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복수론 : 조선의 명판결
복수야말로 가장 오래된 인간의 사회적 행위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가령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자식의 마음이라면 수백번 복수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효심에서 나온 복수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일체의 사적 복수를 막고 공권력으로 복수를 대신할 것인가? 만일 공권력의 조처에 대해 피해자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복수하러 든다면 어찌할 것인가?
복수를 허용할 것인가?
친친(親親)의 도리와 존존(尊尊)의 공적 토대 사이의 마찰이 불가피했던 유교 국가의 딜레마는 이러한 논의의 본질을 잘 드러내 준다.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 고대부터 복수의 허용 여부를 둘러 싼 논의들이 분분한 것도 모두 같은 이유이다. 당나라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유종원과 한 유의 글은 동아시아 역사상 복수에 관한 대표적인 논설이다. 수백 년이 흐른 뒤인 18세기 말 조선에서 다산 정약용은 복수에 대한 두 편의 선학의 글을 읽고 ‘복수의 조건’을 정의한 바 있다.
먼저 유종원의 글을 살펴보자. 그는 예부에 근무하던 시절 진자앙이 올린 복수 논의를 비판하기 위해 ‘박복수의(駁復讐議)’를 지었다. 측천무후 치세에 서원경이란 자가 아버지를 죽인 관리를 살해한 후 자수한 일이 있었다. 진자앙은 부친의 원수를 살해한 서원경을 살인으로 사형에 처하는 동시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도록 건의하였다. 관리를 죽인 죄로 사형에 처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효심을 인정하여 표창하자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유종원은 사형이면 사형에 처할 뿐이고 표창하려면 상을 줄 뿐이지, 사형에 처하는 동시에 상을 준다면 결국 법과 예(禮) 모두를 훼손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유종원의 박복수의(駁復讐議)
유종원의 글이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기로 한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측천무후 시절 동주 하규 지역 사람 서원경이 있었는데 아버지 서상이 현리(縣吏) 조사온에게 살해되자 친히 부친의 원수를 찌르고 자수하였습니다. 당시에 간관이었던 진자앙은 그를 사형에 처하고 마을 입구에 정문을 세워 표창할 것을 건의하였고, 또 그 일을 법령에 두어 영원히 국전으로 삼기를 청했습니다. 신은 삼가 그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듣기로, 예의 근본은 난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가령 함부로 적을 죽여서는 안 된다. 무릇 아들이라 해서 사람을 죽인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형(刑)의 대본 역시 난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적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도리를 내세우더라도 살인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와 형의 근본은 같지만 그 쓰임새는 다르니,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과 복주(伏誅:사형에 처함)를 함께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표창할 만한 이를 복주한다면 이는 남용으로서 형법을 더럽힘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반대로 복주할 자를 표창한다면 이는 참람된 것으로 예를 파괴함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이를 가지고 천하에 보이고 후대에 전한다면, 의를 추구하는 이가 향할 바를 모를 것이며 해를 피하려는 이가 설 곳을 모를 것입니다. 이를 모범으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성인의 제도는 도리를 따져 상벌을 정하고, 인정에 기초하여 포폄한 후 인정과 도리를 하나로 일치시킬 뿐입니다. 가령 사건의 진위를 자세히 따지고 곡직을 살펴 바로잡으며 당초의 원인을 따져 결과를 헤아린다면 형과 예의 적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만약 서원경의 부친이 공죄(公罪)를 범하지 않았고 조사온의 복주가 단지 사적인 원한 때문에 관리의 기세를 믿고 무고한 이를 침학하여 죽였는데도, 주목(州牧:주 장관)이 죄를 묻지 않고 형관(刑官)이 신문하지 않으며, 상하 관리가 몽매하며 호소와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원경이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을 수치로 여겨 창을 베개 삼고 복수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고 여기고 궁리 끝에 원수의 가슴을 찌르고 굳건히 결심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이는 예를 지키고 의를 행한 것입니다.
담당관리는 마땅히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여야 할 것이며 사죄하기에도 바빠야 할 터이니, 어찌 그를 사형에 처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혹 서원경의 부친이 죄를 면키 어렵고 조사온이 그를 사형에 처한 일이 법에 위배되지 않았다면, 이는 관리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죽은 것입니다. 어찌 법에 복수할 수 있겠습니까? 천자의 법에 복수하려고 법을 받드는 관리를 살해했다면, 이는 패려하게도 군주에게 덤벼 든 것입니다. 이를 잡아 처형하는 것이야말로 국법을 바로잡는 길인데 어찌 표창할 수 있겠습니까?”
