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젓가락 혹은 비녀
안 병 태
조부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지어놓고 기다렸단다. 삼칠일을 넘기자 금줄을 거둔 다음, 손 없는 날을 받아 일족들에게 소연을 베풀고 맏손자의 이름을 공표했다. 밝을 병炳 클 태泰.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고 세상을 크게 밝힐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엄숙한 그 자리에서 나를 안고 어르며, ‘빙태야~’ 하고 개명해버리는 바람에 조부님으로부터 지청구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뱅태’, ‘벙태’, 어떨 땐 ‘명태’,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다. 가장의 포부에 어깃장을 놓는 버릇은 우리 집안 며느리들의 대물림인 모양이다.
세상을 크게 밝히기는커녕, 발표 첫날부터 이름이 크게 수난을 당해 그런지 내 인생은 늘 어수선했다. 당신 손자들은 물론 동네 아이들 이름까지 모조리 바꾼 것을 보면 할머니는 개명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가 보다.
인명뿐이랴. 만인이 ‘라면’이라고 부르건만 할머니는 굳이 ‘나면’이라 개명해 불렀다. 1889년생이니 덕혜옹주보다 23년이나 연장인 할머니가 두음법칙을 어디 가서 배웠단 말인가?
담임선생이 가정방문을 다녀간 이튿날, 자존심이 상한 엄마는 쪽을 찐 머리를 싹둑 자르고, 그래서 소용없어진 비녀까지 팔아 밀린 공납금을 바친 다음 뽀글뽀글 파마를 해버렸다. 그 지경으로 나타난 며느리의 헤어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은 할머니는 ‘나면’을 취소하고 ‘빠마국시’라고 다시 개명했다.
알고 보면 할머니의 개명 특기는 순전히 ‘갱상도 할매’의 복모음 발음 불량으로 인한 취미 생활이요, 기실 주업은 우리 집 손칼국수 요리사였다. 평생 홍두깨를 끼고 살던 할머니는 1963년 우리나라에 라면이 출시되자 그 요리의 간편함과 맛의 오묘함에 매료되어 홍두깨를 던져버렸다. 그러나 SY에서 라면을 너무 늦게 개발했고, 두메산골이라서 출시 정보가 늦은 데다, 가세가 기울어 고난의 행군 중인지라 그 좋은 ‘빠마국시’를 마음껏 들지 못하고 가셨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늘에 실 가듯, 라면을 따라다니는 나무젓가락에 대하여 흉중 심사를 토로한다는 것이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허기를 면키 위해 급하게 라면을 삶을라치면 유독 물이 더디 끓는다. 지루한 막간을 이용해 우선 라면 봉지부터 뜯어놓고 나무젓가락을 쪼갠다. 늘 그렇지만 나무젓가락을 양분할라치면 약간 긴장된다. 양쪽 다리를 잡고 가랑이를 쫙 벌리면 일도양단, 공평하게 갈라질 것인가, 아니면 비대칭으로 쪼개지거나 한쪽 다리가 골절돼 식욕을 감퇴시키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다. 나무젓가락 분리 상태 여하에 식욕이 좌우된다니 아직 배가 덜 고픈 모양이라고 흉을 보지만 그것은 짝짝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어보지 않았으니까 하는 말이다. 슬리퍼와 하이힐을 짝짝이로 신고 걸어보면 알 일이다.
나무젓가락을 쪼개기 시작한 지 어언 60여 성상, 아직껏 나무젓가락을 통쾌하게 양분해본 기억이 드물다. 나무젓가락 제조공장의 기술 수준이 구태의연하거나, 내 분리 기술이 제자리걸음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사 그렇지만 일이 안 풀리려면 징조부터 다른 법이다. 나무젓가락 가랑이를 벌리는 순간 벌써 뭔가 거부하는 느낌이 있고 한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이 전해지면 십중팔구 접합 부분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쪽은 대갈장군이요, 한쪽은 죽창이 되기 일쑤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쪼개지면 불편한 대로 면발은 건져 올리련만, 한쪽 다리가 두 동강 날 경우엔 참으로 난감하다. 어쩌다, 그야말로 어쩌다 파죽지세로 쫙 갈라지면 신통하다 못해 경이롭다. 나무젓가락으로 근정전, 숭례문 미니어처를 제작하는 이도 있건만 한심한 이 손재주여! 그렇다고 젓가락을 항상 휴대하고 다닐 수도 없다. 옛날 조부님은 칼집에 은젓가락이 부착된 단도를 차고 다녔다. 예고 없이 만나는 과일, 혹은 라면을 먹기 위해 요즘 세월에 단도를 차고 다니다간 불법무기 소지죄로 봉변을 당하기가 십상이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 몰래 유품함을 열고 그 단도를 훔쳐내 허리에 차고 교실에서 이순신 장군 흉내를 내다가 기겁을 한 선생에게 압수당하고 말았다. 그 뒤 단도를 돌려달라고 졸랐더니 아버지께 직접 전달한다기에 전전긍긍하다가 졸업하고 말았다. 나중 아버지가 그 단도를 찾았을 때 식은땀을 흘리며 시치미 딱 뗀 것이 그만 임종 때까지 이실직고하지 못하고 말았다. 50년 동안 조상의 유품을 찾기 위해 노력한 아버지의 집념도 대단했지만, 50년 동안 시치미 떼고 기만하기도 예삿일 아니었다. 보검까지는 아니더라도 누대 전승의 가보를 길이 보전하기는커녕 외간에 함부로 내돌려 빼앗긴 죄를 훗날 어찌 추궁당할지 걱정이다. 성묘, 벌초 때마다 조상님들께 회계하고 용서를 빌고 있다.
