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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언했듯이 부담없이 쓰는거라, 진도는 참 잘 나가고 있습니다. ;;
근데 문제는 창작란 작가님들의 잠수기간인걸까..게시판이 너무 조용해서, 써놓은
글도 올리기 매우 거북스럽습니다..(도배는 정말 달갑지 않아요...;;)
이것 외에도 두 편 정도 분량을 더 써놨지만..그러한 연유로 이 글 올린 뒤 잠시
사이를 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단편까지 쓰면서 시간을 끌었는데!!!!!)
차마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작가님들 글 좀 올려주세요 m(_ _)m 토끼는 외로우면 죽고
마모는 외로워지면 잠수를...(.....)
* * * *
" 어엇- 여긴, 왠일이야?"
들뜨고 놀란 내 목소리에, 동그란 얼굴 가득- 미소가 퍼진다.
" 왜, 내가 오면 안되?"
" 안되긴- 놀라서 그렇지. 연락도 없이. "
나는 그애의 따끈따끈한 볼을 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짧은 단발이, 예전에 볼 때보다 더 자라있는 것 같다.
반곱슬이라 늘 머리 정리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금방
흐트러져 버리는 나와 달리, 동생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곧은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동생의 볼을 만지며, 약간 비뚤어진 안경을 가만히 바로잡아 주었다.
어릴 때 눈에 상처를 입은 동생은, 초고도 근시에 약간의 녹내장 기미까지
발생해서 이미 시야가 상당히 좁아져 있는 상태였다.
< 수술은 불가능한가요. >
< 망막이 너무 얇아져서.. 지금 섣불리 수술했다간 오히려 실명할 위험이 높습니다.>
섣불리 수술하지 않아도- 사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실명에
다가갈 뿐이라는 것을, 굳이 의사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전문서적을
통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 오다가 넘어지진 않았어?"
"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 거야? 언니보다 훨씬 침착하고..."
" 그래, 그래. "
나는 웃는다. 내가 예술가가 되려고 했던 건, 어쩌면 동생의 영향이 컸는지도 모른다.
그애는 시를 쓰지 않는데도,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시같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도, 맑은 목소리가 노래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결국 나는 그걸 표현할 수 조차 없어 좌절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사이비 시나 소설따위보단, 살아있는 그애의 체온과 미소가
훨씬 소중해서, 나는 아마 생각보다 쉽게 '예술의 길' 대신 '생계의 길'을
택할 수 있었으리라.
동생은 나를 올려다보고, 눈을 깜박깜박 거렸다.
" 왜, 눈 아파? "
" 아니- 언니. 혹시 일이 힘들어?"
" ...."
나는 말 대신 동생의 단발머리와 뺨 사이에 손을 넣어
약간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는다.
" 안 힘들어. 뭘 또 '잘못' 본 거야? 오히려 재밌어 죽겠는데. "
( 그래. 어떤 의미로는. )
시력이 극도로 나빠지기 이전부터, 동생은 남들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예민했다. 타인의 감정에, 느낌에, 혹은 향기에.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동생이 크게 불편없이 생활하는 것은
그런 오감을 이용하는 능력이 원래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동생은- 그걸 '빛의 색깔'이라고 불렀다.
적외선을 볼 수 있는 눈이라도 가진 걸까. (근데 그건 박쥐같은 거나 가진 거 아닌가)
" ...무슨 색인데?"
" 응..글쎄..."
녹색은 기쁨.
노랑색은 행복.
빨간색은 불안. 격앙.
" ...감청색..? 잘 모르겠어. 복잡해. "
흐음. 복잡한 걸까. 지금의 나.
나는 웃으며 동생의 머리위를 살짝 쓰다듬는다.
" 나 감청색 싫어하지 않아. 바다색보다 조금 더 진한 거지?"
" 으응. "
동생의 어깨를 안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매고 온 가방에는, 분명
직접 만든 사탕과, 과자와, 내게 쓴 쪽지들이 가득하겠지.
