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유도 천재’ 전기영
‘유도 천재’ 전기영
‘효자종목’ 유도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선수는 많다. 하지만 ‘유도 천재’ 전기영(39)은 좀 더 특별하다. 유도계에서는 그를 가리켜 “허점이 없다.”, “힘이 있으면서도 유연하다.”, “아는 기술이 정말 많다.” 등 찬사를 쏟아낸다.
전기영은 부드러우면서도 위협적이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 금메달, 세계선수권 3연패 및 2체급 석권(1993년 캐나다 해밀턴 -78㎏급, 1995년 일본 지바 -86㎏급, 1997년 프랑스 파리 -86㎏급), 1995년 뉴델리아시아선수권대회 금메달, 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오픈까지 굵직한 대회를 석권했다. 세계선수권을 입맛대로 주무르면서도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빠져 그랜드슬램은 달성하지 못했다. 양궁, 태권도 못지 않게 유도도 집안싸움이 험난해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번번이 주저앉은 까닭이다.
그래도 전기영이 세계 최고였다는 사실, ‘업어치기의 달인’이었다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 전기영의 맞수였던 윤동식은 “(전기영은) 몸 전체 관절이 유연하다. 거기에 탄력까지 가지고 있다. 업어치기를 하는데, 상대가 방어하거나 각도가 안 나와도 각도 파고 들어와 튕겨낸다.”고 혀를 내둘렀다. 경기대 출신인 그가 2005년 비용인대 출신으로는 처음 유도관련 학과 교수로 임용됐다는 것만으로도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씨름꾼 할아버지-유도선수 아버지
전기영이 청주 교동초 5학년 때의 일이다. 같은 반 유도부 친구와 시비 끝에 한바탕 치고 받았는데, 한 학년 위인 그 녀석 형이 찾아와 수모를 줬다. 속이 팔팔 끓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 형도 유도부원이었다. 전기영은 어린 마음에 ‘유도 하면 강해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선수들이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접은 도복을 검정 띠로 묶어 어깨에 메고 다니는 모습이 마냥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업어치기의 달인 전기영 (현 용인대 교수)
6학년 때 유도부를 찾아가 기어이 도복을 입었다. 낙법을 배우고, 업어치기도 배웠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말에 혹했다. 마르고 작은 체구라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그래서 유독 업어치기 훈련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만날 오른쪽으로만 하다 보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에게 왼쪽으로 해도 되는지 물었더니 응용력 있다며 칭찬하셨다. 오른손잡이였지만 훈련의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그날부터 왼쪽 업어치기를 연마했다. 하다 보니 왼쪽이 더 편해졌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선생님이 진지하게 유도를 권했다. 소질이 있으니 중학교 가서 제대로 해 보라고. 며칠 후 어머니와 마주 앉은 선생님은 재주와 가능성을 얘기했고, 유도 하면 수업료도 면제된다는 비장의 무기로 쐐기를 박았다. 형편이 어려울 때라 어머니에게 그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두 딸 끝에 얻은 외아들의 고된 운동을 반대하기는커녕 되레 좀 해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수업료 면제 얘기로 아주 간단히 결론 났다.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청주 유도는 교동초→대성중→청석고로 하나의 큰 흐름이 형성돼 있었다. 유도하기로 결정한 이상 대성중으로의 진학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 무렵 집안 내력에 대해 듣게 됐다.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이름깨나 날린 씨름꾼이었고, 아버지도 학창시절 씨름과 유도선수로 활동했다고. 아버지는 184㎝에 105㎏의 거구였다. 그 연령대에서는 흔치 않은 몸집이었다. 아버지는 씨름을 하던 중학교 때 지고 들어오면 할아버지한테 새벽까지 무릎 꿇고 앉아 야단맞을 정도로 엄하게 운동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단다.
선배를 매트에 내다 꽂으니
전기영은 중1 때 처음으로 도 대회에 나서 첫 판에 떨어졌다. 그런데 감독은 “물건 하나 들어왔다.”며 기뻐했다. 다들 영문을 몰라 눈만 꿈뻑거렸다. 지긴 했지만 쉴 새 없이 공격을 가하고 왼쪽 업어치기까지 구사하는 모습을 보고 그랬나 짐작할 뿐이다.
처음 나선 전국대회에선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개회식 도중 기절했다. 푯말을 들고 맨 앞에 서 있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손발가락 스무 개를 다 딴 후에야 깨어났다. 그러고 경기에 나섰으니 첫 판에 또 날아갔다. 2학년 말부터 업어치기의 위력을 떨치기 시작했고, 3학년이 되면서 매트를 평정했다. 소년체전을 시작으로 회장기 대회와 추계연맹전까지 석권했다.
청석고 1학년 때는 모든 경기를 3학년 선배에게 양보했다.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따야 대학에 갈 수 있었기에 선배의 진학을 위해 희생한 것. 그 때는 어느 학교나 다 그랬다. 2학년 때인 1990년 전국체전은 청주에서 열렸다. 안방 대회인 만큼 최대한 성적을 내야 한다는 긴장감 속에서도 종래의 ‘양보 분위기’는 여전했다. 하필 유도부에서 가장 친한 선배가 전기영과 같은 71㎏급이었다. 그 선배는 메달 하나 벌어 놓은 게 없어 전국체전이 마지막 무대였지만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했다. 그래도 양보는 해야 했다.
그런데 반전. “충북 예선에서 그 선배와 붙었어요. 그 선배의 진학을 위해 져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들어갔죠. 그런데 도복 깃을 잡는 순간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예요. 머리는 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데 몸은 이미 기술을 걸고 있더라고요. 보기 좋게 한판으로 메다꽂았죠. 그 사건으로 학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습니다.”
