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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興宗、黃居正、金輅等還朝。 慶尙道流人李種學、崔乙義, 全羅道流人禹洪壽、李崇仁、金震陽、禹洪命, 楊廣道流人李擴, 江原道流人禹洪得等八人死。 上聞之, 怒曰: "杖一百已下者皆死, 何故也?" 崇仁, 星州人, 字子安, 號陶隱, 星山君 元具之子。 前朝至正庚子年十四, 中成均試, 壬寅, 中禮闈試丙科第二人, 拜藝文修撰, 累遷至典理佐郞。 洪武辛亥, 朝廷命遣貢士, 文忠公 李仁復、文靖公 李穡掌鄕試, 擢崇仁爲第一。 恭愍惜之不遣, 尋授成均直講、藝文應敎, 以至典理摠郞。 時金承得構朴尙衷等于池奫, 俱貶于外。 崇仁亦貶大丘縣, 戊午, 以成均司成召還。 辛酉, 喪母。 壬戌, 起復, 左右衛上護軍, 掌成均試。 以父在且踰期年不辭, 然人以此短之。 遷至典理判書, 陞密直提學。 丙寅, 以賀正使如京, 戊辰春, 被崔瑩門客鄭承可之讒, 貶通州。 夏, 瑩敗召還, 復知密直司事。 冬, 左侍中李穡朝京, 以崇仁爲副行。 己巳秋, 有人自日本來, 自稱永興君。 崇仁以姻親, 嘗識其爲人甚悉, 乃辨其僞, 見貶星州。 庚午夏, 以尹彛、李初之獄, 逮繫淸州, 以水災宥歸忠州。 壬申春, 復知密直, 夏, 貶順天。 至是, 居正至羅州, 杖其脊, 遂卒于南平, 年四十六。 子四人: 次點、次若、次騫、次參。 崇仁聰明絶人, 讀書輒成誦, 年未冠, 詩文已爲時輩所推。 博極群書, 尤精於性理之學, 自直講至判書, 皆兼製敎。 李穡病後, 事大文字, 全出其手。 高皇帝稱之曰: "表辭精切。" 李穡嘗曰: "吾東方文章, 前輩無如子安者。" 今我殿下命文忠公 權近, 序其遺藁, 印行于世。 初與鄭道傳爲友, 從遊最久。 道傳後附趙浚, 知浚惡崇仁, 反陰毁之, 以致於死。 種學字仲文, 韓山伯 穡之次子, 天性英豪。 恭愍甲寅年十四, 中成均試, 僞朝丙辰, 中同進士, 遂拜長興庫使, 積官至密直司知申事。 戊辰, 掌成均試, 陞僉書密直司事。 己巳, 同知貢擧。 時李穡當國, 種學連歲掌試, 人頗譏之。 恭讓君立, 李穡見劾, 種學亦貶。 庚午, 尹彛、李初之獄作, 父子俱在淸州逮中, 以水災, 俱得蒙宥。 壬申, 又貶咸昌。 至是, 興宗至雞林, 欲行脊杖, 門生金汝知方爲判官, 陰戒吏不得行法外刑, 因是僅活。 移置長沙縣, 興宗遣人, 追至茂村驛, 乘夜縊之, 年三十二。 子六人: 叔野、叔畦、叔當、叔畝、叔福、叔畤。 洪壽, 丹陽伯 玄寶長子。 僞朝丁巳, 中同進士, 拜郞將兼成均博士, 累遷至知申事, 陞大司憲。 己巳, 拜僉書密直司事, 壬申夏, 貶順天, 亦因居正杖脊而死, 年三十九。 子四人: 成範、承範、興範、希範。 初玄寶族人金戩者嘗爲僧, 潛奸其奴樹伊之妻, 生一女。 戩之族人, 皆謂樹伊之女, 獨戩謂爲己女, 密加愛護。 戩後爲俗, 逐樹伊而奪之爲妻, 以其女嫁士人禹延, 盡給奴婢田宅。 延生一女, 適貢生鄭云敬。 云敬積官至刑部尙書, 生三子, 長卽道傳。 方其始仕, 玄寶子弟皆輕侮之, 每遷除臺省, 不署告身。 道傳意玄寶子弟使然, 嘗憤怨。 及恭讓君立, 以洪壽子成範爲駙馬。 道傳懼成範等, 乘勢發其原, 凡可以陷玄寶一門者, 靡不圖之。 及開國之際, 構殺成範, 遂構玄寶父子, 欲寘於死。 又緣趙浚與李穡、李崇仁有隙, 仍構穡及種學、崇仁等, 欲以爲援例。 及製卽位敎書, 條例便民事目, 繼論玄寶等十餘人罪, 寘諸極刑。 上使都承旨安景恭讀之, 驚駭曰: "旣云布寬大之恩, 何若是歟! 宜皆勿論。" 道傳等請減等決罪, 上曰: "禹玄寶、李穡、偰長壽雖減等, 亦不可。" 乃請其餘決杖有差, 上意決杖者不至於死, 勉從之。 道傳與南誾等陰謂居正等曰: "杖一百者, 不宜得生。" 居正等杖殺洪壽兄弟三人, 崇仁等五人皆及於死。 居正等還, 以因杖病死聞。 道傳欺罔上聰, 以報私憾, 上初不知, 及聞其死, 大加傷嘆。 我殿下辛卯之秋, 追理居正、興宗等罔上擅殺之罪, 以雪其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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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22권, 태종 11년 7월 2일 辛酉 5/11 기사 /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하윤이 네 번이나 상소하여 무죄를 진달하다
공신과 대간에서 또 하윤·권근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용사자(用事者)라고 말한 것이 만일 태조를 가리켰다면, 경 등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마땅히 법으로 보였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 굳이 청하는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윤(河崙)이 네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자기의 무죄함을 스스로 진달하니, 임금이 그 번쇄한 것을 싫어하여 그 글을 모두 돌려보내었다. 그 첫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이 불초하므로 탄핵을 당하였으니,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국가를 가진 이는 창업과 수성(守成)이 같지 않았습니다. 창업한 임금은 반드시 전대(前代)의 쇠하고 어지러운 말년에 나왔고, 반드시 호걸의 선비가 있어 마음으로 복종하고 꾀를 합하여 그 사이에 용사하여, 선비들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에게 붙는 자는 진용(進用)하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였습니다. 옛 임금에게 친하고 옛 임금에게 충성하는 자는 모두 힘써 제거하고, 옛 임금의 세력이 위에서 고립되게 하여 온 조정의 신하가 하나도 꺼릴 만한 사람이 없게 한 뒤라야 큰 계교가 이루어졌으니, 위(魏)나라·진(晉)나라 이래 송[趙宋]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큰 일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전대(前代) 때에 배척해버린 신하가 모두 쓰이게 되니, 이것은 이세(理勢)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가 신무(神武)와 불세(不世)의 덕으로 전조의 말년을 당해 장상(將相)을 겸임하였고, 거의(擧義)하여 회군한 뒤에는 중심(衆心)이 추대하기를 원하고 천명이 돌아왔으나, 전대(前代) 군신(君臣)의 분수가 아직 있어서 안위(安危)의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한두 가지 기이한 꾀를 가진 신하가 그 사이에 용사(用事)하여 자기에게 붙는 자는 끌어들이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한 뒤에야만 대업이 이루는 것이겠습니까? 이색이 전조에 있어 벼슬이 총재(冢宰)가 되어, 다만 상도(常道)를 지킬 줄만 알았으니, 용사하는 신하에게 꺼림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권근이 이색의 행장(行狀)을 지어 말하기를,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에게 붙지 않는 것을 꺼리어 논핵하여 폄출(貶黜)하였다.’고 함은 오로지 중간의 용사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물며, 윤이(尹彝)·이초(李初)가 여러 사람의 이름을 연서(連署)하여 중국(中國)에 글을 바쳐서 황자(皇子)를 맞이하기를 청하였으니, 본국의 풍속이 노비(奴婢)를 부리고 토전(土田)의 소출을 먹여서 집집마다 공후(公侯)의 낙(樂)125) 이 있으니, 어찌 중국 사람을 얻어서 임금 삼기를 원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우현보(禹玄寶)는 손부(孫婦)의 아비가 임금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세우고자 하였겠습니까? 