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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믿지 않는 가정에서 개척교회 목사가 되기까지 믿음의 여정 -
호산나 교회
정태경 목사
< 서문 >
먼저 이 글은 저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별했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며 어떤 신학적 논리나 보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글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이 글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이 글을 쓰서 이걸 통해 건축헌금을 모금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주님이 주신 감동으로 쓴 글이며 아주 단순한 목적인 호산나 교회와 지역아동 센터가 같이 입주할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건축하기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쓰여진 글임을 밝혀드립니다. 아무쪼록 편하게 읽고 작은 은혜라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아직 예수 믿지 않는 분이 계시면 예수 믿고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믿으면 너무 좋습니다.^^
예수 믿으면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백이 생깁니다.
어느 학자의 비유처럼 마치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대형 창고에서 살면서 외부로 나오지 않아도 아무 불편 없이 살다가 우연히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선한 공기, 지저귀는 새소리, 맑은 물소리
따사로운 햇볕,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르는 신비한 경험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와 같이 아주 신선한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한번만 내 말을 믿고 결심하고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후회 할 일 없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후회하면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여정을 갓 시작한 분이라면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가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여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장거리 경주처럼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 여러분들의 기도는 주님이 거의 다 들어 주시지만 당장에 무슨 응답이 없어도 길을 가다가 포기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살아계신 표적을 경험하십시오. 때가 되면 주님이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기 위해 주님의 마음으로 선한 일에 도전 하십시오.
받기 보다 더 나누고 섬겨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행복이 가득할 것입니다.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그리고 믿음이 성숙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은 정말 하나님이 쓰시기에 깨끗하고 좋은 그릇들이 되기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빛나는 기둥들입니다.
앞서가는 유다 지파들입니다. 성숙한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는 레위 지파들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백성들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험한 곳도 먼저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갈렙처럼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선포하고 먼저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또 따라올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고 여러분 때문에 이 도시가 잘되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 (잠언 11:11)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회 선배님, 후배님, 동역자 여러분 모두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아무 내 세울 것 없는 부족한 후배요, 또 목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 종이 그냥 예수 믿고 좌충 우돌하며 쓴 글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마는 그냥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애쓰고 몸부림 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을 생각하며 어여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아 주시고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믿고 알기로는 아직도 이 땅에는 복음을 위해 몸부림 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한 영혼이라도 붙들고 씨름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진실하게 목양하려는 수많은 목회자 들이 있기에 아직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선배님들은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실망하지 마시고 끝까지 우리 후배들을 믿고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의 바톤을 잘 이어받아 다시 우리 후대들에게 아름답게 물려주겠습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우리는 잘 모르지만 사도 바울을 위해 정말 수고 한 수많은 사람들을 언급하며 감사를 전한 것처럼 저도 이 글을 통해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늘 부족한 나를 위해 기도하며 인내해준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 믿을 때도 반대하시고 목회할 때는 뭐할라고 그런 것 하느냐며 그렇게 반대하셨지만 이제 예수 믿고 물심 양면으로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장모님께 감사들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모로 수고한 형님, 누나들과 처남, 처제등 양가 가족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대학때 교회에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도하고 돕는 자매에게 감사드리고
