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sia Times Online [ATO] 2013-2-7 (번역) 크메르의 세계
[분석] 캄보디아 : 시하누크의 죽음, 그리고 군주제의 종말
Departure of a king, death of an instit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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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2011년 10월 30일, 자신의 '귀국 20주년 기념일'에 맞춰 중국에서 귀국한 노로돔 시하누크 전 국왕이 다소 들뜬 기분으로 연설을 하고 있다. 훈센(우로부터 3번째) 총리와 꽁 삼 올(우로부터 2번째) 부총리 겸 궁내청 대신이 연설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부왕의 건강을 우려한 시하모니 국왕이 손을 뻗어 부축하고 있다. |
기고 : Sebastian Strangio
(프놈펜) --- '예포의 포성'과 폭죽 세례 속에서, 캄보디아인들은 이번주 그들이 사랑했던 고(故)-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전임 국왕과 마지막 고별식을 마쳤다. 보존처리가 된 시하누크 전 국왕의 시신이 왕궁 옆의 거룩한 공원에 새롭게 만들어진 장대한 다비식장 안에서 화장되기 시작하자, 전국의 캄보디아 국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동안 묵념했다.
쟝 마크 에로(Jean-Marc Ayrault) 프랑스 총리와 [일본 국왕의 차남인] 아키시노 왕자(Prince Akishino, 秋篠宮文仁親王[아키시노미야 후미히토 신노]) 왕자 등 각국 귀빈들도 '다비식'에 참석하여, 캄보디아의 마지막 '신왕'(God-King, 神王)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하누크 전 국왕은 작년 10월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의 90세 생일을 2주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장례식이 치뤄진 곳은 새로 건설된 47m 높이의 황금빛 다비탑 속에서였다. 밤이 찾아오자 다비탑에는 수많은 작은 등불이 켜졌고, 흰색 상복을 입은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과 노로돔 모니니엇(Norodom Monineath) 왕대비가 탑 속의 내실로 들어갔다. 30분 뒤, 시하모니 국왕이 백단유가 발라진 부왕의 시신에 상징적인 불을 점화하자,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장례식 음악'이 끝없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비식 다음날, 시하누크 공의 유골 일부는 프놈펜을 지나는 강의 합류점에서 '산골'되었고, 나머지 유골은 황금빛 항아리에 담겨 '왕궁에 영구 봉안'되었다.
대단한 역사적 인물이자 인습타파자였던 시하누크는 그렇게 떠나갔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폭력과 혼란 속에 빠졌던 20세기 역사를 상징했던 달갑지 않은 군주이기도 했다. 시하누크는 1922년 10월 31일 프놈페넹서 출생했다. 그는 프랑스 식민당국으로부터 캄보디아가 독립하는 과정을 주관했고, 이후 조국이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의 학정에 시달리는 모습도 지켜봤다.
그 과정에서, 시하누크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역활을 수행했다. 그는 최초에 국왕이었고, 이어서 총리와 국가수반, 비동맹 세력의 지도자, 공산주의자들의 명목상의 우두머리, 망명정부 지도자, 그리고 다시금 입헌군주로 등극했다가 2004년에 퇴위했다.
'상여행렬의 시가행진'이 있었던 월요일(2.4) 흰색 상복을 입은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왕궁 근처에 있는 한 공원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섬다잇 어우'(Samdech Eav) 즉 '아버지 대공'에게 마지막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기다렸다.
"난 그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한다"고 말한 샘 유이엄(Saem Yeam, 77세) 씨는 1950년대 '시하누크 통치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유이엄 씨는 공경의 의미로 두 손을 합장한 채 시하누크 통치기를 회상했다. 당시는 캄보디아가 내전과 혼란에 돌입하기 전에 일종의 평화의 섬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엔 그분의 모든 자녀들(=백성들)이 매우 행복했고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발전했던 때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
시하누크 통치기에 관한 향수가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이어져온 캄보디아 군주제가 당면해있는 미래의 운명은 불확실성에 휩싸여있다. 지난 2004년 시하누크 전 국왕이 자신의 아들인 시하모니 현 국왕에게 양위한 이래로, 시하모니 국왕은 훈센(Hun Sen) 총리에 의해 한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전직 공산주의자였던 훈센 총리는 지난 28년간 확고하게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다.
이번주에 치뤄진 장례식은 '아버지-국왕'(King Father)을 떠나보낸다는 의미 말고도, 훈센 총리와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의 승리를 선언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집권당은 이번 국장을 통해 군주제를 속박하려던 오핸 노력에서 성공적인 정점을 찍었고, 칭송을 받으며 수갑을 채웠고, 스스로가 군주제의 유일한 수호자이며 시하누크 전 국왕의 유지를 받드는 유일한 상속자임을 과시했다.