유종원의 주장은 명백하다. 복수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분명히 갈라야 한다는 것이다. 복수할 수 있는 데 처벌하거나 복수할 수 없는 경우인데 상을 준다면 형과 예 모두 무너진다는 주장이다. 유종원이 진자앙을 비판한 첫 번째 이유는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하지 않은 채 처형과 상을 동시에 내림으로써 판단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국법을 어겨 사형에 처해졌다면 부모를 처벌한 관리에게 복수할 수 없지만 국법을 어기지 않았는데 관리가 사적인 감정으로 처형했다면 자식이 복수할 수 있다는 게 유종원의 주장이다. 이는 복수할 수 있는 경우와 복수할 수 없는 경우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아무리 국법을 집행하는 관리라 해도 자식이 복수할 수 있으며, 아무리 효의 도리를 강조한다해도 복수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유(韓愈)의 ‘복수장(復讐狀)’
당대 또 한 명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던 한 유도 복수에 대한 논의를 피력한 바 있다. 811년 부평현의 평민 양열이 아버지의 원수 진고를 죽인 후 자수하였다. 관에서는 정상을 참작하여 사형을 면하고 장백대를 친후 머나먼 순주로 유배 보냈다. 한 유는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황제에게 올렸다.
“엎드려 생각건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는 일은 ‘춘추’ ‘예기’ 그리고 ‘서경’의 ‘주관(周官)’과 여러 가지 경전 및 사서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도 죄로 다스려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법률에 가장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야 하는 데도 법률에 조문이 없는 것은 몰라서 빠뜨린 게 아닙니다. 대개 복수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효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선왕의 가르침과 어긋나고, 또 복수를 허용하면 장차 법에 기대어 마음대로 복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무릇 법률은 성인(聖人)에 근본하고 있지만 법을 집행하는 것은 관리들입니다. 경전에 밝힌 것은 관리를 규제하는 것입니다. 정녕 그 뜻을 경전에서 깊이 하였지만 법률 조문이 누락된 의미는 장차 법리로 하여금 법에 따라 판단하지만 경전에 밝은 학자[經術之士]로 하여금 경전을 인용하여 논의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주관’에 ‘무릇 사람을 죽였으되 의로운 경우 복수할 수 없으며, 복수하면 처형한다.’고 하였고 의롭다 함은 마땅한[宜] 것이니 사람을 죽였으되 마땅함을 얻지 못한 경우 자식이 복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들이 서로 복수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춘추공양전’에 아버지가 죽을죄가 아닌데 처형되었다면 자식이 복수할 수 있다고 했으니 죽을죄가 아니라 함[不受誅]은 죄가 죽을 만한 경우가 아닌 것입니다. 주(誅)란 위에서 아랫사람에게 시행한다는 말이지 백성들이 서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주관’에서 이르기를 ‘복수하려는 자가 관리에게 문서로 알리면 죽여도 무죄이다.’라고 했습니다. 복수하려고 할 때 반드시 사전에 관청에 알려야 하며 그러면 무죄라는 말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전장제도에 뜻을 두어 법제를 만들면서 담당관의 직무를 안타까워하고 효자의 마음을 동정하시어 독단하지 않으려고 여러 신하에게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복수’라는 이름은 같지만 ‘사안’은 각각 다르다고 봅니다. 가령 백성 사이에 서로 복수할 수 있으니 ‘주관’에서 말한 바대로 지금도 논의할 만합니다. 또는 관리에 의해 복주(伏誅)되는 경우도 있는데 ‘공양전’에서 말한 것은 지금 행해서는 안 되는 복수입니다. 그리고 ‘주관’에서 말한 바대로 복수하려 할 때 먼저 관리에게 알려 무죄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만일 어린 고아나 약자가 마음으로 복수할 생각을 지니고 적을 처치하기 좋은 시기를 기다리는 경우라면 아마 스스로 관청에 알릴 수가 없을 것이니 지금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죽일 것인지 사면할 것인지를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다음과 같이 법제를 정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한 자는 사안이 발생하면 그 사실을 자세히 갖추어 상서성에 신고하고 상서성에서는 논의하여 보고한다. 그리고 타당성을 참작하여 처리한다면 경서나 법률의 본의에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논의를 올립니다.”
