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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5월 1일(태종 7년 영락 5년),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재위 1403~1424)가 조선의 3대 왕 태종(재위 1401~1418)에게 협박문을 보낸다. 거칠게 핵심을 간추린다.
“너 이방원(李芳遠), 함부로 까불면 안남(월남)의 여계리(黎季犛)와 그 아들 여창(黎蒼)과 똑같은 신세가 되느니라. 이놈들이 진(陳 쩐 Tran)왕조를 타도하고 방자히 각기 태상황제니 황제니 칭하고 대명의 연호를 안 쓰고 중국의 책력을 불태워 버리더라. 주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천자를 모조리 부정하고 공자와 맹자와 주자도 우습게 여기고 스스로 그들보다 뛰어난 성인을 자처하면서, 순임금의 피와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며 성을 호(胡)씨로 바꾸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치지 않았느냐. 황제는 하늘의 태양, 어찌 하늘에 태양이 둘 있을 수 있겠느냐!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 짐이 장보(張輔) 장군에게 80만 대군을 딸려 보내어 그 두 놈을 사로잡아 압송해 왔노라. 네 아비 이성계(李成桂)처럼 너도 대명(大明)을 하늘로 섬겨야 하느니라. 흐흐, 안남(安南)은 어찌 되었겠느냐. 진왕조의 씨가 말랐으므로, 킥킥, 이참에 아예 명나라 땅으로 만들어 버렸지. 일컬어 교주(交州)라 하느니라.”
다음은 원문이다.
奉天承運皇帝詔曰: 朕祗奉皇圖, 恪遵成憲。 弘敷至化, 期四海之樂康 永保大和, 俾萬物之咸遂。 夙夜兢業, 不敢怠荒。 仰惟皇考太祖高皇帝, 混一天下, 懷綏遠人, 安南陳日煃, 慕義向風, 率先職貢, 嘉其勤悃, 頒賜鴻恩, 封爲安南王, 長有其土, 子孫世襲, 與國咸休。 比者賊臣黎季釐子黎蒼, 久蓄虎狼之心, 竟爲呑噬之擧, 殺其國主, 戕及闔宗 覃(被)〔彼〕陪臣, 重罹其慘。 掊克殺戮, 毒痡生民, 雞犬不寧, 怨聲載路。 狐疑狙狡, 鼠黠狼貪, 詭易姓名, 爲胡一元, 子爲胡夽, 隱蔽其實, 矯稱陳甥, 誑言陳氏絶嗣, 請求紹襲王封。 朕念國人無所統屬, 不逆其詐, 聽允所云。 倖成奸譎之謀, 輒肆跳梁之志, 專無忌憚, 靡慝不爲。 自以爲聖優於三皇, 德高於五帝 以文、武爲不足法, 下周、孔爲不足師 毁孟子爲盜儒, 謗程、朱爲剽竊。 欺聖欺天, 無倫無理。 僭國號曰大虞, 竊紀年曰紹聖。 稱爲兩宮皇帝, 冒用朝廷禮儀。 非惟恣橫於偏方, 實欲抗衡於中國。 佯奉正朔, 授頒曆而焚之 招納逋逃, 聞追索而隱匿。 朝貢之禮不行, 兇暴之情益肆。 涵淹卵育, 荐有圖大之心 鋒蝟斧";711, 益動侵陵之勢。 顗覦南詔, 窺伺廣西。 據思明府之數州, 侵寧遠州之七寨。 刦朝廷之命吏, 供彼家之歲金。 虜其子女, 以備';649鉗 歐其人民, 以蹈湯火。 欺占城之孱立, 伐其國以遭喪。 奪其土疆, 要其貢賦, 逼授僞印冠服, 令其從己背朝。 屢被殘殃, 數來告急。 朕矜其愚昧, 未終絶之, 特遣使臣, 曉以禍福, 啓其自新之路, 開其向善之門。 諄切再三, 俾其改悟, 益見冥頑狠愎, 怙惡不悛。 未幾安南王孫奔竄來京, 訴陳其事。 黎賊一聞, 謬來効款, 求釋誣罔之罪, 迎立陳氏之孫。 示彼至公, 曾何芥";069! 卽遣送歸國, 黎賊乃伏兵, 要殺於途, 幷殺朝士。 朕遣人賜占城禮物, 又殺使臣而奪之。 朝臣請加兵致討, 謂昔苗民逆命, 禹有徂征之師 葛伯仇餉, 湯有徯蘇之旅。
