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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기독저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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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쓴이 : 기독저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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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재검증한다
본지가 기독교텔레비젼에 안식일교회가 주주로 참여한 사실과 관련 이단배격 이라는 입장에서 강한 비판보도를 하자 많은 독자들이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하여 본지는 지난해 11 월부터 개신교문제연구소와 함께 안식일교회에 대한 집중연구를 해오고 있으며 그 연구내용을 일부 긴급진단 형식으로 11 회에 걸쳐 비판과 변증형식으로 편견없이 연속 보도합 니다. 특히 비판은 박영관, 탁영환, 안토니훼케마. 플주이트(美플러신학신학조직신학교수) 등의 견해를 주로 인용하였으며 아울러 변증은 신계훈목사 (삼육대학총장)및 안식일교회측에서 주장 하거나 제공하는 자료들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추후 공청회동을 개최하여 신학자들의 폭넓은 연구결과를 게재할 예정이며 안식일교회가 과연 이단인가? 아닌가를 재진단코저 합니다.
조건적 영혼 불멸 사상
(비평 : 훼케마)
“두 실례 가운데 두번째 것은 계시록 6장 6 ~11절에 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네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프쉬케의 복수인 프쉬카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제단 아래 있는 영혼
(변증 : 안식일교회)
훼케마씨는 위에 묘사된 영혼들이 순교 당하여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로,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진 채 부르짖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 말이 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각시대 모든 순교자들의 형체도 없는 허다한 영혼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좁은 제단 아래 오글오글 (密集)해 있으면서 원통함을 참지 못하여 소리지른다는 뜻인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라
주지하는 대로 요한계시록은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주로 상징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실례로 앞 장인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어린 양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5:6)는 것으로 계시에 나타났다.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완전한 지성의 상징인 일곱 눈과 누구라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인상 깊게 상징한 일곱 뿔이다. 분명히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는가? 제단은 성소의 뜰에 있던 것으로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렸다(레 1:5 3:2:17:6).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순교자들의 희생의 피도 제단 아래 있는 것으로 적절히 상징되었다. 또한 같은 레위기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17:11) 속죄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있다. 피는 희생제물의 생명을 상징한 것이다. 제단 아래 뿌려진 희생제물의 피는 제물의 생명<프쉬케>이 희생된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 피를 신원하여”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결국 피가 부르짖는 것이다.
어떻게 피가 브르짖는 가? 하나님께서도 아우를 죽인 가인을 향하여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고 말씀하셨다. 이른 바 문학에서의 의인법(擬人法)이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다고 표현되었다”(히 12:24).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6:11)셨다고 했는데, 육신의 실체도 없다고 상상을 하고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는가?
상징과 실제를 구별하지 못하면 이상과 같이 해석상의 혼란을 겪게 마련이다. 훼케마씨가 신약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프쉬케”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어떤 본질이라는 증거로 제시한 이상의 두 경우가 모두 성경과 상식에 일치하지 않는 모순된 주장임을 밝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신 · 구약 성경에 “생기” “호흡” “신” “영” “영혼” “생명” “목숨” “샘물” “마음” 등 여러가지로 번역된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가 아래와 같이 분포되어 있다.
<구약 · 히브리어>
루아흐(ruach) : 3백 89회 네피쉬(neohesh) : 7백51회 네솨마(neshamah) : 25회
<신약 · 헬라어>
프뉴마(pneuma) :3백86회 프쉬케(psuche) : 1백 5회 <합계 : 1천 6백 58회>
그런데 이토록 1천6백58회나 쓰여진 말들이 “영”니나 “신” “영혼”으로 번역되기는 했어도 그것 자체가 불멸(不滅)이라거나 죽은 뒤에 몸에서 분리되어도 의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말이 단 한군데도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 두 군데라도 분명히 적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이 불멸이요 결코 죽지 않는가 1천 7백(1천 6백58회)번 성경에 물어보라, 한결같이 압도적인 대답은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수백번 사용되면서도 단 한번 어디에서고 영혼은 본질적으로 죽자 않는다든지 영이 불멸이라고 말하는 대가 없다. 불멸이 영혼이나 영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이런 일은 이상하고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죄의 결과와 죽음의 진상>
(비평 : 훼케마)
“안식일교회는 역사적인 기독교가 가르쳐 온 지옥의 교리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형벌의 결과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우는 영원한 형벌, 곧 멸절(滅絶)을 믿는다.
