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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은 고향을 방문할때 마다 노비산(제비산)과 어릴적 놀던 바닷가를 찾았다
마산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은상 시 김동진 곡 가곡 "가고파" 를 떠올린다. "가고파 문학축제 ", "가고파 국화축제" 등 '가고파'란 이름을 내건 행사나 각종 간판들을 마산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비단 마산뿐이 아니다. 전국적으로도 "가고파" 란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마산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문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1903.10.22~1982.1.1)의 시조 "가고파"의 영향이다. 서울의 재경동창회 회보도 "가고파" 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잔잔히 표현한 이 시조는 국민가곡으로 애창되면서 한국인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현대시조의 개척자로서 가고파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노산 이은상 선생. 그러나, 1960년 그의 3. 15 의거 관련 발언과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협력 논란으로 정작 그가 태어난 고향 마산에서는 제 자리를 못찾은 비운의 문인이다. 하지만, 대다수 지역 문인들은 "과거 문제를 들어 일방적으로 그의 존재 자체와 문학적 위업을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면서 "문학적 공과와 개인적 과거사를 바르게 정립하여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산 선생은 생전에 2,000여 수의 작품을 남긴 현대 시조의 대표적 시인이다. 국문학자 양주동 선생은 “육당(六堂ㆍ최남선)은 박달나무, 위당(爲堂ㆍ정인보)은 인절미 떡, 가람(嘉藍ㆍ이병기)은 난초에 비견될 정도로 그들이 하나씩 체(體)와 풍(風)을 익혀온 데 반하여 노산은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 고 말했다.
마산 여러곳에 노산의 시비가 있다. 월영동, 산호공원, 돝섬등에 모두 다른 형태의 시비가 있다.
노산의 발자취
# 노산 생가, 은상이 샘, 노비산(제비산)
노산 선생이 생전에 마산에 내려오면 가포해변, 노비산공원, 추산공원, 산호공원(가고파시비) 등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에서 자라면서 삶의 일부분이 되었던 곳들이다.
노산 선생의 생가는 구 태양극장터 부근이다. 지금은 태양극장도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의 6호 광장 (구 마산역 자리) 에서 북마산 쪽으로 난 도로 끝 부근 왼쪽의 북마산파출소 자리는 노산 선생 생가 사랑방이 있던 곳으로 3·1운동 당시 이극로·최봉선 선생 등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노산 선생은 상남동 생가에서 1903년 태어나 부친이 작고한 이듬해인 1923년 서울 연희전문학교로 가기 전인 20살 때까지 살았다. 이 시절 그는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회산다리 옆에 있었던 창신 학교를 다녔는데, 현재는 한효아파트가 들어서 당시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창신학교 자리 인근에 있었던 나직한 노비산은 현재는 능선까지 집들이 올라와 옛모습을 떠올리기 힘들지만 노산의 꿈과 포부를 키우는 정신적 터전이 되었던 곳이었다. 노산은 노비산 숲속에서 홀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시절부터 문학소년의 기질을 타고났던지 그는 노비산을 떠올리면서 훗날 시조 '옛동산에 올라'(1928년)와 '그네'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노산 선생의 후손(아들)은 오래전에 미국에 정착한 교포인지라 거의 국내에는 들어오지않는 것으로 알고있으며, 노산의 부모 묘소가 있는 일대 부지는 예전 창신학교에서 관리하다가 제 3자에게 매각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노비산 (제비산) 제일 윗부분에 있는 마산문학관 은 노산을 기리기 위해 "노산문학관" 으로 추진됐다가 논란 끝에 명칭이 바뀌는 곡절이 있었다. 그의 호 노산은 춘원 이광수의 권유에 의해 "노비산" 에서 땄다고 한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 서니/산천의구란 말 옛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베어)지고 없구려'라고 노래한 그의 시조 <옛동산에 올라> 처럼 문학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큰 자취가 그의 고향에 남아있지 않은 쓸쓸한 노산의 모습을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평가되어 그의 업적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 서니 지팡이 도루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노산과 가고파, 김동진
노산이 생전에 남긴 수많은 작품 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가고파다. 10수 연작으로 된 이 작품은 시로서보다는 국민가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노산은 이 시를 1932년 1월5일 서울 행하촌에서 완성했다. 어릴적 집 부근에 있던 노비산과 산호공원을 오르내리고 바닷가를 거닐면서 보았던 고향 마산 앞바다를 떠올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시에 담았다. 이 시는 타향의 이향민을 위시하여 분단상태의 실향민, 그리고 먼 이국으로 이민간 사람에 이르기까지 어린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공통인자에 눈물이 섞여진 예술품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곡으로서의 가고파는 작곡가 김동진이 19살이던 1932년에 작곡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당시 평양숭실전문학교의 교원이었던 양주동이 가고파를 소개하자 학생이던 김동진이 너무 감격해서 노래를 부르는데 편리하도록 10수 중 4수만 작곡하였다고 한다.
김동진은 이후 나머지 6수도 작곡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아 70년대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고 10수 모두의 초연은 지난 73년 12월10일 숙명여대 강당에서 숭의여고 합창단에 의해 이뤄졌다.
가곡파의 주된 주제는 고향바다와 고향동무이며 1수는 고향바다와 물새, 2수 고향동무에 대한 그리움, 3수 고향을 떠나 사는 회한, 4수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 싶은 심경, 5수 고향바다에서 추억 등 10수 모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베어 있다.
