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을 회복한거 같다. 편하다.”
농심배·춘란배 등 굵직한 세계바둑대회를 연속 제패하고 돌아온 바둑의 신, 이창호 구단(30)의 소감은 늘 그렇듯 담담하다.
지난 26일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 구단. 8세 때부터 시작한 바둑이지만 단 한번도 대국시간에 늦은 적이 없다. 이 날도 약속시간
10분 전에 도착해 ‘풀어 쓴 천자문’을 읽고 있는 그의 표정은, 지난달 22~26일 열린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4명의 중·일 고수들을
차례로 베어 버렸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창호’를 쳐보라. 사진 속 100가지 이창호는 늘 돌부처처럼 굳어있다.
“어떤게 자연스러운 표정인지 몸에 익숙치가 않아서…. 그래도 요즘은 대국 때 제 얼굴에 감정이 나타난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실수했을 때는
마음 다스리는 게 괴로워요. 괴로운데 억지로 참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감정을 나타내는게) 더 편한것 같아요.”
그는 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5000년 바둑 본가(本家) 중국에서 세계 바둑고수들을 무릎꿇게 했다. 농심배·춘란배에서 그가 보여준 묘수는
중국 전역에 생중계됐고, 중국은 이 30세 청년에게 ‘아주 질려버렸다’는 뜻의 ‘리마(李麻)’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특히 농심배의 경우, 같은 팀이었던 한국기사들이 도중 하차하는 바람에 이창호 혼자 결승전에서 4명의 외국 기사를 상대해야 했다. 이들을
연속으로 이길 확률은 단 3%, 이 구단을 신보듯 하는 중국 팬들도 힘들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농심배는 대회 전부터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일단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더 편하게 뒀습니다. 초반에 좀 부진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회복하고 싶었고요.”
‘초반의 부진’. 그는 올초 1승 5패의 성적으로 입단 이래 최악의 슬럼프에 허덕였다. 어이없는 실수를 범해 국내 기사들에게 번번이 졌던
것이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1등의 한계’ ‘체력이 다했다’ ‘여자문제’ 등 별별 추측들이 다 나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 구단은 한참을
뜸들인 후 말을 이었다.
“성적으로 볼때, 그 당시에는 슬럼프가 맞죠. 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진 않았어요. 상대적으로 국내 젊은 기사들이 강해지고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고요. 외국기사와 둘 때는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더 들긴 하죠. 나라의 대표 자격으로 두는 거니까 그런게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어요”
18세에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해 세계 최연소 챔피언을 기록하며 바둑강국 중·일을 제치고 한국바둑 전성기를 열어 젖혔던 이창호 구단. 그는
지금까지 미동도 않은 채 세계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창호의 벽을 넘자’란 젊은 기사들의 구호는 10년 넘게 진행형이다. 이만하면 슬슬
바둑이 지겨울때도 됐다. 그게 슬럼프의 원인 아니었을까.
“바둑을 멀리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힘들 때는 오히려 몰입이 잘되는데 바둑이 너무 잘될 때나 결과가 잘 나올 때는 그런 (멀리하고
싶은)느낌이거든요. 평소에도 제가 하고 싶을 때 (바둑을) 몰아서 하고 안 그럴 때는 쉬기도 해요.”
대회 때마다 8~9시간씩 앉아 바둑판에 집중한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소모를 의미한다. 아무리 산신(算神) 이창호라도 머릿속에서 한번에
100수까지 그렸다 지웠다를 20년 넘게 해왔다면 몸이 남아날리 없다. 그도 “갓 입단한 기사들이 체력면에서 좋다. 요즘 가벼운 스트레칭이나
등산·조깅을 해서 (몸을) 관리한다”고 했다.
기풍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기존 이창호 바둑의 특징이 ‘두터움’이었다면 요즘은 그도 공격적인 전투를 시도해 체력전의 수위를 조절한다는 게
바둑계의 분석이다.
다음은 여자문제. 20년 넘은 바둑 외길이 팍팍해서였을까. 한때 ‘유머전집’이나 ‘이성과 대화하는 법’ 같은 책을 탐독했던 그는 최근
“40세 이전에 결혼하고 싶고, 곰보다 여우같은 여자가 좋다”며 결혼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2년전 중국의 미녀기사 마오자쥔과의 대국에서
비겨 ‘여인 앞에서 당황한 돌부처, 중국은 미인계로 이창호를 꺾으려 한다’는 등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한민국 바둑계가 이창호의
결혼문제에 엄청난 관심을 쏟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귀는 사람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며 긍정·부정도 하지 않은 채 화제를 돌렸다.
‘바둑의 신’이란 칭찬에는 아무말 없던 그가 “노래도 잘 부르고(그는 최근 팬클럽과의 만남에서 ‘마법의 성’을 열창했다) 알고보면
날라리라면서요”라는 말에 두 눈을 반짝인다. “날라리라는 말이 좋냐”고 묻자 “(절) 잘 봐주셨나 보네요”라며 웃는다. 날라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평범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바둑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온 거에요. 바둑을 안했다면…, 책을 좋아하니까 공부하면서 착실히 학교생활하지 않았을까요.”
뭘 물어도 답이 두문장을 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돌부처와의 인터뷰가 20분을 넘어섰을까. 그가 쭈볏쭈볏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인터뷰를) 더 해야 하나요? 말을 많이 했더니 체질적으로 힘들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바둑왕. 그의 적수는 미녀 기사가 아니라 ‘말을
많이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