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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캠핑하는 사람들 Camping People 원문보기 글쓴이: 동키호떡
이번주도 방콕에 치를 떨었다. 아~~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흑흑~~
오래전...'신비의 섬, 캠도(島)를 찾아서'...를 집필한 적이 있다.
에효~~캠핑도 못가던 차에...
방바닥 긁어가며, 캠도(島)의 이장님들을 한번 정리해봤다. 그럼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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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캠도(島)를 찾아서...
캠도(島)의 지도자
캠도의 행정구역은 “보네이道 갤럭市 장터사기郡 컵라面 센츄里”이다. 그럼 지금까지 건국후 캠도를 통치하셨던 센츄里 이장(里長)님들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 보기로 하자.
오래전 캠도(島)는 과거 불행하게도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다. 세계 2차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패하자 캠도(島)는 독립을 하게 된다.
캠도의 초대 이장은 이승만(1~3대)이장이였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이하면서 이승만은 귀국한다. 김구와 중경 임시정부사람들은 그 이후 귀국길에 올랐다.
원래 김구와 이승만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귀국 초기에는 순탄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남한 단독정부 구성문제를 두고 이견을 빚었다. 여론은 이승만 편이었다.
당시 우리 캠도시민은 이승만을 '대표적 혁명가'도 '양심적인 지도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장으로 적합한 인물’은 이승만을 1위로 꼽았다.
1948년 7월 이승만은 김구를 누르고 캠도 초대 이장에 당선된다. 이후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사임할 때까지 계속해 2,3대 이장을 지냈다. 이장직 사임후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1965년 7월 숨진다.
이승만의 반대편에는 항상 김구...이 분이 계신다. 우리 세대에게 이승만은 악(惡)이고 김구는 늘 선(善)이다. 그러나 건국에 대한 비전은 김구보다 이승만이 한 발 앞서 있었던 건 아닐까?
역사에 대한 판단은 남은 자의 몫...슬픈 역사를 다룬 슬픈 다큐멘터리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이장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한 제4대 이장으로 윤보선(4대)이장이 선출된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1962년 사임하고, 다음 해에 민정당을 창당하여 박정희에 맞서 이장선거에 나섰으나 실패한다.
이에 그는 민중당 및 신한당을 잇따라 창당하며 1967년 이장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와 복수전을 치렀으나 또한번의 고배를 마신다.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에 재직중이던 박정희(5~9대)소장은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캠도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등의 혁명공약을 내걸고 청년장교들과 함께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같은 해 7월 군사정변의 최고권력기관으로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장악한 캠도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으며, 1962년 3월 윤보선이장의 사임으로 그때부터 이장 권한대행도 함께 맡았다.
군정기간 동안 그의 주장대로 이루지 못한 5·16군사정변의 이념을 민간인 신분으로 실천하고자 1963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고,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정치생활이 시작되었다.
1963년 10월15일 제5대 이장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642표(유효투표의 46.65%)를 얻어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같은 해 12월 이장에 취임했다. 이 이장선거에서 상대후보인 윤보선이 자신의 유세내용 가운데 박정희의 과거 공산주의와의 관련사실을 폭로해 선거에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캠도시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자확보를 위해 한일협정에 정식 조인하고 한일간에 국교를 정상화시켰으며, 베트남 전쟁파병을 단행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매국이라는 비난을, 베트남 전쟁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았다는 비난까지 받았으나,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성과는 '보릿고개'라는 고질적 춘궁기로 상징되는 이 절대빈곤을 극복한 것으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제3공화국 기간 동안 수출주도의 고도성장 및 경제개발5개년 계획, 사회간접자본인 산업기지건설 등을 이룩해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토대를 구축했다.
이러한 정책 이행을 통해 캠도시민들의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던 그는 1967년 7월 제6대 이장 재선에 이어 1969년 10월 17일 3선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모색했다.
3선개헌에 의해 1971년 7월 제7대 이장에 당선되자 마침내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이장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해 제8대 이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유신시대'라 불리는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는 장기집권의 유신시대에 국민의 의식을 한데 모으기 위해 ‘새마을운동'이라는 일대 개혁적인 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간주도가 아닌 관주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았다.
