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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은?
경술국치
‘경술국치’란 ‘
경술년에 일어난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뜻으로
일제에게 우리나라가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한일합병’사건을 말합니다.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한일 신협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하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준비해 갔습니다.
1910년 일본 육군 대신 데라우치가 3대 통감에 취임하면서 한일합병은 더욱 빠르게 추진되었습니다.일본의 헌병이 경찰 업무를 대신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협했으며,
일본의 정책에 반대하지 못하게끔 신문·잡지를 엄중하게 검열하였습니다.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후,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합병 조약안을 통과시키도록 하여,
결국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이루어진 합병 조약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의 마지막 승인이 남았을 때, 문서에 찍을 도장(옥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장을 찍지 못하게 하려고 왕비인 순정효 황후 윤씨가 옥새를 숨겼던 것입니다.
(1910년. 친일파들은 순종에게 계속 합방을 요구하였다.
이 어전회의를 순정효 황후는 병풍 뒤에서 다 엿듣고 있었다.
대신들은 자꾸 순종을 밀어 부쳤다.
순정효 황후는 이 때, 이 조약을 체결할때 옥새가 필요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정효 황후는 이 사실을 덕수궁에 갇혀 있던 고종에게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일본 군인들이 전화선을 끊은 뒤였다.
그 때 내시가 옥새가 든 상자를 들고 방으로 향할 때,
순정효 황후는 그 옥새를 빼앗아 자신의 치마 폭에 숨겼다.
대신들은 옥새를 황후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숙부 개쌔끼 윤덕영이
순정효 황후의 치마 폭에서 옥새를 강제로 빼앗았고
이후, 국권은 피탈되어 대한제국은 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친일파인 윤덕영 등에게 옥새를 빼앗겨, 조선은 건국 519년 만에 끝이 나고
이후 35년간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제강점기 35년은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역사 한 가운데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황제가 있었습니다.
고종은 우리나라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세계사의 격랑속에서 나라를 뺏긴 무기력한 군주.
일제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비운의 황제.
우리가 고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들인데요.
과연 이것이 전부였을까요?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을 추적해봅니다.
1919년 1월 21일 밤. 덕수궁 함녕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갑작스레 승하한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평압된지 햇수로 10년.
당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
누구도 예기치못했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일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제가 편찬한 고종 순종 실록.
고종의 죽음에 대해 실려있다.
1월 20일 고종의 병세가 심해져
도쿄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를 보냈다고 되어있다.
같은 날 이완용 등 조선관료 들에게 숙직을 명했다고 되어있다.
이 때까지도 조선백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의 1월 21일자에는 고종이 중환이라고 되어있다.
같은 날 신문기사 역시 고종의 병이 위중하다고 되어있다.
전날 오후까지 식사도 잘했다는 보도도 함께 나온다.
고종의 병명은 뇌일혈.
당시 정계의 거물이던 윤치호.
그는 이미 고종의 승하소식을 들었는데
매일신보는 여전히 위독 이라고 한다며 의문을 표현하고 있다.
위중하다는 신문기사와는 달리 고종은 이미 승하한 상태였다.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상황을 알지 못했다.
다시 호외가 발행됐다.
1월 22일자 매일신보 호외.
비로소 고종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같은 날 신문기사에는 1월 22일 오전 6시에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백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소식을 안 백성들은 대한문으로 몰려들었다.
애도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닷새가 지나서야 공식 반응을 보였다.
1월 27일부터 음주가무를 정지한다고 했다.
이렇게 고종 황제는 12살에 왕위에 오른지 56년,
68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고종의 죽음과 함께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궁내무 사무관이던 곤도 시로스케.
궁궐일을 꿰뚫어 보던 그도 고종의 죽음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처음 소식을 들은 곤도는 순종이 아닌지 물었다.
"태왕전하(고종)께서 중태에 빠지셨으니 즉각 오십시오.
나는 너무 뜻밖이어서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혹시 창덕궁(순종)쪽이 아닌가 반문하였다.
상대방은 강하게 '덕수궁, 덕수궁 전하십니다' 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창덕궁이 아니냐고 물은 것은 왕 전하께서 평소 병약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덕수궁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셨기 때문에..."
고종 죽음 직후, 대한문에는 역일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고종의 죽음에 얽힌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는 더 충격적인 소문이 나돌았다.
바로 고종 독살설이었다.
고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것이었다.
의혹과 소문은 점점 증폭되었다.
고종이 독살당한 이유도 제시되었다.
