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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제89칙/관음보살의 천수천안
“몸뚱아리 중 소중하지 않은 것 있더냐”
{벽암록} 제89칙은 운암화상과 도오화상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운암화상이 도오화상에게 물었다. "대비보살이 수많은 손과 눈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요?" 도오화상이 말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 운암이 말했다. "나는 알았소." 도오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운암이 말했다. "전신(遍身)이 손이요 눈입니다." 도오화상이 말했다. "말을 잘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 운암이 말했다. "사형은 어떻습니까?" 도오화상이 말했다.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
擧. 雲巖問道吾, 大悲菩薩, 用許多手眼作什. 吾云, 如人夜半背手摸枕子. 巖云, 我會也. 吾云, 汝作生會. 巖云, 遍身是手眼. 吾云, 道卽太殺道, 只道得八成. 巖云, 師兄作生. 吾云, 通身是手眼.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5권 도오장과, {전등록} 14권 운암장에 전하고 있는데, 질문자가 운암이 아니라 도오화상이다. 도오원지(道悟圓智:769~835)는 이미 {벽암록} 55칙에,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은 70칙에 등장한 선승인데, 모두 약산유엄선사의 제자이다. 원오는 '평창'에 "운암은 도오와 함께 약산선사를 참문하고 40년 동안 눕지 않고 정진하였다.
약산선사는 조동종(曹洞宗)이라는 한 종파를 출현하게 했는데, 거기에 3인이 있어 법도가 성행했다. 운암선사 문하에 동산양개(洞山良价), 도오선사 문하에 석상경제(石霜慶諸), 선자덕성(船子德誠)선사 문하에 협산선회(夾山善會)가 배출되었으니 바로 그들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도오와 운암은 약산문하를 대표하는 뛰어난 선승들이다.
원오는 또 "대비 관세음보살은 8만 4천 모타라비(母陀羅臂:印相:mudra)가 있고 수많은 손과 눈이 있다. 그대에게도 있느냐? 백장선사는 '일체의 언어 문자는 모두 돌이켜 자기에게로 귀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공안의 사유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천수경}에서 대비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자비 손과 천개의 지혜 눈으로 다양한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수많은 지혜작용을 제시하고 있다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미묘한 지혜작용을 단순히 경전에서 설한 말씀이라고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해서 안 된다. 백장선사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관음보살이 되고 천수천안 지혜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임제록}에도 '대비보살의 천수안(千手眼) 가운데 어떤 것이 정안(正眼)인가?'라는 질문으로 선문답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선승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거론되고 있었다.
본 공안도 운암화상이 도오선사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데, 그렇게 많은 손과 눈으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즉 도오선사여! 그대는 관음보살의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작용을 체득했는가? 체득했다면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를 어떻게 체득하여 활용하는지 말해보라고 도오선사의 경지를 시험해보기 위한 낚시 바늘이다.
원오는 운암의 질문에 "그대는 평소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면서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그대는 일상생활의 행주좌와 모든 행동이 그대로 천수천안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대비보살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이라고 지적한 말이다.
운암의 질문에 도오선사는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즉 잠자리에 몸부림 많이 치는 사람이 잠시 잠에서 깨어나 목침이 없어졌음을 알고, 깜깜한 밤중에 손을 더듬어서 목침을 찾아 처음 잠잘 때처럼, 다시 목침을 베고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대답한 것이다. 손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이다. 운암이 "나는 알았소."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군요. 도오선사가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라고 다그치며 물었다.
운암은 "신체 중(身)에 손이 있고 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불법 사상과 맞지 않고, 지혜작용이 없는 말이며,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라고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도오선사는 "이치로는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라고 비평했다. 운암이 "사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즉 자신의 견해에 대해 도오선사는 8할 정도 인정하였기에, 10점 만점의 안목은 어떤 경지인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도오선사는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通身是手眼)"이라고 대답했다.