(해설)
훼케마씨가 대표하는 일반 개신교회들과 가톨릭교회가 믿는 바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영원한 지옥불에서 불에 타 없어지지도 않고 산채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의인의 영혼이 영원한 것처럼 악인의 영혼도 소멸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안식일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다음과 같이 믿는다.
예수 재림시 의인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변화된 새몸을 입고 승천하여(살전 4:15 ~18 : 고전 15:51~54).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하늘에서 악인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왕노릇할 것이다(계 20:4~6).
천년 후에 그리스도를 수반하여 새예루살렘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올 때 모든 죽은 악인들이 참여하는 둘째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여 영원히 멸절시키는 “둘째 사망 곧 불못”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계 20:7 ~15). 결국 예수 재림 천년후에 이 지구 자체가 불못인 지옥이 될 것이며(계20:8,9), 죄와 죄인이 영원히 사루어진 후에는 지구가 새롭게 재창조되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새 땅이 될 것임을 믿는다(계 21:1 ~5). 이러한 사실을 조목을 아래에 변증한다.
죄의 결과인 죽음 – 둘째 사망
(변증 : 안식일교회)
하나의 거짓을 합리화하기 위하여는 또 다른 연쇄적인 거짓이 필요하다. 사단이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안심하고 죄짓도록 유혹할때 사용한 첫번째 거짓말 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리라”(참 3:4)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선언이었다. 하와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단의 거짓말을 믿었다.
지금도 사람의 영혼은 불사불멸(不死不滅)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신다.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다음의 말씀들을 비교하며 죄의 결과는 사망임을 확인해 보자.
(창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겔 18:3) “범죄하는 그 영혼에게 쉬이 죽으리라”
(요 3;16)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계 20:14) “사망과 음부<무덤>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죄의 값은 사망임을 일관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인 것처럼 영원히 죽는 것이 사망이다. 만약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면 그것이 고생(苦生)이지 사망은 아니다. 그것은 “죄의 값은 사망” 대신 “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을 바꾸어 놓는 일이다.
위에 인용된 계시록 20장 14절의 둘째 사망이란 무엇인가? 신 · 구약성경은 의인이건 악인 이건 한번 이세상에서 태어났다가 죽게 마련인 생물학적 죽음을 무의식적인 “장”이라고 했다 (신 31:16 : 왕상 11:43 등 열왕기, 역대기에만 35회 이상 표현됨 : 단 12:2 : 욥 14:12: 요 11:11 행 7:60 : 살전 4:15,16: 벧후 3:4) 이처럼 외인이나 악인이나 부활의 날까지 무의식 상태로 무덤 에 머무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
자는 사람은 비록 의식은 없지만 분명히 깨어나는 것처럼 의인은 예수 재림시에 “생명의 부활” 곧 “첫째 부활”때에 육신으로 부활한다(요 5:29: 계20:5,6).
그러나 악인은 예수 재림 천년 후(계 20:5), “심판의 부활”(요 5:29), 곧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죽음인 “둘째 사망”(계 20:6,14)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사망과 음부<무덤>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인 지옥불인 것이며, 이 둘째 사망 때에 사망도 사망(死亡)하여 사망의 영원한 끝이 이르는 것이다.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말은 아직도 사망이 끝나지 않았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지옥의 진상
(비평 : 훼케마)
신약성경에 12회 나타나며 보통 “지옥”(hell)으로 번역되고 있는 헬라어 “게헨나”(gehenna)를 살펴보자, 안식일교회는 이 말이 악인을 영원히 불살라 없앨 파멸의 불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8장 9절의 “지옥불”은 8절의 “영원한 불”과 같은 표현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지옥불은 일시적인 불이 아니요 영원한 불이다”
(해설)
훼케마씨는 안식일교회가 악인은 영원한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일반 교회들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악인은 결국 사루어 없어진다는 악인 소멸(燒滅)을 믿는 것을 반박하는 근거로 “지옥”을 뜻한다는 성경의 “게한나”가 영원한 지옥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시 계시록 14장 11절의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표현을 들어 지옥불 속에서 악인의 고통도 영원하다는 논거를 삼고 있다.