기본적으로 한 유는 복수가 허용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는 어떤 원칙이나 기준의 문제라기보다 상황 즉 맥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맥락과 상황을 잘 고려하여 판단하는 일이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사건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여 판결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이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경전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한 자라야 비로소 정당한 판단을 득할 수 있다고 보고, 형을 집행하기 앞서 경전에 밝은 학자들로 하여금 매번 논의를 거치도록 하여 판결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한 유에게 복수의 허용여부는 사건 발생의 과정을 잘 헤아려 판단해야 하는 문제로 어떤 원칙을 세운 후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요컨대 한 유에게 복수의 허용여부가 ‘맥락’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유종원에게는 허용 ‘기준’에 합당한가라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 유종원은 판단의 기준과 원칙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건을 둘러싼 해석이나 재량의 폭을 좁히고자 했으며, 한유는 하나의 판단 기준을 세우기 어려우므로 도리에 밝은 판관의 재량에 무게를 실어주기로 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견해
다산은 한 유보다 유종원의 논의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맥락’을 헤아리기보다는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아마 조선후기 판결과정에서 다산이 도를 지나친 재량, 한계를 넘어선 자의적 해석을 자주 목도한 결과로 보인다. 다산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 유의 의논을 살펴보면 유종원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비록 백성들이 서로 죽일 수 있다 해도 아버지의 죽음이 의롭지 못할 경우 ‘주례’는 복수할 수 없다고 했다(가령 도둑질하다가 죽거나 음란한 일로 아버지가 죽은 경우 자식은 이를 복수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법관이 죽였다 해도 아버지가 매우 원통하게 죽었다면 ‘춘추’에서는 복수를 허용하였다(춘추공양전에 오자서의 일을 논하였다). 무릇 복수 사건을 다루는 자는 다만 사건의 근본을 추구하여 복수의 단서가 복수할 만한 경우였다면 복수를 의롭게 여기고, 복수의 단서가 복수할 만한 경우가 아니었다면 복수를 범죄로 여겨야 할 뿐이다. 유종원의 논의가 매우 명확하다.”
다산에게 복수여부는 사건의 ‘근본’을 헤아려 복수할 수 있는 경우라면 허용하고 그렇지 않다면 금지한다고 보았다. 유종원이 말한 바 복수 허용의 기준이다. 가령 부모가 죽임을 당했지만 이유가 의롭지 못한 일이었다면 자식이 복수할 수 없다. 가령 도둑질하다가 상대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혹은 간통하다가 여자의 가족들에게 맞아 죽었다면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에 처해졌는데 국가가 정의롭지 못하였다면 복수할 수 있다는 게 다산의 생각이다. 다산은 수령이 사적으로 부모를 죽였다면 부모를 위해 수령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산은 복수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사건의 본질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맥락을 고려하되 사건의 근본을 천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이 꼽은 복수할 만한 대표적 사례는 오자서 이야기다. 초왕의 무함으로 아버지가 죽자 망명길에 오른 오자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를 공격한 일이다. 다산은 오자서가 초왕의 신하였지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아들이 복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복수 자체를 다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사건은 정의로운 복수가 아니다. 명나라 때 어느 장교가 이웃 부녀와 간통하였다. 하루는 남편이 나가길 기다렸다가 침상에 올랐는데 남편이 다시 돌아오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돌아온 이유를 묻는 부인에게 남편은 날씨가 추워 이불을 잘 덮어주려고 했다고 대답했고, 이 말을 들은 교위는 남편의 사랑을 배반한 부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남편을 위해 복수한 것이다. 이후 채소장수가 채소를 팔러 이 집에 들어왔다가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장교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수하여 채소장수의 목숨을 살리게 되었다. 이에 명 황제는 한 명의 불의(不義)한 여자를 죽이고 또 한 명의 무고한 자를 살렸다며 장교를 용서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다산은 본 사건은 남편을 위한 복수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장교 스스로 간음의 범죄를 저지른 자이며 여인을 유혹하여 정분을 옮기게 한 후 또 의롭지 못하다며 남편의 원수를 대신 갚는다면 절대 의인(義人)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은 명 황제의 사면령은 본받을 만한 판단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자신과 간통한 여인을 남편의 원수라며 살해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장교에게 있는가? 다산의 대답은 ‘없다’였다. 다산은 사건의 본질을 헤아려 보아 살인을 인정할 만한 경우에만 복수가 허용될 수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조선후기 무분별한 복수와 해석의 남용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용서할 만한 복수는 권장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복수는 절대 처벌해야 한다는 게 유종원의 생각이자 다산이 동의한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