矧玆兇竪, 積惡如山, 四海之所不容, 神人之所懠怒! 此而可紓, 孰其懲戒! 朕以五兵戢橐之日, 正萬國乂安之時, 獨玆叛夷, 妄干天憲。 蛇";426之毒無';260, 生靈之害曷已! 興言及此, ";891然傷懷。 志在弔民, 豈忍究武! 是不得已告于神祇, 聿興問罪之師, 爰擧九伐之典, 用除殘暴, 以解倒懸。 撲兇焰于方張, 興陳氏於旣絶。 乃命征夷將軍成國公朱能等, 率偏師帶甲八十萬以討之。 特勑將士, 其臨陳來敵者, 殺毋赦 其來降者, 悉宥之。 師渡富師渡富良江, 賊率衆號七百萬來拒戰。 尙逞怒蛙之勇, 以嬰霆擊之威。 兵刃才交, 勢卽披靡。 我師躙之, 如摧枯拉朽。 斬首數百萬級, 直擣東都, 遂平西都。 四郊無結草之固, 前徒有倒戈之師。 黎賊孼黨, 卽時殄滅。 其有投兵乞命者, 卽釋不誅, 所至秋毫無犯, 市不易肆, 人民按堵。 遍求陳氏子孫, 立之其國, 官吏耆老人等, 累稱爲黎賊滅盡, 無可繼承, 陳請: “安南, 本古交州, 爲中國郡縣, 淪汚夷習, 及玆有年矣, 幸遇迅掃攙搶, 剗磢蕪穢。 願復古郡縣, 與民更始, 庶再覩華夏之淳風, 復見禮樂之盛治。” 俯順輿情, 從其所請, 置交趾都指揮使司、交趾承宣布政使司、交趾按察司及軍民衙門, 設官分理, 廓淸海徼之妖氛, 變革遐方之陋俗。 所有合行事宜, 條列于後。
一, 安南陳氏爲黎賊所弑, 死於非命, 誠爲可憫, 宜令贈諡, 以慰幽冥 其子孫宗族, 有爲黎賊所害者, 宜贈以官。 有司卽具名來, 用申恤典。 一, 陳王爲黎賊殺戮已盡, 宗祀廢絶, 今特建祠立碑, 設官主典, 歲時祭祀, 仍給看廟三十戶, 以供灑掃。 一, 陳王墳墓, 蕪廢已久, 宜令有司看視頹圮, 卽爲修葺, 仍給看墓三十戶, 以供祭掃。 一, 安南官吏軍民人等, 俱爲黎賊兇威, 所逼驅之, 以冒白刃, 死亡者衆, 暴露可憫, 有司卽爲掩';612埋胔。 一, 安南郡縣官吏, 皆陳氏舊人, 爲黎賊威脅, 有不得已。 詔書到日, 凡在職役, 悉仍其舊, 俱各不動。 然其民舊染夷俗, 未閑華禮, 朝廷仍設官相兼治理, 敎以中國禮法。 一, 黎賊數年以來, 爲政苛猛, 毒虐其民。 今悉除之, 宣布朝廷政令, 以安衆庶, 各宜遵守, 永享太平。 一, 安南各處關隘, 有結聚人民, 守把營寨及逃避海島者, 詔書到日, 卽便解散還家, 以安生業。 一, 安南之民, 久被黎賊困苦, 有司宜加撫恤, 使安生業, 毋致失所。 一, 安南官吏軍民, 有爲黎賊所害, 或黥刺徒配, 或全家流徙, 不得其所及一應被害之人, 詔書到日, 悉放還原籍復業, 所在有司, 卽便起發, 毋得停留, 其有囚繫于獄者, 卽時放遣。 一, 安南境內, 凡有高年碩德, 有司卽加禮待。 及鰥寡孤獨之人, 無依倚者, 爲立養濟院以存恤之。 一, 安南境內, 懷材抱德有用之士, 有司以禮敦遣, 至京量才, 於本土敍用。 一, 安南疆境與占城、百夷等處接界, 宜各守疆境, 毋致侵越 亦不許軍民人等私通外境, 私自下海販';739蕃貨, 違者, 依律治罪。 於戲! 武威載揚, 豈予心之所欲! 元惡旣殛, 實有衆之同情。 廣施一視之仁, 永樂太平之治。
還鄕省親內官金角、李成、南江、金勿之、尹康等, 隨鄭昇而來。 上拜詔訖, 升殿宴鄭昇、馮謹, 而金角等亦與焉。 角等啓曰: “願殿下南向立, 臣等欲行本國私禮。” 上許之。 及將赴宴, 角等欲與昇一行而坐, 上曰: “奉詔使臣, 獨鄭、馮二人耳, 角等無與焉。 況是本國, 以覲親而來, 爾何敢與我相對乎!” 乃賜坐於殿內南行。
명사(明史) 영락제 본기(本紀)에는 80만 병력이란 말이 안 나온다. 영락 4년에 간단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을 7월 신묘일에 주능을 오랑캐 정벌 총사령관으로 삼고 목성과 장보를 부장군으로 삼아, 군사가 길을 나누어 안남을 정벌하러 갔다.”