결국 유신시대를 통해 절대빈곤은 해결되었지만 날로 심화되어 가는 상대적 빈부의 격차와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 및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캠도 시민의 지지가 약화되자 ‘긴급조치’ 발동으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그러다 유신체제에 항거한 1979년 '부마사태'에 직면해 오히려 측근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다.
1979년 10월26일 사석에서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싼 이장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의 언쟁 도중 그는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사망했다.
아래 사진은 박정희 이장의 캠핑모습이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이장이 피살되자 최규하(10대)는 부이장으로서 이장권한대행이 되었고,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이장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이장이 되었다. 1980년 5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고, 그해 8월16일 이장에 당선된 지 8개월여 만에 전두환장군의 신군부측 압력으로 이장직을 사임했다.
캠도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이장이 된 첫번째 사람이었다.
2006년 10월 노환으로 별세했고 1979년 10·26사태 이후부터 1980년 8월16일 이장직을 사임할 때까지의 역사적 격동기를 이끌었던 그는 당시의 진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역사의 무대를 떠났다.
한편 1979년 박정희 이장 시해사건인 10·26사태를 계기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전두환(11,12대)은 10·26사태 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이장시해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았고 11월6일 사건전모를 발표하면서 시민앞에 나타났다.
1979년 12월12일 합동수사본부 소속의 허삼수·우경윤 대령에게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강제연행과정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권력 공백기에 실권을 장악하였다. 바로 12․12사태다.
1980년 5월17일 저녁 제42회 임시국무회의에서는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확대선포안이 찬반토론 없이 가결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는 조치와 함께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였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후 이장자문 및 보좌기구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를 신설하고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 8월16일 최규하 이장이 군부의 강압에 의해 사임하고 이로부터 6일이 지난 8월22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대장으로 진급한지 불과 17일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8월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제7차 회의에서 이장선거 단일후보로 나서 2,524표를 얻어 99.9%의 득표율로 제11대 이장에 당선되었다.
1981년 1월15일 창당된 민주정의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25일 이장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이장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 선거에서 총선거인 5,277명 가운데 5,271명이 투표에 참가하였고 투표자의 90.2%를 얻어 임기 7년의 제12대 이장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12·12사태로부터 15개월 여만에 군사쿠데타에 의한 정권장악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1983년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고 10월8일에는 동남아·대양주 6개국 순방을 위해 출국하였다. 그러나 이튿날인 10월9일 첫 방문국인 미얀마 랑군 시내의 아웅산묘소에서 북한에 의한 폭탄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도열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등 수행원 17명이 순직하는 사태가 벌어져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대외관계와 대북관계 및 스포츠외교 분야에서 다소 진전된 모습을 보였으며, 경제부문에서도 3저호황에 힘입어 물가안정·수출신장·대외무역 흑자를 기록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내적으로는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으며 인권을 유린하는 등 군사독재정치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7년간의 이장임기 가운데 마지막 1년 여를 남겨 놓고 있던 1987년 4월13일, 이장 직선제를 포함한 캠도시민들의 개헌요구와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의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고 이를 위한 이장선거를 연내에 실시한다는 내용의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정치사의 커다란 분기점인 ‘6월 민주화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때였던 1987년 6월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를 이장후보로 지명하여 차기 이장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거센 직선제 개헌요구에 굴복하여 6월24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청와대 회담을 통해 개헌논의를 즉각 재개키로 하였다.
이에 따라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포함한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29선언'을 발표하자 7월1일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6·29선언을 전폭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장직에서 물러난 후 국가원로자문회의와 일해재단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나 5공 군부와 6공 군부 간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1988년 4월13일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에서 사퇴하였다.
