 그는 다름아닌 천무대법사였다.
중년인의 발아래 또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눈처럼 새하얀 백삼을 입은 청년이었다. 청년의 신색은 극히 영준무비했다. 뿐만 아니라 기도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중년인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청년은 가히 천하제일의 미남자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청년은 날카롭고 깨끗한 검미와 우뚝한 콧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다소 오만해 보이기는 하나 이지적인 입술을 지니고도 있었다. 청년의 두 눈에서는 강렬한 신광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신주제일룡(神州第一龍) 사유성(査流星).
바로 정도무림의 태양과도 같은 청년이 그였던 것이다.
"......."
오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잠시 후 천무대법사는 눈은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유성, 이제 너의 양 어깨에 천하무림의 안녕이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는 백일 동안의 천지교원불통대법을 마쳤다. 그것은 소림사상 두 번째이다."
천무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던 사유성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첫 번째는 누구입니까?"
천무대선사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맺혔다.
"헛허.... 이 못난 사부다."
"아, 어쩐지......."
사유성은 탄성을 발했다.
천지교원불통대법(天地交元佛通大法).
그것은 소림에서 극비리에 전해져 오는 극히 신비한 대법이었다. 또한 그것은 소림의 흥망이 달린 일이 아니면 결코 전개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비술이기도 했다.
소림에서 가장 연로하고 내공수양이 깊은 구인의 법승들이 단 일인의 기재를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진원(眞元)을 탕진해 가면서까지 발모세수,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개정대법(開頂大法)을 시행하는 것이 바로 천지교원불통대법이었다.
그 대법을 시행하면 시술자는 진기가 고갈되어 명이 단축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반면에 시술을 받은 자는 일거에 생사현관(生死玄管)과 천지쌍교(天地雙交)가 타통될 뿐만 아니라 일약 삼백 년의 내공을 얻게 되었다.
결국 천지교원불통대법을 전수받은 자는 그야말로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절대고수가 되는 것이었다.
과거 소림사상 최고의 기재라던 천무대법사. 그도 바로 이 대법으로 인해 탄생한 기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그 대법을 시술받은 것이다.
천무의 말이 이어졌다.
"너 하나를 위해 소림최고의 배분을 지니고 있던 항마구법사(降魔九法師)가 입적하셨다. 너는... 그 분들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셈이다."
"알고 있습니다!"
사유성의 대답은 엄숙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어찌 그 기쁨을 감출 수 있을 것인가.
무림 후기지수의 으뜸이며 내일의 지주가 될 신주제일룡의 얼굴에는 은은한 신광과 함께 자만심이 감돌고 있었다.
"이렇게 큰 희생을 치뤄가면서까지 너를 키운 이유를... 알고 있느냐?"
사유성은 엄숙히 말했다.
"모두가 무림정기(武林正氣)를 수호하라는 뜻인줄로 아옵니다."
"아미타불.... 당금 무림은 난세이다. 난세는 영웅을 부르고 있다. 너는 그 영웅으로 선택된 것이다."
순간 사유성의 미간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두 눈에서 일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야망의 빛이었다.
④
신주제일룡 사유성.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에 있는 명황조(明皇朝)의 대원수(大元帥) 사광천(査光天)의 직계였다.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문의 달인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던 그가 이제는 무에 있어서도 능히 천하제일을 바라보는 위치가 된 것이다.
그런 지위에 있는 사유성이 천하에 부러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못이룰 일이 없었다.
야심(野心).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새 사유성의 가슴 속에는 원대한 야심이 부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어지러운 강호무림의 난을 평정하고 일통(一統)하리라는 야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더우기 그는 천지교원불통대법으로 인해 소림사상 두 번째의 최강자가 되지 않았는가? 어쩌면 그의 야망과 포부는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염려 마십시오. 사부님! 이 유성이 있는 한 무림에는 사마들이 결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핫핫... 이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그들을......."
"닥쳐라!"
"......!"
천무의 입에서 갑작스런 호통이 터져나왔다. 그 때문에 사유성의 패기만만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
천무대법사는 한동안 사유성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
사유성은 천무의 갑작스런 호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의혹의 눈빛으로 천무를 올려다 보았다.
잠시 후 천무는 침중하게 말했다.
"너를 강자로 키운 것은 군림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약자를 보호하라는 뜻이었다. 알겠느냐?"
