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 과 명 |
바울 서신 Ⅱ | |||||
교 수 명 |
김 정 훈 교 수 | |||||
학 과 |
M. Div. | |||||
학년/학번 |
20021157 | |||||
이 름 |
김 시 년 | |||||
제출일자 |
2004 |
년 |
10 |
월 |
28 |
일 |
목 차
들어가는 말 2
1. 아덴의 설교는 실패인가 성공인가? 2
1) 실패한 설교로 보는 학자들의 주장 2
2) 중도적 입장에 놓인 학자들의 주장 3
3) 성공한 설교로 보는 학자들의 주장 3
2. 논쟁의 정리와 답변 4
1) 바울은 순수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였다. 4
2) 결신 숫자가 적었다는 것에 대해 5
(1) 받지 않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6
(2) 숫자가 성공과 실패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7
(3) 믿는 자가 그곳에 있었다. 7
3) 고린도전서 2:2은 증거가 아니다. 8
4) 바울의 설교는 접촉점이 탁월한 설교였다. 8
3. 아덴 설교의 중심 메시지 9
1) 설교의 시작(행17:22-23) 10
2) 설교의 진행(행17:24-29) 10
3) 설교의 마무리(17:30-31) 11
4) 바울은 왜 부활을 외쳤는가? 11
4. 아덴 설교의 현대의 적용점은 무엇인가? 12
나가는 말 13
참고문헌 14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는 실패한 설교라고 알려져 있다. 필자도 뚜렷한 학문적 연구 없이 이런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훈교수의 책「사도들의 신학과 설교」에서, 바울의 아덴의 설교는 괄목할 만한 성공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1)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보면서 왜 한국교회에서는 바울의 아덴 설교를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할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연구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F. F. 브루스는 바울의 아덴 설교만큼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 본문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2) 논쟁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논쟁은 아덴의 설교가 바울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일부학자들은 아덴의 설교는 누가나 다른 어떤 저자에 의해서 새롭게 쓰였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는 설교의 내용과 방법이 바울 고유의 설교와 다르다는 데 두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논쟁은 아덴에서의 설교가 실패한 것인가? 라는 논쟁이다.
필자는 지면상 첫 번째의 논쟁은 접어두고, 본 연구에서는 두 번째의 논쟁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아덴 설교가 실패한 설교인지 아닌지를 여러 학자들의 의견과 분석을 통하여 분명히 밝히고, 두 번째는 아덴 설교의 핵심을 살펴봄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아덴의 설교는 실패인가 성공인가?
1) 실패한 설교로 보는 학자들의 주장
아덴의 설교를 실패로 보는 대표적인 학자는 귄터 보른캄이다. 그는 바울의 당대의 철학자들 앞에서 자기의 학문의 우수성을 자랑하고자 하였고, 결국 그는 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결신자의 숫자가 적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바울은 ‘다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겠다.’(고전2:1-4)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 램지는 바울이 여러 가지 철학과 사변을 통하여 지식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사건을 기대하였지만 아덴에서의 실패의 경험에 실망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4) 그 외에도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은 알렉산더 맥클렌(Alexander Maclaren)5), 렉헴6), 이상근박사7) 등이 있다.
2) 중도적 입장에 놓인 학자들의 주장
드레인은 아덴에서의 설교에서 바울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부분이 아니라 헬라적인 요소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나중에 본래대로 돌아온 그의 전형적인 부활에 관한 설교로 인하여 청중은 그를 조롱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결신자가 나왔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8) 교회성장의 전문학자인 피터 와그너는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를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숫자적인 결과에 있어서는 실패한 설교라고 한다. 그는 우리가 바울의 목표를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서 이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9) 만일 바울의 목표가 ‘상황화’한 설교를 전하려 한 것이었음을 이해한다면 바울의 설교를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목표를 지성주의자들과 논쟁에서 이기는 데에 두었다고 이해한다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일차적인 목표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아덴에서 튼튼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면 그의 실패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바울의 아덴에서의 사역이 능력의 사역보다는 말씀 사역인 것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의 설교는 세련된 것이었지만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사용한 방법이 말씀으로 설명하고 능력으로 확증하는 방법인데 그것을 이곳에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설교는 실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3) 성공한 설교로 보는 학자들의 주장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를 실패한 설교라고 보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맞선 사람은 바로 스톤하우스였다. 그는 「아레오바고 앞에서의 바울」이라는 책을 통하여 실패한 설교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하여 훌륭한 답변을 하였다.10) 스톤하우스는 이곳에서 전도의 결과가 좋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아덴 사람들의 책임이며 고린도전서 2:2에서 바울의 결심은 그가 아덴에서 시도한 접근 방법에 대한 환멸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지지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존 스토트는 바울이 결코 아덴에서의 설교를 불만스럽게 여긴 것을 성경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세 개의 연설을 각각 유대인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비시디아 안디옥, 13장), 무지한 이교도들(루스드라, 14장), 그리고 교양 있는 철학자들(아덴, 17장)에 대한 그의 선포의 견본들로서 기록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회심자들의 숫자로부터 메시지의 옳고 그름을 추론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아덴에서 십자가를 전파했을 것이라 믿고 있는데 그 이유로 누가는 바울의 긴 연설을 짧게 발췌하여 기록했을 것인데, 부활이 선포되었다면 생략된 앞부분에는 분명 십자가가 선포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11) 브루스는 바울은 결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했을 법한 철학적 방법으로 설교하지 않았으며 그의 주장은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성경 계시에 확고하게 서 있었으며, 성경의 사상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하였다.12)