운암이 '편신(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8점이고, 도오가 '통신(通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10점 만점이다. 편신(身)은 눈과 손의 움직임과 같이 몸의 일부가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통신(通身)은 온몸 전체가 눈이 되고 손이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어 작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굳이 다른 점을 논해 본다면 편신(身)은 평면적, 외연적이라면, 통신(通身)은 입체적 내포적이라고 할까?
그러나 {조당집} 5권 도오전에는 신산(神山)이 "혼신(渾身)이 바로 눈"이라 대답하고 있다. 또 10권 경청장에는 "어떻게 처처에서 그를 상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경청은 "온 몸(遍身)이 눈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통신(通身), 편신(身), 혼신(渾身), 편신(遍身)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벽암록} 18칙과 '수시'에 "온 몸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손이 되고 눈이 된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손뿐만 아니라 다리나 머리도 눈이 되는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원통하고 무애자재한 지혜를 펼치는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의 묘용이다. 손이 1000개, 눈이 1000개라 할지라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마음이 쏠리고 머무르면 999개의 손과 눈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음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 무심의 경지에서 1000개의 손과 눈이 자유자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백족(百足, 지네)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무심의 경지에서 온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할 때 편안하고 지혜로운 삶이 되는데, 괜히 번뇌 망념을 일으켜 중생심으로 분별 의식을 일으키면 불심의 지혜로운 생활이 죽어버린다.(死人)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전신(身)이 옳은가. 온몸(通身)이 옳은가?" 본칙의 공안에서 운암의 대답이 옳은가, 도오의 대답이 옳은가?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 분별하면 10만 리나 멀어진다." 그러나 설두는 편신(身)이나 통신(通身)은 같은 말로 그러한 언어문자를 시비로 삼으면 천수천안 관음보살의 지혜와는 멀어진다. "나래치는 붕새는 천지 사방(六合)의 구름위에 날고," 운암의 지혜작용을 {장자}의 붕새에 비유하여, 한번의 날개짓에 천지를 뒤덮는 것과 같았다.
"회오리 바람은 깊은 바다(四溟水)를 들끓게 하네." 도오의 견해는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일시에 동요시키는 큰 역량을 갖춘 안목이다. 두 사람 견해의 우열은 논한다는 것은 어렵다. "웬일로 먼지가 갑자기 생기는가?" 운암의 지혜가 대붕과 같이 웅대하지만, 관음보살의 천수천안 활약에 비교하면 한 점의 티끌이 공중에 날리는 것과 같다. "무슨 일로 가는 털은 어찌 멈추지 않는가?" 또한 도오의 지혜도 훌륭하지만, 관음 대비의 광대무변한 원력에 비교하면 미세한 터럭이 불과하다. 전신이니 온몸이라는 차별심으로 대비관음의 천수천안을 친견할 수가 없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제석천의 구슬로 법을 드리우니 겹겹이 그림자 쌓이는 것을."
{화엄경}에 도리천에 구슬로 엮은 주련이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에 수천 수만의 구슬이 서로서로 비추어 전부 하나의 구슬 가운데 비춘다는 중중 무진의 법계를 비유하고 있다. 온 시방세계가 하나의 구슬이며, 천수천안의 무애자재한 경지이다. "주장자 끝의 손과 눈이 어디에서 일어날까?"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지혜는 덕산이 주장자를 휘두르는 것과 같고, 임제가 고함치는 것 같이 일체의 모든 도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며, 밤중에 목침을 찾아 편히 잠자는 것이다. "쯧쯧()." 말이 많았군!
벽암록 제90칙 지문(智門)화상과 반야지혜의 본체
반야지혜의 무분별지 體.用으로 잰들…
{벽암록} 제90칙은 지문화상에게 반야지혜의 본체와 작용에 대한 질문을 하며, 다음과 같이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반야지혜의 본체입니까?"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대합조개가 밝은 달을 삼킨다." 스님은 질문했다. "무엇이 반야지혜의 작용입니까?"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토끼가 새끼를 잉태했다."
擧. 僧問智門, 如何是般若體. 門云, 蚌含明月. 僧云, 如何是般若用. 門云, 兎子懷胎.
