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덕원리(陽德院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양덕원이라는 원집이 있었다 하여 양덕원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장터, 뒷모퉁이, 앞버덩을 병합하여 양덕원이라 한다. 남면의 중심지로 면단위 기관과 1954년에 설립한 양덕중학교와 1974년에 개교된 양덕상고가 있으며, 기미만세운동이 벌어지던 1919년에 설립한 명덕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2개리로 분리되어 있다. 주민의 60%가 농업에 종사하며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도 30%가 된다. 이 마을에는 매년 음력 3월3일 봉바위산 성황대제의 풍습이 있다. 주민들의 무병장수와 풍년을 빌고 온갖 재앙을 멀리하려는 뜻으로 마을 원로회에서 뽑힌 도제주는 한달동안 몸과 마음을 정히하고 이날을 맞아 잡인의 출입을 금한 가운데 칠성각 앞 개천에서 수퇘지 제물로 제를 올리고 저녁에는 마을 원로들과 마을과 가정의 행운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린다. 마을 동쪽 동구에는 200녀년 묵은 노송 숲이 있는데 이곳에 1972년 부락 청년들이 마을 노인들을 위하여 봉암정이라는 육각정자를 지어, 이마을 노인들과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유목정리(楡木亭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느릅나무 정자가 있었다하며 느릅정이 또는 유목정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길, 봉상촌, 물구비를 병합하여 유목정리라 한다. 주민의 90%가 농업에 종사하고 맥주 원료인 호프와 비육우, 양봉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경기도와 도계를 이루는 신당고개 마루에는 성황신을 모신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포장된 44번 국도가 뚫려 그 흔적을 찾아 볼 길 없다. 마을에서 제일높은 두루봉에는 옛날 봉화를 올려 긴급한 상황을 알리던 봉화대가 흔적만 남아있고 큰 갈길이, 작은 갈길이로 나뉘며 마을 뒷산에서는 매년 음력 3월3일과 10월 3일에 산치성을 올리는 풍습이 전해오며, 임진란 때 근동 사람들이 이 산속에서 피난을 하고 있다가, 그 사실이 왜병에 알려져 전원이 무참히 학살된 후로 사람인자, 쌓을 적자를 써 인적산이라 불려오기도 한다.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다. |
신대리(新垈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유치리에 있는 느르치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터, 또는 신대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창말, 동거른다리, 서거른다리, 아래거른다리, 사기막, 덕머리, 샛말을 병합하여 신대리라 한다. 전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고추, 호프등의 특용작물과 비육우, 양봉등도 높은 소득원이 되고 있다.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다. |
시동리(詩洞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옛부터 시동팔경이 있어 시인묵객들이 모여들어 사시철 끊임없이 시를 읊었다 하여 시동골 또는 시동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음실, 동삿골, 독벼루, 사기점거리, 도출을 병합하여 시동리라 한다. 시동팔경을 보면 삼성서당의 시 읊는 소리, 풍악들이 논매는 소리, 소리개뜰의 풍년경치, 금계천의 고기잠이 햇불, 미봉산의 월출, 인적산의 저녁놀, 금물산의 단풍, 매화산의 설경이며 4개리로 분리 되었다. 농업이 80%, 상업이 20%를 차지하며 농가부업으로 비육우, 양봉, 고추등을 주로하며 이곳에는 시동출장소와 1950년에 개교한 협신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
유치리(楡峙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느리치 고개의 아래에 위치하며 느릅나무가 많은 고개가 있다하여 느르치 또는 유치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화터, 학동, 지산, 산막골을 병합하여 유치리라 한다. 1리와 2리로 나뉘어 진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비육우와 고추, 담배등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고 2리에는 이회명과 이회봉 두 형제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1884년 내려진 큰 효자정문과 작은 효자정문이 있으며 1939년에 설립된 매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1938년에 만들어진 유치저수지가 있는데 몽리면적이 77.4정보에 달한다. |
월천리(月川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넢은 위치에 있다하여 다락골 또는 월천동, 월천곡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말, 가작골, 헌텃골, 양지촌, 욕골을 병합하여 월천리라 한다. 비교적 협소한 부락으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인삼과 호프를 많이 재배하는 곳이다. 마을 동쪽 며느리고개가 있는 산으로부터 발원한 월천 개울은 서남쪽으로 흘러 명동리 숲골에서 합류하며 마을 주변에서 장사바위, 용마바위, 쇠뿔봉등의 명소들이 있다. |
명동리(明洞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조선조까지만 해 도 월천리와 합쳐서 월명리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양촌, 심방골, 숲골, 안골을 병합하여 명동리라 한다. 다일 행정리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
제곡리(諸谷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물좋고 산좋으며 전답이 기름져 살기가 제일 좋은 곳이라 하여 제일, 제골 도는 제곡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터를 병합하여 제곡리라 한다. 주민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토종벌과 인삼재배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삼승대 성황제와 토보산 산신제를 각각 2월1일과 10월1일에 올리고 있으며 조선 인조때의 효자 이소의 효자각이 있고 8·15 전후의 국내 유명 무용가인 최승희도 이곳 출신이다. |
용수리(龍水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용소가 있었으므로 용숫골 도는 용수동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응아지, 큰말, 장독벼루를 병합하여 용수리라 한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옥수수 재배단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품목골에서는 산신제가 행여지고 있고 1937년에 설립된 용수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용수리는 전에는 앞산이 둘로 나뉘어져 그 사이로 강물이 흘러 용수 마을을 돌아서 흘러 용소에서 용이 나와서 산을 한데 합하여 '강물이 장독벼루 쪽으로 흐르게 됐다는 말이 전하여 지기도 한다. |
남노일리(南魯日里) |
본래 홍천군 북방면의 지역으로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드레미, 돌고개, 어내를 병합하여 노일이라 불려오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노일, 북노일로 구분되어 남노일은 남면에 북노일은 북방면에 편입됐다. 주민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며 땅콩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1976년에 전기가 들어가고 1980년에 시내버스가 개통된 오지 마을이며 36가구의 소규모 부락이다. |
화전리(花田里) |
본래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역으로 옛날 신선이 꽃을 가꾸며 살았다하여 화전동 또는 화전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과우, 방골, 길골, 터골, 독장골, 막거리, 홍성골, 묵어골, 봄노리, 사방터, 허리원, 명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화전리라 한다. 주민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1949년 설립한 화전초등학교가 있고 3개리로 분리되어 있다. 오미자, 담배, 호프등의 특용작물 재배를 많이 하고 있으며 방골에서 올리는 서낭제는 이산의 산신령이 문성신이라 하여 제물로 인두와 가위를 올리는 것이 특이하다. (화전초등학교 는 명덕초교로통합) |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드리고 역사공부 ,내고향자랑 다시 한번새겨 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