그것이 거짓 행위인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태조의 명예(明睿)하심으로 조금도 의심하려 하지 않으셨는데, 다만 한두 용사하는 신하가 예전에 원망이 있는 사람의 여러 이름 가운데에 있으므로 힘써 그 의논을 주장하여 그 죄를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하물며 태조가 추대될 때를 당해 겸양하여 굳이 거절하였으니, 즉위하던 날에 이르러 마땅히 관대한 인덕(仁德)을 베풀어 유신(惟新)의 화(化)126) 를 이룰 것인데, 지난번의 용사하던 자가 반드시 묵은 원망을 갚고자 하여 이색 등에게 죄를 돌리었으니, 이것이 어찌 태조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수성(守成)하는 날에 미쳐서 용사하는 신하가 한 번도 전일에 하던 일과 같이 하지 못하였으니, 태조의 밝은 판단과 전일의 한 일이 과연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권근이 지은 행장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신이 이로써 서문(序文)을 지은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송나라 태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즈음에 조보(趙普)의 꾀와 한통(韓通)의 죽은 것을 사책에 모두 태조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썼으니, 그 관대한 덕이 더욱 후세에 빛났습니다. 만일 창업하여 처음 개국하던 때에 용사하는 신하의 기계(奇計)와 음모한 일이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왔다 한다면, 이종학(李種學)을 목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을 매질하여 죽인 것 같은 6,7인의 일이 어찌 태조의 아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사실대로 용사하는 자의 한 짓으로 쓰지 않고 모두 태조에게서 나온 것처럼 한다면, 신은 태조의 성덕(盛德)의 빛이 후세에 누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성학(聖學)이 밝고 넓으시어 의리가 정미한 것을 통하여 마지 않음이 없으니, 다행히 성려(聖慮)를 더하시어 너그럽게 면하는 것을 입게 하면, 살아 있는 자가 어찌 충성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죽은 자가 어찌 결초(結草)127) 하기를 생각하여 성덕의 만분의 일을 갚기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그 두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臣) 하윤은 용렬하고 어두워 과오를 범해 죄가 불측함에 있는데, 전하의 깊이 살피시고 밝게 판단하심을 입어서 신으로 하여금 자취를 감추고 죄를 뉘우치게 하셨으니, 재생의 은혜가 실로 천지와 같습니다. 감격한 정을 어찌 이루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권근이 지은 이색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에게 붙좇지 않는 것을 꺼리어 탄핵하여 장단(長湍)에 내치었다.’ 하였는데, 신은 생각하기를 공양군 때에 임금과 정승 사이에서 용사한 자가 1,2인에 지나지 않는 것은 나라 사람이 함께 아는 것입니다. 권근이 어찌 용사(用事) 두 글자를 가지고 태조를 가리켰겠습니까? 신이 서문에서 ‘용사’자를 깎아버리고, 다만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리어 논핵하여 장단에 폄출하였다.’고 쓰고, 불부기(不附己) 세 글자를 버리지 않은 것은 만일 다만 공을 꺼렸다고만 쓴다면, 후세 사람들이 꺼림을 당한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기 때문에 아울러 쓴 것입니다. 그때 용사하는 한두 사람의 문(門)에 일국의 대소 신하가 혹은 자기가 가고 혹은 자제를 보내어 은근한 뜻을 보이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이색은 태조에게 지우(知遇)가 있어 한 번도 그 문에 발걸음하지 않았고, 또 꺼림을 받을 말을 한 사실도 신이 실로 압니다. 그러므로 이 세 글자를 깎지 않은 것이지, 어찌 감히 일호라도 은미한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 행장에 또 말하기를, ‘공이 죽은 뒤에 공을 꺼리는 문형(文衡)을 맡은 자가 비로소 표사(表辭)로 황제에게 견책을 당하였다.’ 하였으니, 신은 전문(典文)한 기공자(忌公者)가 곧 용사한 기공자임이 틀림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행장에 또 말하기를, ‘태상왕(太上王)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을 꺼리어 공을 죄로 무함하여 극형에 두고자 하였다.’ 하였는데, 신은 이 용사자와 앞서 말한 용사자가 동일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의 서문에는 ‘용사(用事)’ 두 자를 깎아버리고 다만 ‘공을 꺼리는 자가 공을 죄로 무함하여 극형에 두고자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태조 대왕께서 총명 신무(神武)한 자품으로 전조의 말년에 나시어 공과 덕이 이미 높았으므로, 도리어 그때 임금의 꺼림을 받아 위태하기가 누란(累卵)의 형세와 같았습니다. 휘하(麾下)의 기계(奇計)를 가진 선비가 먼저 추대할 마음을 내어 세월이 흐를수록 정상이 나타나고, 일이 긴박하게 된 뒤에야 태조가 아시고 노하여 더욱 사피(辭避)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이미 굳어져서 부득이 즉위하였으니, 처음에 어찌 나라를 취하려는 데에 마음이 있어 미리 명령이 있었겠습니까? 초창기(草創期)에는 기계(奇計)한 음모가 모두 용사하는 신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만일 용사자의 한 일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한다면, 즉위하여 유지(宥旨)를 내린 뒤에 때려서 죽이고 목매어 죽인 따위의 일이 어찌 태조가 아시는 것이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들으니, 산의생(散宜生)128) 이 주(紂)에게 뇌물을 준 계책을 문왕(文王)이 알지 못하였고, 진평(陳平)129) 이 여섯 번 낸 계책을 한 고조(漢高祖)가 알지 못했으며, 배적(裵寂)130) ·유문정(劉文靖)131) 의 꾀를 당 고조(唐高祖)가 처음에 알지 못하였고, 묘훈(苗訓)132) 의 말과 조보(趙普)133) 의 꾀를 송 태조(宋太祖)가 처음에 알지 못하였는데, 사책(史策)에 사실대로 썼으므로 후세 사람이 성덕이 있는 것을 알고 조금도 의논할 것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용사(用事)하는 사람이 협사(挾私)한 일을 어찌 사실대로 쓰지 않아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聖德)에 대하여 의심이 있게 하겠습니까? 하물며 무인년 가을에 지난번의 용사(用事)하던 자가 어린 얼자(孼子)를 끼고 난을 꾸미어 종친을 해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태조의 아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로서 이 용사하는 무리를 제거한 뒤에 종사가 편안해져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무인년에 용사(用事)한 자가 곧 임신년에 용사한 자이니, 사실대로 쓰지 않고 비호(庇護)할 수 있겠습니까? 무인년에 일이 진정된 뒤를 당하여 중의(衆議)가 용사자의 맏아들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신이 생각하기를, 큰 일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다시 주륙(誅戮)이 있을 수 없다고 하여 힘써 전하께 말씀드렸습니다. 곧 전하가 여러 의논을 거절하고 살리었으니, 이것은 전하가 밝게 아시는 것입니다. 그 자식의 몸에 보복하지 않고 빈말로 보복의 계교를 하고자 하였다면 신이 비록 얕고 좁으나 어찌 감히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용렬하고 우둔함으로 인연하여 권근이 지은 행장에 끌리어 크게 필삭(筆削)을 가하지 못하여 말 뜻이 분명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위로는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시는 밝으심을 더럽히고 아래로는 평일의 배운 것을 저버렸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어 몸둘 땅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는 다시 불쌍히 여겨 살피소서."