목회 처음부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신 학림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 생초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개척할 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신 둔산중앙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대전서노회와 유성 시찰과 설교 모임에 불러주셔서 이모양 저모양 많은 은혜와 사랑을 주신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기도와 물질로 돕는 천사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목회에 힘이 되어 주신 부산장신 신대원 교수님과 동기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언제나 부족한 종을 믿고 따라 오며 지극한 사랑으로 섬기고 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해주신 사랑하는 호산나 교회 가족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지면을 빌어 일일이 거론 하지는 못하지만 정말 많은 분들에게 감사들 드립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의 빚을 진 자입니다. 어찌 다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기대와 주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주의 종이 되겟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 모두가 보는데서 작은 일에 충성한 착한 종이라고 주님께 칭찬 한마디 듣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며 진신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꾸벅^^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 목차 >
1부,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덤으로 사는 인생
중학교때 다니던 시골 교회의 추억 ( 믿지 않는 가정에서 교회 다님)
교회 안 다니던 때도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주심 ( 마산 고등학교 )
진주 경상대를 간 것도 주님의 인도하심
고통의 군대 시절을 견디며 ( 군대에서 나쁜 추억을 바꾸어주심)
사방에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직장, 공부, 연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간 대학병원에서 만난 하나님
대학생 때 병원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한 세 가지 서원
버스에서 만난 대학 친구 ( 그 길로 경상대 앞 개척교회 다님)
도서관에서 만난 자매의 뒷모습에 반하다
새벽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 ( 자매를 위한 기도 )
부활절 간증과 첫 프로포즈의 추억
거절을 승낙으로 바꾸기 위해
행복했던 첫 사랑의 시간들
여름 수련회의 은혜 ( 내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
다른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직장도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태의 열매로 주신 세 아들
의영이를 잃어 버렸다가 찾은 은혜
에벤에셀 (도움의 돌) 교통사고에서 건지심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하심
삶의 즐거움과 어려움의 때
어떤 일을 해도 재미가 없고 눈물만 흐를 때에 부르심
3일의 금식 기도에서 기도 응답을 받고
가족 전도 ( 가족도 구원하지 못하고 어떻게 전도사가 되겠는가? )
2부,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 첫 사역지로 인도하심 ( 생초 교회 )
- 부산 장신대를 다니며 ( 시골에도 좋은 목회자가 있어야 된다 )
- 나를 떠민 사람이 누구야? ( 사경회에서 새겨진 말씀 )
- 생초 교회에서의 은혜 ( 나누면 더 채워주시는 은혜 )
- 의진이 교통사고를 통한 은혜 ( 자녀도 주님의 것입니다)
- 새벽 기도의 추억과 은혜
-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겨울 밤 ( 동계 캠프에서 군불을 떼며 )
- 하나님 말씀을 읽다가 흘린 눈물 (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는 시간 )
- 말씀의 능력 ( 아이들은 장난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
- 말씀 묵상의 힘 ( 경건 훈련의 시간과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경험 )
- 낮은 자세로 보아야 보이는 고사리 ( 낮아짐의 은혜 )
- 눈오는 날 잃어버린 강아지
- 목에 밧줄을 풀어주며
- 텃밭을 가꾸며 (귀농의 시간)
- 조립식 2층 사택에서의 추억 ( 좋은 일 하다가 낙심하지 마라)
- 학교 앞 전도의 추억
- 아동센터를 통한 부모님들의 감사
- 장례식과 노인 대학을 통한 어른들의 변화
- 다양한 경험을 위해 도시 교회로 가기를 기도함
- 말레이시아 선교지를 다녀와서
3부,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 경상도 시골 촌놈이 전도사로 와서 겪은 에피소드
( 신맹기, 갱민아, 방언 통변의 은사를 받으라 )
- 아동부 예배의 절묘한 조화 ( 전라도 부장 권사님과 조화 안거. 인나)
- 목사 안수 받으면서 서원 ( 더 낮은 곳으로 가리라 )
- 장기 기증 서약 ( 탁 교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부활 소망 )
-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 체육대회와 경옥고 사건)
- 주의 종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직해야 한다 (죽다가 살아난 경험 )
- 말씀을 받은 대로 실천하라 ( 희년을 선포하다 )
- 교회 개척을 위한 준비 ( 최후의 선택으로 한 개척 )
4부.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 기도하며 얻은 예배당과 옥탑방
-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어가는 교회
- 세족식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 ( 아내가 적은 글 참조 ^^ )
- 첫 이웃초청 예배를 드리며 ( 세옹지마의 말씀을 주심 )
한 밤중에 만난 하나님 (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
- 광야의 시간을 보내며 ( 갈등의 시간 속에서 깨달음 )
pcss의 은혜 ( 베트남 선교지에서 만난 하나님 )
- 제자도에 대한 깨달음
- 전도 티슈를 준비하며 받은 은혜 ( 정확한 하나님의 손길 ^^ )
- 축구와 새벽기도에 대해 생각하다가 받은 은혜^^
- 2010년 개척 첫해의 감사 제목들 ^^
사람들을 보내주심 ( 기도응답으로 사람들을 보내주심 )
나누고 섬기는 교회가 되라 ( 장학헌금을 통한 은혜 나눔 )
5부,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러곳을 다녔다. (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고등학교는 마산으로, 대학은 진주로, 군대는 창원방범대와 고성 경찰서에서, 직장은 통영,
자매를 만나러 갈 때는 거제로, 직장 때문에 부산으로, 진주로, 생초로 대전으로) - 영어가 잘 안되서 선교지에 선뜻 못가지만 말레이시아 3번, 베트남 1번,
중국 2번, 태국 1번, 성지순례간곳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 터키) 까지
합치면 8개국을 다녀왔다. 주님이 어디를 보내든 갈 수 있다.