본체는 작용을 떠나지 않고
작용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
본칙의 공안은 {고존숙어록} 제39권에 수록된 {지문광조선사어록}에 전하고 있는 선문답인데, {벽암록} 제21칙 본칙의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다. 지문광조(智門光祚)화상은 운문문언선사의 제자로서 그의 전기는 {광등록} 22권, {속등록} 2권, {연등회용} 27권 등에 전하고 있는데, 사천성 향림원 징원(澄遠)선사를 참문해 법을 잇고 뒤에 호북성 수주 지문사에서 선법을 펼쳤다. 그의 문하에 설두중현 등 30여명의 훌륭한 선지식이 배출됐다.
본칙의 선문답은 반야 지혜의 본체(體)와 작용(用)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반야란 일체의 사량분별이 없는 불심의 지혜이다. 반야(prjna)는 여성명사로 생산능력이 있는 말인데, {유마경}에 "반야바라밀(智度)은 보살의 어머니(母)이며, 방편을 아버지(父)로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불법을 깨달은 지혜의 완성을 어머니로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으로 부처의 성도(成道)가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야지혜의 보살인 문수를 제불을 출현시키는 어머니라고 한다.
{대지도론} 18권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이 초발심에서 일체의 지혜를 구하며 일체 만법의 참된 모습(諸法實相)을 깨달아 아는 지혜라고 설하며, 또 반야는 일체의 모든 지혜 가운데 제일이고 한다. 대승불교는 공(空)과 반야를 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반야의 지혜는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空(sunya)의 실천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생심 번뇌 망심을 텅 비워진 그대로가 불심으로 반야의 지혜가 일체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법(tatha)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승의장} 10권 등에 반야는 실상(實相), 관조(觀照), 문자(文字)반야의 세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실상은 반야의 본체(體)로서 견고해 파괴할 수가 없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심인 것이다. 관조의 작용은 지극히 예리한 것으로 일체의 번뇌 망념을 타파하는 불심의 지혜광명이다. 문자반야는 이러한 반야지혜의 이치를 언어 문자로 표현하여 만고에 전하고 사람들이 반야지혜를 체득하도록 하는 경전이다. 반야지혜의 한마디와 짧은 문장을 설하여 세간의 등불이 되고 무명을 제거하여 해탈인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문자반야라고 한다. 실상반야는 마음의 본체로서 밝은 거울과 같음을 본체로 하고,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비추는 작용을 관조반야라고 하며, 그러한 사실을 언어문자로 표현한 것을 문자반야라고 한다.
여기서는 반야지혜의 본체와 작용을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데, 반야사상의 체(體)와 용(用), 화엄사상의 이(理)와 사(事), 유식사상의 성(性)과 상(相)의 논리는 중국불교의 각 종파의 철학체계를 확립한 핵심적인 사상이었고, 논리가 빈약한 중국인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선사상은 반야의 체용(體用), 화엄법계의 이사(理事), 불성과 유식의 성상(性相)의 논리를 불심의 지혜와 작용으로 소화시켜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대화나 지혜로 활용하고 있다. {종경록} 45권에는 "선정은 자심(自心)의 본체요, 지혜는 자심의 작용이다. 선정이 곧 지혜이기 때문에 본체는 작용을 떠나지 않고, 지혜가 곧 선정이기 때문에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지혜와 선정 이 둘이 서로서로를 차단하면 함께 없어지고, 이 둘이 서로 서로를 비추면 함께 존재한다. 본체와 작용이 서로 서로 성립되면 차단함과 비춤에 걸림없이 무애하리라. 이러한 선정과 지혜 두 법이 참선수행의 요체이며 조불(祖佛)의 큰 뜻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어떤 것이 반야지혜의 본체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지문화상은 "대합조개가 밝은 달(明月)을 삼킨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평창'에 "이 말은 한강에서 생산되는 조개 속에 맑은 진주가 있는데, 중추절이 되면 수면으로 떠올라 입을 벌리고 달빛을 빨아들여 교감(交感)되어 진주가 생긴다고 한다. 