그 세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이 엎드려 들으니, 헌의(獻議)하는 자가 말하기를, ‘권근이 지은 이색의 행장에 ‘용사자(用事者)’라고 말하고, 신이 지은 비문(碑文)에 ‘기공자(忌公者)’라 하고 모두 성명(姓名)을 쓰지 않았으니, 이것이 죄가 된다.’고 하나, 신은 삼가 당(唐)나라·송(宋)나라 제유(諸儒)의 비갈문(碑碣文)과 언행록(言行錄)을 상고하여 삼가 조목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1. 한문공(韓文公)134) 이 유자후(柳子厚)135) 의 묘지(墓誌)에 이르기를, ‘순종(順宗)이 즉위하자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제수하였는데, 용사(用事)하는 자를 만나 득죄하여 전례에 따라 나가서 자사(刺史)가 되었다.’하였고,
1. 주문공(朱文公)136) 이 지은 한위공(韓魏公)137) 의 언행록(言行錄)에 이르기를, ‘조종(祖宗)의 옛법을 준용(遵用)한 지가 오래인데, 근자에 한 선비의 편벽된 의논을 따라 여러 조정의 정률(定律)이 변하였다.’하였고, 주문공이 지은부정공(富鄭公)의 언행록에 이르기를,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상(上)의 앞에서 「재이(災異)는 모두 천수(天數)이고, 인사(人事) 득실(得失)의 소치(所致)가 아니라.」고 말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듣고 탄식하기를, 「인군(人君)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늘인데, 만일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간신(奸臣)의 간사한 말을 드리고자 하여 먼저 주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도록 인도하여 간쟁(諫爭)하는 신하를 어기게 한 것이니, 이것은 치란(治亂)의 기틀이라.」고 하였다.’ 하였고,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138) 의 언행록을 찬(撰)하기를, ‘공이 한림(翰林)에 있을 때 입언(立言)하기를, 「참위(讖緯)의 설(說)139) 은 일체 깎아 없애서 후학을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집정자(執政者)가 심히 주장하지 않아서 마침내 행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판태원부(判太原府)를 제수하였는데 공이 사양하고 채주(蔡州)를 구(求)하여 말하기를, 「때는 신기(新奇)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신은 졸(拙)한 것을 지키기를 생각하고, 여러 사람을 바야흐로 재리(財利)를 일으키는데, 신은 상도(常道)를 따르고자 합니다.」하니, 집정(執政)이 마침내 자기를 따르지 않을 것[不附己]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한퇴지(韓退之)140) 의 문장과 주문공(朱文公)의 도덕은 후세 학자가 사모하고 본받는 바인데, 일을 기록하는 글에 다만 그 사람의 행한 일만 쓰고 그 성명은 쓰지 않았으니, 문장을 쓰는 법이 요컨대 함축(含蓄)이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알아내게 하는 것입니다. 권근이 성명을 쓰지 않은 것이 어찌 이것을 본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헌의자(獻議者)가 불부기(不附己) 3자로 말을 한다고 하는데, 구양영숙(歐陽永叔)141) 은 선진(先進)인 노유(老儒)이고, 왕안석(王安石)142) 은 신진(新進)한 자인데, 주문공(朱文公)이 지기불부기(知其不附己)라고 썼으니, 무릇 위엄과 세력이 있는 곳에는 욕망이 있는 자가 일체 모두 달려가 붙어서 환심을 사려 하니, 이것이 이른바, ‘염(炎)에 나아가고 열(熱)에 붙는다.’는 것입니다. 이색(李穡)은 선진 노유(先進老儒)이고, 당시에 용사하는 자는 비록 신진이지마는 그 세력이 추부(趨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색이 한 번도 그집에 가지 않고, 또 그 사람을 곧게 여기지 않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꺼림을 받은 까닭입니다. 권근이 쓴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서문에 용사(用事) 2자는 깎고, 불부기(不附己) 3자는 깎지 않은 것은 신의 얕은 학식으로 권근의 그릇되지 않은 것을 보증한 것인데, 신이 오늘에 이르러 실로 이것을 가지고 후회합니다. 여러 의논이 서로 모이어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죄를 가하고자 하는데, 상자(上慈)께서 밝게 분별하심을 입어서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하니, 신의 지극히 감사한 마음은 천지 일월이 실로 조림(照臨)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상감(上監)을 바랍니다."
그 네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 하윤은 생각하건대,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던 처음에 태조(太祖)가 당국(當國)하였는데, 이색을 꺼리는 자는 한두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태조가 이색을 예로 대접하기를 심히 후하게 하여 이색을 꺼리는 자가 여러 번 위태한 땅에 두려고 하였으나, 태조가 곧 구제하여 보전되었는데, 신이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여 태조가 이색을 꺼렸다고 하였겠습니까? 만일 태조의 감명하심으로 용사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하면, 신의 서문에 말하기를, ‘공(公)을 꺼리는 자가 공(公)을 죄로 무함하여 극형을 가하고자 하였다.’ 할 것입니다. 또 이어 말하기를, ‘왕이 용서하였다.’ 하였으니, 용서하신 것은 태조의 감명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성덕에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태조 때에 용사자의 한 일이 모두 옳다고 한다면, 장차 전하가 정사(定社)하던 때에 여러 공신들이 한 일이 모두 그르다고 하여야 할 것이니, 전하는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전하가 종사의 대계로 태조 때에 용사하던 무리를 제거한 뒤에 종사가 편하여졌으니, 마땅히 후에 사람으로 하여금 전하의 공덕을 무궁하게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그 용사하던 자를 비호(庇護)하고자 하여 도리어 전하의 공신(功臣)을 능멸하겠습니까? 권근이 지은 제릉(齊陵)의 비문과 건원릉(健元陵) 비문에 모두 용사한 자의 이름을 나타냈으니, 또 다 비호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는 다시 성려(聖慮)를 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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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功臣臺諫又請崙、近之罪, 上曰: "其所言用事者, 若指太祖, 不待卿等之言, 當示以法也。 卿等何以固請乎? 勿復言。" 崙上書至四, 自陳己之無罪, 上厭其煩, 悉還其書。