사무실 안에 가득찬, 넉넉하게 따듯한 햇빛을 보고 동생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오른다. 눈부신 빛에는 아픔을 느끼는 동생에게, 두터운
유리창을 투과한 아늑한 봄빛이 드는 방은, 나쁘지 않은 환경이리라.
쇼파에 앉은 동생은, 내가 머무는 곳의 향기를 맡듯 한숨을 돌리고,
벽에 머리를 기대어 잠시동안 잠든 듯 가만히 있다.
말은 안해도, 커다란 대학의 복잡한 공학관을 찾아오느라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동생이 휴식을 끝낼 때까지, 턱을 괴고 보고서를 끄적이고 있다.
...감청색이라.
확실히, 머리가 복잡한 건 사실이지만-.
* * * *
" 여동생이래. "
" 안닮았는데. "
" 게다가 한참은 어려보이네. 실은 딸인 거 아냐?"
유신희는 말없이, 김이선- 과장님을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손님을 맞이하는 그녀를.
언제나 조금 당혹스럽거나, 입술을 꾹 다물거나, 혹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는 그녀와 달리 ( 첫날의 그 창틀에서의
모습을 제외하면) 지금 '과장님'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양,
작은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손가락을 어린 여동생의 뺨에 덴 채,
더 할 나위없이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평소때의 딱딱하게 굳은
모습보다 훨씬 부드러워 보였지만, 동시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여동생은, 커다란 안경을 쓴 체 언니를 향해 천진한 미소를 짓고,
'언니'는 웃으며 이따금씩 동생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까맣고 곧은 생머리와 뺨 사이에 닿은 언니- 김이선의 손가락이,
신희가 평소에 보았던 것 보다 더 길고, 하얗게 느껴진다.
아니, 평소에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 - 그래서 어쨌단 거지?"
갑자기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현이.
" 여동생을 아껴주는 언니라, 좋잖아? 남의 가족사에 방해말고
빨리 연구실로 돌아가자구. 구경꺼리도 안되는 거 가지고. "
" 쳇.. 그래도, 말이 연구실이지 이건 무슨 감옥이야-. 우린 면회오는
사람도 없잖아. "
" 그렇게 할 일 없음 외출이라도 하든가. "
" 우웩. 교수님들이 날뛸걸. 이거해놓고 가라, 저거 해놓고 가라. "
" ....해놓고 가자. "
갑자기 아이들의 시선이 신희에게 머문다.
유신희가 차트를 안은 채, 아이들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 좋잖아. 우리도 외출한 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이왕이면 다 함께 가는거야. 어때?"
잠시 조용해졌던 아이들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 좋지. 다 함께라- "
" 1년 만인가?"
" 그때 샘플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외출금지 되었었지.
누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더라? "
" 공소시효 끝난지가 옛날이다-"
외출.
바깥에 나가고 싶었다.
신희는 유리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의 햇살을 바라보고,
그리고 다시 자매가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미 문은 닫기고, 자매는 언니,의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한참 큰 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어떤 느낌일까.
문득 신희는 궁금해졌다.
그렇게 웃으며, 언니를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녀는 자신의 뺨에, 가만히 손가락 끝을 대어본다.
아까 시약을 만지느라 소독을 여러번 해서, 약간 차갑게 식은
손가락 끝에서, 톡 쏘는 약의 내음이 스친다.
따듯하고- 다정한 웃음.
유신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는, 차트를 꼭 안았다.
그래. 모처럼, 다 함께 외출을 하는 거야.
그리고, 하루쯤 연구같은 것에 대해 잊고, 다 같이 노는 것도 즐거울 거야.
신희는 창 밖에 푸르게 돋는 싹들과, 평화롭고 한가한 가운데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왜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다 한결같이 행복해보일까.
우리들도, 저 사람들이 보기엔 그렇게 느껴질까. 행복하게. 걱정없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 그럴 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얀 가운을 입고,
공학관의 연구실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신분증 겸 전자카드를 목에 건
자신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외출' 할때는 이게 필요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 * * *
" 대체 저 여자는 왜 온거냐."