2. 논쟁의 정리와 답변
1) 바울은 순수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의 설교를 실패로 보는 사람들은 바울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이 아덴의 찬란한 문화를 보고 이들에게 문화적인 면에서 자기 자신이 앞서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이 설교를 함으로써 실패를 했고, 이것은 고린도전서 2장의 회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바울은 자기가 이 설교를 실패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가의 기사에서 그가 아덴에서 행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불만스럽게 여긴 부분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바울은 아덴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 설교를 했던 것이다.
스토트는 바울이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식을 그들에게 정확하게 전하였으며 바울은 복음을 선포함으로 그들이 우상으로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과 그 분의 아들에게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설득하려고 애썼다고 말하고 있다.13)
아덴에서의 설교를 순수하지 못하게 보는 자들은 사도행전 17:16에서 바울이 ‘분하였다’는 말에 사용된 동사 παροξύνω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성내다’라는 동사와 동일한 단어임으로 그는 진정한 열의와 순수로 설교하지 않고 자기의 감정에 치우쳐 행함으로써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프리 W. 브라밀리는 그의 신약성서 사전에서, παροξύνω라는 단어는 ‘자극하다’, ‘성내다’를 나타내는 단어이지만, 사도행전 17:16에 사용된 단어 παροξύνω는 바울이 자극을 받아서 설교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상 숭배에 대해 화를 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4) 스토트도 παροξύνω라는 단어는 원래 의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자극하다’, ‘성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우선 그 동사는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음을 유념한다면 이는 갑자기 화를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본 것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정한 반응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자신의 감정을 누가에게 이야기할 때, 그 자신이 사용한 단어임으로 분명 바울은 이러한 감정들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15)
칼빈은 그 성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극히 열심인 것을 보았을 때, 바울은 당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신 누가는 바울의 열심을 자극했던 그 흔하지 않은 의롭고 거룩한 분노를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기의 사역을 위한 더욱 열렬한 각오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불경스럽게 모독되고 있는 것과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부패된 것을 보고 바울이 분노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 이외에 그 무엇도 자기에게는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바울이 극히 분노하여 실망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있지 않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사람들은 전혀 분노하게 되지 아니하고 슬픔과 근심을 갖는 척 하면서 그 악한 자들을 시정시키기는커녕 그들과 함께 불경스러운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16)
박윤선박사는 그의 「사도행전 주석」에서 바울이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라고 하였는데 이때 ‘분하여’라는 말은 흥분됨을 의미하며 이런 심리는 통분한 감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것은 우상의 거짓된 것에 대한 분노요, 하나님을 섬기라고 지음 받은 인류가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원통히 여김이다.’라고 하였다.17) 이상근박사도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가 실패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의도는 순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18)
그러므로 바울이 아덴에서 느낀 고통 또는 ‘격발’은, 인간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영광과 찬송을 우상들에게 돌리는 우상 숭배에 대한 혐오감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열심 또는 질투인 것이다.
2) 결신 숫자가 적었다는 것에 대해
피터 와그너는 진정한 교회의 성장은 내적 성장, 교량적 성장 그리고 분명하게 개척성장과 양적성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적인 성장이 없는 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교회라고 말한다.19) 쟌이라는 학자는 바울은 아덴에서 개종자를 거의 얻지 못하였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도 없었는데, 이는 바울의 지적인 교만으로 인해 훌륭한 설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이 진리에 관하여 더 상세히 알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설교는 실패한 설교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의욕은 복음에 대한 경멸적인 모욕과는 다른 것이다.20)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면서 바울의 아덴 설교가 성공한 설교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1) 받지 않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칼빈은 아덴에서 바울이 조롱당한 것은-인간의 마음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신비 때문인데 이 신비는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도 이에 관한 지극히 작은 지식도 얻은 적이 없기 때문에-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21) 이에 대하여는 브루스22), 헨리23), 박윤선박사24) 등도 같은 의견이다.
