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은 가람의 외호신(外護神)인 까닭에 사찰의 뒷쪽 외각에 산신각(山神閣, 또는 山靈閣)을 짓고 그 안에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상이나 산신탱화를 봉안한다.
산신탱화는 독성탱화와 도상면에서 일견 유사한 면도 있으나 엄격한 이미지의 독성과는 달리 산신은 인자한 미소에 복스러운 모습으로 호랑이와 함께 나타나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산신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오해가 적지 않다.
즉 산신이 원래는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속신이었으나 불교가 재래 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가 나름대로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는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일컬어지는 산신에 대한 개념의 근거는 화엄법회에 동참했던 39위의 화엄신중 가운데 제 33위에 엄연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신을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앙만으로 보는 견해는 재고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석문의범』의 산신청(山神請) "가영(歌詠)"에서는 산신은 "옛날 옛적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시고, 강산을 위진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푸른하늘 청산에 사시며, 구름을 타고 학처럼 걸림없이 날아 다니시는 분(靈山昔日如來囑 威鎭江山度衆生 萬里白雲靑障裸 雲車鶴駕任閑情) 이라고 찬탄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전 국토의 2/3가 산이기에 선조들에게 있어서 산은 곧 생활의 터전이었다. 산을 의지하여 살았고 또 죽어서는 그 곳에 묻혀야 했던 사람들이 산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산악 숭배가 전국의 곳곳에 산신당(山神堂)을 짓고 숭배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런 이유만으로 불교의 수호신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주지하였다시피 화엄경 등의 교의적 근거가 있었기에 소재강복(消災降福: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내리는)의 외호신으로 무리없이 습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신은 조각상보다 탱화로 도상화하여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문경 김용사(金龍寺)의 산신탱화를 보며 산신의 위의를 교의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산수와 노송을 배경으로 가운데 큼직이 앉아서 인자한 미소와 눈빛을 보이는 산신(①)은 왼손으로는 흰수염을 만지며 오른손에는 백우선(白牛扇)을 잡고 있다. 산신청 "거목(擧目)"에, "만 가지 덕을 갖추고 뛰어난 성품을 한가롭게 가지고 계시며(萬德高勝性皆閑寂山王大神)", "사찰이 자리한 산에 항상 계실(比山局內恒住大聖山王大神)"뿐만 아니라 "시방법계에서 지극한 영험을 나타내시는 분(十方 法界至靈至聖山王大神)"임을 한눈에 느낄 수 있도록 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가서 의지 하고픈 생각이 들 정도로 넉넉한 산신의 오른쪽에 있는 호랑이(②)는 무섭고 위엄스럽기보다는 애교스러운 자태로 표현되어 친근감을 주고 있다. 산신의 왼쪽에는 과일을 바치는 동녀(③)와 그 조금 뒤의 동자(④)는 자손이 끊이지 않음을 기원하는 의미의 호리병과 불로의 영지가 매달린 지팡이를 들고 서 있다.
동녀가 들고 있는 과일 중 석류는 다자(多子)를 뜻한다.
동자와 동녀가 올리는 이러한 공양과 기원은 곧 신행자가 산신에게 올리는 기원의 시각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 같은 불화의 많은 도상들은 그 자체의 의미와 함께 신행자의 심중소구(心中所求)를 담은 복합적, 동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산신의 뒤로는 힘찬 소나무의 뻗은 가지와 잎이 화면의 상단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청록산수 기법으로 표현된 화려한 산수에는 부귀화(富貴花)인 모란꽃(⑤)이 피어 있고 새들이 노닐고 있으며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항상하기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서운(瑞雲)과 함께 붉은 해(⑥)가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의 산신탱화가 전국의 사찰에 모셔져 있다는 것은 토속신으로서의 소박한 수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으로도 교리적 근거가 분명하며, 나아가 각종 공해로 강산의 폐해가 심한 요즈음 산신신앙의 재조명을 통해 환경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글•최성규 / 사단법인 한국전통불교회 불화연구소 소장
<사찰 100美 100選>
- 45. 신중상 ② 산신(山神)상 -
우리 민족신앙과 불교의 만남
전세계 유례없는 한국 특유의 신중그림 토착 산신신앙
불교 신중으로 수용돼 일반 민중 신앙대상서 사찰수호신으로
호랑이를 거느린 선풍도골(仙風道骨) 풍의 산신을 그린 산신탱화는
동남아의 불교 국가는 물론 이웃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신중그림이다. 산신도는 산신각에 봉안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사찰에 따라서 삼성각(三聖閣)에 칠성, 독성과 함께 봉안되거나,
대웅전 등 본전 건물 벽에 걸려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산신은 신중탱화 속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 예를 통해서 토착 산신신앙의
대상인 산신이 불교 신중의 일원으로 포섭된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산신에 대한 신앙은 삼국시대에 이미 행해지고 있었음이 중국 측의
기록을 통해 밝혀져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其俗重山川)”, 또 “범에게 제사를 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祠虎以爲神)”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호랑이 숭배와 산신신앙과의 연관성을 확인해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산신도가 언제부터 그려지고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고려 중엽의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노무편(老巫篇) 병서(幷序)의 내용이 참고가 된다.