고종독살설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고종 죽음 직후 발표된 국민대회성명서.
성명서는 고종 독살에 연루된 실명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들이 궁녀들에게 독약을 타게 했다는 것이다.
고종 죽음에 대한 의혹은 미국인 선교사 노블여사의 일기에는
조선 백성들의 의견이 담긴 전단이 뿌려지고 있다고 했다.
전단에 따르면 고종은 일제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고종 독살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역시 궁녀 두 사람이 독을 탔고 이들도 끝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독살설 와중에도 고종의 장례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고종의 국상일자는 3월 3일, 승하한지 약 45일만이었다.
국상은 논란 끝에 일본 식으로 결정되었다.
덕수궁 안에서 는 일본식 의상과 절차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조선식 복장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덕수궁에서 남양주까지 고종의 장례행렬에는 수많은 백성이 함께했다.
이처럼 숱한 의혹과 백성들의 피눈물을 남기고
나라를 빼앗긴지 10년만이었다.
덕수궁에서 갇혀지내던 고종황제는 어떻게 죽었을까요?
독살설을 비롯해서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고종황제의 죽음.
1919년 1월 21일 밤.
그 때 그 현장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된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었다.
함녕전은 덕수궁의 침전. 숙소용 건물이었다.
함녕전은 이른바 우물정자형 구조. 모두 9개의 방이 있는데
중앙 4개의 방을 터서 큰 방을 만들고 사방에 5개의 곁방을 두었다.
그런데 고종은 중앙의 큰 방 대신 곁방을 옮겨가며 숙소로 사용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때문이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이 작은 곁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은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고종의 불안감은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압박감으로 고종은 늘 불면증에 시달렸다.
덕수궁 정관헌.
고종이 외국 사신을 만나거나 차를 마시던 곳이었다.
고종은 특히 커피를 즐겨 마셨다.
고종이 사용하던 차숟가락.
황실을 상징하던 오얏꽃 문양이 선명하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다음 해인 1898년,
고종 독살 미수사건이 발생한다.
역관 김홍육라는 인물이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섞은 사건 이었다.
러시아어 통역관이던 김홍육이 뇌물 사건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저지른 일이었다.
다행히 고종은 무사했다.
커피맛을 잘 알던 고종은 향이 이상하자 조금만 마셨다.
반면 많이 마신 순종은 큰 곤욕을 치루었다고 나온다.
이런 암살의 의혹은 고종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14살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다.
일본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신경쇠약을 앓았고
나중에는 일본인과 강제결혼까지 당하는 비운의 황녀였다.
덕혜의 일본인 동창생이 남긴 증언록.
여기에는 언제나 암살의 두려움에 떨었던 덕혜옹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덕혜옹주는 매일 마법병(보온병)을 들고 학교에 왔습니다.
왜 그렇게 보온병을 들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덕혜옹주는 독살당하지 않으려고 보온병의 물만 마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고종 죽음 직후부터 독살설은 끊임없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고종의 죽음에 대한 더 구체적인 증거가 나돌기 시작했다.
고종이 식혜를 마신 다음 급사했다는 것이었다.
식혜 독살설은 각종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것이 사실일까?
고종은 정말 식혜를 마신 다음 갑작스레 죽은 것일까?
고종은 각종 차와 커피, 그리고 냉면과 식혜를 특히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특별히 소나무 사이 사이에서 나오는 돌틈에서 나오는
석반수라는 물을 받아다가 쌀을 삭혀서 식혜를 드셨다고 한다.
너무 즐겨해서 아침에 새벽에도 드시고 밤참에도 드셔서
여러가지 음식 중에서 특히 식혜를 즐겨했다고 한다.
황제를 위해 특별이 좋은 물을 이용해 만들어진 식혜.
철저한 보안과 감시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혜가 과연 독약이 될 수 있을까? 음식에 타는 독약은 몇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곽정식 교수 경북대학교 법의학교실-
독약이 좋은 독약이 되려면 소량으로 효과가 나타나야 하기때문에
그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독극물이라면
얼마든지 식혜의 단맛 속에 숨기고 독살할 수 있습니다.
고종황제께서 평소에 식혜를 잘 드시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맛을 잘 압니다.
맛에도 변화가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 그런 종류의 강렬한 독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 있죠.
예를 들면 비상, 예전에 많이 썼던 건데 비소를 정제해서 만든건데 무색무치고 잘 녹습니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독살과 관련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윤치호는 정계의 거물이었다.