其一曰, 臣以不肖被劾, 愧歎何量! 然臣竊惟, 有國家者, 創業與守成不同。 創業之主, 必出於前代衰亂之季, 必有豪傑之士, 歸心協謀, 用事於其間, 陰引士類, 附己者進之, 異己者斥之, 親於舊主而忠於舊主者, 務皆去之, 使舊主之勢, 孤立於上, 擧朝之臣, 無一忌憚者, 然後大計乃成。 若魏、晋以來至于趙 宋, 莫不皆然。 及至大事旣成, 然後前代之時, 斥去之臣, 皆爲所用, 此理勢之不得不然者也。 恭惟我太祖, 以神武不世之德, 當前朝之季, 任兼將相, 自擧義回軍之後, 衆心願戴, 天命有歸矣。 然前代君臣之分尙存, 安危之機, 不可不察。 豈非一二奇計之, 臣用事於其間, 附己者進之, 異己者斥之, 然後大業以成哉? 李穡在前朝, 位爲冢宰, 但知守常, 宜爲見忌於用事之臣。 權近作穡行狀曰: "恭讓君立, 用事者忌公不附己, 劾貶。" 是專指中間用事之人耳。 況尹彛、李初連署衆名, 獻書上國, 請迎皇子! 本國之俗, 役奴婢食土田, 家家有公侯之樂, 豈願得中國之人而爲主哉? 況禹玄寶旣幸孫婦之父爲君, 豈欲立他人哉? 其爲詐僞灼然。 以太祖之明睿, 不肯有小疑, 但一二用事之臣, 以其舊怨者之名, 在衆名之中, 力主其議, 欲成其罪耳。 況太祖當推戴之時, 謙讓固拒, 至卽位之日, 當施寬大之仁, 以致惟新之化? 向之用事者, 必欲報其舊怨, 歸罪穡等, 此豈出於太祖之心哉? 及乎守成之日, 用事之臣, 不得一有如前日之所爲, 可以見太祖之明斷, 而前日之所爲, 果皆非出於太祖之命矣。 近之行狀之意如此, 故臣因而撰序文。 臣竊謂宋 太祖受禪之際, 趙普之謀、韓通之死, 史策皆以太祖之不知書之, 其寬大之德, 益光於後世矣。 若謂創業草昧之時, 用事之臣奇計陰謀之事, 皆以爲出於太祖之命, 則有如縊殺李種學, 杖殺李崇仁等六七人之事, 此豈太祖之所知哉? 若不以實書之, 以用事者之所爲, 似皆出於太祖, 則臣恐太祖之盛德光輝, 有累於後世矣。 伏惟殿下, 聖學緝熙, 義理之精微, 靡不融會, 幸加聖慮, 俾蒙寬免, 則生者豈不願糜身, 死者豈不思結草, 圖報聖德之萬一哉? 伏望聖慈優容焉。 其二曰, 臣崙庸暗失誤, 罪在不測, 伏蒙殿下睿察明斷, 許令臣屛迹悔罪, 再生之恩, 實同天地, 感激之情, 何可勝言! 然臣謹考權近所撰李穡行狀曰: "恭讓君立, 用事者忌公不附己, 劾貶長湍。" 臣謂恭讓之時, 用事君相之間者, 不過一二人, 國人之所共知, 近豈以用事二字, 指斥太祖乎? 臣於序文, 削去用事二字, 只書忌公不附己者, 劾貶長湍, 其不去不附己三字者, 若只書忌公, 則後之人, 不知見忌者爲何事, 故幷書之。 其時用事一二者之門, 一國大小之臣, 或自往, 或遣子弟, 無不致慇懃之意, 惟穡遇知於太祖, 足不一躡其門。 又出見忌之言, 臣實知之, 故不削此三字, 豈敢有一毫微意哉? 其行狀又曰: "及公沒, 忌公者典文, 始以表辭, 見責於帝。" 臣謂此典文之忌公者, 便是用事之忌公者無疑矣。 其行狀又曰: "太上王卽位, 用事者忌公, 誣公以罪, 欲置極刑。" 臣謂此用事者, 與前言用事者同是一人。 然臣之序文, 削去用事二字, 只書忌公者誣公以罪, 欲寘極刑。 臣竊恐太祖大王, 以聰明神武之資, 出於前朝之季, 功德旣崇, 反爲時君所忌, 危如累卵, 麾下奇計之士, 先出推戴之心, 積以歲月, 及至情見事迫, 然後太祖乃知之, 怒而益避, 衆心旣固, 不獲已卽位, 初豈有心於取國, 而預有命令哉? 其草昧之際, 奇計陰謀, 皆出於用事之臣, 若以爲不敢言用事者之所爲, 則卽位宥旨之後, 杖殺縊殺等事, 豈爲太祖之所知乎? 臣嘗聞散宜生賄紂之計, 文王不之知; 陳平六出之計, 漢祖不之知; 裵寂、劉文靖之謀, 唐祖初不知; 苗訓之言, 趙普之謀, 宋祖初不知, 史策實書之。 後世之人, 知有聖德, 不知其小有可議。 況其用事之人挾私之事, 何不以實書之, 使後世之人, 有疑於聖德哉? 又況戊寅之秋, 向之用事者, 欲挾幼孼爲亂, 謀害宗親, 此亦豈太祖之所知哉? 殿下以宗社大計, 去此用事之輩, 然後宗社乃安, 式至今日。 戊寅之用事者, 乃其壬申之用事者也。 可不以實書之, 而庇護之哉? 當戊寅事定之後, 衆議欲誅用事者之長子, 臣謂大事旣定, 不可更有誅戮, 力言於殿下, 卽蒙殿下拒衆議而活之, 此殿下之所明知也。 不報復於其子之身, 欲以空言爲報復之計, 臣雖淺狹, 豈敢有此哉? 只緣庸暗, 牽於近之行狀, 不能大加筆削, 使語意未瑩, 此則臣之罪也。 仰累殿下知人之明, 下負平日之所學, 慙愧之至, 措躬無地。 伏望殿下, 更垂矜察焉。 其三曰, 臣伏聞獻議者曰: "權近所撰李穡行狀, 曰用事者, 臣所撰碑文, 曰忌公者, 俱不書姓名, 是爲有罪。" 臣謹稽唐、宋諸儒碑碣之文、言行之錄, 謹條列如左。 一, 韓文公撰柳子厚墓誌曰: "順宗卽位, 拜禮部員外郞, 遇用事者得罪, 例出爲刺史。" 一, 朱文公撰韓魏公言行錄曰: "祖宗舊法, 遵用斯久, 屬者遵一士之偏議, 變數朝之定律。" 撰富鄭公言行錄曰: "神宗卽位, 有於上前言災異皆天數, 非人事得失所致。 公聞之, 嘆曰: ‘人君所畏唯天, 若不畏天, 何事不爲!’ 此奸臣欲進邪說, 先導上無所畏, 使咈諫諍之臣, 此治亂之機也。" 撰歐陽 文忠公言行錄曰: "公在翰林立言, 讖緯之說, 一切削去, 無誤後學, 執政者不甚主之, 竟不行。" 又曰: "除判太原府, 公辭求蔡州曰: ‘時多喜新奇, 而臣思守拙; 衆方興財利, 而臣欲循常。’ 執政知其終不附己。" 臣竊謂韓退之文章、朱文公道德, 後世學者之所慕效者也。 其於記事之文, 只書其人之行事, 而不書其姓名者, 爲文之法, 要有含蓄, 而使人思而得之也。 近之不書姓名者, 豈非體此乎? 又聞獻議者, 以不附己三字爲說。 歐陽 永叔, 先進老儒, 而王安石, 新進者也, 朱文公以知其不附己書之。 凡威勢之所在, 有欲者一皆趨附而取悅焉, 此所謂趨炎附熱者也。 穡, 先進老儒, 而當時用事者, 雖爲新進, 其勢不可不趨附也, 而穡一不造其門, 且出不直其人之言, 此其所以見忌也。 近之所書, 豈非以此乎? 臣之序文, 削其用事二字, 不削其不附己三字者, 臣以學淺, 保近之不誤, 臣至今日, 實以此爲悔。 衆議交集, 不量輕重, 欲加之罪, 伏蒙上慈明辨, 俾全性命, 臣心感謝之極, 天地日月, 實所照臨。 伏惟上鑑。 其四曰, 臣崙竊謂, 恭讓君卽位之初, 太祖當國, 忌穡者不過一二人, 太祖以禮待穡甚厚, 忌穡者屢欲寘危地, 太祖便救之得全。 臣豈不知此乃以太祖爲忌穡哉? 獻議者若謂太祖剛明, 不可謂有用事者, 則臣之序文曰: "忌公者誣公以罪, 欲加極刑。" 繼之曰: "王原之。" 其所以原之者, 乃太祖之剛明也, 何傷於聖德乎? 若謂太祖之時, 用事者之所爲皆是, 則將謂殿下定社之時, 諸功臣之所爲, 皆非矣。 殿下何不念此乎? 殿下以宗社大計, 去太祖之時用事之輩, 然後宗社乃安。 當使後世之人詠歌殿下之功德於無窮矣, 乃何欲庇護其用事者, 而反埋沒殿下之功臣乎? 權近所撰齊陵之碑、健元陵之碑, 皆著用事者之名, 又可得而盡庇護之哉? 伏望殿下更加聖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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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22권, 태종 11년 7월 2일 辛酉 7/11 기사 /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이숭인·이종학의 교살에 대해 승정원에 전지하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였다.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을 곤장을 때린 뒤에 또 교살(絞殺)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너희들이 들었는가?"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대답하기를,