따라서 아덴에서 결신자가 적었다는 것은 바울의 설교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반응치 않은 아덴 사람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사상과 지식만이 참이라는 지적 교만으로 바울의 설교를 외면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결코 숫자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근거하고 있는가이다. 바울의 설교가 잘못된 것이라면 한 명도 회심자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몇 사람이 믿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지금 이 시대 선교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닌가? 어떤 지역에서는 많은 회심자가 나오지만, 회심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 선교지도 많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그 증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노아는 120년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지만 한 사람도 귀를 기울인 사람이 없었고,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그리고 회개에 관하여 뜨거운 눈물의 설교로 유다에 전했지만 유다 백성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2) 숫자가 성공과 실패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존 길리스는 “진정한 부흥의 추구는 결코 외적이며 양적인 성장이나 팽창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참된 부흥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마땅히 전해야 하는 바를 합당하게 담대히 전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5) 옥한흠목사도 우리가 열매를 가지고 전도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숫자적인 것은 그 교회의 성공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26)
따라서 얼마나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자들의 숫자’로부터 메시지의 옳고 그름을 추론해 내려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27)
(3) 믿는 자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은 후에 믿은 숫자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레오바고는 12명의28) 판사로 구성된 아테네 최고의 법정이었다.29) 그곳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므로 아주 적은 숫자만이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소수 가운데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라 하는 여자,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도 믿은 것이다. 렌스키는 이와 같은 것은 사실 승리의 신호라고 말하며30) 박윤선박사도 복음을 받은 이 소수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하며,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매우 반갑고 후에 크게 쓰게 되는 귀한 열매로 간주된다고 말하고 있다.31) 칼빈도 누가가 다른 사람들에 앞서 디오누시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 시민 중에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다마리 역시 훌륭한 신분을 가진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32)
디오누시오는 회심한 후에 계속해서 바울에 의해 교육을 받아 마침내 아덴에서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린도의 감독이 되었다가 95년 도미시안 황제 때 순교했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33) 헨리는 ‘다마리’라는 여자는 ‘디오누시오’의 부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34) 렌스키는 누가가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없으나 그녀의 이름을 덧붙여 언급한 것은 그 여자가 유력한 여자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고 하였다.35)
3) 고린도전서 2:2은 증거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귄터 보른캄이나 렉헴, 그리고 렘지나 이상근박사 등은 바울이 아덴에서의 설교 후에 그들의 미미한 반응을 본 후 상당한 충격을 받고 인간적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진리만을 전하기로 단호히 결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톤하우스의 단언처럼 정당성이 없는 이론이다.36) 실제로 ‘십자가’라는 말은 그의 설교문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말이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덴에서 교묘하게 빠뜨렸다는 것을 지지해 주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언급하며 이 설교를 마쳤는데, 이 ‘부활’은 ‘십자가’보다 이방인들에게 더 미련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아덴 인들이 부활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던 그때에, 그렇다면 바울은 무슨 목적으로 아덴으로 가서 부활을 증거하였는가? 만일 그들이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고전 1;18)이라 생각함으로 인해 바울이 ‘십자가’라는 말을 빼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바울은 그들이 싫어하는 인간의 부활도 역시 빼 버렸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함축적인 의미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부활의 사건을 언급한 누가의 저술로 보아 그 안에는 부활을 말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십자가의 언급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스토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바울이 아덴에서 실제로 십자가를 전파했다고 믿는다. 누가는 그의 연설에서 짧은 발췌문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읽는데 2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바울은 이 개요를 상당히 길게 늘여서 연설했을 것이며, 그의 결론(30-31절)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떻게 그가 선행되는 죽음에 대한 언급 없이 부활을 선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회개에 항상 수반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언급 없이 어떻게 회개하라고 요청할 수 있었단 말인가?”37)
그러므로 바울은 아덴에서 그 어떤 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전하였으며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었으며 또한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4) 바울의 설교는 접촉점이 탁월한 설교였다.