친일파이면서도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상태 교수 서울대병원 병원역사 문화센터 <윤치호일기> 번역-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중국,미국 세나라에서 유학을 한 그런 인물이었고요.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 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했고 지금의 차관급의 고위직위도 지니고
백오위 사건때 3년 넘게 투옥되었던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던 지식인들은 물론
백성들도 아는 거물급 인사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는 당시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폭넓게 등장한다.
고종이 승하한지 20여일 후인 1919년 2월 11일자의 일기.
고종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윤치호일기> 1919년 2월 11일
"홍건이 민영휘에게 들은 바로는 고종황제가 한약을 한 사발 먹고 난 후
한 시간도 못되어 현기증과 위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잠시후 황제의 육신이 심하게 마비되어서 민씨가 도착했을 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고 한다.
황제가 죽어가면서 민씨의 두 손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던지
환관이 두 사람의 손을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정지천 교수 동국대학교 한의대 내과-
독약 급성중독에 의해서 워낙 심한 통증과 경련이 일어나니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견디느라 발버둥친 것이 아닌가 보고요.
그렇게 꽉 쥔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경각에 이르고 하니까
악착같이 생명줄을 놓지 않겠다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흔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해의 일기는 더욱 구체적이다.
<윤치호일기> 1919년 2월 11일
한진창씨는 고종황제가 독살된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이렇다.
이상적이라 할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곽정식 교수 경북대학교 법의학교실-
바로 경련, 마비가 왔다는 것은 신경계통의 특성을 나타내는 물질들
얼마든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비상같은 것도...
시신의 상태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고종황제의 팔다리가 1~2일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곽정식 교수 경북대학교 법의학교실-
저희들이 부검을 할 때 흔히 부패된 시신의 옷을 벗길 때는 다리나 팔이 부어올라 가지고
흔히 저희들도 옷을 찢습니다.
가위로 끊고 하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부패소견으로 보고
그 정도의 부패는 상당히 진행된 부패입니다.
그래서 사후부패가 빨리 진행 됐구나 그걸 알 수 있죠. 그래서 중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염을 행한 사람의 증언도 기록되어 있다.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져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cm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곽정식 교수 경북대학교 법의학교실-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면 피부의 혈관들이 그물처럼 다 보이게 됩니다.
그것을 부패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그 기록은 제 생각으로는 부패망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 당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행한 민영달씨가
한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윤치호일기의 신빙성을 짐작해주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불거진 고종 독살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숱한 기록과 증언들.
초대 총독 테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
이들이 바로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식민지 초기 무단정치를 펼쳤던 주역들입니다.
고종황제와는 필연적으로 악연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
그래서 고종황제는 늘 이들과 긴장속에 살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들이 바로 고종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까요?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과정을 연구하면서 의문을 제기해온 이태진 교수.
그는 최근 일본측 자료에서 고종의 죽음과 관련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당시에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의 고위관리가 남긴 일기를 발견한것이다.
일기에는 이태왕 즉, 고종의 독살설과 함께 민병석, 윤덕영등 당시 대표적 친일파와
테라우치와 하세가와등 두 총독의 이름도 등장하고 있다.
일기는 고종이 이들의 모의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총독이 고종의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두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예상이 맞구나 하는 것과 동시에
또 정말 놀라운, 역시 이 사람들이 이런 짓까지 했구나
명성황후 시해는 이미 널리 알려져있는 사실이지만 마지막에는 황제까지 죽이는구나
그걸 확신했을 때 그 역사가 너무 잔혹하다는 느낌과 함께
정말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지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조선 초대 총독 테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 이들은 어떤 인물들일까?
초대 총독 테라우치의 고향, 야마우치시 그의 고향 마을에는 커다란 비석이 하나 서있다.
테라우치의 탄생지에 세워진 테라우치의 기념비. 그는 아직도 이 곳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고향마을에 한 대학. 이 곳에 마련된 테라우치 문고.
테라우치가 소장하고 있던 서적과 회화를 기증받아 만들어진 문고이다.
그런데 천여점의 서적의 대부분이 조선의 서적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테라우치가 수집한 것이다.
조선의 통감과 총독이라는 막강한 지위를 이용,
조선의 고서적과 희귀본들을 일본으로 반출했던 것이다.
이 중 130여점만이 지난 1995년 경남대학교로 반환됐다.
그는 1910년 7월 조선에 왔다.
그리고 한일 강제 평화 협약을 이끌어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하고 통합적인 식민지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일본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다.
한일 강제평압을 성공시킨 일제는 특별한 주사위 놀이판을 만들었다.