(변증 : 안식일교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는 지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옥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고, 언제 있을 것이며, 얼마나 오래 있을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먼저 지옥(地獄)의 본래 뜻부터 확인하여 볼 필요가 있다. “지옥을 영어로는 “헬”(hell)이라고 하는데, 흠정역(KJV) 구약성경에 31번, 신약성경에 23번 나타나는 말이다. 그런데 “지옥”으로 번역된 이상의 표현들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말에서 나왔다. 그것들을 일일히 점검하며 참으로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진상을 확인해 보자.
구약성경의 음부 – 스올
구약성경에 66번 쓰여진 “스올”(sheol)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우리 말 성경에는 주로 “음부”(陰府)로 번역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잘못 생각하는 “저승”을 연상시킨다. 17세기 영어번역인 흠정역(1611년 KJV)에는 같은 말을 자신들의 주관에 따라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서 더 많은 연구를 거쳐 번역된 영어 성경들은 “지옥”이 문맥과 신학에 맞지 않게 미국 표준역(ASV)의 경우 대부분 원어인 “스올”을 그대로 썻고, 새국제역(NIV)은 대부분 “지옥”대신 “무덤”으로 번역하여 신학적 양심을 되찾고 있다.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음부”로 번역된 이 “스올”이란 곳은 사람이 죽으면 악인이나 모두 가게 마련인 융택(瀜宅), 곧 “무덤”을 뜻했음을(욥 7:9: 시 30:3: 전 9: 10) 다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신실하게 산 야곱도 자신이 죽으면 갈 곳이라고 했고(창 37:35 : 42:38 44:29,31)
의로운 욥도 죽으면 그리로 내려간다고 했으며(욥 14:13 17:13 ~16)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다윗도 죽으면 갈 곳으로 기대했고(시 18:4,5 30:3 49:15)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뒤 잠시 머무실 곳도 음부라고 예언되었다(시 16:10 행 2:27,31)
또한 반역한 무리들도 음부에 삼키웠다고 했고(민16:33)
애굽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도 죽으면 가는 곳이고(겔 31:18 ~ 23)
바벨론 왕도 가고(사 14:9)
결국은 모든 사람, 모든 악인이 가는 곳이다(시 9:17 계20:13)
구약성경에서의 “스올”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윌터(Ralph Walter)는 구약성경에 쓰여진 “스올”(sheol)에 대한 거의 모든 묘사는 “무덤”과 정확하게 같은 뜻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연구의 결과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스올”이 구약 성경에서 “지옥”이나 “음부”등으로 잘못 번역되기는 했지만 그곳이 악인이 죽은 뒤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지옥의 뜻으로 쓰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에는 악인을 영원히 불태우는 그런 지옥은 용어마저도 없다. 신약성경에는 어떠한가?
신약성경의 음부 – 하데스
신약성경에 지옥(hell)이라고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 (hades)에서, 12번은 “게헨나”(Gehenna)에서,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등 세 가지 헬라에서 나왔다.
먼저 “하데스”는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에 해당되는 헬라어임을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한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다윗이나 예수님이 장사된 무덤임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행 2:29,31).
소아시아 무덤들 앞에 “00의 무덤”이라고 쓴 묘비(墓碑)에도 무덤을 뜻하는 헬라어인 “하데스” 를 썻음을 지금도 확인 할 수 있다. 자주 “지옥”으로 번역된 신약 성경의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고통 당하는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모두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했음을 성경 본문만 주의 깊게 읽어보아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리하여 17세기 영어 번역 성경인 흠정역(KJV)등 “하데스”를 대부분 “지옥”으로 번역했던 옛날 성경들과는 달리, 20세기 새번역 성경들은 그것을 “무덤” 혹은 원어 그대로 “하데스”를 써서 지옥으로 번역할때 생기는 문맥과 신약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 신학교를 대표하는 훼케마 씨는 칼빈의 가르침을 뒷바침하기 위해 “스올’이나 “하데스”가 지옥도 아니고 무덤도 아닌 곳으로, 의인과 영혼들이 최후 심판이 있기까지 예비적인 평안이나 고통을 겪는 임시 휴게소격의 중간상태라는 무리한 주장을 펴고 있다. 이것은 칼빈주의 신앙과 교과서인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의 정설(定說)에도 어긋나는 자체 모순임을 뒤에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본래 영어의 지옥인 “헬”(hell)도 “덮다”(to cover), 혹은 “숨다”(to hide)라는 뜻의 앵글로 - 색슨어인 “헬란(helan)에서 나온 것이다.