태현이 불만스럽다듯 모래의 머리카락을 잡고 늘어지며
조그맣게 소근거렸다.
" 어쩔 수 없잖아. 저 여자가 붙어야 외출허가가 된다는데. "
" 진짜 저거 정체가 뭐야? 감사원이면 감사원답게 회계 장부나
들춰보면 될 거 아냐. 대체 왜 우리 소풍에까지 끼어드는데?"
" 너야말로 내 머리카락 부터 놔."
태현이 모래의 머리카락을 놓자, 그녀는 자신의 곧은 생머리를
다시한번 점검하고는, 모처럼 밝은 색 원피스 차림인 자신의
모습을 주변의 주차용 거울에 비춰보았다.
" 흥..공주병. "
" 뭐야?"
" 아니. 옷 예쁘다고-"
태현이가 기분이 나쁜 이유를, 백모래는 대충 짐작하고 있다.
그는 사실 성격이 나쁜 편이 아니지만, 오히려 수더분하고
배려심도 있는 편이지만, '자기들의 세계'에 남들이 끼어드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그런 것치곤, 유신희는 너무 쉽게 받아들였지만.
(아니, 쉽게 반한건가- 확실히 그건 누가봐도 '한눈에 반한' 얼굴이었지.)
그여자,는 태연히 도시락 통을 들고, 바람이 기분 좋은 듯 태평한 표정을
하고 있다. 대체 누구의 기분전환을 위해 나온걸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 뭐,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왜 그렇게 싱글벙글해요?"
모래는 그녀 옆에 가서, 생각보다 큰 키의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 김이선은 그런 질문을 하는 그녀가 오히려 의외라는 듯,
건물 안에서보다 두배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응? 당연하지. 소풍이잖아. 도시락도 있고. 대학 캠퍼스긴 하지만,
워낙 넓어서 숲속같고. 돗자리도 있고. 날씨도 좋고. "
....흥분했군.
이 여자, 정말 어른인걸까. 아니면 자신들이 비정상인걸까.
그녀는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맨날 걷는 캠퍼스따위. 지겨울 뿐인데.
그녀는 마치 회춘이라도 한 양, 정말로 자기들 사이에 녹아들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흥..착각이야 자유지만.'
영주도 기분이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긴, 영주는 처음부터 그녀의 존재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지. 사람들, 특히 자신보다 연상의 여자들을 언니처럼 잘 따르는 영주.
그녀는 마치 유치원 선생처럼, 아이들을 살피며, 특히 영주의 손을 잡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엿들었지만, 기껏해야 남자친구가 있냐, 좋아하는 사람은 없냐,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 그런 시시껄렁한 것들이었다 .
속물.
모래는 속으로 혀를 찬다. 서른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회계 장부나 입력시키고 있는 인생이라니,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저 지긋지긋한 연구실에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 본 채 인생을 썩히기도 싫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끝내면, 각자 하고 싶은 영역의 연구를
자유롭게 해도 좋아'
모래는 교수들의 말을 상기하며, 힐끔, 팔짱을 꼭 끼고 걸어다니는
학부생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부럽기도 한 모습이었지만- 실제 자신들 또래의 애들이긴 했지만,
왜 이리 유치하게 느껴지는 걸까?
문득 모래는 뭔가 떠오른 듯, 영주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 과장님. 저기요- 궁금한 게 있어요. "
" 응?"
" 저기, 혹시 애인 있으세요? 결혼할 사람이나, 동거중인 사람. "
영주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모래는 짖궂은 미소를
속으로 감추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별로 당황하지 않고,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 손가락으로 다른 손 바닥에 뭔가를 끄적인다.
" 음- 지금은 없고, 학생 때 두 세명... 졸업하고 두 명. 동거는 한 번. "
" 우왁. "
옆에서 듣는 듯 안 듣는 듯 했던 한희가 찬탄(?)의 소리를 질렀다.
