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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노트 ․ 죽산 조봉암 끝나지 않은 꿈 ․ 사람과 문화 ․ 인천 ․ 2013.6.13 저녁
도입 2분
1. 인사 - 인천의 진보성향 오피니언 리더들의 모임인 사람과 문화 인문학 콘서트에 초대된 걸 기쁘고 고맙게 생각 - 지하에 계신 죽산 선생도, “허허, 끝나지 않은 조봉암의 꿈이라니” 하며 좋아하실 것
2. 왜 고생하며 썼느냐 기자들 질문 -- 나 스스로 질문한 바 있으므로 -너무 힘들어서
1)노경 바라보는 작가의 길 → 세상에 의미로 남는 책
*20년 전 독립전쟁사 대하소설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집필하며 답사 시작. 중국러시아 20여차 답사 특히 사회주의 독립투사들 관심
*독립운동사도 분단되었다는 자각
*그걸 바탕으로 역사소설로 갈 것인가 망설이다가 평전으로 결심 → <약산 김원봉> <김산평전> 출간하고 마지막 평전으로 죽산평전을 결심
2)연민과 위무慰撫
*선구자와 같은 생애를 살고 억울하게 희생된 분에 대한 연민
*죽산은 강화 출신이지만 인천에서 배출. 위무하고 싶은 생각.
3)탐사의 욕망 탐사 논픽션
*도대체 죽산은 어떤 사람이고 민족과 조국을 무엇을 했으며 뭘 잘못한 것일까. 도대체 이승만은 왜 그랬을까. 밝히자.
*지금까지 나온 연구서와 전기, 왜 광복 후에만 집중되는가. 청년기도 밝히자.
4)그리하여 목적한 바를 획득했다고 판단 집필 시작 - 쓰는 데만 3년
5)내가 본 죽산--지난 100년 인천 배출 가장 걸출한 인물 - 강화의 가난한 농가 출신 - 자기 힘으로 길을 열어 - 사람들의 지지를 업고 - 자기 운명뿐만 아니라 민족과 조국의 길을 열며 - 한국 현대사를 뒤흔들며 가다가 압제자에 의해 날개가 꺾인 - 인천으로서는 이보다 더 억울한 일 없는
6)내게 맡겨진 시간 절반은 죽산선생의 생애를 압축해서 짚어보고/ 후반부는 그분의 자취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강연 주제 그대로 끝나지 않은 꿈, 죽산은 가셨지만 어떻게 그분의 정신을 계승할까 하는 이야기
Ⅰ.짧게 압축한 죽산의 생애
『조봉암평전』2013.3, 한길사, 권말부록 압축
1.출생과 소년시절
*강화정신 - 고려 삼별초 저항 - 조선 병자호란 저항 - 조선말기 병인양요 운요호사건 신미양요 - 이동휘 진위대장과 잠두교회 - 1907년 진위대원 봉기 - 견자산 진위대 진지 - 보창학교
*죽산 선생 -1899년 강화 선원면 금월리에서 출생
*총명하나 공부 안 하는 아이였으나 학급회 토론과 주산에 탁월
*죽마고우들→ 유찬식(전남교육청 학무국장) 조광원(성공회 신부) 조구원(3.1운동) 정경창(인천노동운동 모스크바공산대학 중퇴. 만주 투쟁 중 행불) 정수근(3.1운동 인천에서 사업 성공/ 대한농회 인천소장) 박길양(선배. 상동학원 출신 공청 창설 멤버 옥사) 갈홍기(후배. 부친 갈형대 보창학교장/뒷날 이승만 정권 공보처장)
*아우 조용암과 애인 김이옥
*잠두교회에 나감.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군청사환 임시고원으로 일함
2. 3․1만세운동과 청년시절
*읍내 대서소 보조원 잠두교회 권사 칭호-김이옥을 만남-6천명 모인 3․1만세운동에 참가 구속
*혹독한 고문 서대문감옥-이가순과 민족적 각성
*YMCA 중학부 -이상재 선생 영향 - 동급생 인천 박남칠을 만남
*대동단사건으로 평양경찰서에 구속 - 21.7 석방 후 일본 유학길
*4명의 친구 - 김찬 유찬식 홍순복 이성구 등과 동숙 엿장수 고학 세이소쿠영어학교→주오대학 정경과→김찬의 영향→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서적 탐닉 독서와 토론 →고학생동우회와 흑도회黑濤會→가명을 朴鐵丸으로
*1922.8 귀국해서 청년논객으로 등장→22.11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출국→모스크바 담판에 감→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폐결핵으로 중퇴 귀국
3. 조선공산당(조공) 창당과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
*코민테른, 조공 창당 예비작업으로 김재봉과 김찬 침투시킴 - 조봉암의 가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상하이 트로이카의 석방 합류 - 신흥청년동맹 전국순회강연 선풍적 인기 - 조선일보 기자 - 최고의 논객 - 인천에서의 결산강연 24.4.19 - 사회운동 후배 김조이와 결혼
*1925.4.17. 조공 창당(1차공산당/김재봉당) - 승인 얻으려 밀사로 모스크바행 - 임무 완수하고 공산대학 실링 21명 받아냄 - 조용암 김조이 정경창 포함
*조공1차당 붕괴 상하이에서 투쟁(여운형이 죽산의 멘토) - 25.5 만주 밀행 조공만주총국 조직 - 6․10만세사건 주도 - 2차당 붕괴 25.11
*27.1 김이옥이 상하이로 와서 동거 딸 호정을 낳음 28.9 - 동지들의 비난 경제적 곤경 위상 약화됨 - 공금 전용 시비 - 이 무렵에 양이섭을 수하에 둠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윤봉길 의거 - 안창호 여운형 현정건 피체, 양이섭 피체, 정윤교 사건, 반제동맹 주도 - 32.12 체포되어 압송 - 7년 징역 선고 신의주형무소 수감 -김이옥 귀국 뒤 죽음 - 딸은 친척에 의해 인천으로