조선 침탈과정을 놀이판으로 만들어 강제평압을 기념하고 자축했다.
식민지 초기 무단통치를 감행한 테라우치 뒤로 그의 심복 하세가와가 2대총독이 되었다.
조슈세력의 군부출신, 군벌의 대포적 인물 두 사람이 총리대신과 조선총독으로 있는 상태에서
두 사람은 고종황제의 동향과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하세가와는 을사늑약 당시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협약을 강요했다.
그리고 1916년 테라우치의 뒤를 이어 무단 통치를 이어갔다.
고종과는 악연이었다.
하세가와는 테라우치와 같은 지역 출신이었다.
하세가와의 옛 집은 지금 검도장이 되었다.
하세가와는 1850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 후 일본군에 투신, 승승장구했다.
청일전쟁때 공을 세워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이후 러일전쟁 승전 공로로 육군 대장이 되었다.
-이즈미 미야타 이와쿠니 향토사학자-
하세가와는 아버지의 지도 아래 어린 시절부터 검도를 해왔습니다.
검도의 길은 훗날 군인이 되는 발판이 됩니다.
이 곳 도장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점에서 장래 군인이 되는 뜻을 세운 곳이라 생각합니다.
하세가와 고향의 시립박물관. 이 곳에서 하세가와가 남긴 새로운 기록을 찾았다.
아직도 군사우편 인장이 선명한 그의 편지들.
조선주둔 총사령관 시절 같은 군부 출신 동료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한국은 지금도 폭도가 여기저기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어 실로 난처합니다.
그 때문에 올해는 도쿄에 돌아가는 것이 어려 우리라 생각됩니다.
하세가와 고향 마을의 공원. 곳곳에 조선통치의 흔적이 남아있다.
공원 한켠에 서있는 낯익은 석상 두개. 묘소 앞을 지키는 문인석이다.
조선에서 가져간 것이었다.
공원 한 가운데 연못각. 아담한 정자 하나가 서있다.
-이즈미 미야타 이와쿠니 향토사학자-
육각정은 서울 주변의 벽제관에 있던 건물이었습니다.
벽제관은 기카와 히로이에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을 때 그 곳에서
민병연합군을 상대로 매우 큰 공적을 쌓은 곳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던 하세가와는 이 곳 이와쿠니에 대규모 공원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공원의 중심적인 건물로 무언가를 기부하고 싶어서 보낸 것입니다.
정자의 기둥과 대들보와 석가래까지 모두 조선의 목재이다.
극히 일부분 손본 것을 빼고는 조선의 정자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벽제관의 육각정을 뺏어갔을까?
경기도 고양의 벽제관터. 벽제관은 조선시대의 여관이었다.
중국의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 전날,
마지막으로 여정을 풀던 곳이었다.
그 벽제관의 뒷동산. 하세가와가 가져간 육각정은 이 곳에 있었다.
지금은 빈터인 이 곳에 일제는 전적기념탑을 세웠다.
벽제관은 왜군이 임진왜란때 명나라에 승전을 기록한 곳이었다.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이 곳은 일본사람들이 봤을 때 대단한 전승지입니다.
1593년 1월 27일에 명나라군과 왜군이 격전을 치루었는데
일본군대가 대륙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건 최초였습니다.
군국주의를 홍보하고 알리는데 그 정자가 기여하지 않았을까...
일본의 육각정. 또 하나의 역사적 상처로 남아있다.
일본의 국회도서관. 고종의 죽음과 관련해 일본인이 남긴 문서가 소장되어있다.
구라토미 유자부로 문서.
도서관측이 꺼낸 자료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수첩. 바로 일기였다.
구라토미는 이런 일기를 무려 340여권이나 남겼다. 구라토미는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나가이 가즈 교수 교토대 문학연구과-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 일본인의 관리를 한국에 파견하려 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사법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필요한 인재를 일본에 파견하려 했던 때에
이토 히로부미가 구라토미를 지목하여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한일병합 직후 그는 사법부장관이 되어 사법체계를 세웠다.
구라토미는 조선총독부 핵심고위관리였다.
그 역시 고종 죽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919년 10월 26일.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10주기에 참가했다가 송병준을 만난다.
이 때 송병준은 고종의 죽음에 민병석과 윤덕영이 자신들의 사표가 수리된 것에
대단히 분노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사표를 냈는데 수리가 되어버렸어요.
고종독살의 진범으로 몰렸단 말이죠.