"신(臣)도 들었습니다마는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니,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니, 한상덕(韓尙德)은 말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퍽 많습니다. 이종학이 죽음에 임하여 시를 지어 그 아들에게 부치기를, ‘네 아비는 비록 단명하나, 네 할아버지는 반드시 수할 것이다. 너희들은 내 뜻과 같이 하여 혼정 신성을 혹시라도 틀림없게 하라.’고 하였으니, 이 시를 보면, 자기 명대로 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조말생(趙末生)은,
"신이 옛날에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수찬(修撰)하는 임무에 참여하였었는데, 사신(史臣)이 쓰기를, ‘임금이 이숭인·이종학 등 12인의 죽음을 듣고 크게 노하여 봉사(奉使)한 사람을 책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사람의 말은 참으로 믿을 수가 없지만, 사필(史筆)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속히 의정부에 전하여 그 때의 체복사(體覆使)와 그 도의 안렴사(按廉使) 및 위의 사람들이 가서 죽은 주군(州郡)의 수령(守令)과 죽은 곳에 사는 사람과 체복사가 데리고 갔던 사령(使令)을 추문(推問)하여 그 사실을 밝게 핵실하여 아뢰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때에 봉사(奉使)한 사람을 죄줄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말한 사람을 죄 주겠다."
인하여 의정부에 명하였다.
"내가 들으니, 임신년에 이숭인·이종학 등과 다른 죄인을 혹은 교살(絞殺)하고 혹은 잘못 형벌하여 죽게 하였다고 하니,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명령을 꾸며 죽인 자가 유죄하고, 만일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말한 자가 유죄하니, 마땅히 법으로 논하겠다. 자세히 추문하여 아뢰게 하라."
정부에서 사헌부에 이문(移文)하였는데, 하윤이 밀봉(密封)145) 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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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傳旨承政院曰: "人有言李崇仁、李種學, 杖後又絞, 汝等聞乎否?" 知申事金汝知對曰: "臣亦聞之, 然非目見, 其實則未知。" 韓尙德曰: "如是說者多多。 李種學臨死, 作詩以寄其子曰: ‘汝翁雖短命, 汝祖必高年。 汝等如吾志, 晨昏莫或愆。’ 觀是詩, 則不得其死明矣。" 趙末生曰: "臣昔與於《太祖實錄》修撰之任, 史臣書曰: ‘上聞崇仁、種學等十二人之死, 大怒, 責奉使之人。’" 上曰: "人言固不足信, 史筆豈可盡信! 速傳議政府, 推其時體覆其道按廉使及右人等往死州郡守令、死所居人與體覆率行使令, 明覈其實以聞。 其言然, 則罪其時奉使之人, 不實, 則罪言之者。" 仍命議政府曰: "予聞壬申年間, 崇仁、種學等及他罪人, 或絞殺, 或枉刑致死。 信如此言, 則矯命殺之者有罪, 若此言不實, 則言之者有罪, 當以法論, 其令細推以聞。" 政府移文司憲府。 因河崙密封, 有此命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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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22권, 태종 11년 7월 2일 辛酉 10/11 기사 /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헌부로 하여금 이숭인·이종학을 형벌한 사실을 조사케 하다
지신사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명하였다.
"옥중에서 상서(上書)한 일은 예전 사람도 있었다. 하윤이 세 번 글을 올려 옛사람이 비명(碑銘)을 지을 때에 흔히 그 이름을 분명히 말하지 않고 범칭(泛稱)한 것을 두루 인용하고, ‘신이 말한 용사자(用事者)라는 것도 이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국초(國初)에 이종학을 액살(縊殺)하고, 이숭인을 장살(杖殺)한 일을 말하였는데 내가 처음에 알지 못하였다. 이 일이 참으로 혼미(昏迷)하기가 진(晉)나라 영제(靈帝)와 같다면 혹 있을 수 있지마는, 태조같이 강명한 임금으로서 창업하는 처음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형벌을 감독하는 자가 명령을 받고 결장(決杖)한 뒤에, 또 권신(權臣)의 뜻에 맞추어 추후하여 목매게 하였다면 명령을 전달한 자의 죄이고, 만일 그런 사실이 없는데 이런 말이 있다면 말한 자의 죄이니, 헌사(憲司)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라."
김여지 등이 말하였다.
"태조가 너그럽고 어진 임금으로서 창업할 당초부터 형벌을 씀에 어찌 곤장을 때리고 다시 목매어 죽이도록 명할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과연 목매어 죽였다면 명령을 전달하는 자가 반드시 권신에 아부하여 그 뜻을 맞춘 것입니다. 지금 만일 이 일을 처단한다면, 한편으로는 태조의 관인(寬仁)한 덕을 나타내고, 한편으로는 신자의 임의로 참람하게 형벌하는 것을 경계할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하윤에게 물으면 반드시 말한 자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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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知申事金汝知等曰: "獄中上書, 古人亦有之。 河崙三上書, 歷引古人製碑銘多不明言其名而泛稱之者, 臣之言用事者, 亦倣此也。 又云國初縊殺李種學, 杖殺李崇仁之事, 予初不之知也。 此事, 誠昏迷如晋 靈帝, 則或有之矣, 以太祖剛明之主, 創業之初, 豈有如是之事哉? 其監刑者承命決杖之後, 又希權臣之旨, 追令縊之, 則將命者之罪也。 若無其實, 而有如是之語, 則言者之罪也。 須令憲司覈實以聞。" 汝知等曰: "太祖以寬仁之主, 當創業之初, 豈於用刑之際, 有旣杖而復命縊殺者哉? 若果縊殺, 則將命者必阿附權臣, 逢迎指意也。 今若斷此事, 則一以著太祖寬仁之德, 一以戒臣子擅刑之僭。" 上曰: "問於崙, 則必知言之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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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22권, 태종 11년 7월 27일 丙戌 3/3 기사 /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사헌부에서 이숭인·이종학을 죽인 황거정·손흥종에게 죄주기를 청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황거정(黃居正)·손흥종(孫興宗)이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을 임의로 죽인 죄를 청하였다. 상소(上疏)는 이러하였다.