수백년 전에는 그 낱말이 앞에서 살펴본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처럼 죽으면 누구나 가는 “보이지 않는(unseen)곳인 무덤을 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 (hell)는 악인들이 형벌 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hell)는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때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tartarus)는 신약성경(밷후 2:4)에 단 한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에서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헬라어의 동사형(tartaroo)으로 나타난다.
명사인 “타르타루스”는 “어두운 구덩이”(a dark abyss)의 뜻으로 쓰였는데 유다에서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유 1:6)”고 썻다.
그러면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높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인가? 요한계시록에 그 대답이 있다. 범죄함으로 하늘에서 추방당한 사단과 그를 따르는 악한 천사들은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내어 쫓기니라”(12:8,9 12,13)
실제로 이 땅은 재림 후 최후의 심판이 집행되기까지 천년 동안 사단이 갇혀 있을 혼돈( 混沌) 상태인 “무저갱”(無底坑)으로도 묘사되었다 (게 20:1 ~ 3). 그러므로 비록 지옥으로 번역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악인이 영원히 불살라지는 그런 뜻의 지옥이 아닌것이 분명하다.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 “지옥”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Gehenna)는 12번 나타나는데 헬라어로는 “게엔나”(geenna)로 불리운다.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된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이다(수 18:16). 12번 가운데 9번은 “지옥”(hell)이란 명사로, 3번은 형용사로 쓰였는데 한번(약 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신 특이한 표현이다. 이 “게헨나”만이 불타고 있는 성경적인 베경의 “지옥”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게헨나”는 어디이며, 타오르는 불은 언제 그리고 언제까지 타오를 불인가?
지옥의 주소로 소개된 “게헨나”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져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때, 이곳에서 자식들을 물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기까지 한(대하 28:1 ~3, 33:1~6: 왕하 23:10)배도의 현장이었다.
예레미야는 이 골짜기를 “살륙의 골짜기”라 칭할 것임을 예고하고, 배도한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쫒을 자가 없을 것”이며 “땅이 황폐하리라고 예언했다”(렘 7:30 ~ 34: 19:2,6: 32:36).
실제로 요시아왕은 그 골짜기를 그렇게 만들었다(왕하 23:10). 후에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 되어, 이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을 곳을 상징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적용하여 당신의 말씀을 한사코 거역하는 바리새인들과 완고한 인간들을 질책하시며, 그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살륙의 골짜기” 곧 “게헨나”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막 9:43 ~47).
그러므로 예수께서 묘사하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이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막 9:43,48) 지옥불은 곧 “힌놈의 골짜기”의 쓰레기와 시체를 태우는 불이었다.
이 “게헨나”가 신약성경에는 모두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다(마 5:22 29,30: 10:28 : 23:33). 그러나 이러한 지옥은 사람이 죽은 뒤 몸을 떠난 영혼이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곳으로 표현된 경우는 한번도 없고, 장차 있을 재림과 연관된 심판의 때에(마 5:22: 25:41), 몸이 함께 사루어 없어질 곳으로 분명히 언급되었다(마 10:28: 5:29,30).
그 때와 장소는 앞에서 밝힌 대로 예수재림이 있은지 천년 후에 불못으로 화할이 땅인 것이다(계20:7~10,13,14 : 벧후 3:10 ~13).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구약의 “스올”(65번), 신약의 “하데스”(11번), “타르타루스”(1번), “게헨나(12 번) 등 사람이 죽은 뒤 가는 곳으로 언급된 표현이 80번이나 나오지만 어느 한곳도 죽은 뒤 몸을 떠난 영혼이 가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곳으로 소개된 곳은 없다. 단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를 태우는 불이 밤낮 타오르던 “힌놈의 공짜기”를 뜻하는 “게헨나”를 연상하여, 신약 성경은 마지막 심판날에 악인을 태울 불을 “영원한 불”(마 25:41)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의 힌놈의 골짜기의 쓰레기는 모두 타버렸거나 지워지고, 시체들도 모두 썩어버려서 지옥을 상징했던 그 “게헨나”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더 이상 불도 타오르지 않고 벌레도 득실 거리지 않는 아름다운 성지의 일부가 되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이러한 “힌놈의 골짜기”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깨닫지 못하고, 이상과 같은 성경의 표현을 악인이 지옥불에서 당하는 고통은 영원하다는 영원지옥설(永遠地獄設)의 논거로 삼는 것은 학문적으로 신중하지 못한 가르침이다.