제6공화국 초기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청문회가 진행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제5공화국 권력비리에 대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을 요구하는 전국민적인 요구에 직면하였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11월23일 대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헌납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은둔하였다가 2년1개월 만인 1990년 12월30일 하산하였다. 백담사에 은둔 중이던 1989년 12월31일에는 국회의 줄기찬 요구에 의해 국회 5공특위·광주특위 연석회의에 출석하여 125개 항목에 걸친 서면질문에 관해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부 출범 후 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수천억원에 이르는 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구속수감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제15대 이장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실현되면서, 나흘 뒤인 12월22일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1979년 당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12·12사태를 계기로 군 지휘권을 장악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노태우(13대)는 12·12사태 직후인 12월13일 육군의 핵심부대인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군사쿠데타 성공으로 1980년 8월27일 전두환이 제11대 이장에 당선되자 국군보안사령관직을 1년간 맡다가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1987년 6월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차기 이장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전두환 이장의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이장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는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자 6월29일 이장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다가오는 제13대 이장선거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87년 12월16일 캠도시민의 직접투표에 의한 이장선거가 16년만에 실시되었으며 노태우 후보는 36.6%의 득표율로 28.0%를 얻어 2위를 기록한 김영삼 후보를 8.6% 차이로 누르고 이장에 당선되어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88년 4월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여 민주정의당 중심의 정국운영이 어렵게 되어 1990년 1월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3당합당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2월9일 민주자유당이 공식 출범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는 순식간에 216석의 거대여당과 왜소한 야당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1992년 12월18일 이장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42.0%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2월25일 제14대 이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당시 부각되었던 수천억원 규모의 이장비자금 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95년 11월1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1997년 4월17일 12·12사태와 5·18사건 및 이장비자금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7년 12월18일 제15대 이장선거 직후 김영삼(14대) 정부의 특별사면조치에 의해 전두환 전이장과 함께 석방되었다.
14대 이장인 김영삼(14대)은 1980년 이후 전두환 정부에 의해 2년 동안 가택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하였다. 1983년 5월18일~6월9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 5공화국 하에서 민주화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신한당을 와해시켰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13대 이장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바로 3당 합당이 이것이다.
결국 1992년 12월14대 이장선거에서 당선, 1993년 2월 취임함으로써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1983년 5·18 광주항쟁 3주년 기념식 때, 전두환 정권의 정치탄압에 맞서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던 중 몰래 보름달빵과 우유를 먹다가 문익환목사에게 들켜 사이가 틀어졌다는 루머가 돌면서 비판이 일기도 했다. 혹자들은 '빵삼이'라는 애칭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90년 민주정의당과의 3당 합당, 재임 말년에 발생한 차남 김현철 등과 측근들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사건, IMF 구제금융사건 초래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요정출신 이모씨와의 사이에 숨겨둔 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또한 전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말년에 김영삼이 이회창을 공천해 놓고는 자기아들(김현철)을 2인자로 만들려고 이인제를 밀었다며 정치하는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법이며, 정치 도의도 없고 신의도 없다며 비난하였다.
캠도 15대 이장은 김대중(15대)이다. 1956년 9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장면과 인연을 맺은 그는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장면 전 총리를 대부로 삼고 노기남(당시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집무실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는다.
이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연거푸 두 차례(4대, 5대)의 낙선을 맛보았고, 조강지처인 차용애의 사망(음독자살)으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1970년에 치러진 신민당내 이장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과 제휴해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를 얻어 역전승, 이장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1년 4월27일, 제7대 이장선거에 출마했지만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으나 당시 정치환경으로 볼 때 대단한 선전이었다.
대선 후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에게 박정희는 위기감을 느꼈다. 선거 얼마 뒤에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고, 골반 부위를 다쳐 다리를 절게 됐다.
이후 1971년 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에 일본에 체류하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하여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하였다.
1973년 8월8일 그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일본 경찰청은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 등을 채취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김 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활동면책, 김종필 당시 총리의 사과방일 등을 약속 받고 물러섰다. 도쿄에서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하면서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이후 1979년 4월4일에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하여 공동의장으로 반독재투쟁에 앞장, 3차례 연행당하였다.
1979년 12월8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 당하여 사망한 후 10.26 사태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가택연금에서 해제 되었다.