유도부는 위계질서가 강해 연습 때도 선배를 함부로 넘기지 못하는데 선배의 장래가 걸린 절체절명의 무대에서 처참하게 처박았으니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은 숨통을 조였고, 동기들도 잘난 척한다며 어울리기를 꺼렸다. 그 선배와의 관계에 금이 간 건 물론이었다. 다행히 그 선배가 본선 무제한급에 나가 한 게임 이기고 동메달을 따는 바람에 대학도 가고 묵은 감정도 풀렸다고. “정말 마음고생 많이 했습니다. 저는 그 전국체전을 시작으로 3학년 때까지 6관왕을 달성했죠. 금메달이 급했던 선생님들은 속으로 제가 체전에 나가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세계선수권 최연소 금메달
요시다 히데히코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78㎏급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 유도의 간판스타다. 전기영이 그를 처음 만난 건 1993년 캐나다 해밀턴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서였다. “딱 서니까 머리 반 개는 더 있고, 덩치도 저보다 훨씬 커 보이더라고요. 같은 체급의 상대가 그렇게 보인다는 건 위압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죠. 그 해 초 파리오픈 우승이 유일한 세계대회 성적이었던 제게는 긴장감을 주고도 남는 존재였어요.”
그러나 막상 깃을 잡아보니 움직임이 영 아니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거침없이 몰아붙였고, 지도 하나를 빼앗았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종료 20여 초를 남기고 왼쪽 업어치기로 요시다의 품을 파고들어 기어이 절반을 뽑아냈다. 한국의 세계선수권대회 최연소 금메달이었다.
먹성은 왕성하고 체중 감량은 갈수록 힘들어 1995년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대회에는 86㎏급으로 한 체급을 올렸다. 요시다도 같은 체급으로 나왔다. 이번에도 결승에서 만났다. 일본에서 벌이는 일본 영웅과의 결승전은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잡아 보니 2년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요시다의 맹공에 고전하다 종료 2분을 남기고 승부수를 띄웠다. 양 소매를 잡고 시도한 소매 업어치기에 이어 변칙 기술 소매 밭다리걸기로 요시다를 보기 좋게 쓰러뜨렸다. 한판이었다.
금메달 0순위
1996년 2월 파리오픈에서 우승하며 곧 있을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희망을 부풀렸다. 모든 관계자들이 ‘금메달 0순위’라고 입을 모았다. 곧바로 오스트리아오픈에 출전해 또 우승했다. 특히 그해 유럽선수권자인 네덜란드 마크 후이징가와의 경기에선 효과-유효-절반을 차례로 따낸 데 이어 한판으로 게임을 마무리, ‘사이클링 포인트’까지 기록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 금메달
일주일 후 독일오픈에서 또 후이징가와 만났다. 힘 빼지 말고 가볍게 끝내자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깃을 잡는 순간 느낌이 확 달랐다. 전기영은 공격 한 번 못 들어간 채 지도 하나 받고 졌다. 그 어떤 기술도 먹히지 않았다. 큰 키에 힘이 좋고 변칙기술에 능한 강적이었다.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저 자신한테 너무도 실망스러워 어금니 물고 다짐했죠. ‘자만은 금물이다. 지도자가 되어서도 잊지 말자’고요.”
애틀랜타의 하룻밤은 1년보다 길었다. 후이징가와 또 만날까 두렵고 불안해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전기영은 ‘후이징가만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대진 추첨하러 간 감독이 얼마 후 흙빛이 돼 돌아왔다. 하필 후이징가와 첫 판에 붙게 된 것.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속이 타는 게 아주 미치겠더라고요. 이미지 트레이닝도 해야 하고, 상대 분석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얬습니다.”
전기영은 새벽녘에 두 시간 눈 붙이고 매트에 올랐다. 사람들이 금세 눈치챌 정도로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좀처럼 쓰지 않는 조르기를 시도하는가 하면, 주특기인 업어치기 대신 다양한 기술로 상대방을 위협했다. 전기영은 안뒤축걸기로 먼저 유효를 따냈지만 유럽의 강호는 안다리걸기로 다시 유효를 빼앗았다. 아찔한 랠리가 이어져 보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길고도 짧은 5분의 경기가 동점으로 끝났고 전기영은 판정에서 3-0으로 이겨 고비를 넘겼다.
험한 첫 고비를 넘고 나자 결승가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2, 3라운드와 준결승을 잇달아 한판승으로 거침없이 메쳤다. 결승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아르멘 바그다사로프를 만났다. 전기영은 경기 시작 20초 만에 절반을 따내며 기선을 제압했고, 이어 주특기인 업어치기로 유효를 추가했다. 종료 57초 전에는 화려한 업어치기로 한판승을 따내며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걸었다. 화끈한 포효. 금메달은 물론, 그를 짓누르던 중압감에서 해방된 순간이었다. 후이징가는 첫 판에서 지고도 패자부활전 끝에 동메달을 따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90㎏급에서 기어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화려한 선수생활을 마친 전기영은 1999년 한국마사회에서 은퇴한 뒤 학업에 힘썼다. 2003년 경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5년에는 용인대 유도학과에 교수로 임용됐다. 그 해 카이로 세계선수권부터 국가대표 코치를 맡아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금빛 도우미’로 맹활약했다. 세계 각국 유도선수들의 정보를 분석한 체육과학연구소의 ‘탈란투라 시스템’의 개발 및 연구에도 참여했다. 기껏해야 비디오를 수십 번 돌려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 유도 선수들에게 새로운 힘을 제공하는데 공헌했다. 2012년 초에는 싱가포르로 연수를 떠나 국가대표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