본지가 기독교텔레비젼에 안식일교회가 주주로 참여한 사실과 관련 이단배격 이라는 입장에서 강한 비판보도를 하자 많은 독자들이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하여 본지는 지난해 11 월부터 개신교문제연구소와 함께 안식일교회에 대한 집중연구를 해오고 있으며 그 연구내용을 일부 긴급진단 형식으로 11 회에 걸쳐 비판과 변증형식으로 편견없이 연속 보도합 니다. 특히 비판은 박영관, 탁영환, 안토니훼케마. 플주이트(美플러신학신학조직신학교수) 등의 견해를 주로 인용하였으며 아울러 변증은 신계훈목사 (삼육대학총장)및 안식일교회측에서 주장 하거나 제공하는 자료들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추후 공청회동을 개최하여 신학자들의 폭넓은 연구결과를 게재할 예정이며 안식일교회가 과연 이단인가? 아닌가를 재진단코저 합니다.
조건적 영혼 불멸 사상
(비평 : 훼케마)
“두 실례 가운데 두번째 것은 계시록 6장 6 ~11절에 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네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프쉬케의 복수인 프쉬카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제단 아래 있는 영혼
(변증 : 안식일교회)
훼케마씨는 위에 묘사된 영혼들이 순교 당하여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로,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진 채 부르짖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 말이 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각시대 모든 순교자들의 형체도 없는 허다한 영혼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좁은 제단 아래 오글오글 (密集)해 있으면서 원통함을 참지 못하여 소리지른다는 뜻인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라
주지하는 대로 요한계시록은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주로 상징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실례로 앞 장인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어린 양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5:6)는 것으로 계시에 나타났다.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완전한 지성의 상징인 일곱 눈과 누구라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인상 깊게 상징한 일곱 뿔이다. 분명히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는가? 제단은 성소의 뜰에 있던 것으로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렸다(레 1:5 3:2:17:6).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순교자들의 희생의 피도 제단 아래 있는 것으로 적절히 상징되었다. 또한 같은 레위기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17:11) 속죄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있다. 피는 희생제물의 생명을 상징한 것이다. 제단 아래 뿌려진 희생제물의 피는 제물의 생명<프쉬케>이 희생된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 피를 신원하여”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결국 피가 부르짖는 것이다.
어떻게 피가 브르짖는 가? 하나님께서도 아우를 죽인 가인을 향하여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고 말씀하셨다. 이른 바 문학에서의 의인법(擬人法)이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다고 표현되었다”(히 12:24).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6:11)셨다고 했는데, 육신의 실체도 없다고 상상을 하고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는가?
상징과 실제를 구별하지 못하면 이상과 같이 해석상의 혼란을 겪게 마련이다. 훼케마씨가 신약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프쉬케”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어떤 본질이라는 증거로 제시한 이상의 두 경우가 모두 성경과 상식에 일치하지 않는 모순된 주장임을 밝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신 · 구약 성경에 “생기” “호흡” “신” “영” “영혼” “생명” “목숨” “샘물” “마음” 등 여러가지로 번역된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가 아래와 같이 분포되어 있다.
<구약 · 히브리어>
루아흐(ruach) : 3백 89회 네피쉬(neohesh) : 7백51회 네솨마(neshamah) : 25회
<신약 · 헬라어>
프뉴마(pneuma) :3백86회 프쉬케(psuche) : 1백 5회 <합계 : 1천 6백 58회>
그런데 이토록 1천6백58회나 쓰여진 말들이 “영”니나 “신” “영혼”으로 번역되기는 했어도 그것 자체가 불멸(不滅)이라거나 죽은 뒤에 몸에서 분리되어도 의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말이 단 한군데도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 두 군데라도 분명히 적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이 불멸이요 결코 죽지 않는가 1천 7백(1천 6백58회)번 성경에 물어보라, 한결같이 압도적인 대답은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수백번 사용되면서도 단 한번 어디에서고 영혼은 본질적으로 죽자 않는다든지 영이 불멸이라고 말하는 대가 없다. 불멸이 영혼이나 영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이런 일은 이상하고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죄의 결과와 죽음의 진상>
(비평 : 훼케마)
“안식일교회는 역사적인 기독교가 가르쳐 온 지옥의 교리를 부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형벌의 결과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우는 영원한 형벌, 곧 멸절(滅絶)을 믿는다.