송병준이 전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 때문에 결국은 민, 윤 두 사람이 펄펄 뛰고 있다
그리고 진상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구라토미 당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이걸 좀 잘 처리해달라
말하자면 그 두사람이 발설하면 일본도 좋을게 뭐있냐 이렇게 된거죠.
민병석, 윤덕영 이 둘은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민병석은 강제병합 이후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윤덕영은 1910년 국권피탈 당시 순종을 협박해 강제로 옷을 찢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들이 고종의 죽음에 깊숙히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내부 관리이던 곤도 시로스케, 그도 이들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곤도의 이왕궁 비사.
1907년부터 1920년까지 조선황실에서 근무하며 남긴 회고록이다.
여기도 고종 죽음과 관련 민병석과 윤덕영이 거론되고 있다.
이들이 안상호에게 독을 사용하게 했다는 유언비어가 있다고 했다.
당시 황실의 청탁의였던 의사 안상호가 등장한다.
안상호 역시 여러 기록에서 발견되는데 그가 독살범으로 주목받는 것이다.
당시 안상호는 일본여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고종 사망 한달 전인 내선일체의 모범이라면서 일제에 동원되었다.
고종의 죽음과 관련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황실의 어주도감 즉,
식자재를 담당하던 한상학이라는 인물.
이완용의 지시로 윤덕영과 한상학이 궁녀를 위협해 식혜에 독을 탔다는 것인데
당시 한상학은 이완용과 특별한 관계였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고종독살사건과 관련해서 이완용이 주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한상학과 사돈지간이 됩니다.
그래서 고종이 독살당했다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일본이 총기획을 하고 이완용이 연출을 하고
한상학과 김상궁이라는 한상학의 수하가 직접 실행을 담당했던 사건으로
이완용의 이름이 고종 독살과 관련해서 가장 깊숙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1919년 3월 30일 구라토미 일기
테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설명하게 하였지만
고종이 수락하지 않았기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이들은 고종에게 무엇을 요구했던 것일까?
-이태진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지시를 한겁니다. 확인해보고 듣지 않으면 죽이라는 그런 지시를 내렸고
역시 고종황제가 그 무언가를 아마도 한국병합은 잘된 거라는 것을
추인하는 인정을 하라는 요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고종황제가 받아들일리가 없었죠.
결국 이 사람은 대 일본제국을 위해서 제거해야된다는 판단에서 지시를 했고
지금까지 알려졌던 민병석과 윤덕영은 하수인에 불과했다 이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기에 대해 일본학자들은 엇갈린 견해를 내놓고 있다.
-나가이 가즈 교수 교토대 문학연구과-
구라토미 일기의 기술로는 테라우치와 하세가와가 관여했다는 점을 증명한다는 사실은
자료 해석으로는 불가능하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독살에 관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구라토미 일기의 기술에 의해 테라우치와 하세가와, 윤덕영과 민병석이 이른바 현장을 지휘하여
독살을 하였다는 점이 최초로 밝혀졌으며 구라토미는 이를 풍설이라고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왕가와 매우 밀접한 일본인 관리 또는 조선인의 사무관들
즉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구라토미는 이 이야기를 쓰고 있으므로
무책임한 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전문 증거로서 자료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일제의 폭압에 대한 고종의 저항은 완강했다.
최근 을사늑약 직후 고종이 보낸 비밀전보 하나가 발견이 되었다.
당시 고종은 이 비밀전보를 독일주재 민철호 공사에게 보냈다.
민철호는 이를 독일어로 번역 1905년 11월 24일 독일 외교부에 접수시켰다.
고종은 이토, 하야시, 하세가와 등 국권 침탈의 주범들을 공개해서
국제 사회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려했다.
비밀전보
이토특별공사 하세가와 장군, 하야시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짐의 궁궐에 난입해 무력으로 본인을 위협하면서
그들이 만든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소.
일본은 서울에 통감을 임명하고 우리의 외교권을 양도하게 했소.
이러한 범죄행위는 국제법상 도저히 용인할 수 없소.
귀하는 이같은 사실을 독일정부에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시오.
독일의 도움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오.
-정상수 연구교수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고종황제가 이름을 나열한 이토, 하세가와, 하야시 이 세명이
한국 침탈의 주역이었구나 라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해주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두번째 증거에서도 비준문제,
고종이 서명하지 않았다는 그 부분보다는 군대를 동원한 강제성이라는게 엄연히 드러나있고
을사늑약 이라든지 합방에 대해서는 강제성 때문에 무효라는 근거를 제시한거죠.