"임신년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이 지금 풍해도 신은현(新恩縣)에 있는데, 본부(本府)에서 그 도 감사(監司)로 하여금 이종학을 교살(絞殺)한 사실을 묻게 하였는데, 감사가 보고하기를, ‘손흥종이 자복하기를, 「그때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이 만일 곤장 1백 대를 때린 뒤에 죽지 않거든 교살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교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에게 이숭인(李崇仁)이 죽은 연유로 핵문하니, 대답하기를, ‘장(杖) 이외의 다른 형벌은 없었고, 다만 이 앞서 병이 생겼기 때문에 장(杖)으로 인하여 죽게 된 것이다.’하였습니다. 전라도 감사로 하여금 집장(執杖)하였던 아전에게 이숭인이 죽게 된 연유를 묻게 하였더니, 감사가 보고하기를, ‘그때에 집장(執杖)하였던 나주 호장(羅州戶長) 정철(鄭哲) 등 수인(數人)이 고하기를, 「그때 체복사 황거정이 반인(伴人)을 시켜 장목(杖木)을 두 번이나 점검하여 물리치고, 그 허리를 때리게 하고 곧 말에 실어 순천부(順天府)에 옮겨 두었는데, 노상(路上)에서 두 코에서 피가 나와 죽었다.」고 하였다.’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손흥종·황거정이 교살하고 함부로 형벌한 죄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청컨대, 그 사유를 국문하소서."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였다.
"그때 태조(太祖)는 살리고자 했는데, 권신이 법을 농간하여 임의로 죽였으니, 그 죄가 얼마인가? 그러나 이미 사유(赦宥)를 지냈으니 내버려두고 논하지 말 것인가?"
지신사 김여지(金汝知) 등이 대답하기를,
"인신(人臣)의 죄는 임금을 속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또 모고 살인(謀故殺人)은 또한 용서하지 않는 죄에 들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렇다."
하고, 황거정·손흥종을 가두고 신문하도록 명하고, 순금사(巡禁司)에 일렀다.
"인신(人臣)으로서 어찌 군상(君上)의 명령도 없는데, 임의로 죽일 수가 있겠느냐? 의령군(宜寧君) 남재(南在)는 그때에 참여하여 들었고,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도 또한 임신년에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이었으니 어찌 알지 못했겠는가? 모두 알지 못하는 것으로 대답하니 또한 그르다. 개국하던 처음에는 내가 일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없었지마는, 그 뒤로는 내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숭인·이종학의 죽음을 말하였지만 장사(杖死)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제야 임의로 죽인 것을 알겠다. 마땅히 고략(拷掠)하여 물으라."
또 명하기를,
"그뿐만 아니라, 그때 우홍수(禹洪壽)도 원통한 형벌을 받고 죽었으니, 아울러 추문하라."
하였다. 우홍수의 아들 우승범(禹承範)이 상서하였으므로, 임금이 보고 그 글을 순금사에 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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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上疏請黃居正、孫興宗擅殺李崇仁、李種學之罪。 疏曰:
壬申年敎書使孫興宗, 今在豐海道 新恩縣。 本府令其道監司, 問以絞殺李種學之實, 監司報: "興宗伏: ‘其時南誾、鄭道傳云: 「若杖一百後不死, 則須絞殺」, 故臣絞殺之。’ 是實。" 劾問其時體覆使黃居正以李崇仁致死之由, 答曰: "杖外無刑, 但前此發病, 故因杖致死耳。" 令全羅道監司, 問執杖之吏以致死之由, 監司報: "其時執杖羅州戶長鄭哲等數人告: ‘其時體覆使黃居正, 令伴人再度點退杖木, 使杖其腰, 卽載馬移寘順天府路上, 兩鼻出血而死。’" 如此則興宗、居正絞殺枉刑之罪已著, 請鞫問其由。
命承政院曰: "其時太祖欲生之, 而權臣弄法擅殺, 其罪如何? 然已經赦宥, 寘而勿論乎?" 知申事金汝知等對曰: "人臣之罪, 莫大於欺君。 且謀故殺人, 亦在不宥。" 上曰: "然。" 命囚居正、興宗訊之。 謂巡禁司曰: "人臣豈有無君上之命, 而擅殺者哉? 宜寧君 南在, 其時與聞之, (鈇城君)〔鐵城君〕 李原, 亦壬申全羅道按廉使也。 夫豈不知? 予問之而皆以不知爲答, 亦非矣。 開國之初, 予於事無不與, 厥後則予未之知也, 故人有言崇仁、種學之死, 則意爲杖死, 今乃知擅殺之也。 宜拷掠以問。" 又命曰: "非特此也, 其時禹洪壽, 亦受枉刑而死, 竝宜推之。" 洪壽之子承範上書, 上覽之, 下其書巡禁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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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22권, 태종 11년 8월 17일 丙午 2/2 기사 /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대간에서 손흥정·황거정·남은 등의 죄를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서 교장(交章)하여 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의 죄를 청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임금을 속이고, 사(私)를 행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큰 죄입니다. 정도전(鄭道傳)의 음험한 성품으로 우홍수(禹洪壽) 형제가 자기를 천인이라고 한 말에 한을 품고,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이 재주를 믿고 자기에게 붙좇지 않는 것을 꺼린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전조 말년에 이숭인 등이 마침 당죄(黨罪)로써 나누어 귀양갔는데,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아 즉위하자 호생(好生)의 덕으로 특별히 관대한 은혜를 내려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보이고, 죄인을 과단(科斷)하는 것을 다만 결장(決杖)만 하게 하였습니다. 정도전은 남은(南誾)과 더불어 감히 임금을 속이는 마음을 자행하여 비밀히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 등을 사주하여 이숭인 등을 임의로 죽이어, 위로 태조를 속이고 아래로 형벌의 권세를 오로지하였으니, 견빙(堅氷)의 조짐177) 이 시작된 것입니다. 무인년에 이르러 이 흉하고 교활한 무리를 놓아 두어 거의 사직을 기울어뜨릴 뻔하였으니, 옛날 무군(無君)의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 증험된 것입니다. 이것은 왕법에 반드시 죽여야 하고 죽어도 남은 죄가 있는 자인데, 손흥종·황거정 등이 권신(權臣)이 있는 것만 알고 태조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몸소 교서를 받들고 명령을 어기고 잘못 죽이어 권신의 욕심을 이루었으니, 법에 상고하면 정도전 등과 그 죄가 같습니다.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만세를 경계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순금사(巡禁司)가 무군(無君)의 마음을 추원(推原)하지 않고 모살(謨殺)의 율(律)에 얽매어서 망령되게 수(首)와 종(從)을 나누어 죄가 교형(絞刑)에 그치었으니, 그 잘못이 이미 컸고 한두 공신이 또한 이 율에 구애하여 그 죄를 감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잘못이 더욱 심합니다. 전하가 또 관대한 법전을 따라서 그 머리를 보전하게 하시니, 진실로 난신(亂臣)을 베는 의(義)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손흥종·황거정을 모두 극형에 처하고, 남은은 비록 공훈이 있으나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여 공보다 죄가 더하니, 마땅히 정도전과 함께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고, 자손을 금고(禁錮)하여 후세에 경계를 남기소서."
임금이 명하였다.