(해설)
훼케마씨가 대표하는 일반 개신교회들과 가톨릭교회가 믿는 바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영원한 지옥불에서 불에 타 없어지지도 않고 산채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의인의 영혼이 영원한 것처럼 악인의 영혼도 소멸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안식일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다음과 같이 믿는다.
예수 재림시 의인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변화된 새몸을 입고 승천하여(살전 4:15 ~18 : 고전 15:51~54).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하늘에서 악인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왕노릇할 것이다(계 20:4~6).
천년 후에 그리스도를 수반하여 새예루살렘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올 때 모든 죽은 악인들이 참여하는 둘째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여 영원히 멸절시키는 “둘째 사망 곧 불못”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계 20:7 ~15). 결국 예수 재림 천년후에 이 지구 자체가 불못인 지옥이 될 것이며(계20:8,9), 죄와 죄인이 영원히 사루어진 후에는 지구가 새롭게 재창조되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새 땅이 될 것임을 믿는다(계 21:1 ~5). 이러한 사실을 조목을 아래에 변증한다.
죄의 결과인 죽음 – 둘째 사망
(변증 : 안식일교회)
하나의 거짓을 합리화하기 위하여는 또 다른 연쇄적인 거짓이 필요하다. 사단이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안심하고 죄짓도록 유혹할때 사용한 첫번째 거짓말 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리라”(참 3:4)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선언이었다. 하와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단의 거짓말을 믿었다.
지금도 사람의 영혼은 불사불멸(不死不滅)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신다.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다음의 말씀들을 비교하며 죄의 결과는 사망임을 확인해 보자.
(창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겔 18:3) “범죄하는 그 영혼에게 쉬이 죽으리라”
(요 3;16)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계 20:14) “사망과 음부<무덤>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죄의 값은 사망임을 일관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인 것처럼 영원히 죽는 것이 사망이다. 만약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면 그것이 고생(苦生)이지 사망은 아니다. 그것은 “죄의 값은 사망” 대신 “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을 바꾸어 놓는 일이다.
위에 인용된 계시록 20장 14절의 둘째 사망이란 무엇인가? 신 · 구약성경은 의인이건 악인 이건 한번 이세상에서 태어났다가 죽게 마련인 생물학적 죽음을 무의식적인 “장”이라고 했다 (신 31:16 : 왕상 11:43 등 열왕기, 역대기에만 35회 이상 표현됨 : 단 12:2 : 욥 14:12: 요 11:11 행 7:60 : 살전 4:15,16: 벧후 3:4) 이처럼 외인이나 악인이나 부활의 날까지 무의식 상태로 무덤 에 머무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
자는 사람은 비록 의식은 없지만 분명히 깨어나는 것처럼 의인은 예수 재림시에 “생명의 부활” 곧 “첫째 부활”때에 육신으로 부활한다(요 5:29: 계20:5,6).
그러나 악인은 예수 재림 천년 후(계 20:5), “심판의 부활”(요 5:29), 곧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죽음인 “둘째 사망”(계 20:6,14)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사망과 음부<무덤>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인 지옥불인 것이며, 이 둘째 사망 때에 사망도 사망(死亡)하여 사망의 영원한 끝이 이르는 것이다.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말은 아직도 사망이 끝나지 않았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지옥의 진상
(비평 : 훼케마)
신약성경에 12회 나타나며 보통 “지옥”(hell)으로 번역되고 있는 헬라어 “게헨나”(gehenna)를 살펴보자, 안식일교회는 이 말이 악인을 영원히 불살라 없앨 파멸의 불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8장 9절의 “지옥불”은 8절의 “영원한 불”과 같은 표현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지옥불은 일시적인 불이 아니요 영원한 불이다”
(해설)
훼케마씨는 안식일교회가 악인은 영원한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일반 교회들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악인은 결국 사루어 없어진다는 악인 소멸(燒滅)을 믿는 것을 반박하는 근거로 “지옥”을 뜻한다는 성경의 “게한나”가 영원한 지옥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시 계시록 14장 11절의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표현을 들어 지옥불 속에서 악인의 고통도 영원하다는 논거를 삼고 있다.