1980년 신군부시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세계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인 1981년 1월23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에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대중이 무기 징역으로 감형받는 데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1980년 12월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이장에게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이후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1985년 2월8일 귀국하였다. 당시 김대중의 귀국 결정에 대해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을 강행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중이던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그래도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암살을 우려한 미국 하원 의원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김대중을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한 덕분에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통일민주당을 탈당, 11월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이장후보로 선출된 이후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987년 12월16일 제13대 이장선거에 출마했지만,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1990년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 때 3당 야합 반대투쟁을 선언하며 규탄하였다. 1991년 4월15일에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재창당한 뒤 총재에 취임했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어 1992년 5월15일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이장후보로 지명되어 12월18일 제14대 이장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804만 표를 얻었으나 190만여표 차로 낙선하였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19일에 정계 은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3당통합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김영삼 정부의 철학과 비전의 부족은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수월하게 하여, 정계 은퇴를 번복하게 된다. 하여 1995년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후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997년 12월18일 제15대 이장선거에 출마해 1033만 표를 획득해 이회창을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장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2009년 7월13일, 흡인성 폐렴증세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18일 오후1시43분 1달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장기부전으로 사망하였다.
제16대 이장 노무현(16대)은 8·15해방 이듬해에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뼈저린 가난은 향학열을 자극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에 일찌감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가정교육을 통해 불의에 대한 저항감을 물려받았다.
고시 준비생 시절 사상범 권오석의 딸 권양숙과 결혼(1973)했으며,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이듬해에 법복을 벗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반정부세력 소탕작전에 따라 부산지역의 민주인사 22명이 무더기로 구속된 이른바 부림사건(釜林事件)은 노무현이라는 열정적인 인권변호사의 출현을 알렸다. 약 3개월간의 구금과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학생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치열한 시대정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6월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같은 해 8월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평화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 사건을 수습하다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듬해(1988)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제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박해받는 노동자·농민·도시영세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낙선을 우려해 맞대결을 기피하던 신군부 실세 허삼수 민정당 후보의 대항마를 자청해 부산 동구에 출마, 승리 함으로써 화려한 정계 입문 의식을 치렀다.
이어 같은 해 11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회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이종원 전 법무장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이들의 습관성 '기억상실증'과 위증발뺌에 쐐기를 박으며 궁지에 몰아넣어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1990년 1월 노태우 이장의 집권 민정당, 김영삼의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간의 이른바 '3당합당'은 여소야대의 민주화 국면을 일거에 뒤집고 국민을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2개의 국민'으로 갈라놓았다.
그는 이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부산·경남의 정치적 맹주인 김영삼과 결별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허삼수 민자당 후보와 재대결했으나 강한 지역감정에 밀려 재선에 실패했다. 그의 패배는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그의 좌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14대 이장선거(1992)에서 김영삼 집권 민자당 후보에게 패한 뒤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이 지방의회 선거 직후인 1995년 9월 정계에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이를 야권분열로 규정하고 김대중과 결별했다. 보스 중심의 줄서기와 이합집산을 거부한 결과 그는 이듬해 제15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1997)를 앞두고 자신이 속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구성원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를 이끌었다.
평생의 꿈인 동서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제16대 총선(2000)에서 부산 북-강서 을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를 계기로 최초의 정치인 팬 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되었다. 이후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2000.8~2001.3)을 역임하였으며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집권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권에 복귀해 제16대 이장선거 후보경선에 나섰다.
2001년 9월 그는 집권 민주당의 이장후보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자금도 계파도 조직도 없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라는 대중적 평판 뿐이었다.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 경선제는 당원 외에도 일반 국민이 집권당의 이장후보 선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지금까지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국민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모았다.
특히 영남 출신인 그의 광주 경선 1위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며 동서통합의 가능성을 알렸다. 이후 이른바 '노풍'(盧風)은 대선 정국을 이해하는 핵심어가 되었다. 그러나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 상임고문을 중심으로 한 당내 반대세력의 집요한 재경선·후보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또한 당권파는 당권파대로 그의 대안으로 정몽준 의원을 내세우기 위해 신당 창당도 불사하겠다고 그를 압박했다. 이어 9월 중순 정몽준 의원의 이장선거 출마선언을 계기로 그는 후보단일화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그 사이에 여론조사 지지율은 3위로 떨어졌다.
11월초 그는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에게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잇달아 제의하면서 대역전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11월 중순 정몽준 후보와 정책 중심의 텔레비전 토론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방식의 후보단일화 원칙에 전격 합의한 데 이어 여론조사 설문 내용을 둘러싸고 양당간의 단일화 협상이 난항을 겪자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전격 수용했으며, 11월말 후보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승리했다.