"상소의 뜻은 그러하나, 나의 처결(處決)이 중도를 얻었다. 내가 장차 친히 경 등을 보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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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司諫院, 交章請孫興宗、黃居正之罪。 疏曰:
誣上行私, 人臣之大罪。 鄭道傳以陰險之資, 懷禹洪壽兄弟以己爲賤之恨, 忌崇仁、種學負才不附己有年矣。 前朝之季, 崇仁等適以黨罪分配, 我太祖受命卽位, 以好生之德, 特垂寬大之恩, 頒示敎書, 科斷罪人, 止令決杖。 道傳乃與南誾, 敢肆欺上之心, 密嗾敎書使孫興宗等, 擅殺崇仁等, 上欺太祖, 下專刑柄, 堅氷之漸兆矣。 及至戊寅, 縱此兇狡, 幾傾社稷, 昔日無君之心, 至此驗矣。 此王法所必誅, 而死有餘辜者也, 而興宗、居正等, 知有權臣, 而不知有太祖, 身奉敎書, 而違命枉殺, 以遂權臣之欲。 稽之於法, 與道傳等, 厥罪惟鈞, 宜置極刑, 以戒萬世。 今巡禁司不原無君之心, 拘於謀殺之律, 妄分首從, 罪止於絞, 其失固已大矣, 一二功臣, 亦拘此律, 請減其罪, 其失尤甚, 殿下又從寬典, 全其首領, 固非誅亂臣之義也。 伏望殿下, 將興宗、居正, 竝置極刑; 南誾雖有功勳, 身犯不赦之罪, 功不可以掩罪, 宜同道傳廢爲庶人, 禁錮子孫, 垂戒後來。
命曰: "疏意然矣, 然予之處決得中。 予將親見卿等言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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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7하
임신년 공양왕 4년(명태조 홍무 25, 1392)
○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유배하고 조준 등을 소환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뒤 태조가 황희석(黃希碩)으로 하여금 왕에게 아뢰어 조준ㆍ남은 등을 소환하도록 청하여 대간과 변명(辨明)하도록 하였고 또,
“만약 정몽주 일당의 죄를 묻지 않는다면 신등을 죄주소서.”
하고 청하게 하니, 왕이 부득이 대간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김진양ㆍ이확(李擴)ㆍ이내(李來)ㆍ이감(李敢)ㆍ권홍(權弘)ㆍ정희(鄭熙)ㆍ김묘(金畝)ㆍ서견(徐甄)ㆍ이작(李作)ㆍ이신(李申) 및 이숭인ㆍ이종학(李種學) 조호(趙瑚) 등을 국문하여 유배하였다. 이내는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인데 뒤에 본조(本朝)에 들어와 좌명공신(佐命功臣 1401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운 이들에게 내린 공신호)에 참여하였으며, 서견은 개국 후에 금천(衿川)에 숨어살면서 나오지 않았다.
허씨(許氏)는 이렇게 적었다.
고려가 망할 때 정몽주ㆍ이색ㆍ김진양ㆍ이종학ㆍ길재ㆍ서견 등 몇몇 군자가 〈고려를 위해〉 죽기도 하고 죽지 않기도 했지만 스스로 충절을 지킨 점에서는 한결같다.
【안】 야사(野史)에는,
“서견이 아조(我朝)가 건국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지은 시에,
천년의 신도가 한강을 격했는데 / 千載神都隔漢江
충량한 제제다사 밝은 임금 돕는구나 / 忠良濟濟佐明王
삼국을 통일한 공업 어디 있는가 / 統三爲一功安在
전조의 왕업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이에 대간이 죄주기를 청하자, 태종은 낯빛을 고치면서 ‘이 사람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 같은 유(流)이니, 상은 줄지언정 죄를 줄 수는 없다.’ 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수찬(修撰) 허봉(許篈)이 계청(啓請)하여 대사헌에 증직(贈職)되었다.”
하였다.
○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이색이 풀려나 한주(韓州)로 돌아갔다.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이색에게 이르기를,
“경은 물러가오. 양강(兩江)의 바깥 지방만이 경이 갈 수 있는 곳이오.”
하니, 이색이 실의(失意)에 찬 모습으로 아뢰기를,
“신은 돌아보아도 전택(田宅) 하나 없으니 과연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였다. 드디어 금천(衿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여흥(驪興)에 이배(移配)되고, 겨울에 사유되어 한주로 돌아갔다.
이색은 자를 영숙(頴叔)이라 하는데 자질이 명민(明敏)한 데다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읽어 시문을 지을 때는 붓을 잡고 곧장 써내려가되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후학(後學)을 양성하여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배우는 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여 목은 선생(牧隱先生)이라 일컬었다. 나라의 문한(文翰)을 맡은 지 수십 년에 여러 차례 중국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여 낯빛을 변하는 일이 없고 모난 행동을 드러낸 일이 없었으며, 치산(治産)을 염두에 두지 않아 비록 어려운 처지를 당했어도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정몽주와 시종 뜻을 같이하여 신하의 절개를 변하지 않았으나 불법(佛法)을 숭신(崇信)하여 세상 사람들의 기롱을 받았다. 문인(門人) 권근이 지은 화상찬(畫像讚)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천품은 순수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났고, 성학(聖學)은 정미함이 극치에 달해서 마음이 환히 틔어 밝게 빛나네. 실천은 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문장은 표현이 기묘하였네. 증 점(曾點) 같은 광(狂)이 아니면서도 읊조리며 돌아오는 흥취를 가졌고, 유하혜(柳下惠) 같이 화(和)하면서도 불공하다는 비난은 받지 않았네. 학자들은 태산(泰山)과 북두(北斗)같이 우러러 보았고 나라에서는 시귀(蓍龜)처럼 믿어 의지하였네, 높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마음씀이 한결같았고 큰 어려움을 당하여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충성심이 더욱 미더웠고 결백한 지조는 변치 않았네.
【안】 권근이 찬(撰)한 행장(行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임신년(1392) 7월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에게 극형을 가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성 망령된 말을 한 일이 없는데 감히 거짓 자복할 수 있겠는가? 비록 죽더라도 나는 바른말하는 귀신이 되겠다.”
하자 이 말을 듣고 왕이 특별히 용서해 주었으니 공의 덕택으로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았다. 겨울에 풀려가 한주(韓州)에 돌아갔다가 을해년(1395) 가을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머물러 있었는데, 왕이 불러 옛 친구의 예로 대우하였고, 병자년 5월에 여강(驪江)에서 졸(卒)하니 향년이 69요, 묘는 지금의 한산군(韓山郡) 서쪽 가지현(加知峴)에 있다.
○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을해년에 이색이 오대사(五臺寺)에 거처하고 있을 때 태조가 여러 번 글을 보내어 부르므로 이색이 교자(轎子)를 타고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태조가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옛 친구의 예로 맞이하면서 말 한 마디 해주기를 원하자 이색은 아뢰기를,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 편히 살기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해골이나 고향에 묻히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에 태조도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中門) 밖까지 전송하고 서로 읍(揖)하면서 이별하였다. 병자년(1396)에 여흥(驪興) 월남촌(月南村)에서 피서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3일에 벽란도(碧瀾渡)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호송하는 중사(中使)도 왔다. 7일에 여흥 연자탄(燕子灘)의 배 안에서 몰(沒)하니 세상에서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개 고려 왕씨의 자손들이 배 안에서 처치된 자가 많았으니, 모두 정도전ㆍ조준 등의 음모이다.
○ 이숭인ㆍ이종학(李種學)ㆍ김진양(金震陽) 등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우리 태조의 휘하 선비들이 상소하여 정몽주의 당을 다스릴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숭인ㆍ이종학ㆍ이종선ㆍ조호(趙瑚)ㆍ김진양ㆍ이확(李擴)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이숭인은 자를 자안(子安), 호를 도은(陶隱)이라 하는데, 천품은 영민(英敏)한 예기(銳氣)가 있고,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색이 매양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흔하지 않다.”
하였고,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 원장(朱元章))가 일찍이 숭인이 지은 표문(表文)을 보고 칭찬하기를,
“표문의 말이 진실하고 간절하다.”