(변증 : 안식일교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는 지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옥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고, 언제 있을 것이며, 얼마나 오래 있을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먼저 지옥(地獄)의 본래 뜻부터 확인하여 볼 필요가 있다. “지옥을 영어로는 “헬”(hell)이라고 하는데, 흠정역(KJV) 구약성경에 31번, 신약성경에 23번 나타나는 말이다. 그런데 “지옥”으로 번역된 이상의 표현들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말에서 나왔다. 그것들을 일일히 점검하며 참으로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진상을 확인해 보자.
구약성경의 음부 – 스올
구약성경에 66번 쓰여진 “스올”(sheol)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우리 말 성경에는 주로 “음부”(陰府)로 번역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잘못 생각하는 “저승”을 연상시킨다. 17세기 영어번역인 흠정역(1611년 KJV)에는 같은 말을 자신들의 주관에 따라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서 더 많은 연구를 거쳐 번역된 영어 성경들은 “지옥”이 문맥과 신학에 맞지 않게 미국 표준역(ASV)의 경우 대부분 원어인 “스올”을 그대로 썻고, 새국제역(NIV)은 대부분 “지옥”대신 “무덤”으로 번역하여 신학적 양심을 되찾고 있다.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음부”로 번역된 이 “스올”이란 곳은 사람이 죽으면 악인이나 모두 가게 마련인 융택(瀜宅), 곧 “무덤”을 뜻했음을(욥 7:9: 시 30:3: 전 9: 10) 다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신실하게 산 야곱도 자신이 죽으면 갈 곳이라고 했고(창 37:35 : 42:38 44:29,31)
의로운 욥도 죽으면 그리로 내려간다고 했으며(욥 14:13 17:13 ~16)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다윗도 죽으면 갈 곳으로 기대했고(시 18:4,5 30:3 49:15)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뒤 잠시 머무실 곳도 음부라고 예언되었다(시 16:10 행 2:27,31)
또한 반역한 무리들도 음부에 삼키웠다고 했고(민16:33)
애굽 사람과 앗시리아 사람도 죽으면 가는 곳이고(겔 31:18 ~ 23)
바벨론 왕도 가고(사 14:9)
결국은 모든 사람, 모든 악인이 가는 곳이다(시 9:17 계20:13)
구약성경에서의 “스올”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윌터(Ralph Walter)는 구약성경에 쓰여진 “스올”(sheol)에 대한 거의 모든 묘사는 “무덤”과 정확하게 같은 뜻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연구의 결과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스올”이 구약 성경에서 “지옥”이나 “음부”등으로 잘못 번역되기는 했지만 그곳이 악인이 죽은 뒤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지옥의 뜻으로 쓰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에는 악인을 영원히 불태우는 그런 지옥은 용어마저도 없다. 신약성경에는 어떠한가?
신약성경의 음부 – 하데스
신약성경에 지옥(hell)이라고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 (hades)에서, 12번은 “게헨나”(Gehenna)에서,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등 세 가지 헬라에서 나왔다.
먼저 “하데스”는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에 해당되는 헬라어임을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한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다윗이나 예수님이 장사된 무덤임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행 2:29,31).
소아시아 무덤들 앞에 “00의 무덤”이라고 쓴 묘비(墓碑)에도 무덤을 뜻하는 헬라어인 “하데스” 를 썻음을 지금도 확인 할 수 있다. 자주 “지옥”으로 번역된 신약 성경의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고통 당하는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모두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했음을 성경 본문만 주의 깊게 읽어보아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리하여 17세기 영어 번역 성경인 흠정역(KJV)등 “하데스”를 대부분 “지옥”으로 번역했던 옛날 성경들과는 달리, 20세기 새번역 성경들은 그것을 “무덤” 혹은 원어 그대로 “하데스”를 써서 지옥으로 번역할때 생기는 문맥과 신약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 신학교를 대표하는 훼케마 씨는 칼빈의 가르침을 뒷바침하기 위해 “스올’이나 “하데스”가 지옥도 아니고 무덤도 아닌 곳으로, 의인과 영혼들이 최후 심판이 있기까지 예비적인 평안이나 고통을 겪는 임시 휴게소격의 중간상태라는 무리한 주장을 펴고 있다. 이것은 칼빈주의 신앙과 교과서인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의 정설(定說)에도 어긋나는 자체 모순임을 뒤에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본래 영어의 지옥인 “헬”(hell)도 “덮다”(to cover), 혹은 “숨다”(to hide)라는 뜻의 앵글로 - 색슨어인 “헬란(helan)에서 나온 것이다.
