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담은 연적
청자 철화 초화문 연적
아무리 따르고 따라도 저 작은 청자 안 슬기의 물은 마르지
않고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그것은 물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그 안에 이루지 못한 한을 담고 노래하지 못한
가락을 담고 다 이르지 못한 말의 사연을 담았다. 때로는
부처님 앞에 엎드려 빈 사원을 담는다.
그것들이 흙을 비집고 배어나 신묘한 청자 빛이 되고 불룩
하게 팽창하여 표주박 모양을 이루었다.
우리도 가끔 이런 청자 하나 있으면 고려인들처럼 슬기의
물을 따라 글을 쓰리라. 세상 어느 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기에 오늘도 청자 철화 풀꽃무늬 앞에서 합장을
한다. 그리고 한 방울의 차가운 물이 우리 뜨거운 가슴으
로 떨어지는 선뜻한 감촉을 느낀다.
- 이어령 시. <마음을 담은 연적> 전문
- 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부록 편} 2022년 3월 열림원
지나간 스토리에서 4월을 뒤적이다, 글과 사진을 가져왔다.
학선 선생님 칠순 무렵이다.
선물 받은 펜으로
선물한 제, 조카의 이름을 적어 보며.
사월도 단 하루를 남겨놓은 시점.
학선 선생님 가족 모임, 오랜 지인분들과의 만남,
이래저래 바쁘게 흘러가고 있다.
사무실 근처가 아니고 서는 외출을 잘 하지 않으시는데
6월 이사를 앞두고,
가끔 찾아와 주시는 연배가 높으신 분들과의
약속 먼저 잡으신다.
점점 실감이 나니 일보다 마음 먼저 허둥거린다.
그럴수록 이다 싶어, 오랜만에 근처 공원 한 바퀴 돌고 온
수확으로 계절이 더 풍성해졌다.
공원을 다 돌고 집 가까이 올 무렵
지난 생각이 스쳤는데
글 하나 더 가져와 본다.
심신이 부었다.
'나 한 시간만 나갔다 와도 되죠?'
일요일이다.
"이 새벽에 어딜 간다고!"
새벽은 무슨 6시인데, 공원에 사람들도 다니는구먼.
하긴 우리 패턴으로는 새벽이지.
이어폰을 장착하고 밖을 나서는데
긴 팔의 옷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오늘 하늘은 서서히 맑을 예정 이던가.
대기하고 있는 버스는 울긋불긋 사람들을 싣고
싱그러운 산으로 가게 되는 것 같고,
캐리어에 기댄 사람은 비행기를 탈 모양이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듯.
문 닫힌 복권 점포는 지나간 당첨 번호로 도배를,
미래의 당첨 번호는 못 적는 것일 테지.
선거 현수막이 서로 눈에 띄려고 유세를 한다.
그럼, 공원으로 들어가 보실까.
멀리 뒤 베란다에서 보이는 길이 예뻤고,
한번 다녀와 봤었지.
그러던 어느 날 발그스레한 것이 올라와
길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야.
느낌 왔어. 꽃
한 여인이 셀카 중이다.
산책 나온 거 같지는 않고 그저 지나는 길,
작은 체구에 수더분한 아주머님 포스.
꽃밭에 이끌려
꽃 같은 마음이 동했을 것이라 여겨져
우아한 여인으로 읽힌다.
당연히 다가가 몇 컷, '잘 찍었는지 모르겠어요.'
무더기로 있다는 느낌보다
가녀리게 자연스럽게 하늘 하늘거리는 꽃
간간이 수레국화, 양귀비가 어울려
시선을 더해준다.
낮은 자세로 꽃들과 눈 맞춤도 하며
부기를 빼가는 아침
요즘은 노래 듣기도 좀 뜸했지.
내가 구성한 앨범 중, 국악가요의 음률이
공원을 나와 언덕배기를 오른다.
파랗게 자란 담쟁이 따라 메꽃도 보이고
지나는 아파트에서는 장미가 확연히 붉어
내 집처럼 발길을 들여놓고 향기를 훔쳐낸다.
큰길 가의, 꾸민지 얼마 안 된 화단에도
꽃과 식물들의 이름이 꽂혔다.
이런 건 참 좋아.
얼마 전 편의점에서 나오다 본
100m 거리에 찔레꽃이 하얗게 탐스러웠는데,
마음과 달리 발걸음이 돌아섰는데,
오늘은 슬픈 향기가 말라서
더 애잔한 아쉬움으로 붙잡아 세운다.
소리꾼 김주리의 한계령도 다 넘은 듯하니,
집 앞이다.
여전히 뒤 베란다에 서서
내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지나온 길을 본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어떤 모양새였을까.
나만 보지 못한 내 모습
생각해 보니, 여기저기 다 찍혔다.
모든 곳,
길에도 cctv가 쫙 깔렸다.
역시 나만 볼 수 없게.
한잔으로는 부족하다.
디카페인으로 다가 아메리카노
둘 샷이오.
- 2022년 5월 舞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