이 기록에, “무당이 자기 집의 신단(神壇) 방 벽에 단청으로 그린 신상을
가득히 걸어 놓고 장구를 치고 노래하고 춤춘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단청으로 그린 신상이라는 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신의 화상(畵像)인
무신도와 같이 원색으로 그린 당시의 무신도를 가리키는 대목으로 추측되고,
그 속에 산신도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신각이 언제부터 절 안에 세워지고 산신도가
그 속에 봉안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렇지만 대략 17세기 이후부터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충북 옥천에 있는 가산사 산신각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영규대사와 조헌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정각이 지붕 망와의 명문에 의해 조선 숙종 20년(1694)에 건축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므로, 경내의 산신각이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이라면
현존 사찰 산신각 중 가장 오래된 유적이 되는 셈이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사찰 산신각의 창건 또는 중건 사례가 갑자기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19세기로 계속 이어지는데,
당시에 건립된 산신각으로서 건립시기가 확실한 것 몇 군데를 소개해 보면,
통도사의 산신각은 1761년(영조 37)에 초창되었고,
파주 보광사 산신각은 1871년, 경기도 동두천 자재암의 산신각은 1872년 중건되었다.
그리고 해남 은적사의 산신각은 1873년에 창건되었고,
설악산 백담사 산신당은 1882에 창건되었으며,
고양 무량사 산신각은 1897년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는 수많은 사찰 산신각들이
18~19세기에 걸린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조선후기의 어려운 사원경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임진왜란 후 사찰 유지 경비와 승려들의 생계가 주로
재(齋), 불공(佛供), 기도의식 등 일반 신도들의 부담에 의한 방법으로 바뀌면서
왕실이나 일반 신도들의 다양한 신앙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명부전, 칠성각 등이
사찰 경내에 많이 건립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동신제(洞神祭)의
가장 중요한 신인 산신도 사찰 내에 편입되어 산신각에 봉안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찰 경내 불교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 산신은 재물확보와 기자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하면서, 도량의 수호신으로서의 위상도 확보하였다.
〈석문의범(釋門儀範)〉의 산신청(山神請)에 의하면,
산신은 가장 신령스럽고 위엄 있고 용맹스러워 마귀를 물리치고
재앙을 없애며 복을 내린다고 한다.
안성 운수암 산신도 여백에, “이 절에 위치하신 덕이 높고 한가롭고
고요한 산왕대신지위(此山局內德高閑寂山王大神之位)”이라고 쓴 글이 써있는데,
이런 사례를 통해서도 사신의 사찰 수호신으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산신은 이처럼 도량 수호신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지만,
산신을 그린 그림을 일반적으로 불화라고 하지 않고 민화로 취급하는 것은
필력을 갖춘 화승(畵僧)들이 정해진 도상(圖像)에 의거하여 그린
불.보살이나 신중탱화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스러운 형식과 치기 어린 표현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산신도가 무속이라는 한국 전통의 민간신앙 속에서
형성, 전승되어 온 일종의 원시회화라는 점과, 종교화이면서도
신의 화상이라는 점에서 초상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산신도 작품 자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산신도는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첫째 산신.호랑이.소나무로 구성되어 있는 것,
둘째, 산신.호랑이.소나무의 기본 구조에 동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
셋째 호랑이를 동반하지 않거나 배경이 깊은 산이 아니라 일월병풍 등의
장식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첫째 유형 중에서 볼만한 것은 1870년에 제작된 안성 운수사 산신도이다.
왼 손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 손은 호랑이 등 위에 올려놓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민머리에 이마가 불거져 나와 있는 것과 흰 수염을 달고 있는 모습이
민화의 수성노인(壽星老人)과 닮았다.
산신의 옷은 검은색, 녹색, 남색, 붉은색 등 원색을 사용하여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산신의 복장에서 주목되는 것은 목과 허리에 나뭇잎을 두르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죽은 후에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의 도상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노랑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를 가진 덩치 큰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 같은 표정이 민화 까치호랑이그림의 호랑이를 연상케 한다.
둘째 유형에 속하는 산신도 중 대표적인 것이 송광사 산신도이다.
이 산신도는 화승 도순(道詢)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송광사 청진암에 있던 것을 후에 본사 관음전에 옮겨 봉안하고 있는 것으로,
산신.호랑이.소나무, 그리고 시중을 드는 세 명의 동자가 그려져 있다.
산신은 연꽃무늬가 그려진 붉은 색 도포를 입고 호랑이 몸에 기대앉은
자애로운 노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호랑이는 맹수로서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화(戱畵)되어 있다. 석류와 천도를 손에 받쳐 들고 서있는
시동의 모습은 일반 무화(巫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유형의 그림으로는 남양주 봉영사에 소장되어 있는 원흥사 산신도가 있다.
1903년에 조성된 이 그림은 일월병풍과 선경(仙境)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산신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 손으로 수염을 만지고,
왼손으로 새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는 여유로운 모습이다.
두 명의 시동, 얼굴만 내밀고 있는 호랑이가 산신 주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배경은 십장생 병풍을 연상케 할 정도로 환상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끝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할 것은 산신도에 항상 등장하고 있는 소나무이다.
산신의 거처가 깊은 산속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라면 배경을 숲의 형태로
묘사해도 좋을 것이나, 산신도에서는 숲이 아니라 단독의 노송(老松)만을 강조해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산신도의 소나무가 보통의 소나무가 아니라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1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