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찬연하게 밝아온 을미(乙未) 원단을 버선발로 뛰어나가 하당영지(下堂迎之)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맞는다. 황홀한 서기가 담뿍 서린 돋을볕이 온 누리를 감싸고 은총을 내리는 환희의 새아침이다. 을미는 육십 간지 중에서 서른두 번째로서, ‘을(乙)’은 청(靑)인 까닭에 ‘파란양의 해’의 서막이 올랐다. 예로부터 양은 착하고 온순하며 무리를 지어 화목하게 활동하는 동물로서 평화를 신봉하는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연유하는지 양의 해 태생은 자비롭고 유순하며, 친절하고 온화하며, 마음이 넓고 진실하며, 관대하고 인내심이 있고, 창조적이고 품위를 존중하는 성격을 소유한다는 속설을 정설처럼 믿어 왔다.
우리는 급격한 변혁을 거듭해 온 산업화 과정에서 물질문명을 최고선으로 내세우며 과도한 압축 성장을 지향했던 어두운 그늘의 적폐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요인이 갈등의 불씨가 되어 공존과 공생이나 상생의 대승적인 가치 추구보다는 질시와 반목 속에 고약한 덤터기 씌우기나 폄하가 끝없이 불뚝댔다. 그런데도 면전에서는 입발림으로 잘 보이려고 안달복달하는 사술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눙치는 게 보편적인 세태이자 인심이었다. 게다가 네 편과 내편으로 갈라져 끝 모를 소모적인 대립적 구도가 날로 첨예해져 갈등의 골로 냉소와 정쟁이 끊임없이 발호(跋扈)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상대의 강점은 화투 패처럼 꽁꽁 감춰 놓고 의식적으로 외면한 채 허물의 경우는 양파껍질 벗기듯이 야멸차게 까발리는 냉혹한 인심이 우리의 숨겨진 진면목일지도 모른다.
비정상을 상징하는 편린이다. 끼니 때우기도 어려웠던 가난에서 벼락 치듯이 부를 축적한 패거리들은 일거수일투족이 졸부의 옹졸한 전형을 보여 눈꼴사나운 경우가 숱하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고 했던가. 우리 사회의 졸부나 일그러진 기득권층들은 ‘권력(힘)이란 안개처럼 사라진다’는 뜻으로 권서여무(權逝如霧)라고 경고 했거늘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다른 행성의 도덕률 잣대인 듯 애써 외면하려는 온당치 못한 태도를 보이기 일쑤여서 무척 낯설고 황당하다.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는 공자(孔子)가 얘기한 “손자삼요(損者三樂)”를 탐닉하는 꼴불견 일탈이 흔하다. 결국, 다부진 도전과 열정을 쏟아내는 진솔함 대신에 ‘교만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며’, ‘편안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고’, ‘향락에 빠짐을 좋아하는’ 사회적 병폐현상은 도덕적 해이로 이어져 척결해야 할 풍조이다.
일찍이 맹자(孟子)는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고 일깨웠다. 그것은 첫째로 ‘양친이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로 ‘하늘이나 사람에게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것’, 셋째로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이른다. 맹자의 ‘삼락’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을 한다. 그 첫 번째 즐거움은 ‘사람의 의지나 뜻 혹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나 신이 내려주는 축복으로 신의 영역에 관한 은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부모 형제의 수명이나 무고는 사람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즐거움은 ‘신실한 자세와 도덕률에 입각한 청교도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한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단순히 부끄럽지 않은 삶에 그치는 것은 소승적인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세 번째 즐거움은 ‘단순히 천하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는 차원을 벗어나 대승적인 삶을 이르는 가르침’이지 싶다. 왜냐하면 나나 내 가족이라는 소승적인 범주를 과감하게 초월하여 ‘우리’라고 하는 큰 세상을 위해 공헌함으로써 공존과 상생을 위한 열린 마음과 자세를 전제로 한 삶을 깨우쳐 주려는 가르침이 분명하다. ‘나’라는 작은 틀에서 ‘우리’라고 하는 큰 세상이나 우주와 조화를 위한 대승적인 자세와 안목을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늘의 축복이 전제되고 소승적인 견지에서 대승적인 삶으로 지평을 넓힘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궤도 수정을 겨냥한 변화의 조짐이다. 이는 모두가 향유하는 문화가 나를 위주로 하는 개인문화 차원에서 우리라고 하는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집단문화로 진일보하려는 태동의 증좌이다. 오늘이 어렵고 힘들어도 미래를 위해서 공존과 상생의 철학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구각을 깨고 환골탈태는 필연이다.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던 나를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이고 소승적인 아람치에서 벗어나 열린 세상을 염원하는 대승적인 자세로 집단문화를 활짝 꽃피워야 한다.
인술을 펼치는 의사를 이런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의학 지식을 가까스로 터득한’ 소의(小醫)는 ‘기껏해야 병을 고치’는 치병(治病)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식견을 어느 정도 구비한’ 중의(中醫)는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치인(治人)이 한계 능력이다. 그들에 비해서 ‘하늘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를 꿰뚫은’는 대의(大醫)는 ‘나라를 고칠 수 있다’고 하여 치국(治國)이 가능하여 세상도 너끈하게 바꾼다는 견해이다. 우리네 삶이나 쓰는 글도 이와 다를 바 없는 이치일진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부질없는 지문자답이 필요할까.
우리는 마음의 텃밭에 영혼의 씨앗을 뿌려 ‘글’이라는 쏠쏠한 소출을 꿈꾸는 농투성이다. 원래 자연을 빌어 가꿔야하는 농사일은 정파(政派)나 지연과 혈연을 비롯하여 학연이 오염시키지 않은 청정지역이라야 쏟아 부은 노동력에 비례하는 실팍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글밭에도 고약한 모리배 같은 정파가 독버섯처럼 자리 잡아 패거리를 지어 끼리끼리 문화가 만연되었다. 그런가하면 동종교배 현상의 만연으로 열성 유전인자 발현을 우려해야할 수준으로 문화 환경이 오염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같은 까닭에서 보이지 않는 철옹성 같은 서로의 유리장벽을 과감하게 허물고 하나로 대동단결하여 힘차게 진군하는 결연한 각오와 다짐이 그 어느 때보다고 그리운 이즈음이다.
이제 셋만 모이면 패거리를 만들고 지연과 학연을 따지며 이웃과 집단으로 사분오열하여 뒤엉켜 할퀴고 생채기 내며 마음의 문에 단단한 빗장을 채웠던 어제로부터 자유로워져 분연히 별리(別離)했으면 좋겠다. 아집과 편견 그리고 번뇌의 늪에 빠졌던 지난날의 소승적인 가치관에서 대승적인 차원으로 승화를 위한 관용과 화해와 용단의 길을 활짝 여는 원년으로 가름되길 간원한다. 해가 지면 미련 없이 그를 떠나보내야 달과 별이 보이는 법이 아니던가. 희망적인 변화의 기미가 감지된다면 우리는 저마다의 글밭에서 평화롭게 귀한 어린 싹을 정성들여 가꾸면서 소담한 결실을 꿈꾸며 한껏 내일을 기대할 터인데. 이런 맥락에서 을미 원단의 돋을볕이 희망의 바이러스가 되어 지구촌 구석구석을 골고루 어루만지며 따스하게 보듬는다면 이보다 더 큰 홍복(洪福)이 또 있을까.
(한판암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