*전향 회유 정책 1년 감형 출옥 39.7
4. 출옥 후 인천 정착과 유휴의 세월
*인천에 정착 -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 이승엽 등 미곡상 업계 인물들 인연, 부자가 된 정수근
*박남칠 등이 비강업조합 만들어줌 - 사무실은 서경정(내동) 건어물 거리 정수근의 집 바깥채
*김조이와 재결합 부평동 39번지 셋집 이사
*처가가 인천으로 옴 - 처남들이 사업 도와줌 - 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 이사
*긴 유휴기간을 보냄 - 조공 조직과 멀어지고
*일제와 묵시적 타협선 -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두 가지 - 興亞新春 광고와 국방성금 사건
*45.1 결국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
5. 광복 후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영광과 굴레
*45.8.15 여운형이 필동 헌병대 감방문 열어줌 - 내가 건준 만드니 인천을 장악하라 - 석방되어 인천으로
*집앞에 기다리는 청년들과 보안대 조직 치안장악 8.16 - 건준 조직 8.18
*부활된 조공 동지들의 거부로 소외됨
*인천 민전을 조직, 그러나 박헌영이 비난 반조운동 충고와 자기반성 서신 CIC에
압수당함 - 윙필드와 신태범
*결국 공산당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의 공작으로 연행 전향성명 내고 공산당을 떠남 46.6.23 <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전국을 크게 흔듦
*46.8~9 인천의 기업인 함효영, 이필상, 김성진, 배인복 등과 교유 통일건국회 조직 - 중앙에서 김찬, 원우관, 임원근, 이극로, 이동산과 민주주의 독립전선 주도
*47 하반기 우파와 결합 단독정부안 받아들임
*48.5 제헌의회 당선 강원명, 조훈, 심계택 형제, 김수현 도움 - 하상훈, 이성민, 김석기, 임홍제와 겨뤄 - 국회로 가서 무소속 그룹 통합 통합 통합 → 무소속 의원 85명의 대표로 떠오름 - 헌법기초위원이 됨 - 평등지권 주장 발언 이승만이 주목
*48.7. 초대 농림부장관-평등지권의 신념 농지개혁법 주도 - 혁명 없이 신속한 토지 균등성 확보 성공 - 농민들 지지
*국회부의장 탁월한 사회 솜씨 - 6․25전쟁으로 국회문서 피난 아내 김조이 납북
*부산임시수도에서 발췌개헌안 협조 - 이승만 한계 드러냄
*52.8.5 2대대통령 출마 70만표
*야인이 되어 도정궁 칩거 - 호헌동지회의 요청으로 재등장
*55.12 진보당 구상 - 서상일과 경쟁, 신익희와 단일후보 협상중 신익희 급서 단독후보 216만표 획득 56.5.15
*56.11진보당 창당 - 여러 차례 위기 - 장택상 ‘벼룩에 굴레를 씌울 사람’
*58.1 결국 서울시경 TF팀에 의해 함정에 걸려듦 - 양이섭이 준 돈이 북한 공작금이라고 - 1심 인정하지 않아 5년 → 2심 사형 → 대법원 파기자판 사형선고
*조호정의 탄원서 - 죽산의 유언 - 비록 사형당해도 내 애국심은 변함 없어
*59.7.31 재심기각 17시간 만에 처형 - 총독부령 120호 장례식과 비문 없는 비석
*왜 처형당했는가 - 매카시즘 분단을 정권연장에 이용 - 미국 양다리 걸치기
6. 53년만에 무죄선고 햇빛 속으로
*05.2.5 과거사 정리 진실화해위원회 설치 - 05.11 위원회 재심권유
*11. 2. 11 대법원 무죄선고
*네 자녀들 형극의 길 - 외아들 규호가 걸어온 길/조호정 여사가 걸어온 길
Ⅱ 죽산이 가졌던 꿈
1.실현시킨 꿈 → 농지개혁의 공적 → 국가 부흥의 발판
*죽산 관련 기자 인터뷰와 강연 - 가장 많은 질문 - 이승만은 왜 죽산을 농림부장관으로? → 세 가지 학설 = 한민당 견제설 = 미국 요구설 = 이범석 총리 거래설
*耕者有其田과 평등지권의 확신 - 당시 전체 농가는 200만호 - 완전 소작농이 49% - 반소작농 35%, 완전 자립농과 지주가 17%
*북한 이미 토지개혁을 감행, 중국 국공내전 공산군의 승리 원인 - 토지의 몰수와 분배 - 남한 민심의 향방 안심할 수 없다 판단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절묘한 선택과 관철 - 신속히 세계 최고수준의 토지균등성 확보 성공 → 실현단계에서 한국동란 발발 → 농민들 공산혁명 거부 → 자경농의 동력이 곧바로 자녀교육으로 집중 → 기적적 경제성장의 동력이 됨
2. 실현하지 못한 꿈 → 평등과 정의의 사회
<조봉암 평전> 인텐션 문장 - 궁극적으로 한국에서의 진보의 태생적 한계, 그리고 죽산의 그것을 초극하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자
1)죽산이 추구한 진보의 개념
<창당대회 개회사>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발기취지문> 우리는 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 강령>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종합적인 연차 경제계획