(秋七月辛卯,朱能為征夷將軍,沐晟、張輔副之,帥師分道討安南)
명사(明史) 열전 제42 장보 편에 80만 대군이 언급되어 있다.
“영락제가 크게 노하여, 성국공 주능을 오랑캐 정벌 총사령관으로, 장보를 우부장군으로 삼아, 풍성후 이빈 등 열여덟 장군과 80만 병사를 거느리고 좌부장 서평후 목성과 만나 길을 나눠 (안남을) 토벌하러 보냈다.”
(帝大怒,命成國公朱能為征夷將軍,輔為右副將軍,帥豐城侯李彬等十八將軍,兵八十萬,會左副將軍西平侯沐晟,分道進討。)
국내 어떤 <동남아시아사>에선 80만이 아니라 20만이라고 나와 있는데, 원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영락제의 협박문은 장보 열전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원래 총사령관은 주능(朱能)이었으나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병사해서, 장보가 총사령관이 되어 1406년에서 1416년까지 4차례에 걸쳐서 안남에서 공포의 대왕으로 군림했다.
영락제가 크게 노했다는 부분은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명사 열전 제209 안남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진씨왕조의 왕족 진천평(陳天平)이 명나라에 망명했는데, 여창에서 호저(胡𡗨)로 개명한 안남 황제는 영락제에게 진천평도 잘 대우하고 명나라에 사대(事大)도 잘할 테니, 그를 안남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한다. 이에 영락제는 5천 명의 군사가 호위하는 가운데 진천평을 돌려보낸다. 영락제는 고분고분한 진천평을 안남의 국왕으로 삼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안남 황제는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대오 정연한 이리 무리가 오합지졸 양떼를 희롱하듯 그들을 요절내고 진천평도 죽여 버린다. 이에 영락제가 크게 노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중남부 베트남에 해당하는 점성(占城 Champa)이 호씨왕조의 침략을 성토하며 영락제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도 안남 정벌의 빌미가 되었다.
외척으로서 실세로 있다가 역성혁명을 일으킨(1399) 여계리는 여러모로 이성계와 흡사하다. 문란한 국정을 쇄신하여 왕의 직계 외에는 10무(畝)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귀족의 노비 숫자도 제한한다. 게다가 통쾌하게도 중국의 신흥 왕조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다! 신채호로부터 손바닥 얼얼 박수를 받을 일이다. 통쾌한 것은 잠시, 자신과 아들이 함께 개죽음 당하고 조국강산도 10년에 걸쳐 유린당한다. 312만 가구(한 가구 당 4명이라고 쳐도 1200만 인구)가 10년 간 북쪽 오랑캐의 무지막지한 침략에 살이 베이고 뼈가 발리게 만든다.
1368년 주원장이 몽골족의 원(元)을 중원에서 몰아내면서 요동에 힘의 공백이 생긴다. 민족적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공민왕이 가만있을 리 없다. 주원장이 새 왕조를 개창한 직후라 내치에 힘쓸 것이 명약관화한지라, 공민왕은 동녕부를, 21년간 서경에 있다가 1290년부터 심양으로 옮겨간 동녕부(東寧府)를 접수하기로 결정한다(공민왕 18년 1369년 11월). (東寧이나 安東이나 安南은 모두 같은 발상으로 중원의 통일왕조가 동쪽이나 남쪽의 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중원의 평화를 도모한다는 뜻이다.) 이에 발탁된 장군이 이성계다. 공민왕 19년(1370) 1월, 드디어 이성계 장군은 보병 1만과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넌다. 이성계는 통쾌하게 요동을 정벌한다. 고려사 42권에서 나오는 다음 부분은 태조실록 총서에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의 국역을 그대로 옮긴다.