1979년, 베트남 군대가 크메르루주 정권을 붕괴시킨 뒤, 베트남은 당시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ampuche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KPRP)이라 불렸던 현재의 집권 CPP 위성정권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시하누크의 대중적 인기가 그들의 권력에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다. 1980년대 내내, 시하누크는 반정부군 동맹세력의 수장으로서 프놈펜의 CPP 정권에 대항했다. 당시 CPP가 운용하던 언론매체들은 망명 중인 시하누크를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착취적인" 봉권 반동분자라고 폄훼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평화협상이 진행되자 CPP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91년 11월에 시하누크가 캄보디아로 귀국하자, 훈센은 시하누크와 함께 무개차에 올라 시가행진을 펼쳤다. 1992년, CPP의 기관지인 <쁘라찌어쫀>(Pracheachon: 민족)은 시하누크를 칭송하면서, CPP 정권을 과거 시하누크 정권의 "동생"이라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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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FP) 1989년 6월 24일, 캄보디아 내전을 끝내기 위한 파리평화협상을 위해 프랑스에서 만난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과 훈센 총리가 롤랑 뒤마(Roland Dumas) 프랑스 외무장관과 함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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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FP) 1991년 10월 말, 오랜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좌)을 훈센 총리(우)가 영접해, 프놈펜 시가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
금도금된 새장
하지만 CPP는 이와 동시에 귀국한 군주의 야망에 제동을 거는 작업도 시작했다. 1993년, 시하누크가 다시금 국왕에 복위하자, CPP는 그를 새로운 헌법에서 군주의 역할을 상당한 수준에서 제한시켰다. 시하누크의 공식적인 전기 작가였던 훌리오 헬드레스(Julio Jeldre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CPP는 처음부터 국왕에게 자유로운 통치권을 부여하는 일의 위험성을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시하누크 국왕은 농촌지역 주민들에게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모든 일이 타이트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
2004년 9월 24일에 있었던 '시하모니 국왕의 대관식'을 며칠 앞두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농업경제학자 꽁 삼 올(Kong Samol 혹은 Kong Sam Ol)이 궁내청 대신으로 임명됐다. 꽁 삼 올은 현재 집권 CPP의 상임위원회(=정치국) 위원이기도 하며, 현재까지 계속해서 부총리 겸 궁내청대신을 맡고 있다. 왕궁 내의 소식통들에 따르면, 꽁 삼 올 대신은 시하모니 국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국왕이 국민들을 접견하거나 전국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일을 막고 있다고 한다.
시하누크 전 국왕은 최초에 이러한 제한들에 저항하면서, 스스로가 정치적 게임으로 복귀하는 책략을 구사하길 원했다. 하지만 1993년에 '캄보디아 국제연합 과도행정기구'(UNTAC) 체제에서 실시된 최초의 총선 이후 자신의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몇 차례 실패하고 나자, 시하누크는 자신이 점점 더 권력을 상실해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최초의 선거에서 시하누크의 장남인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훈센과 공동 정부를 구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점차로 자신의 부왕에게 저항하면서 시하누크의 바램을 묵살하기도 했다. 1997년 7월, 훈센은 훈센은 '1997년 7월의 유혈 쿠테타를 통해 라나릿 왕자를 축출시켰다. 이 사건은 시하누크의 권력을 더욱 감소시켰다. 그 이후, 시하누크 국왕은 점차로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특히 중국의 베이징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다. 시하누크는 그곳에서 훈센 정권의 부정부패와 불공정을 탄식하는 슬프고도 신랄한 논평들을 온라인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 사이, 훈센은 장시간의 연설과 학교의 건설, 캄보디아의 "작은 국민들"(=보통사람들)과 밀접한 동질감을 형성하는 등, 시하누크가 했던 방식을 모방하면서 시하누크의 지지기반을 잠식해들어갔다. 시하누크 국왕의 측근이었던 시소왓 토미쪼(Sisowath Thomico) 왕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훈센은 항상 시하누크 통치기의 시하누크가 되고자 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훈센은 그 점에서 성공했다." |
시하누크는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하자, 결국 2004년에 스스로 퇴위했다. 그는 자신의 왕관은 아들인 시하모니에게 넘겨줬고, 정치적 장은 훈센에게 넘겨줬다. 이후 훈센은 시하누크가 결코 갖이 않았던 [시하누크의] "아들"로 묘사되는 일이 증가했다.
<그림자 속의 댄싱: 시하누크, 크메르루주, 캄보디아에서의 유엔>(Dancing in Shadows: Sihanouk, the Khmer Rouge, and the United Nations in Cambodia)의 저자인 베니 위됴노(Benny Widyono)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하누크는 이룩하지 못한 커다란 야망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번영하고 평화로운 캄보디아를 통치해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훈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의 평생에 걸친 야망은 이루지 못한 채로 남게 되었다." |
시하모니 현 국왕은 전직 발레 무용수로서,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UNESCO) 주재 캄보디아 대사를 지냈다. 그는 정치적 게임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정치는 훈센 및 집권 CPP가 주도하는 정부에 맡겨두고 있다.