3)민주우방과 제휴 민주세력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4)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5)노동자 권리 보장,
→죽산이 처음 사용한 진보의 진정한 의미==책임정치 - 수탈없는 정의로운 경제 - 평화통일 흔히 3가지를 말하지만 강령에는 교육도 있다 →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반세기 동안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금 고스란히 우리 정치의 주요담론이 되어 있다 - 놀라운 선견성 -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3. 죽산이 안은 원제와 숙명의 고리
*조공 창당 멤버,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이 인정한 핵심 → 광복 후 전향 → 결국 조공 창당 멤버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 막혀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본인의 인생은 모순 속에 함몰
*3대대통령 선거 216만표 농지개혁의 결과 농민들의 지지 +무력 북진통일 독재 거부 민심 + 새로운 정치 이념 제시 → 충분한 정당성
*친미 남한 정권의 실력자이면서 제3세계, 사회민주주의 추구 → 공산당이었다는 과거를 원죄처럼 뒤집어 씌워 → 사사건건 빨갱이로 몰려 → 장택상의 벼룩의 굴레론 → 그러나 결국 서울시경의 정권의 TF 함정에 빠져 쓰러져 → 분단모순의 상황 속에서 민중은 속으로만 울어
*<이재승 교수> 조봉암의 처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3세력 정치인의 운명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이승만(자유당)과 민주당의 지배블록에 맞선 이단자이고, 동시에 국제적인 냉전질서의 시각에서는 최일선에서 진영을 흔드는 불온한 자였다. 당시 지배세력들은 반공주의라는 상징질서 속에서 조봉암을 희생자로 삼기를 원했고,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바로 충직하고 자발적인 처형자가 되었다.
*남북의 첨예한 대립 속에 정권은 분단모순을 이용 - 죽산에 대한 사법살인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50년이 걸림
*올림픽, 월드컵 개최 세계 10위권 경제 - 소련붕괴 동유럽 블록 붕괴 → 국가의 자신감 진실화해위원회 발족 → 대법원 재심 무죄선고 → 국가 양심과 國格 회복
*그러나 독립유공 서훈은 유보되고 있고 아직도 남은 맹목적인 안티 조봉암 그룹
4. 죽산이 뿌린 씨앗은?
1)죽산의 진보와 현재 한국의 진보
*국가 발전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의 날개가 움직여야 - 그러나 한국 진보는 분단모순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 공산주의는 용납 안 되고 제3의 길이 가능한데 백범 김구와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성숙 박건웅 등 설 자리 잃어 -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나라 갈망 - 분단 모순 속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죽산은 제3의 길 갔지만 신념대로 밀고가다가 쓰러졌다. 그리고 타협과 포용과 관용이 있었다 → 해방 조국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 - 그런데도 간첩으로 몰려 죽어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지켜보기 안타깝다 - 죽산과 함께 했던 늙은 진보당원들 - “죽산과 우리의 진보와 오늘의 진보는 다르다/임정치 경제민주화 평화통일이었다./ 오늘의 진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말로만 하는 입 진보다”
*오늘의 진보 국민의 지지 10%도 안돼. <한겨레> 서평 - ‘넘사벽이다’ - 왜 그런가? - 현실정치를 무조건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고 냉소적이다 - 죽산처럼 온 몸으로 뛰어들어 대안세력으로서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데 입으로만 한다 - 종북 진보를 자처한다 - 변증법에서 말하는 진정성을 갖고 민중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2)죽산이 남긴 씨앗 키우기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잘 사는 나라 - 남북의 대회로써 평화통일을 이루기 - 네덜란드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 국가유공 수훈의 관철 - 새얼재단의 동상건립운동 = 진정한 복권 → 나아가 그의 정신을 인천정신으로 계승하는 인천 오피니언 리더들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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