태조는 기병 5천 명과 보병(步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里)를 행진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고, 또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에 서울의 서북방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차고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쳤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용감한 장수의 기상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成桂)를 북방에 보냈으니 반드시 그 감응(感應)일 것이다.”
하였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于羅山城)으로 옮겨 가서 지켜 대로(大路)에 웅거하여 막고자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니, 이원경(李原景)【원경(元景)은 곧 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이다.】이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고,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隨從)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城中)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山城)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萬餘戶)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歸順)한 사람이 저자[市]와 같았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我太祖以騎兵五千步兵一萬自東北面踰黃草嶺行六百餘里至雪寒嶺又行七百餘里甲辰渡鴨綠江. 是夕西北方紫氣漫空影皆南書雲觀言猛將之氣王喜曰: “予遣
李[太祖舊諱]必其應也.” 時東寧府同知李吾魯帖木兒聞
太祖來移保于羅山城欲據險以拒.
太祖至也頓村吾魯帖木兒來挑戰俄而棄甲再拜曰: “吾先本高麗人願爲臣僕.” 率三百餘戶降. 吾魯帖木兒後改名原景其酋高安慰帥麾下嬰城拒守我師圍之.
太祖適不御弓矢取從者之弓用片箭射之. 凡七十餘發皆正中其面城中奪氣安慰棄妻孥縋城夜遁. 明日頭目二十餘人率其衆出降. 諸城望風皆降得戶凡萬餘. 以所獲牛二千餘頭馬數百餘匹悉還其主北人大悅歸者如市. 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之一空.)
고려사 공민왕 19년(1370) 11월 기사는 2차 요동정벌에 관해 딱 한 줄 언급한다.
(11월 정해일, 우리 태조께서 지용수 등과 의주에 이르러 압록강에 부교를 놓으셨다. 을축일에 요성(遼城)을 급습하여 발본색원해 버린다.)
十一月丁亥我
太祖與池龍壽等至義州造浮橋渡鴨綠江己丑進襲遼城急攻拔之.
군사는 몇 명이었으며 전과는 어땠을까? 고려사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다. 다행히 태조실록 총서에 이에 대한 기사가 있다. 여기에는 11월이 아니라 12월도 나와 있고, 병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이성계의 친위대가 1600명이고 요성을 공격할 때 전위대인 기병이 3천 명이었다고 하고 뒤이어 대군이 들이쳤다고 하는 걸 보아, 1차 요동정벌 때와 숫자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다. 2차도 성공적이었다.
12월, 태조는 친병(親兵) 1천 6백 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너는데, 사졸(士卒)이 3일 만에야 다 건넜다.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遼城)과의 거리가 2일 길이었다. 군대의 짐[輜重]은 그냥 남겨 두고 7일 양식만 가지고 행진하였다. 비장(裨將) 홍인계(洪仁桂)·최공철(崔公哲) 등을 시켜 빠른 기병[輕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요성을 습격하게 했는데, 저들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이를 얕보아 싸웠으나, 많은 군사들이 잇달이 이르니 성중(城中) 사람이 바라보고는 간담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 장수 처명(處明)이 날래고 용감함을 믿고 그래도 항거해 싸우므로, 태조는 이원경(李原景)을 시켜 타이르기를,
“너를 죽이기는 매우 쉽지만, 다만 너를 살려서 쓰고자 하니 빨리 항복하라.”
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원경(原景)이 또 말하기를,
“네가 우리 장군님의 재주를 알지 못하는구나.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한 번에 쏘아서 네 몸을 꿰뚫을 것이다.”
하였으나, 그래도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는 짐짓 그 투구를 쏘아 벗기고는 또 원경을 시켜 그에게 타일렀으나, 또 따르지 않으므로, 태조는 또 그 다리를 쏘니, 처명(處明)이 화살에 맞아 물러가 달아나더니, 조금 후에 다시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태조는 또 원경을 시켜 그에게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즉시 네 얼굴을 쏘겠다.”