저번 농막에서 새참으로 ‘빠마 국시’를 요리하다가 나무젓가락 한쪽이 두 동강 나고 말았다. 나무젓가락 제조회사를 규탄하기 위해 동아리방에 사진을 올렸더니 댓글이 가지각색이다.
- 인도식으로 먹어라.
인도 사람들은 라면도 손으로 건져 먹는가? 손가락이 뜨겁지 않을까?
- 기아에 허덕이는 빈민을 생각하고 반성하라.
아닌 게 아니라 지구 저쪽엔 아사자가 속출하는데 나무젓가락 타령을 하다니. 양심에 부끄럽다.
- 나뭇가지로 대용하려무나. 학창시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렇기도 하다. 교정 나무에 잔가지가 남아나지 않았었지. 논두렁의 저 버드나무도 미구에 단발머리가 되겠구나.
- 기다려라. 나무젓가락 갖고 갈 테니 같이 먹자.
가장 인간적인 댓글이다. 그 사이 떡이 되지 않을까?
- 젓가락 한 짝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없다. 우리도 각자 튼튼한 젓가락이 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여 우정을 서로 오래오래 지속하자.
역시 훈장답게 교훈적이고 장황한 댓글이다. 그러나 국민학교 조회시간 교장 선생님 연설을 듣는 것 같아 식상하고도 진부하다.
담임선생이 집까지 찾아와 밀린 공납금을 독촉하자 가난이 한스럽고 자존심도 상한 엄마는 삼단 같은 머리를 잘라 팔아 밀린 공납금을 바친 다음 ‘파마’를 했고, 할머니에게 ‘빠마국시’ 개명 빌미를 제공한 이듬해 그만 초록별을 떠나고 말았다. 엄마 요절 뒤의 아버지 신세가 짝 부러진 나무젓가락 모습이었다. 재혼했으나 그것은 놋젓가락과 나무젓가락의 만남, 아니, 슬리퍼와 하이힐의 만남이었다.
옛날 어느 빈처는 남편 찾아 멀리 온 벗을 대접하려고 머리카락을 잘라 술을 사 오다 돌부리에 걸려 술이 엎질러져 울었단다. 우리 엄마도 맏아들 밀린 공납금을 바치기 위해 팔 수 있는 건 쪽을 찐 머리카락과 소용없어진 비녀뿐이었다. 그 은비녀는 시집가는 누나에게 외삼촌이 주머니를 털어 선물한 것이었단다. 그렇게 비녀까지 팔아 공납금을 바친 자식이 일껏 잡문이나 끼적거리고 있으니 엄마도 돌부리에 걸려 인생을 엎질렀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 완행열차를 타고 청량리로 올라가던 길에 강원도 어느 역 플랫폼에 내려서 가락국수를 사 먹은 일이 있었다. 가락국수를 받아들자 아버지가 ‘와리바시’를 쪼개 손으로 비벼서 나에게 주었다. 그땐 왜 비볐는지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니 나무젓가락에 붙은 보푸라기를 뜯어주기 위함이었다. 그걸 깨닫는 데 60년이나 걸렸다. 12시간이나 걸리는 칙칙폭폭 거북이 기차가 가락국수 역 정차하는 시간은 고작 5분이었다. 평생 훈련소 이외에 그렇게 허겁지겁 빨리 음식을 먹은 일도 없었고, 그렇게 맛있게 먹은 음식도 없었다.
우리도 짝짝이 만났다고 영일 없이 다투지만, 누가 하이힐인지 누가 슬리퍼인지 알 도리가 없다. 나는 기미상궁(염도계)을 보며 찻숟가락으로 소금을 집어넣는 성격이요, 그는 소금 보시기 째 설렁설렁 흔들어 들뜨리는 형이다. 나는 짜다고 잔소리하는 형이요, 그는 맹물을 털썩 부어 마시는 형이다. 선친께선 늘 음양이 바뀌어 만났다고 혀를 차셨으나, 소금같이 짠 며느리 덕에 몰락하기 전보다 넓은 토지를 회복했다. 그런데 요즘 땅값이 똥값이다. 세상사 모두 부질없는 것을….
사실 우리 만남은 선친과 친구들이 장날 주막거리에서 주고받은 술잔의 안줏감으로 시작, 다음 장날 맞선보고, 다다음 장날 약혼하고, 다다다음 장날 빠마머리에 족두리를 썼다. 이것은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은 우리 고향의 속전속결 전설이다. 일회용 나무젓가락 만나듯 만나 여태 갈라지지 않고 있으니 기적인가. 짝짝이로 만났을망정 50년 넘게 동행했으면 금혼식이라도 올려야 하는가? 껌보다 질긴 세월이었다.
남녀는 음양이 제대로 결합함으로써 완성도를 지향할 수 있지만, 나무젓가락은 온전하게 분리됨으로써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한 뼘 나무젓가락에 대한 유감이 이렇게 길고 깊은 줄 몰랐다. 다만 나무젓가락의 재료로 제 몸을 바치고도 오히려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백양목에게 미안할 뿐이다. 나무에 무슨 죄가 있는가.
<경주문학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