그 결과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단숨에 앞질러 선거 막판까지 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장선거 전날 저녁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갑작스러운 지지 철회가 있었지만...그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마침내 12월 그는 민주당 후보경선 승리, 후보직 사퇴위기, 야권 후보단일화를 통한 극적반전 끝에 유효표의 48.9%를 얻어 46.6% 득표율에 그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6대 이장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많은 국민들에게 건국 이래 50여 년 간 이어온 보수독점 정치에 대한 국민참여형 새 정치의 승리, 사대외교에 대한 자주외교의 승리,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서민대중의 승리, 흑색선전·폭로전에 대한 정책선거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7만 명에 이르는 '노사모'의 자원봉사, 미디어·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표상되는 국민의 자발적 후원금 등 그가 선보인 선거운동은 자금과 조직, 지역주의라는 낡은 방식에 의존한 이회창 후보의 선거운동과 크게 대비되었다.
그러던 2004년 3월12일 노무현은 이장으로서 캠도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했다. 노무현은 이장 당선 이후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계속 갈등을 빚어왔는데, 두 정당은 3월9일 측근비리, 경제파탄, 선거법위반 등의 사유로 이장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결국 3월12일 열린우리당의 물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이장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그러자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촛불시위와 시민단체들의 탄핵철회운동이 거세지면서 전국이 탄핵사태로 들끓었다.
이러한 전국민적인 분노의 결과는 4월15일 제17대 총선에서 나타났다. 노무현을 지지하며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해온 열린우리당이 결국 원내과반수를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또한 5월14일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어 노무현은 다시 이장의 권한을 회복했다.
노무현은 비록 이장탄핵사태에 휘말렸지만 결국 이장의 권한도 회복하고, 그를 지지하는 열린우리당도 압승하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은 결과가 되었다.
이후 그는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언론관계법·과거사진상규명법 실시, 부동산 가격안정을 위한 부동산세 신설, 미국으로부터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의 개혁 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숨가뿐 개혁정책은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잇따른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치솟자 서민들마저 등을 돌려 지지율은 더 떨어졌다.
그 결과 여권인 열린우리당은 재·보선 패배에 이어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에 참패하였다. 2007년 이후 열린우리당은 민심을 이유로 그에게 등을 돌린 국회의원들의 탈당으로 2007년 8월 결국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함으로써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그의 정치실험의 동력도 사라지고 말았다.
2008년 2월25일 노무현은 제17대 이명박 이장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한국고속철도(KTX)를 타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함으로써,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이장이라는 타이틀을 또 얻었다.
귀향 후 마을 주변 하천에서 직접 쓰레기를 줍고 습지인 화포천 환경정화 활동을 벌이면서 봉하마을의 주변 환경개선에 주력하였다.
특히 그와 봉하마을 주민들이 작목반을 구성해서 재배한 노무현표 '봉하오리쌀'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불티나게 팔렸다.
이와 같은 활동 덕분에 그는 봉하마을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 되었는데, 실제로 봉하마을은 하루 최고 1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김해 지역에서는 최고 관광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국가기록물 유출 논란'으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형 노건평이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고, 안희정·이광재·서갑원 등 그가 '동지'라며 애정을 보였던 386 측근들과 박정규 전민정수석 등 참모들이 비리혐의로 수감되었다.
또한 부인 권양숙과 아들 노건호가 30년 정치인생의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뇌물 비리사건과 관련하여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그 자신도 검찰에 출두함으로써 역대 전직 이장으로서는 전두환·노태우 전(前) 이장에 이어 3번째로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은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런후...
2009년 5월 23일 새벽 컴퓨터에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서거 이후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봉하마을에는 수많은 추모객들이 방문하였고, 전국적으로도 시민들이 직접 설치한 분향소를 포함하여 수백 곳의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국민장 7일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서울 경복궁에서 영결식이 진행되었고,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이 준비한 노제가 열렸다. 유언대로 그는 화장되어 봉하마을에 안치되었다.