- 결혼해서 지금까지 이사를 많이 했다. ( 통영 신혼집, 부산 직장으로,
진주로, 교회 근처로, 시골로, 대전으로,,,, 많은 이사를 다녔다 )
- 집도 다양하게 살아 보았다. ( 아파트, 투룸, 교회 사택, 2층 조립식집 , 쥐가 뛰어다니고 텃밭이 있는 시골집, 단독 주택, 4층 옥탑방 까지 )
- 교회 이전을 위해 여러곳을 알아 보았다 ( 경매, 건물 매입, 땅 구입, 다 막힘)
- 새로운 땅을 향하여 가는 것 전혀 두렵지 않다
( 노은 3지구 신도시 – 여리고 정탐꾼 2명처럼 다른 목사님과 밟고 왔다 )
새벽 말씀에 기생 라합처럼 돕는 자를 붙여주시겠다 하신다.
이 땅이 더 좋다. 한 군데 더 가보자. 새로운 땅을 발견함
- 왜? 그 땅으로 가려고 하는가? ( 교회 이전의 원인과 계기 )
1, 월세 부담이 너무 크다. ( 매월 140만원 교회와 사택 월세와 관리비 금액 )
말레이시아 선교사님과 대화 중 내 마음에 소원을 주심
그 돈이면 대출해서 이자내고 조금만 더 보태서 건물을 사라
월세 140만원은 대출 원금 3억원이 넘는 금액의 이자다
지금까지 5년 동안 매월 한번도 거르지 않고 월세를 보냈다.
또 다시 월세를 인상하겠다 하신다. 나가라는 사인이다.
우리가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월세를 받을 수 있다고 하신다.
2, 다른 분과 대화중 새로운 비젼을 주심
교회 없는 곳으로 가라 ( 사도 바울은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겠다 )
주님의 인도하심 기대 ( 행 16장 한 여인이 집으로 들어오라 하면 가겠다 )
선교지라 생각하고 전도하기 좋은 곳으로 가라
3, 더 좋은 곳으로 가라 ( 2층 예배당 40평, 1층에 아동센터 40평, 3층에
사택 2개가 생긴다. 땅 값도 상승한다, 400만원이 800만원 예상됨 )
예배도, 지역을 향한 섬김도, 기도도, 전도도 훨씬 좋아진다.
-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주님이 전부입니다 ( 새벽에 찾아오신 하나님: 내가 무엇을 도와줄까 ? )
- 내 전부를 드린다. ( 개척교회 섬길 때도 최선을 다해 섬김.
전도사 때도 내 직장, 학교, 아이들도 ,물질도 모든 것 드리고 따라갔다.
목사 안수 받으면서 내 몸도 드렸고 개척하면서 내가 가진 전부를 드렸다.
지금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고 가만히 서서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린다.
“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 13)
1부,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덤으로 사는 인생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고성의 조그만 시골 마을이다. 농사일을 하시던 부모님의 4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사업을 하는 일본 재일교포로 온 가족이 일본 동경에서 잘 사셨는데 우리 어머니만 한국에 시집와서 경남 고성이라는 완전 시골에 살고 계셨다.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자주 아프기도 하셨는데 그런 어려운 중에도 자녀를 주렁주렁 많이 낳고 사는 어머니를 보니 외할아버지는 많이 속상하셨는지 또 나를 잉태하고 찾아온 어머니를 보고는 화를 내시며 그만 뱃속의 아이를 지우라고 하셨단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못내 서운해 하시면서도
마지 못해 어느날 삼천포의 산부인과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며칠후 다시 오라고 하셨단다. 내가 태어난 것이 음력 4월 22일인데 그때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짓다 보니 농사 일이 바빠서 아마 한참 시간이 지나고 병원에 가셨다. 이번에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해 보더니 “지금은 너무 늦어서 아기를 지우면 산모도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그냥 낳으라 하셨단다”
그렇게 해서 안 태어날 뻔 막내 아들이 덤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나다^^.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쓸모없는 존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속상하고 듣기 싫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난후에 보니 정말 너무 감사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셨구나 생각이 들어서 감사했고 그 누군지 이름도 모르는 의사가 너무 감사했다.