고종은 일제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을사늑약 후에 헤이그특사를 파견해서 국제사회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일제는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켜버렸다.
비정상적인 양위식이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양위하는 고종도 참석을 안하고 순종도 양위 받기를 거부하고
참석을 안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양위식이 었기 때문에
일본쪽에서 그렇게 붙여서
양위식 이라는 이름으 붙게 된거지 일본에서 고종을 제위에서 쫓아냈다
물러 났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기 위한 그런 정치극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위식 이후 황제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데려갔다.
인질이었다.
영친왕의 나이 고작 11살 때였다.
뒤이어 대한제국의 군대도 해산시켜버렸다.
수많은 의병들이 토벌되고 참수되었다. 더이상 대한제국의 하늘은 없었다.
고종은 함녕전에 유폐 외부와 철저히 고립되었다.
일제는 또 다른 압박을 해왔다.
바로 영친왕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카(이방자)와의 결혼계획이었다.
강제합병 이후 조선과의 순조로운 관계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1918년 일제는 영친왕을 일시 귀국시켰다. 그리고 깍듯하게 영접했다.
귀국하자마자 영친왕은 조선총독부를 방문하는 등 각종 행사에 초대됐다.
일제가 갑자기 영친왕을 귀국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의 발표로 세계는 새로운 기류를 탔는데
일제는 영친왕으로 이를 희석시키려고 했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한번도 귀국을 안 시켰는데 윌슨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5일도 안됐는데 귀국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와서 문안드리게 하고 종묘에도 가게 하고
일종의 쇼를 하게 하는 거죠. 쇼를 시킨겁니다.
그 즈음 고종은 또 다른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회영 일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운것이다.
국외로 망명해 망명정부를 세우고 고종이 직접 일제의 불법을 국제에 알리면
그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었다.
고종의 망명정부는 국내외 한일 세력의 구심점이 될 것이었다.
망명계획은 고종의 승부수였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만약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면 그 사건 자체로 일본은 항상 해외에 선전할 때
한국의 자발적인 요청에 의해서 합방한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주중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종이 망명한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을 겁니다.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는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1차대전에 참가한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국제회의였다.
이 강화회의에 맞추어 고종이 또 다시 움직였다.
바로 이 파리 강화 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 한 것이었다.
밀사는 의친왕과 하란사라는 여성으로 결정이 되었다.
-김승일 송암문화재단 전문위원-
당시 하란사는 맹렬한 여성으로 신영성이 갖고있는 독특한 특징을 가졌는데
미국 유학, 일본 유학으로 국제정세 돌아가는 것도 알다보니
더군다나 의친왕과 같은 지역에서 유학생활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궁정의 일에도 참가도 하고 고종과 대화도 하고
그런 와중에 고종이 속내를 털어놔서 의친왕에게 파리 평화 회의에 가서
우리의 답답함을 호소하라고 한거죠.
일제는 당황했다.
황실과 고종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이런 고종의 움직임에 일제는 다급해졌다.
당시 정세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당시 선교사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노블 여사.
1919년 3월 일기에 보면 한국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문서에 억지로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쓰여있다.
윤치호 역시 이 서명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윤덕영, 이완용, 조중응, 한상용, 신흥우 등이 일본의 통치에
조선인들이 만족해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어떤 서한에 서명했다고...
1919년 3월 4일 윤치호일기
박은식은 친일파들이 황제의 서명까지 받으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가 바라는 것은 한국인 스스로 식민지 백성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서명이었다.
강제병합의 정당성을 보여주려던 영친왕의 결혼은 1919년 1월 25일로 정해졌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화 회의가 열리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가게해서 우효관계를 과시하겠죠.
그전에 고종 황제에게 확인 하려고 한 것, 결국 을사 조약을 끝까지 거부했지 않습니까
나는 인정한 적이 없다고... 또 헤이그 평화회의를 통해서 열강국 들에게 알렸단 말이죠.
그 사실을 뒤엎는 발언을 해달라는 겁니다. 그것도 문서로 해달라는 겁니다.
고종은 끝까지 한일강제병합을 취인하는 서명을 거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이 고종 독살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하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러나 고종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독립 운동의 불씨로 되살아 났다.
고종의 죽음,
그것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한지 올해로 90년.
고종의 죽음은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죽은 역사입니다.
치욕의 역사도 마냥 묻어둘 수만은 없습니다.
고종 황제의 독살설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
광복절을 기념하는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출처]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은?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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