" 의외로 인기 많네요. 대단한 걸-."
" 응. 내가 원래 좀 인기가 있어. 어린애들은 잘 모르겠지만. "
담담한 그녀의 말투에, 공연히 신경질이 났다. '의외로'라는 한희의 말에도,
그녀는 전혀 마음이 상하거나 상처받지 않은 듯 태연했다.
하긴, 그 정도에 마음이 상한다면, 정말로 어른이 아니겠지.
" 근데 금방 차였나보네요. 그렇게 많이 사귄 걸 보면. "
" 그래- 난 원래 사람들 별로 안좋아해. "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대답.
모래는 약간 아연했다.
" 그런데 잘도-"
잘도 우리들이랑 어울려 소풍같은 것도 하는 군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영주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귓에다 뭐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 웃으며, 영주의 머리를 토닥였다.
" 모래야. 우리 점심 어디서 먹을까? 이왕이면 사람들 없는데가 좋지 않아?"
어느샌가 주변에 다가온 김주열이 그녀에게 말했다.
주열이 있으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왠지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거나,
성질을 부리려는 마음이 녹아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할 수 없지,
모처럼 온 소풍이니까.
모래는 한숨을 쉬곤, 고개를 돌려 기숙사로 가는 산길을 바라본다.
" 산으로 올라가서 먹어요. 아. 근데 신희는?"
" 응. 저쪽에 태현이랑 같이 있는 것 같은데. "
과연, 약간 떨어진 곳에 그녀는 태현과 함께 천천히 무언가를 이야기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태현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선,
연구에 관련된 이야긴 것 같다.
...알기 쉬운 사람이라니까. 정말.
* * * *
산기슭. 많지는 않지만 산에서부터 내려온 개울물이 흐르고,
나무 다리가 꽤 운치있는, 그럴 듯한 교내의 '산 속'에서,
나는 아이들과 첫 소풍의 도시락을 풀었다.
원래 아이들이 원한 것은 학교 밖의 외출이었고,
나,라는 혹이 붙지 않은, 자신들만의 시간이었지만
교수들은 허락하지 않았고, 조교는 '나'를 방패삼아
그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솔직히 그건 내게도 그다지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감시원' 노릇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거대하고 어두침침한 건물을 빠져나오니, 그 자체로도
세상이 바뀐 듯,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봄빛도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난 살갗위에 뿌려졌고,
바람도 훈훈하다.
몇년 전의 나와 똑같은 '평범한 대학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캠퍼스를 누빈다.
나는 가장 이야기하기 편한 영주를 붙잡고,
아이들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 별로 데이터 이상으로 얻어낸 건 없었지만)
친한 척 남자애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꼭 감시원의 역할을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기분이 무척 좋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캠퍼스를 좋아한다.
소풍도 좋아했고, 실은 술도 좋아했다.
이것저것 적당히 산 음식들에, 직접 만든 유부초밥이며
샐러드도 있었지만, 솔직한 심정은 삼겹살과 소주, 하다못해
캔맥주라도 가지고 오고 싶었다.
( 그러나 조교가 아-주- 간곡히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나와 애들 사이엔 아직 위화감이 남아있었다.
백모래처럼, 드러나게 내게 못마땅한 심경을 보이거나,
짖궂음을 나타내는 아이는 물론이거니와,
( 분명한 건, 나이에 비해 여섯명 중 그 누구도 연애에는 그다지 면역이 없다는 것이다.
그 애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들 이외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서툰 것 같았다.
김주열, 그 사람은 좀 예외인 듯 하고, 박영주도 얌전한 것 치고는 의외로 연애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지만 )
한희라든가 태현에게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 어려웠다.
아니, 말을 걸 수는 있었지만, 친근한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쪽일까-.
" 이거 언니가 만든 거예요? 와.. "
영주가 내가 만든 유부초밥 하나를 들고 감탄스럽다는 듯 웃었다.