필자는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그의 이방인에 대한 설교를 위한 접촉점의 탁월성을 볼 수 있었다.38) 로이드 존스는 어디에서나 어느 사람들에게나 꼭 같이 쉽게 말할 수 있는 바울의 능력에 찬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39) 레피우는 바울은 어디로 가든지 그곳의 문화나 배경에 관한 지식을 갖고 그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것은 현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고 감탄하였다.40) S. M. 젬머는 그것을 “재치 있고 강력한 설교의 기적”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아덴 사람에게의 접근 방식은 더 이상 나무랄 데 없는 정도로 훌륭하였다고 말한다.41)
여기에서 필자는 바울의 의사 전달 기술에 대하여 뛰어난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아덴의 지적인 사람들에게 지적인 사람이 된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이는 그가 부단히 자신을 청중에게 맞추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에게 설교할 때에는 구약 성경에 거의 전적으로 호소하였다(행13;14-41). 그러나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에 호소했다(행14:15-18). 아덴에서 헬라 철학자들에게 설교할 때 바울은 그들의 시를 인용함으로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했고, 그들의 역사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였으며,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샌더스는 바울이 아덴 인들의 자부심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단지 바울이 전달 방식에 있어서 그들이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여러 모양’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설교가 선교를 준비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기독교를 변증할 것인가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42)
3. 아덴 설교의 중심 메시지
바울은 아테네의 거리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목격한 후에 이곳에 메시지를 전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는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회당과 장터에서 에피쿠러스 학파에 속한 사람들(Epicureans)43)과 스토아 학파에 속한 사람들(Stoics)44) 등과 논쟁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바울을 ‘말쟁이’(σπερμολόγος), ‘이방종교를 전파하는 자’(καταγγελεύς)로-바울이 예수와 몸의 부활을 전하기 때문에-보았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특히 ‘부활’은 생소하게 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영혼의 감옥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육체를 벗어버린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므로 육체의 부활은 저급한 사상으로 여겨진 것이다. 바울의 말은 이들 철학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했다. 바울은 고대 최고의 법정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바울의 가르침이 너무 새로운 것이어서 그들의 지적 요구를 자극하였다.45)
1) 설교의 시작(행17:22-23)
바울은 사도행전 17:22-23절로 서두를 시작했다. 이 서두는 자극적이면서도 자기들에 대한 칭찬의 말로 들렸을 것이다. 바울은 청중들의 종교생활에 대한 자기의 느낌을 간략히 말함으로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과의 접촉점으로서 그들의 종교를 거명했던 것이다.46) 그리고 왜 그런 평가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풀어준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을 자신이 알려주겠다고 말하였다.
전체적으로 서두의 진행은 속도감과 연결성이 매우 좋았으며 또 청중들이 평소 관심을 갖고 있는 내용을 주제로 삼음으로서 좋은 접촉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47)
2) 설교의 진행(행17:24-29)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충족성을 언급한다(행17:24-25). 하나님은 신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주시오, 천지의 주관자이시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참되고 유일하신,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시며, 생명의 원천자이시며 온 우주의 주재자가 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또 바울은 하나님의 충족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물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다. 도리어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48)
두 번째로 바울은 인간의 한계성에 대해 진술한다(행17:26-27).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분께 의존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성 속에 살도록 규정된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 속에 살게 하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 혹 더듬어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27a) 사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할 때 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려 한다. 바울은 이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다가오시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49)
그리고 그는 청중들에게 바른 신관을 정립할 것을 촉구한다(행17:28-29). 그는 하나님을, 사람이 만든 우상과 동등한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손이다(창1:26). 그러므로 우상은 인간의 우매의 극치이다.50)
3) 설교의 마무리(17:30-31)
마지막으로 바울은 청중들에게 회개할 것을 권면하며 설교를 마무리한다. 회개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며, 그가 “정하신 사람으로 세상을 의로 심판할 한 날을 세우[셨기]”때문이라고 말한다. “정하신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가 심판권을 행사하실 것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즉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기본 뼈대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설교가 신론 중심이라 해도 기독론적 내용을 적절히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51)
4) 바울은 왜 부활을 외쳤는가?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최종적인 증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지혜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전능하신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는 느낌만 가졌을 뿐 그 분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했던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 우리 모두는 설 것이다. 이제는 도처의 사람들이 회개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심판할 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4. 아덴 설교의 현대의 적용점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아덴에는 크게 에피쿠로스학파(쾌락주의)와 스토아 학파(금욕주의)가 등장한다. 이들의 사상은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점이다. 그들은 매우 현세적인 사상으로 개인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당시의 지배적이고 지적인 시대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그토록 현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는 여러 신들을 위한 수많은 신전들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말처럼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바울의 눈길을 끈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주는데, 그들은 세상의 온갖 신들을 다 생각해서 명부를 만들었으나 그들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신들의 이름 위에 또 다른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비한 존재를 찾을 수 없었다. 단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우상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위로와 평안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크고 유명한 아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아덴의 모습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도 바로 그때와 동일하게 쾌락과 위로와 평안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쾌락과 여러 가지 도덕적 수준을 운운하면서 행복을 위해 살고 있다. 세상은 또 다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로 나뉘어서 아덴의 지식을 또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학식과 지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만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많은 자기 노력과 사상에도 불구하고 만족과 쉼이 없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현대인들은 철학이나 사교나 미신 등,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찾아 나서고 있다. 지금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있고, 어떤 희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추구하고 있다. 오늘 이 세계는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와 똑같은 상황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우리는 바울을 움직여 아덴의 우상 숭배자들과 복음을 나누도록 만들었던 이 내적 고통과 혐오가 우리의 마음에도 일어나야 한다. 그 거룩한 분노가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불일 듯 일어나야 할 것이다.