하였으며, 중국 사대부들이 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종학(種學)은 이색의 아들로 호를 인재(麟齋)라 하는데, 벼슬이 첨서밀직(簽書密直)에 이르렀고, 형 종덕(種德)은 관직이 지밀직(知密直)이었는데 본조(本朝 고려를 말한다)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켜, 사직이 바뀔 때 목숨을 바쳤다. 김진양은 박학(博學)하고 뛰어난 재주로 사람들이 크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항상 초가집에 살았으므로 호를 초옥자(草屋子)라 하였으며, 유배된지 얼마 안 되어 졸하였다.
【안】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정도전과 이숭인은 함께 목은(牧隱)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재명(才名)이 쌍벽을 이루었으나 뜻은 판이하였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불평을 품어 우리 태조가 천명(天命)을 받기에 이르러 정도전이 권력을 잡은 신하가 되자, 자기 심복인 황거정(黃居正)을 이숭인이 유배된 고을의 원으로 내보내 곤장을 쳐서 숭인을 때려 죽였으니, 심하구나 소인의 용심(用心)이여! 얼마 안 있어 정도전이 방석(芳碩)의 난에 관여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황거정도 정도전의 문객(門客)이었기 때문에 태종 때에 훈적(勳籍)을 삭탈당하면 지금껏 〈그 자손이〉 서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정도전의 화가 숭인보다 훨씬 더하고,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나고 있으니,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음이 뒷날의 소인들을 경계하기에 충분하다.
○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태종이 전교하기를,
“임신년(태조 1 1392)에 곤장을 맞아 죽은 이숭인ㆍ이종학 등의 무리는 실은 곤장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교살(絞殺)하였거나 억울한 형벌로 죽었다 하니 실정을 조사해서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종학이 죽을 죄가 아닌데 죽은 것은 실로 태조의 본의가 아니라 당국자가 보복하기 위하여 부당한 형벌로 죽인 것이니, 그때에 손흥종(孫興宗)ㆍ황거정(黃居正)을 교사해서 왕명을 거짓으로 꾸미고 임금을 속인 죄를 국문하도록 하되 부당하게 중형(重刑)을 한 율을 적용하라.”
하니, 공신 등이 아뢰기를,
“정도전ㆍ남은 등이 황거정과 손흥종을 사주(使嗾)하여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행위는 비록 죄가 있기는 하나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전ㆍ거정ㆍ흥종은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固)에 처할 것이며, 남은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다같이 목은(牧隱) 문하에서 나왔는데 목은이, 도은이 지은 7언 장편시 ‘오호도(嗚呼島)’를 보고 칭찬하기를 마지않자 정도전이 시기하였다. 뒤에 도전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 와서 오호도 시를 지어 중국인의 시 속에 섞어 목은에게 보이자 목은이 보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도전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크게 칭찬하자 목은이 말하기를,
“이 시편은 좋기는 좋으나 그대들도 지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였다. 도전이 이 뒤부터 더욱 자기의 재주가 도은만 못함을 알고 꼭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도은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 우리 태조를 시중으로, 태종을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심덕부(沈德符)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 혁명이 일어날 즈음에 절의(節義)를 지킨 이들은 정몽주ㆍ길재(吉再)ㆍ서견(徐甄) 등 여러 사람 외에, 또 이양중(李養中)ㆍ김주(金澍)ㆍ원천석(元天錫) 등 몇 사람이 있는데, 모두 지조를 지켜 굴하지 않았으니 우뚝하게 뛰어났다 할 만하다. 이양중은 호를 석탄(石灘)이라 하는데, 광주인(廣州人)으로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으며 혁명 후에 시골 농장에 숨어살면서 징소(徵召)의 명을 받지 않았다. 태종이 잠저(潛邸) 때의 친구이기 때문에 특별히 한성윤(漢城尹)에 제배(除拜)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상(上)이 언젠가 광주(廣州)에 행행하여 불러 보니 양중은 야인(野人)의 복장으로 거문고를 끼고 물고기 안주에 술을 올리니 상이 매우 기뻐하였으나 끝내 그 지조를 빼앗지는 못하고 그 아들에게 특별히 관직을 주어 그 충절을 장려하였다.
김주는 선산인(善山人)으로 공양왕 임신년(1392)에 사신의 명을 띠고 하 절사(賀節使)로 경사(京師 명의 서울)에 갔다 돌아오다 압록강(鴨綠江)에 도착하여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했다는 소문을 듣고 부인 유씨(柳氏)에게 편지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더라도 몸 붙일 곳이 없소.”
하고, 이어 조복(朝服)과 신발을 보내면서,
“부인이 돌아가거던 이것과 합장하고, 압록강에 도착하였다가 중조(中朝)로 되돌아간 날을 제사날로 삼을 것이며, 장사 후에는 묘지(墓誌)나 비갈(碑碣)을 쓰지 말라.”
하고는, 드디어 중국으로 되돌아가 형초(荊楚) 지방에 살았다. 뒷날 사람들이 농암 선생(籠巖先生)이라 일컬었다.
원천석은 자를 자정(子正), 호를 운곡(耘谷)이라 한다.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치악산(雉岳山) 아래에 숨어서 몸소 농사지어 부모를 봉양하면서 살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나 부(部)를 조사할 때에 군적(軍籍)에 등록되자 부득이 과거를 보아 단번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지만 역시 벼슬길에 나가고 싶은 뜻이 없었고, 이색 등 여러 사람과 잘 지냈다. 태종이 어려서 그에게 수업(授業)한 일이 있었으므로 귀하게 된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상(上)이 그 초옥(草屋)에 행행하였으나 숨고 나타나지 않자 상이 초옥을 지키고 있는 여종을 불러 음식물을 주고 돌아갔다. 원천석에게는 감추어 둔 책 6권이 있었는데, 고려가 망한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임종 때에 유언하기를,
“자손 중에 성인(聖人)이 아닌 자는 열어보지 말라.”
하였는데, 몇 대를 지나 한 자손이 가만히 열어보고는 크게 놀라며 ‘우리 가문이 멸족당하겠구나.’ 하고는 드디어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시편(詩篇)은 남은 것이 있어 세상에서 시사(詩史)라고들 한다. 그 시의 제목 주(注)에 우왕(禑王) 이전을 ‘국가(國家)’라 하고, 그 이후를 ‘국(國)’이라 하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신국(新國)’이라고만 하였다.
○ 고려가 망한 뒤에 구신(舊臣) 가문의 자제들은 즐겨 벼슬하려 하지 않아, 신분을 감추고 외부와 접촉을 끊으며 절개를 지키다 죽으면서 스스로 깊숙이 폐장(閉藏)하니, 지금 그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이른다. 우리 태조가 친히 경덕궁(敬德宮) 송도(松都)에 있는 태조 잠저(潛邸) 때의 구택이다. 에 임어(臨御)하니 정성을 다해 달래고 스스로 일신(一新)할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선비들을 시험보였으나 한 사람도 응시하는 자가 없었다. 모두 세 차례 과거를 베풀었으나 모두 그러하므로 태조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는 1백 년 동안 과거를 보이지 말라는 명까지 내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는 데 따르지 않은 자들은 금고(禁固)에 처하였다. 이에 사족(士族)의 자제들도 모두 초관(草冠)ㆍ포삼(布衫)ㆍ갈신[葛履]ㆍ면대(綿帶)를 하고 분수 밖의 일은 경영할 생각도 않았다. 여자들이 문 밖을 나다닐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두 사람이 서로 부를 때는 으레 댁(宅)이라고 불렀으며 화장도 않고 색깔 있는 옷도 입지 않아, 풍습이 검박(儉朴)한 것을 숭상하며 스스로 정절(貞節)을 지켜 지금까지 이 풍습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성종(成宗) 5년에 송도에 행행하여 금고와 과거 정지령을 해제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유승주 (역) |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