합포주(合浦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중추절에 달이 뜨면 진주가 많이 나오고 달이 뜨지 않으면 진주가 적게 나온다고 한다"고 했다. 강주 합포(合浦)라는 곳의 대합조개(蚌蛤)는 진주를 안고 있는데, 8월15일 밤에 조개가 명월(明月)의 정기를 받아서 진주가 된 것이라는 전설이 {조정사원} 8권과 {본초강목(本草綱目)} 등에도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설을 토대로 지문화상은 진주가 명월을 삼키고 있다고 대답했다. 반야의 본체에 대한 질문에 명월(明月)과 조개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명월이 창공에서 무심하게 비추고, 조개도 무심하게 명월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스님은 다시 "무엇이 반야지혜의 작용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지문화상은 "토끼가 새끼를 잉태했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평창'에 "토끼는 음(陰)에 속한 동물이다. 중추절에 달이 뜨면 입을 벌려 달빛을 삼키고 바로 새끼를 잉태하여 입으로 낳는다하니 이 또한 달이 뜨면 새끼가 많고, 없으면 적게 낳는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토끼 역시 8월 15일 밤에 달을 향해 입을 열고 달의 정기를 받아 새끼를 잉태한다는 전설을 토대로 대답한 것이다. 질문자는 반야를 본체와 작용으로 나누고 있지만, 지문화상은 체용(體用) 일체의 입장에서 대답한 것이다. 8월15일 강물 속의 조개가 밝은 달이 무심하게 비추는 달빛을 삼키어 진주를 만들고, 토끼는 새끼를 잉태하였다는 속설로 대답했는데, 밝은 달의 광명이 무심하게 만물을 비추는 모습을 말한다. 즉 반야 무분별지가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하여 역력하고도 분명하게 나타나 작용하고 있는 모습을 비교해서 대답했다. 마치 밝은 거울이 무심하게 일체의 만물을 차별심과 분별심도 없이 무심하게 비추는 것과 같이 청정한 불심이 반야의 본체이고, 무심하게 지혜를 비추는 것을 반야의 작용이기 때문에 체와 용이 둘로 나눌 수가 없고 하나가 된 경지이다. {조당집} 15권에 반산선사는 이러한 경지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마음 달 홀로 원명하니, 그 빛이 만상을 삼킨다. 빛은 경계를 비추지 않고, 경계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빛과 경계 함께 잊으니 도대체 이것은 어떤 물건인가?"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한 덩어리 맑고 투명한 것(달)은 언어와 정식(情識)이 붙을 수가 없다" 반야의 체와 용을 모두 다 송출했다. 허(虛)는 허령불매(虛靈不昧)로 인간 본심(불심)의 신령스러운 지혜의 광명이 무애자재한 것이고, 응(凝)은 응적(凝寂)의 의미로 본심의 영광(靈光, 지혜작용)이 항상하여 변함이 없으면서도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 즉 중생의 사량 분별심과 정식이 일체 끊어진 불심은 반야의 본체로서 부동이며, 지혜의 광명은 신령스럽게 시방삼세를 두루 비추고 있다. "인간과 천신이 이로부터 수보리(空生)를 본다"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가 좌선하고 있는데, 범천이 꽃비를 내린 이야기이다. 수보리가 반야에 대하여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지만, 반야의 체와 용을 설했다고 찬탄한 사실을 파악한다면 지문화상이 대답한 말의 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
지문화상이 "조개는 달빛을 삼키고, 토끼는 새끼를 잉태했다고 대답한 깊고 깊은 뜻" 지문화상의 대답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조개가 달(토끼)을 삼켰다고 한 것은 조개와 토끼로 반야의 체와 용이 둘이 아닌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멋지게 비유하여 대답한 것이다. "일찍이 선승들은 한바탕 법전을 펼쳤다" 지문화상의 의미 있는 대답은 선가의 수행자들이 서로 서로 법전을 하면서 참구하였지만, 지문화상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안목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