또한 애기 많다고 외할아버지에게 온갖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나를 낳아 이렇게 잘 길러주신 어머니에게 정말 감사들 드린다. 나중에 자라면서 들으니 이렇게 태어난 아기를 보고 우리 작은 누나는 “ 이 좋은 것을 잃어버릴 뻔 했다”고 하면서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언젠가 박정희 대통령도 이렇게 어머니가 않 낳으려 하다가 덤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교회 여자 집사님 한분도 다섯 자매의 막내로 태어나면서 아버지와 시댁에서 딸이라서 밉다고 추운 겨울에 냉방에 밀어 놓았다고 했는데 그 딸이 지금은 그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제일 효녀다^^ 나도 우리 집에서는 조금 효자지만 ㅎㅎ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추억과 감사
아버지는 늘 부지런하셨다. 어릴적부터 농사를 지으셨고 일제 시대와 6,25 동란을 거치면서 안해본 일없이 고생하셨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여러 직업을 거쳤다. 멧돌로 콩을 직접 갈아서 만드는 두부 장사를 했다. 두부 장사와 함께 시골 장날에는 깨를 볶아서 직접 손으로 기름을 짜서 파는 참기름 집도 했다. 넓은 타작 마당에 블록을 만드는 공장 ( 보리꼬 공장)을 하신것도 기억난다. 농사를 지으시면서 소도 키우셨는데 소가 살림 밑천이라고 잘 돌보시려고 풀을 베고는 지게에 지고 오시면 산처럼 만들어서 지고 오셨다. 멀리서 보면 사람은 안 보이고 풀만 혼자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일만큼 크게 만들어서 지고 오셨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할 때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의 모습을 실재로 나는 아버지에게서 보았다. 여러 가지 육체의 노동과 너무 힘든 일로 자주 술을 드셨는데 그런중에도 아버지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벌써 논이나 밭에 나가셔서 아침 일을 하고 오셨다.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나는 아버지 식사하러 오시라고 부르러 밭으로 가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잠도 많고 게으른 내가 새벽 기도를 위해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닮은 것 같다.
아버지는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셨지만 당신의 자녀들을 멀리 도시에 학교에 보내시지는 못했다. 형님 누나들은 모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나만 대학까지 졸업했고 그리고 신대원과 지금은 다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막내라고 끝까지 공부시켜 주신 부모님의 헌신에 감사할 뿐이요 부족한 나를 돌보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고등학교를 마산의 명문 마산고등학교에 진학한 것도 주님의 은혜다. 그때는 기술을 가르치는 공업고등학교를 공고라 불렀는데 아버지는 나보고 공고에 장학금 받고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역사를 좋아하고 기획하고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이리저리 다니는 걸 좋아한다. 공고가
내 적성에는 안 맞는 것 같았다 또 나보다 공부 못하는 애들도 다들 인문계 고등학교 가는데 나만 공고에 가는게 싫어서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반드시 효도하겠다고 하며 아버지를 졸라서 겨우 인문계 학교 가는 승낙을 받아냈다. 지금 세월이 지난후 돌아보니 그때 기술계 학교 간 친구들이 훨씬 나보다 돈도 잘 벌고 효도도 더 많이 한다. 지금 우리집의 아이들은 큰애는 자연 과학을 좋아해서 기상을 연구하는 대기과에 다닌다. 둘째는 태권도학과에 다니고
셋째는 성남고 뮤지컬과 다니면서 현대 무용을 전공하려고 공부한다. 진작부터 아버지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성공할 걸 아셨나 보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씀 중에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 떡 얻어 먹는다”고 했다. 실제로 부모님 말씀에 순종한 날 밤에는 어떤 집에서 제사 지냈다고 하면서 밥과 떡을 가져와서 자다가 일어나서 떡을 먹은 기억이 난다. 부모님 말씀은 뭐든지 잘못되는 게 없구나 새삼 깨닫는다.
어머니는 늘 다른 사람에게 뭐든지 나누어 주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여름철에 맛있는 칼국수를 하면 길 옆의 마당에 펴놓은 평상에 앉아서 먹는데 지나가는 사람을 다 불러서 대접한다.