어느새 그애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 야. 그건 누구나 만들수 있는 거야. 그나마 생김새 좀 봐라.
내가 발로 만들어도-"
태현이 뭐라고 하는 걸, 주열이가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막는다.
그의 얼굴엔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라 있다.
" 아주 맛있겠는데요?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어요. "
" 뭘.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거 맞는데. "
나는 어느새 애들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어차피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지나친 예의조차 거추장스럽다.
" 신희야. 너도 와서 하나 먹어. "
조금 떨어져서, 높은 나무 하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애가
고개를 돌린다.
밝은 태양 아래서 보는 그애는, 약간 섬찟하도록 눈부셨다.
나무와, 숲이, 그리고 자연스러운 바람이 지독하리만큼 잘 어울리는 여자.
하지만 그 백색 건물 안에서도, 하얀 가운을 입은 그애도
위화감은 없다.
신희는 주열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나무 꼭대기의 푸른 가지들을
바라보고는, 뭐라고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 자-"
태현이 통째로 건네주는 도시락 통에서, 그녀는 유부초밥 하나를
집어들고 처음으로 먹는 음식처럼, 한입에 넣고 가만가만 씹었다.
" 저 여자가 직접 만든 거라는데, 식중독 걸리면 다 함께 걸리는거다-"
그 말에 신희가 초밥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손가락으로 쓱 훑으며
내 쪽을 보았다.
" ....서서 먹으면 체해. 이쪽에 와서 앉아. "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옆에 판판하게 깔아진 돗자리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다시 나무 쪽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애는 의외로 순순히 내 옆에 와서 앉고, 아이들도
저마다 눕든지, 돌위에 걸터앉든지 하며 산 속의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밥을 다먹고, (아니나다를까) 애들이 사가지고 온 '음료수'
속에 들어있던 알콜들까지 처리하고 나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나는 내 뒤에 있던 커다란 나무를 등판삼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먹고 나서 바로 자면 살찌는데...
함께 살 때 늘 들었던 동생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 언니, 또 야식이야? 먹고 바로 자려그러지?'
' 아냐- 나 회사일 마저 보려면 밤 새야되..'
' 그러면서 꼭 그냥 자더라. 차라리 TV봐-'
' 아냐..나 안자. 유선아. 걱정마.'
" 유선아.."
잠꼬대인가, 나도 모르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핫, 하고 눈을 떠서 둘러보지만, 다들 각자의 세계에 빠져서
(나처럼 자는 애도 있고, 혼자 뭔가 중얼거리는 애도 있고,
다람쥐를 가만히 지켜보는 애도 있었다)
내 잠꼬대는 듣지 못했다. 뭐, 들어도 상관없지만.
" - 그 애 이름이예요?"
" ....."
나보다 약간 높은 바위 언저리에서, 그애,가 묻는다.
하필이면.
" 뭐가?"
나는 시치미를 뗀다. 신희의 차분한 눈동자가 내 얼굴 표면을 훑는다.
마치, 아까의 높은 나무 가지를 바라보듯.
" 유선이."
" ..."
" 동거했다는 애인이름은 아닐테고-"
낭랑하고, 그러면서도 차분한 말소리에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아까 대화를 들었나? 꽤 떨어져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잠든 새 아이들이랑 내 연애 생활에 대해 수다라도 떨었나?
하지만 사실 나는 화낼 자격까진 없었다.
나 자체가, 그 아이들의 사생활을 알아내고, 보고하고, 간섭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 동생이야. "
목소리를 최대한 태연하게 하며, 나는 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 잠꼬대로 동생이름을 부르는군요. "
" ....."
그래. 어쩔래. 잠꼬대로 꼭 연인이름 불러야 된다는 법 있어?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예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애가 몹시 짜증이났다.
왜냐하면, 유선이는 내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고, 남자든 여자든,
애인이든 가족이든을 떠나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순결한 영혼이니까.
내 동생으로 있기에 너무 아까운.
...그리고...