수백년 전에는 그 낱말이 앞에서 살펴본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처럼 죽으면 누구나 가는 “보이지 않는(unseen)곳인 무덤을 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 (hell)는 악인들이 형벌 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hell)는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때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tartarus)는 신약성경(밷후 2:4)에 단 한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에서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헬라어의 동사형(tartaroo)으로 나타난다.
명사인 “타르타루스”는 “어두운 구덩이”(a dark abyss)의 뜻으로 쓰였는데 유다에서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유 1:6)”고 썻다.
그러면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높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인가? 요한계시록에 그 대답이 있다. 범죄함으로 하늘에서 추방당한 사단과 그를 따르는 악한 천사들은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내어 쫓기니라”(12:8,9 12,13)
실제로 이 땅은 재림 후 최후의 심판이 집행되기까지 천년 동안 사단이 갇혀 있을 혼돈( 混沌) 상태인 “무저갱”(無底坑)으로도 묘사되었다 (게 20:1 ~ 3). 그러므로 비록 지옥으로 번역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악인이 영원히 불살라지는 그런 뜻의 지옥이 아닌것이 분명하다.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 “지옥”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Gehenna)는 12번 나타나는데 헬라어로는 “게엔나”(geenna)로 불리운다.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된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이다(수 18:16). 12번 가운데 9번은 “지옥”(hell)이란 명사로, 3번은 형용사로 쓰였는데 한번(약 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신 특이한 표현이다. 이 “게헨나”만이 불타고 있는 성경적인 베경의 “지옥”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게헨나”는 어디이며, 타오르는 불은 언제 그리고 언제까지 타오를 불인가?
지옥의 주소로 소개된 “게헨나”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져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때, 이곳에서 자식들을 물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기까지 한(대하 28:1 ~3, 33:1~6: 왕하 23:10)배도의 현장이었다.
예레미야는 이 골짜기를 “살륙의 골짜기”라 칭할 것임을 예고하고, 배도한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쫒을 자가 없을 것”이며 “땅이 황폐하리라고 예언했다”(렘 7:30 ~ 34: 19:2,6: 32:36).
실제로 요시아왕은 그 골짜기를 그렇게 만들었다(왕하 23:10). 후에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 되어, 이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을 곳을 상징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적용하여 당신의 말씀을 한사코 거역하는 바리새인들과 완고한 인간들을 질책하시며, 그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살륙의 골짜기” 곧 “게헨나”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막 9:43 ~47).
그러므로 예수께서 묘사하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이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막 9:43,48) 지옥불은 곧 “힌놈의 골짜기”의 쓰레기와 시체를 태우는 불이었다.
이 “게헨나”가 신약성경에는 모두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다(마 5:22 29,30: 10:28 : 23:33). 그러나 이러한 지옥은 사람이 죽은 뒤 몸을 떠난 영혼이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곳으로 표현된 경우는 한번도 없고, 장차 있을 재림과 연관된 심판의 때에(마 5:22: 25:41), 몸이 함께 사루어 없어질 곳으로 분명히 언급되었다(마 10:28: 5:29,30).
그 때와 장소는 앞에서 밝힌 대로 예수재림이 있은지 천년 후에 불못으로 화할이 땅인 것이다(계20:7~10,13,14 : 벧후 3:10 ~13).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구약의 “스올”(65번), 신약의 “하데스”(11번), “타르타루스”(1번), “게헨나(12 번) 등 사람이 죽은 뒤 가는 곳으로 언급된 표현이 80번이나 나오지만 어느 한곳도 죽은 뒤 몸을 떠난 영혼이 가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곳으로 소개된 곳은 없다. 단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를 태우는 불이 밤낮 타오르던 “힌놈의 공짜기”를 뜻하는 “게헨나”를 연상하여, 신약 성경은 마지막 심판날에 악인을 태울 불을 “영원한 불”(마 25:41)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의 힌놈의 골짜기의 쓰레기는 모두 타버렸거나 지워지고, 시체들도 모두 썩어버려서 지옥을 상징했던 그 “게헨나”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더 이상 불도 타오르지 않고 벌레도 득실 거리지 않는 아름다운 성지의 일부가 되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이러한 “힌놈의 골짜기”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깨닫지 못하고, 이상과 같은 성경의 표현을 악인이 지옥불에서 당하는 고통은 영원하다는 영원지옥설(永遠地獄設)의 논거로 삼는 것은 학문적으로 신중하지 못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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