# 노산과 박태준 : 동무생각 (사우)
*박태준(朴泰俊1901~1986)은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났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뒤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박태준은 창신학교에서 노산 이은상을 만난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어느날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한 여학생을 사랑하였던 자신의 고민을 이은상에게 털어놓는다. 노산은 대구에서 있었던 박태준의 첫사랑이야기를 듣고 “ 박 선생이 잊지 못할 그 소녀를 노래로 승화시켜 그 곡에 담아 두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노래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소?” 하고 시를 써서 박태준에게 건네준다. 이것이 가곡 ‘동무생각’ (사우)이다. 일설에 의하면 박태준이 먼저 곡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노산 선생이 시를 붙였다는 설도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 적에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소리 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전국시조백일장 심사위원들과 함께한 노산 (앞줄 중앙)
#노산 이은상
1903년 마산시 상남동에서 태어나 1922년 시조 '아버님을 여의고', '꿈깬 뒤'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동양적 호흡으로 노래하였다. 특히 시조의 부흥을 기울여 독특한 이론으로 양장 시조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쓰기도 했다. 1918년 마산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수료한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귀국한 뒤로는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기관에서 근무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광양지역에서 피신생활을 했었고, 8·15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해방되던 해 전남 광주에서 호남신문사 사장에 취임했고, 1950년 이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82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타계하기까지 60여년간의 창작활동을 통해 시조 외에도 수필, 기행문집, 평전, 평론, 국학연구 관련서 등 4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 노산의 재평가 요원한가?
현재 마산에는 가고파를 기리기 위해 노산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마산 앞바다를 내려다 보던 산호공원과 무학산 자락(월영대 부근), 돝섬 등 3곳에 가고파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가고파가 마산에 시심이 흐르는 도시, 문학과 낭만, 서정의 도시로 이미지화 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 수십년 객지에 살았던 나 뿐만 아니라 고향 떠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 노래를 들을때 마다 옛 추억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언론과 단체는 노산 선생의 친독재정권 행적을 부각시키며 마산사람들 정서엔 "가고파" 라는 것은 이미 없어졌다 라고 주장하며, 그런 정신은 이미 사라진것이라고 말한다. 자기들 논리대로, 경마장의 경주말처럼 앞만 쳐다보는 획일적 시각만으로는 더불어 사는 이들과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기가 쉽지않다. 우리 주위에 벤치마킹할 상생의 사회통합 주제가 너무도 많은데, 그들의 행보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노산은 가고파 외에도 수많은 노래말을 남겼다, 당신의 가슴을 울리는 우리 가곡이 있다면 그 가곡 노랫말의 상당 수는 노산이 썼을 것이라고 단언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봄처녀, 고향생각, 그리움, 그집앞, 성불사의 밤, 장안사, 동무생각, 옛동산에 올라,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등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모두 노산 선생의 작시다.
노산은 가곡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및 기관의 교가도 작사했다. 경남지역에서는 경남대, 창원대, 창원전문대,해군사관학교,창신고,마산중앙고,마산용마고(마산상고),마산여고, 마산제일여중고, 무학여고(마산여상), 거창대성고 등 경남지역의 수많은 학교를 비롯, 전남대, 영남대, 충북대, 한국외국어대, 홍익대, 경성고, 국립부산해사고는 물론 광주일고, 목포고, 수피아여고, 순천금당고, 신진공고, 인성고, 군산중, 동양중, 광주중앙초등, 해군 군가, 대한의 노래, 경남도민의 노래, 창원시민의 노래, 강원도의 노래, 진천군민의 노래, 철도의 노래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한의 우연오 교수는 「반일·애국·광복 이념을 노래한 계몽기 서정가요」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속에서 노산의 「사우」, 「그리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을 높이 평가했다.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은유적인 수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그는 북한에서도 주목받는 민족시인이다.
몇해전 나는 전북 고창 선운사를 찾으면서 미당 서정주 시비, 서정주 시문학관등을 둘러보며 당시 마산지역사회에서 논쟁이 되었던 노산 선생의 평가와 연관시켜 생각했던적이 있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 역시 친일, 친독재 행적으로 인해 문학단체들로 부터 언론기관에서 제정한 "미당문학상" 수상 거부운동 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문학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은 더 이상 작가만의 작품이 아니라고 여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보고, 듣고, 읽으며 가슴으로 예술적 감흥을 느끼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 자산이다. 화합과 상생의 미래지향적 공동사회를 이야기 하면서 퇴로없는 이념에만 사로잡혀 작가의 작품에 대한 순수한 문학성마저 부인한다는 것은 글로벌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편협한 시각이다.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 지금 살고있는 지역사회에 대한 어떠한 규범적 사명감을 부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말 없는 다수의 고향지킴이들도 너무 많다는 것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 고창에서는 미당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노산의 과거행적을 들추어 여론화했던 분들이 마음을 열고 더불어 함께사는 우리 사회 모든 이들의 화합과 창조적인 내일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재고했으면 한다. 노산은 이미 1982년 세상을 떠났다. 사라진 한 문인이 그 시대에 살며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포용의 반석위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한 쪽으로만 치우친 잣대로 그의 업적을 폄훼하며 설왕설래 하고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가 균열의 시대에 있다는 증거다. 뜨거운 마음으로 치열한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던, 조용히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왔던, 우리 모두 지나온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점 부끄럼 없이, 자신들에게 과연 얼마나 떳떳하였고 이웃과 사회와 나라에 정의로웠는지 성찰해봤으면 한다.
중국땅에 이백과 두보가 있었다면 한반도 땅에는 소월과 노산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민시인의 위치에 있는 거목이 제대로 평가받아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셨으면 한다.
** 위 내용은 지역신문, 관련 홈페이지, 향토사 연구하시는 분들의 자료집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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