고 하니, 처명은 마침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였다. 한 사람이 성(城)에 올라 외치기를,
“우리 무리들은 대군(大軍)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투항(投降)하고자 하였으나 관원(官員)이 강제로 항거해 싸우게 했으니, 만약 힘을 써서 성을 공격한다면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은 매우 높고 가파르며, 화살이 빗발처럼 내려오며 또 나무와 돌까지 섞여서 내려오는데, 우리의 보병(步兵)들이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것을 무릅쓰고 성에 가까이 가서 급히 공격하여 마침내 성을 함락시켰다.
새인첩목아(賽因帖木兒)는 도망하므로 백안(伯顔)을 사로잡아 군사를 성 동쪽에 물리치고, 나하추(納哈出)와 야산불화(也山不花) 등지에 방문(榜文)을 포고하기를,
“기새인첩목아(奇賽仁帖木兒)는 본국(本國)의 미천한 신하로서 황제의 조정에 친근(親近)하여 별다른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관위(官位)가 1품(品)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나라와 함께 기쁨과 근심을 같이해야 될 것이며, 천자(天子)가 밖에 피난(避亂)했으니, 의리상 마땅히 전후 좌우에서 보좌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고 가버리지 않아야 될 것인데, 그는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잊고서 동녕부(東寧府)에 몸을 도망쳐 와서, 본국(本國)에 원수를 가지고 몰래 모반(謀反)을 도모하고 있다. 두서너 해 전에 국가에서 군사를 보내어 뒤쫓아 습격했으나, 도망하여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는데, 또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물러와 동녕성(東寧城)을 지키면서, 김백안(金伯顔) 평장(平章) 등과 결탁하여 심복(心腹)이 되어 송보리(松甫里)·법독하(法禿河)·아상개(阿尙介) 등지에서 군사와 말을 단결(團結)시켜 또 본국을 침해하고자 하니,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문죄(問罪)하니, 그 새인첩목아(賽仁帖木兒)와 김백안(金伯顔) 등은 소민(小民)들을 유혹 협박하고 성벽을 굳게 지켜 명령을 거역[逆命]하므로, 초마(哨馬) 전봉(前鋒)이 김백안 외에 합라파두(哈剌波豆)·덕좌불화고(德左不花高)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대도총관(大都摠管) 등 대소 두목(大小頭目)을 모두 잡아 죽였으나, 새인첩목아는 또 다시 도망 중에 있으니, 새인첩목아가 가서 접(接)하는 각채(各寨)에서는 즉시 잡아서 빨리 보고할 것이며, 만약 이를 숨기고 자수(自首)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감계(鑑戒)가 동녕부(東寧府)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금주(金州)와 복주(復州) 등지에 방문(榜文)을 포고하기를,
“본국은 요제(堯帝)와 같이 건국(建國)했으며,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후(封侯)하여 영토(領土)를 주어 서쪽으로 요하(遼河)에 이르렀으며 대대로 강토를 지켰는데, 원(元)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공주(公主)에게 요동(遼東)·심양(瀋陽)의 땅을 내려 주어 탕목읍(湯沐邑) 28) 으로 삼게 하고, 그로 인하여 분성(分省)을 설치하였다. 말세(末世)에 와서 덕망(德望)을 잃고 천자가 밖에서 피란(避亂)했는데도, 요동·심양의 두목관(頭目官) 등이 들은 체하지 않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또 본국(本國)에도 예의(禮儀)를 닦지 않고서, 곧 본국의 죄인 기새인첩목아와 결탁하여 복심(服心)이 되어 무리를 모아 백성들을 침해했으니, 불충(不忠)의 죄는 모면할 수가 없다. 지금 의병(義兵)을 일으켜 문죄(問罪)하는데 새인첩목아 등이 동녕성(東寧城)에 웅거하여 강성함을 믿고 명령을 거역하므로, 초마(哨馬) 전봉(前鋒)이 이를 모두 잡아 죽일 것이므로,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같이 재액(災厄)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개 요하(遼河) 이동(以東)의 본국 강토내의 백성과 대소(大小) 두목관(頭目官) 등은 속히 와서 조회하여 작록(爵祿)을 함께 누릴 것이며, 만약 조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감계(鑑界)가 동경(東京)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군대가 성 서쪽 10리(里)에 유숙했는데, 이날 밤에 붉은 기운[赤氣]이 군영(軍營)을 내리쏘는데 성하기가 불길과 같았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내리쏘니 옮겨서 둔치면 크게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돌려 들에서 유숙하고, 사졸(士卒)들로 하여금 각기 변소(便所)와 마구(馬廐)를 만들도록 하였다. 나하추가 뒤를 쫓아 온 지 2일 만에 말하기를,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었으니 군대의 행진이 정제(整齊)할 것이므로 습격할 수 없다.”