훈센이 독자적인 권력을 응축하면서 라나릿 같은 왕당파 정적을 변방으로 돌려버리자, 시하누크는 자신이 죽기 전에 군주제가 생존하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마침내 퇴위를 결정했다. 시소왓 토미쪼 왕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군주제의 존속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퇴위는 유일한 선택지였고, '국왕 선출위원회'가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
하지만 시하모니 국왕의 등극이 훈센의 공격으로부터 군주제를 구원해줬다면, 그와 동시에 집권 CPP가 바랬던 것, 즉 국왕이 정치의 바깥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함께 들어주었다. 베니 위됴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시하모니 국왕에 관한 책을 쓰게 된다면, 그 제목을 <마지못한 국왕>(The Reluctant King)이란 제목을 붙일 것 같다. 시하모니 국왕은 훈센의 방식에 매우 잘 들어맞는다." |
결과적으로 시하누크의 서거는 정치적 입막음이 되었다. 즉, 그의 장례식은 그가 정치적 삶에서 철수했다고 하는 최종적이고도 성대한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집권 CPP는 별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시하누크의 유지에 대한 유일한 수호자임을 천명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보도들에 따르면, 캄보디아 정부는 우뚝 솟아오른 모습의 다비식장 탑 건설에 500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한다. 이 건축물은 일주일간 진행된 성대하고 정교한 의식을 상징하는 명작으로 남았다.
지난 금요일(2.1), 시하누크의 관을 담은 상여를 앞세운 행렬이 마지막으로 프놈펜 시가를 행진했다. 그리고 시내 전역에 설치된 확성기들은 '아버지 국왕' 및 그가 이룩했던 기나긴 목록의 업적들 을 찬양하는 내용을 방송했다.
게다가 정부는 '쁘레아 보롬 로따나 꼿'(Preah Borum Rattanak Kod)이라는 '공식적인 묘호(廟號)를 추존(追尊)'하고, 1천 리엘(0.24달러) 짜리 '추모 지폐도 발행'했다. 추모 지폐의 전면에는 시하누크 전 국왕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작년 10월 '그의 유해가 중국에서 귀환'했을 때 유해를 운구하는 불사조(=가루다) 모양의 배(=상여 운구차)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유적을 자국 국기의 도안에 삽입한 사례는 '캄보디아 국기'가 유일할 것이며, 장례식 장면을 담은 지폐 역시 캄보디아 화폐가 처음일듯하다.]
그리고 월요일(2.4)에 있었던 화려한 다비식은 전통의 최종적인 절정으로서, 희미해져가는 시하누크의 시대와 떠오르는 훈센의 시대 사이에 확고한 경계선을 그었다. 아시아 국가의 한 전직 외교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훈센은 마지막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그후에는, 군주가 망각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
'관방부'(=국무회의 사무처) 대변인인 파이 시판(Phay Siphan) 차관은 발언에서, 헌법에 따라 국왕은 정치적 권력을 갖지 않지만 여전히 "양심의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관리들이 국사를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국왕을 알현하고 있다면서, 정부가 왕실을 속박하려 한다는 것은 부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소리이다. 어찌하여 우리(=정부)가 [왕실을] 감시한단 말인가? 우리는 국왕에 관한 일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
많은 캄보디아인들은 현재까지도 시하누크의 생애와 업적을 추모하면서 과거에 매달려있다.
[상인인] 마오 소완(Mao Sovann, 54세) 씨는 2월1일부터 [장례식장 주변에서] 전 국왕의 기념사진들을 수백장이나 판매했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공원에 퍼져나간 사진들을 보면, 시하누크는 자신의 통치기에 보였던 단정한 양복 차림의 젊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1960년대 중반의 모습이다. 또 다른 사진들 속에는, 그와 그의 부인인 모니니엇이 1973년에 비밀리에 귀국하여 '크메르루주'의 검은 복장을 한 모습도 담겨 있다. 그리고 훗날 촬영된 시하모니 국왕과 함께 촬영한 사진들도 있다. 마오 소완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이들이 그분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 이 사진들을 남겨주길 바라고 있다. 다음 세대는 그분을 모른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사진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보다 미래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현재는 하나만 알겠다. 훈센 총리가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것이다." |
* 필자소개 : 세바스티안 스트랜지오(Sebastian Strangio)는 프놈펜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언론인이다. 그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관한 기고문들을 쓰고 있고, 최근에는 현대 캄보디아에 관한 책을 저술 중이다. 그의 연락처는 "sebastian.strangio@gmail.co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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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자료에는 훈센 총리의 주장(?)과 달리 시하모니 현 국왕이 점화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군요.
진실이 뭐든 이제 훈센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어 보이네요.
그렇죠..
물론 훈센의 독주 체제는 이미 1997년 쿠테타로 사실상 완결된 것이긴 합니다만...
버팀목을 덧대는 정도로 봐야겟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