그 말에 사유성이 불만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강자를 다루려면 힘... 힘이 필요합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도 꺾어 누르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쯧쯧.... 틀린 말이다. 강한 것은 부러지기가 쉽다. 이유제강(以柔制强)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결국 너는 약자를 지켜야겠다는 의식보다도 사적인 명예욕에 치우쳐 있구나."
"......."
대답대신 사유성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은 어쩌면 얼굴에 드러난 불만의 기색을 감추기 위해서 였는지도 몰랐다. 천무대사는 탄식하며 불호를 외웠다.
"명예란 결국 공허한 것이다. 아미타불.... 유성아, 네 마음은 운무처럼 신비롭되 바람처럼 형태를 보이지 않아야 한다. 알겠느냐?"
"운무처럼... 바람처럼......?"
사유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사유성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너의 눈에는 야심이 표출되고 있다. 그것은 효웅(梟雄)의 욕망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느냐?"
천무대선사는 탄식했다.
이어 그는 고개를 들어 야천을 바라보았다. 천공에 매달린 별들이 무림에 휘몰아칠 풍운을 예고하듯 흐릿한 빛을 발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천중(天中)의 정기가 흩어지고 있다. 반면 적미성(赤眉星)과 천살성(天煞星)이 붉게 타고 있다. 머잖아 강호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것을... 네가 막아야 한다."
사유성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그의 눈에 흐르던 신광은 안으로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너는 대법을 무사히 마쳤을 뿐 아니라 노납이 그간 깨달은 달마십팔해(達磨十八解)를 완전히 이어 받았다. 이제 네가 나설 때다."
사유성은 부복했다.
"길을 일러 주십시오."
천무대선사는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이번의 대혈겁은 과거의 악연이 뿌린 씨가 발아한 것이다. 모두 업보이나... 거둘 것은 거두어야 한다."
"......."
천무대선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인간의 마음에 증오심과 욕망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사유성은 묵묵히 부복한 채 듣기만 했다.
"천기를 짚어보면 가장 먼저 구중천(九重天)이 흔들리고 있다 구중천.... 구대세가(九大勢家)의 뿌리가 썩고 있는 것이다."
"옛?"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놀란 사유성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천무대법사는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구대세가는 그동안 착실히 성장하여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실력을 쌓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만을 부채질하여 당대에 이르러 그것이 뿌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 더구나......."
"더구나 무엇입니까?"
"과거 구공자가 한 여인을 죽게 한 것이 화근이 되고 있다."
사유성의 안색이 변했다.
"그... 그것은 그들의 쾌사가 아닙니까?"
"아미타불.... 쾌사가 아니라 혈사다."
"그, 그렇지만......."
사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무는 눈을 감으며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가장 먼저 구대세가에 혈풍이 불 것이다. 노납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
사유성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대세가는 바로 무림구공자의 가문이었다.
더군다나 무림구공자와 자신을 합한 일룡구공자는 항상 그 이름을 같이 하지 않았던가?
구공자의 우두머리. 그는 바로 무림일룡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주제일룡 사유성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구대세가가 무너진다면.......'
사유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천무대선사가 눈을 번쩍 떴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유성을 바라보던 그의 안색이 흐려졌다.
'어쩔 수 없군. 이 아이는 지나치게 명예욕이 강하다. 크게 꺾인 후에라야 뜻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무대선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어 그는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늦기 전에 손을 써야 할 것이다. 구대세가가 무너지면 중원의 힘이 반감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격동이 실린 사유성의 음성은 떨렸다. 천무대선사는 덧붙여 말했다.
"보이는 것만 실체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무서운 함정이 있느니라."
"......."
천무선사의 말은 이미 사유성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마음보다 몸이 급해진 사유성은 즉시 삼배를 올렸다.
"그럼 제자 곧 떠나겠습니다."
"아미타불.... 무운을 빈다."
스스스... 팟!
한순간 사유성의 모습이 흐려지는 듯 하더니 사라졌다.
"녀석! 무무불영종(無無佛影踪)이 이미 십 성(十成)에 이르렀구나."
천무대선사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뻗더니 녹슨 정과 망치를 잡았다.
쩡... 쩡... 쩡.......
깊어가는 야음을 타고 바위를 깨는 정소리가 은은히 불혼애를 울리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혈겁을 막을 방법이 정녕 없단 말인가?"
천무의 입에서는 이따금씩 탄식소리가 흘러나왔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