고 하면서 그만 돌아갔다. 이때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성(城)을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게 됨은 고려와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十二月, 太祖以親兵一千六百人至義州, 造浮橋, 渡鴨綠江, 士卒三日畢濟。 至螺匠塔, 去遼城二日程, 留輜重齎七日糧以行。 使裨將洪仁桂、崔公哲等, 領輕騎三千, 襲遼城, 彼見我師少, 易之與戰, 大軍繼至, 城中望見膽落, 其將處明恃驍勇猶拒戰。 太祖使李原景喩之曰: “殺汝甚易, 但欲活汝收用, 其速降也。” 不從。 原景曰: “汝不知我將之才也。 汝若不降, 則一射洞貫矣。” 猶不降。 太祖故射拂其兜牟, 又使原景喩之, 又不從, 太祖又射其脚, 處明中箭退走。 旣而復來欲戰, 又使原景喩之曰: “汝若不降, 卽射汝面。” 處明遂下馬叩頭而降。 有一人登城呼曰: “我輩聞大軍來, 皆欲投降, 官員勒使拒戰, 若力攻城, 可取也。” 城甚高峻, 矢下如雨, 又雜以木石, 我步兵冒矢石, 薄城急攻, 遂拔之。 賽因帖木兒遁, 虜伯顔, 退師城東。 張牓納哈出、也山不花等處曰:
奇賽因帖木兒, 本國微臣, 昵近天庭, 過蒙殊恩, 位至一品, 義同休戚。 天子蒙塵于外, 義當左右先後, 効死勿去。 爾乃背恩忘義, 竄身東寧府, 挾讎本國, 潛圖不軌。 年前國家, 遣兵追襲, 逃不血刃, 又不赴於行在, 退保東寧城, 與金伯顔平章等, 結爲心腹, 松甫里、法禿河、阿尙介等處, 團結軍馬, 又欲侵害本國, 罪在不原。 故今擧義兵以問, 乃其賽因帖木兒、金伯顔等誘脅小民, 堅壁逆命。 哨馬前鋒, 生擒金伯顔外哈刺波豆、德左不花高達魯花赤、大都摠管等大小頭目, 盡行勦捕, 賽因帖木兒, 又復在逃。 仰賽因帖木兒去接各寨, 卽便捕捉飛報。 如有隱匿不首者, 鑑在東寧。
又牓金、復州等處曰:
本國與堯竝立, 周武王封箕子于朝鮮, 而賜之履西至于遼河, 世守疆域。 元朝一統, 釐降公主, 遼瀋地面, 以爲湯邑, 因置分省。 叔季失德, 天子蒙塵于外, 遼瀋頭目官等, 罔聞不赴, 又不修禮於本國, 卽與本國罪人奇賽因帖木兒, 結爲腹心, 嘯聚虐民, 不忠之罪, 不可逭也。 今擧義兵以問, 賽因帖木兒等據于東寧城, 恃强方命。 哨馬前鋒, 盡行勦捕, 玉石俱焚, 噬臍何及? 凡遼河以東本國疆內之民, 大小頭目官等速自來朝, 共享爵祿。 如有不庭, 鑑在東京。
翌日, 師次城西十里。 是夜, 有赤氣射營, 熾如火, 日官曰: “異氣臨營, 移屯大吉。” 遂班師野宿, 令士卒各作溷廁、馬廐。 納哈出躡後行二日曰: “作廁與廐, 師行整齊, 不可襲也。” 乃還。 時中國人曰: “攻城必取, 未有如高麗者也。”
그 후 고려는 왕조말기 증상에 왜구의 침략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한다. 반면에 명나라는 주원장의 무자비한 정적 제거로 역설적으로 새 왕조가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하면서 국력이 급격히 신장된다. 명나라가 내치에 힘을 쏟고 몽골이 북원(北元)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사이에 요동에는 여진과 거란이 뿔뿔이 흩어져 자유를 만끽한다. 그 사이에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1388)으로 실권을 장악한 후 고려의 말기암을 들어내고 새 왕조를 일으킨다(1392). 귀족사회를 양반관료 사회로 일신한다. 고려의 귀족과 승려는 강과 산을 경계로 삼았지만, 18등급으로 나눠진 조선의 양반관료는 최대 150결(1科 정1품)에서 최소 10결(18과 종9품)밖에 가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50%가 예사였던 조세율이 고려 태조 왕건 때처럼 10%로 낮춰졌다는 것이다. 과전법은 원래 고려의 것이었지만, 이때에 비로소 명실상부하게 정착된다. 새 왕조의 핵심 정책인 전제(田制)개혁은 최근에 조선초 제일의 영웅으로 괴이하게 떠받들리는 정도전(鄭道傳)이 아니라 신진세력의 기수 조준(趙浚)이 주도한다. 위화도 회군 바로 그 해에 조준은 전국의 농장을 몰수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고려의 충신들이 이에 격렬히 반대한다. 실세 이성계의 강력한 지원으로 건국 1년 전인 1391년 전제개혁이 전격적으로 단행된다. 물적 토대를 잃은 귀족과 사원은 바로 몰락한다. 최영과 정몽주와 이색 등은 이런 측면에서 재조명해야 한다.