아버지 생신이나 뭐 집안 행사를 하면 꼭 동네 어르신들을 아침부터 식사하러 오시라고 모시러 다녔다. 어디 다른 집에 가면 빈손으로 보내는 적이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하숙할 때도 야채등 반찬거리를 들고 가게 하셨다. 멸치나 마늘이나 파, 고추등 차에 타면 냄새나는 것을 억지로 가져 가게 하셨다. 그때는 멋진 마산고 교복을 입고 다닐 땐데 스타일 구겨져서 정말 싫었다.
또 하숙집 아주머니가 내가 야채를 좋아하는 줄 알고 내 도시락 반찬을 맨날 야채만 싸 주셔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나도 고기반찬 소시지 반찬, 계란반찬을 훨씬 좋아하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웰빙이다 해서 건강을 생각해서 야채나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즐겨먹는데 나는 지금도 그런 것 보다 햄이나 소세지가 훨씬 좋다. 어릴적 못 먹은 한이 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 덕분에 차에서 냄새가 나더라도 어디갈 때 뭘 들고 다니더라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목사가 되고 나서도 명절이나 생일 되면 뭘 들고 가서 어른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찾아뵙는 것도 그때 훈련받은 덕분이다.
중학교 때 다니던 시골 교회의 추억
우리 집은 마을의 다른 집안처럼 유교적 전통 속에서 그냥 조상에 제사지내는 가정이었다.
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우리 작은 누나가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옆 동네에 사시는 우리 아버지의 사촌인 고모가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권사님 이었다. 고모님은 늘 우리 집에 오시면 교회 다니시라고 부모님을 전도하셨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연히 나도 중학교때 친구를 따라 고모가 다니던 교회로 가게 되었다. 나중에 고모님은 내가 예수 믿었다고 너무 좋아하셨다. 열심히 주일 낮 예배도 저녁 예배도 다녔는데 기억나는 것은 열심히 찬송가를 불렀던 기억과 추운 겨울에 성탄절 발표회 준비하던 것과 새벽에 추운 날씨에 친구들과 함께 이동네 저동네를 다니면서 노래 부르며 새벽송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신앙도 잠시뿐 믿음의 기초가 없다보니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교회를 떠나버렸다.
교회 안 다니던 때도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주심 ( 마산 고등학교 )
고성 시골의 하일중학교에서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그때 당시에는 최고의 점수를 받아야 들어가는 마산의 연합고사에 합격했고 가장 좋은 학교인 마산고등학교에 배치를 받았다. 부모를 일찍 떠나 아무 연고 없는 낯선 마산의 객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방황할 때도 내 주변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여러 번 하숙집을 옮겼는데 모두 주인 아주머니들이 교회를 다니거나 성당을 다니셨다. 그래서 새벽기도하고 구역예배 드리는 것을 자주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들은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을 것 같다. 한번은 하숙집 어린 아들이 장난으로 나의 목에 넥타이를 메고 뒤에서 당기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공부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신경도 안 썼는데 나중에는 점점 숨쉬기가 곤란해지고 정신이 아득해 지면서 그만 두라고 손짓을 했지만 이미 힘이 빠지고 말하기가 늦었다.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완전 나른해 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넥타이를 풀어주었다. 지금도 생각해보니 아찔한 순간이었다. 장난으로 시작한 넥타이가 완전 사람 잡을 뻔 했다. 그때도 비록 나는 교회를 안 다녔지만 나를 잊지 않으시고 절체 절명의 순간에 다른 사람을 보내 구해 주신 분이 주님인줄 알고 감사를 드린다.
내가 다닌 마산고등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배웠다. 그분은 책 한권만 들고 오시면 수업시간 한 시간 내도록 칠판 가득히 필기해 주시면서 역사 이야기를 해주셨다. 동양과 서양을 오가면서 그 역사적 사건과 의미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셨는데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분의 영향으로 대학교 갈 때 역사 학자나 교수를 꿈꾸고 역사관련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내 뜻 데로 되지 않아 취업이 잘 될 것 같은 다른 과를 지원했지만 지금 목사가 되어서 성경 한권만 들고 있어도 한 시간 내도록 설교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렇고 오래전 역사인 성경과 현 시대를 통찰하며 삶의 지혜를 얻는 것은 그 선생님의 영향이 크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다. 인생에 가장 의미있는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자요
성경교사가 되었다. 명강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성경을 잘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통전적으로 해석하는 목사가 되고 보니 어릴적 내 꿈을 주님이 다 이루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린다.