캠도 18대 이장은 첫여성 이장 서혜림(18대)이다. 서혜림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종전의 카리스마를 잃어버린 채 당지도부의 앵무새 노릇을 하던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야심을 위해 서혜림에게 탈당을 제안했던 강태산의원의 번복에 서혜림은 혼자서라도 탈당을 하겠다고 나서며“하루아침에 자기 소신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게 우리 정치가 추구하는 비전이고 가치냐, 강의원님은 개인적인 야심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펼치려는 게 아니냐”며 흑막정치와 다시 거래를 한 강태산의원과 같은 길을 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민우당을 떠난 혜림은 남송 해송 간척지개발 사업의 특혜비리를 막기 위해 남해도지사 선거에 출마에 나사며 남해도지사가 된다.
이어서 서혜림은 대권에 도전해 고군분투 끝에 국민을 살리겠다는 정치 신념으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민우당의 강태산의 벽은 너무 높았다.
복지당의 민동포는 혜림에게 "야당이 강태산을 이길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며 야권단일화를 제안해왔다. 고민하던 혜림은 "적어도 밀실정치, 금권정치로 국민을 우롱하는 사람이 이장이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며 제안을 수용했다.
이는 강태산의 지지율이 30%를 넘는 상황에서 서혜림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2차 TV토론회 후 혜림의 지지율은 급상승했고 국민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혜림이 단일후보로 선정됐다. 이로써 대권전쟁은 태산, 혜림, 민동포의 삼파전에서 태산과 혜림의 이파전으로 좁혀진 상황이 되었다.
민동포의 지지율을 흡수한 혜림은 처음으로 30%이상의 지지율을 확보하며 태산을 압박해갔다. 이에 긴장한 민우당 중진들은 태산 몰래 혜림과 하도야의 열애 스캔들을 터트렸고 여론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혜림은 여느 정치인들처럼 거짓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특유의 진솔한 성격 그대로 맞섰다. 유세장에 나선 혜림은 "얼마 전에 한사람한테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하지만 지금은 한 남자가 아닌 캠도국민의 연인이 되고 싶다. 제 프로포즈를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이같은 혜림의 솔직한 발언은 젊은 유권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고, 그녀의 지지율은 더욱 상승하며 그야말로 태산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하지만 강태산과 모종의 밀약을 맺은 민동포는 투표 하루 전날 혜림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강태산에게 대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맞은 선거일에 오재봉의원은 개표도 시작되기 전부터 ‘축, 강태산 이장 당선’이라고 적힌 화환을 당 사무실에 들여놓고 샴페인까지 준비하는 등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개표 방송이 시작되자 강태산 48%, 서혜림 45%라는 출구조사 결과가 보도되었으나 개표율이 50%에 이른 시점에서 둘의 차이는 3%까지 줄어들고 이후 개표율 70% 상황에서 이 격차가 1%까지 좁아졌다.
그리고 서혜림이 도지사로 있던 남해도 개표가 본격화되면서 서혜림의 득표율이 눈에 띄게 상승했고, 개표 90% 상황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서혜림의 당선이 확실시 됐다. 민동포의 지지 철회가 역풍으로 작용하면서 결국 서혜림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이장에 당선됐다.
당선이 확정되자 서혜림은 “이번 선거의 승리는 저 서혜림의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 정치를 바꾸겠다는 국민 여러분의 소신과 양심이 승리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쁨의 눈물을 터트렸다.
이와 반대로 강태산은 “오늘 국민 여러분들의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서혜림 당선자가 국정을 잘 이끌어 줄거라 믿는다.”며 고개를 숙였다.
취임사에서 서혜림은 "국정이라는 중책을 맡아 가슴 벅차고 두렵다"면서"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책을 펼 것"이라며 "제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여러분께서 회초리를 들어 달라"며 국민의 연인다운 연설로 관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이상이다.
작은 섬...캠도(島)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강물이 흘러가 듯 역사는 흐른다. 영원토록 굽이쳐 도도히 흐를 것이다.
『상기자료 모두는 인터넷 다음과 네이버의 인물백과사전 자료만을 참조하였습니다. 뭐~그냥...캠도(島) 이장님들을 한번 정리하고 싶었고...아이들에게 ‘캠도 지도자중엔 이런 이런 분들이 계셨다’라고 얘기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뭐 그런 생각에서죠. 혹여 이념적으로 불편하신 분,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