선교의 동기는 중요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비교종교 연구가 많아,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성과 독특성을 부인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회심시킨다는 개념 자체를 부인하도록 만드는 때에는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고귀한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열심 또는 질투이다. 그 분이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해야 할 올바른 위치를 부인 당할 때, 우리는 내적으로 상처를 받고 그 분의 이름을 위해 질투해야 한다.52)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이렇게 어느 환경에 놓여 있든지 간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볼 때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 시대의 회당과 유사한 교회에서, 그 시대의 광장에 해당하는 공원이나 시장터, 거리 모퉁이나 상가 등에서, 그 시대의 아레오바고와 같은 대학이나 학원가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지식적인 것을 뛰어 넘으신 “모든 지혜의 근본”(잠1:7)이신 하나님을, 오늘 바울이 설교한 것처럼 설교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덴의 바울의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며 가치인 것이다.
나가는 말
필자는 지금까지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 논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설교가 실패한 설교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필자도 이 연구를 하기 전에는 이와 같은 자들이었다.- 이 설교가 성공한 설교라는 것에 대하여 반론하며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설교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리해 보았다.
필자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설교(전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제시하는 복음을,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찮은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통합된 세계관을 찾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온전한 복음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올바로 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서 역사하신다. 교만하여 믿었던 숫자가 적었던 아덴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온갖 인간의 지혜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은 동일하게 역사하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다.
필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이 시대에서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로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큰 위로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어느 곳일지라도, 그곳이 도시든 시골이든, 사역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믿는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칭찬하실 그 분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묵묵히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대언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바르게 전파하는 것, 그 분의 뜻을 좇아 그것을 온전히 전하는 것, 이것이 이 땅에서의 진정한 부흥이며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참고문헌
국내 단행본
1. 김정훈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도서출판 그리심, 2003)
2. 옥한흠, 「평신도를 깨운다」“사도행전편”, (서울: 두란노, 1998)
번역본
1. F. F. 브루스, 「사도행전」, 김재영, 장동민 역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6)
2. G. Bornkamm, 「바울: 그의 생애와 사상」, 허혁 역 (서울: 이대출판사, 1980)
3. J. O. 샌더스, 「지도자 바울」, 이경준역 (서울: 네비게이토, 1987)
4. J. W. 드레인, 「바울」, 이중수 역 (서울: 두란노, 1989)
5. C. P. 와그너, 「개척하라」, 홍용표 역 (서울: 애찬사, 1997)
6. J. R. W. 스토트, 「사도행전 강해」, 정옥백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8)
7. J. 길리스, 「18세기 위대한 영적 부흥」, 김남준 역 (서울: 솔로몬, 1992)
8. P. J. 래피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 편집부 역 (서울: IVP, 1995)
외국 단행본
1. Stonhouse, N. B. Paul Before the Areopagus (Grand Rapids, Michigan: Eerd,ams: 1967)
2. William M. Ramsay, St Paul the Traveller and the Roman Citizen (Hoeede and Stoughton, 1985)
3. Rackham, R. B. The Act of the Apostles: An Exoposition (Londen: Methuen and Co., 1901)
4. Constance E. Padwick, Henry Martyn: Confess of the Faith, (IVF, 1953)
주석류
1. 이상근, 「사도행전 주석」(서울: 총회교육부, 1984)
2. J. 칼빈, 「사도행전 주석」(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1)
3. 박윤선, 「사도행전 주석」(서울: 영음사, 1981)
4. 박윤선, 「고린도전후서 주석」(서울: 영음사, 1981)
5. M. 헨리, 「사도행전(하)」, 이기문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93)
사전류
1. 브라밀리, G. W. 「신약성서신학사전」(서울: 요단출판사, 1986)
정기 간행물
1. D. M. 로이드 존스, 「그 말씀」, “부활 그 적실성”. 1998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