세계화 1.0 시대를 열었던 원이 멸망한 후, 인류 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었던 원(元)이 멸망한 후, 아시아에 세 주인공(primo uomo)이 역사의 무대에 오른다. (중국의 이전 왕조는 건국 시조의 고향 이름이 곧 나라 이름이 되었으나, 몽골족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유라시아에 걸쳐 인류의 새 기원을 연다는 의미에서 추상 명사 ‘으뜸 원’<元>을 나라 이름으로 정했고, 그 후 두 왕조 明과 淸도 민족이나 고향에 무관하게 이를 이어 받았다.) 중국에는 주원장, 한반도에는 이성계, 인도지나에는 여계리가 말기 증상을 보이던 이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다.
세 나라가 새 왕조의 기틀을 잡고 국력이 급상승할 무렵에 명과 조선에 두 영웅이 등장한다. 주체(朱棣)와 이방원은 각각 조카와 형을 물리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불과 2년 차이로 영락제(1403)와 태종(1401)으로 등극하여 여차하면 거꾸러질 수 있는 허약한 새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인도지나에선 이 둘에 걸맞은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다.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다고 하지만, 여계리가 여전히 모든 걸 관장하는데,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신과 민족 모두에게 피눈물의 선물을 안겨 준다. 영락제는 한족이 세운 통일왕조 가운데, 송(宋)과 더불어 가장 허약했던 명(明)에서 그나마 최전성기를 이끈다. 당시 서양은 꿈도 못 꾸던 대항해의 주인공 정화(鄭和)도 영락제가 보낸(1405)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에 정치생명을 건다. 그것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양반관료가 주도권을 잡으려는 권력투쟁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저간의 사정은 쏙 빼고 정도전이 1970년대 무렵부터 한국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재조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반미 및 인민민주와 은밀히 손잡는다. 막상 자유통일의 불구대천지원수였고 지금도 여전히 자유통일의 최대 걸림돌인 공산독재 국가 중국에는 입도 벙긋 못하면서! 어쩌면 일부러 안 하면서!
이성계 장군이 공민왕 때 이미 요동을 두 번이나 정벌했다는 것은 쏙 빼놓고, 마치 위화도회군이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인 양, 이불속에서, 인구 정책에나 협조할 일이지, 발길질을 요란스럽게 해 댄다. 미안하지만, 당시 고려는 요동을 건사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말기암 환자 고려를 대수술하고 새로 태어난 나라도 체력을 회복하는 데 최소한 한 세대가 필요했다. 저 무시무시한 영락제마저 요동은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몽골족과 전쟁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 사이 태종의 아들 세종이 앞으로는 하늘하늘 사대주의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뒤로는 천둥과 번개를 몰아쳐 여진족을 무찌르고 야금야금 국토를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