" ...언니, 라고 불러도 되요? "
나는 갑자기 멈칫,한다. 그애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해 꽂혀있고,
아이들은...
" 아까 영주도 언니라고 하던데. 누구는 언니라고 하고, 누구는 과장님이라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주으며, 신희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입술을 한번 꽉 다물고, '나의 할 일'을 생각해냈다.
나는 이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특히 유신희와는, 더더욱 친해질 필요가 있다.
<요주의 인물>
그애를 둘러싼 감정을 파악하고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선
그애와 친해지는 것이 가장 편리하리라.
나는 잠시 지나치게 빨리 돌았던 아드레날린을 진정시키고,
머리를 한번 흐트러뜨린다.
학창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는 너무 쉽게 흥분하는 게 탈이다.
이러니, 연애를 길게 못하지...
" ....그럼. 아무렇게나 부르고싶은 데로 불러. 언니든. 과장님이든. "
" ...이선씨,는요?"
얼씨구. 나는 약간 아연한 얼굴로 그애의 얼굴을 본다.
실제로는 다섯살 차이. 지금 그애가 알고 있는 바로는 무려 여덟살 차이인
나와 맞먹겠다고?
나는 웃으며 두 팔로 엑스자 모양을 그려보인다.
" 노 땡큐. 난 동성에겐 이름불리는 거 별로 안좋아해서. "
" ...연애중독인가봐요?"
" 뭐. 글쎄. "
내 애매한 대답에 그애가 웃었다.
아까 그애가 서 있던 장소의, 햇살이 비치던 푸른 잎사귀와
비슷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유선이가 이 애를 본다면 <어떤 색>이 보인다고 할까.
내가 보기에 이 애는...
" 과장님- 영주가 몸이 좀 안좋은 거 같아요."
적막을 깨뜨리는 주열의 목소리.
나와 신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영주가 누워있던
돗자리 쪽으로 갔다.
그냥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있었다.
" 내려가야 겠다. "
" 내가 업을께. "
영주가 아픈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닌 듯, 아이들은 비교적 침착했다.
태현이의 등에 업힐 때, 영주가 빨간 얼굴로 희미하게 말했다.
" ..미.안해..나때문에...또.."
" 미안하긴. 소풍 다 끝났는데. 넌 가서 빨리 잠이나 자.
내가 특제 해열제 가져다 줄테니까. "
가벼운 공기라도 업은 듯, 태현이 아무렇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고, 모래가 그 옆에 따라가고, 나머지 아이들과 나는 짐을 챙겨
그 뒤를 따라 공학관으로 향했다.
그다지 밝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아마도 나 역시.
핸드폰이 울렸다. 조교에게서 온 문자였다.
' 즐거운 소풍이었나요? 슬슬 철수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는 즐거웠다고, 안그래도 돌아가는 길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영주가 아픈 건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아이들을 자게 내버려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데이터에 영주의 몸 상태에 대한 건 없었는데.
" 과장님. "
옆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 과장님 책임은 아니니까 염려 마세요. 영주 몸 약한 건
우리들이 더 잘 알아요.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까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좋은 쪽으로 부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사소한 일엔 신경쓰지 말자, 라고 생각하며 나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 김이선 과장님. "
다시금 뒤에서 신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 - 이런 건 괜찮죠?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니까. "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있는 그애를 바라봤다.
그 애는 나보다 천천히 걸어오다가, 내가 고개를 돌리자 멈추어 서서
내 눈을 바라보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아까 내가 그랬던 것 처럼.
평범한 남방. 브이넥 스웨터. 청바지 차림의 그애는
하얀 가운을 걸친 건물 안,에서와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김이선'
그애에게 불린 내 존재또한, 지금까지와 전연 다른,
생소한 어감으로 다가왔다.
너무나, 이상스럽게.
첫댓글 꺄악ㅋㅋ 재밌어요 ㅋㅋ
잫봤습니다^
잔잔하게 다가가는 느낌 재밋네요 ㅠ.ㅠ 저는왜 이제서 본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