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화랑세기》... <10>진지왕이 폐위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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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79년. 당대의 여걸 사도(思道)태후는 아들 진지왕의 엽색행각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큰 아들 동륜(銅輪)태자가 7년전인 572년 3월에 비명횡사하자 둘째아들인 금륜(金輪·또는 사륜(舍輪)으로도 부름)이 576년 신라 제25대 왕에 올랐다. 금륜은 왕위에 오르기전 흔히 태자들이 그러했던것과는 달리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천하의 자유부인 미실의 유혹으로 그녀와 잠시 관계를 한 정도였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금륜은 왕이 되자마자 여자들을 밤낮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왕의 엽색행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진지왕의 할아버지인 법흥왕은 보도부인 벽화후 오도부인 옥진궁주 금진부인 등 많은 여자를 거느렸고 아버지인 진흥왕도 씨 다른 형제인 숙명후와잠자리를 했으며 심지어 큰 아들 동륜과 관계하여 임신한 미실을 침실로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아무도 그런 일을 두고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당시에 색공(色供)이라하여 왕에게 여자를 공급하는 제도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진지왕의 여성문제에 대해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는 달랐던 것이다.
진지왕을 왕위에 올린 그의 어머니인 사도태후는 마침내 금륜을 재위 4년만에 왕위에서 끌어내리기에 이른다. 진지왕의 여성편력 문제는 진지왕의폐위원인이 되므로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화랑세기」전편을 통틀어 재위중인 왕을 폐위시키는 일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화랑세기에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그 부분에 보다 상세한 기록을 보인다.
삼국사기 권4, 진지왕조를 보면 금륜이 즉위 4년 7월 17일에 사망해 영경사(永敬寺)북쪽에 장사지냈다고 돼 있다. 권4, 진평왕 원년(579년) 8월에 이찬(신라 관등 17위 가운데 2위)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신라때 17관등을 초월한 최고 관직)으로 삼았다. 즉 삼국사기의 내용은 진지왕이 즉위한지 4년만에 죽어 자연히 동륜태자와 동륜의 고모인 만호부인 사이에서 난백정(白淨)이 579년 26대 진평왕으로 등극한 것으로 돼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또 다르다. 진지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에 정사(政事)가 어지럽고 또 음란한 짓을 많이 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는 것. 권1, 도화녀와 비형랑편을 보면 그는 폐위되자 죽어 귀신인 상태에서 도화녀의 방에 나타나 7일간 머물며 사랑을 나누어 아들 비형(鼻荊)을낳았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처럼 진지왕이 죽었기 때문에 폐위됐거나 폐위직후 바로 죽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화랑세기에선 폐위후 생존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어 흥미를 끈다. 7세 풍월주 설화랑편에 보면 「진지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가 이를 고민하다 오빠인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폐위시키고 노리부공에게 왕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또 13세 풍월주 용춘(龍春)편을 보면 「금륜왕은 음란한행실로 인하여 폐위되어 궁에 갇힌지 3년만에 죽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돼있다.
이처럼 화랑세기에는 진평왕이 즉위할 때까지 노리부공이 왕의 직무를 대행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에 노리부공이 상대등의 직위에 올랐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마 화랑세기에 보이는 것처럼 노리부공이 진지왕을 폐위시킨 공로로 상대등에 임명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여러 사실들을 분석해보면 진지왕은 폐위를 당하기 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폐위되고 3년간 생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 13세 용춘편에 도화녀와의 사이에 낳은 비형도 폐위후에 낳은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당시 역대 왕들의 성도덕을 지금의 잣대로 견주어본다면 문란하기 이를데 없었는데도 유독 진지왕만이 여색문제로 폐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도태후가 머리를 싸맸던 문제도 이것이다.
역사가 이종학(전 공군대학교수)씨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내놓았다.
그는 『해답은 바로 당시 골품제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며 『진골간 남녀의 통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으나 골품이 다른 경우는 용서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다시말해 진지왕 폐위 근본 원인은 왕이 진골이 아닌, 골품이 아래인 여자와 통정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진골이 아닌 도화녀와의 관계가 그 예이며 이는 진지왕의 여성편력중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진지왕의 폐위 원인을 애써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방증 사례가 삼국사기11, 문성왕 7년에 보인다.
문성왕이 청해진대사 궁복(弓福)의 딸을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자 신하들이『궁복은 섬사람인데 어찌 그 딸을 왕실의 배우자로 삼겠습니까』하며 반대하자 왕이 그 말을 따른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왕들이 관계한 많은 여자들은 왕족과 진골신분의 여자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라사회는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임금조차도폐위시켰을 만큼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이 진지왕의 폐위사건에서 읽을 수 있는 또다른 역사적 편린이다. / 조해훈기자 massjo@kookje.co.kr
《신라 궁궐터》
신라시대 왕과 왕족들이 거주하며 신라의 화려한 역사를 이루었던 궁궐터에 현재 남아있는 건조물로는 1741년(영조 17)에 축조한 석빙고(石氷庫) 뿐이다. 그러나 사적 제16호인 이 곳에 대한 학문적 연구조차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등 외면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움을 준다.
이 궁궐은 둘레가 2천4백보로 흙과 돌을 혼합해 남쪽의 남천을 끼고 자연지세를 이용해 축조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이사금 22)에궁성으로 쌓아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왕궁을 옮겼다고 기록돼 있음을 알수 있다. 성안의 면적은 19만8천㎡.
성안에 태후의 궁인 영명궁과 왕태자의 궁인 월지궁 외에 영창궁 동궁 내성 등 여러 궁이 있었고 내황전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전설과 관계가있는 만파식적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또 남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등 여러 궁성문이 있었고 월산루 등을 비롯한 누각과 남당 조원전 등 관청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웅장했던 건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경주시민들의유원지로 전락해 당시의 역사를 상상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