인생의 길은 지나고 보면 내가 볼 때는 멀리 돌아가는 것 같지만 주님은 내 길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내 길을 정확하게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 ^^
진주 경상대를 간 것도 주님의 인도하심
대학진학을 위해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진주에 있는 국립 경상대로 진학했다. 처음 희망은 서울쪽으로 가보고 싶었지만 그때는 학교에 기숙사도 없고 하숙집이나 머물 집도 마땅치 않고 다른 사립대학은 학비가 비싸고 서울대 갈 실력은 안되고 생각하다 보니 경상대 밖에 없었다.
일단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하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도 가까워 농사 지을 때 자주 찾아뵙기 좋아서 진주 경상대를 선택했다. 그러나 처음 가본 경상대학교 이미지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저 진주에서도 완전 구석에 시골 논밭 벌판 옆에 덩그러니 있는 학교에 잘 적응이 안되었다.
한참을 적응하기 힘들어 하다가 겨우 동아리에도 학과에도 적응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나중에 예수 믿고 학교 앞에 교회를 다녔고 또 다른데 직장 다니다가 교회 때문에 다시 진주에 와서 살고 했다. 전도사가 되어 생초로 이사를 하기까지 진주에 뿌리를 내리고 산 것은 거의 18년 가까이 살았다. 진주가 내 인생의 제2의 고향이다. 지나고 나니 진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린다. 그곳에서 예수를 믿었고 학교 앞에 있는 작은 교회 다니면서 지금도 믿음으로 교제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났고 그 교회에서 믿는 자매를 만나 결혼했고 서리집사 안수집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세 아들을 선물로 얻어서 재미있게 키웠고 직장도 즐겁게 다녔고 가게를 얻어 장사도 했고 인생의 가장 좋은 청년의 때요 황금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늘 교회 중심으로 살았던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금 자리였다.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진주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고통의 의경 시절을 견디며 ( 군대 다시 가는 악몽을 바꾸어주심)
.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투쟁으로 한참 데모를 많이 하던 시절의 87년에 의경으로 군대를 입대했다. 대학교 다닐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3,15일 되면 의거일 기념이라고 4,19일 되면 민주화 항쟁 기념일 이라고 5,18되면 광주 민주화 항쟁기념일 이라고 친구들을 따라 데모하러 다녔다.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고 앞에서 있는 친구들에게 돌멩이 던진 것을 회개한다. 그러다가 내가 군대 갈 때가 되었다. 친구들은 전부 육군으로 입대했는데 나는 의경이 교통 경찰업무등 멋진 제복을 입고 아주 편하고 근무 환경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는 진실인줄 알고 의경으로 지원했다. 설마 의경이 데모 진압하는데 근무 할 줄은 몰랐다. 전투경찰이 있기에 그들이 다 데모 진압하는 줄 알았다. 한창 데모가 심할 때 6.10 사태가 나고 전국이 시끄러울 때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때 의경이 지원제도 였는데 35개월 복무기간이었다.
나는 대학교에서 2년 교련훈련을 받았기에 3개월이 단축되어서 32개월 복무했다. 논산 훈련소를 거쳐 수안보 경찰 학교에 갈 때만 해도 의경은 전혀 다른 근무환경인줄 알았다. 의경에 입대 하길 잘했다 했는데 웬걸 자대 발령 받는다고 부르는데 나는 창원 방범대라고 한다. 방범대가 뭐하는 곳이냐 물어보니 낮에는 경찰서 지원 근무 나가고 야간에는 방범 활동하는 곳이라 한다.
경찰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실력있는 애들은 다 그리 빠졌다. 좋은 곳이구나 생각하고 그런 근무정도야 뭐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좋다고 했는데 우리를 데리러온 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버스가 왔는데 유리창엔 철망이 쳐져있고 안에 들어가 보니 방패와 방석복과 헬멧이 즐비하다
그 버스를 타고 창원으로 오는데 신병들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났다. 긴장감이 가득 흘렀다.
와! 이제는 죽었구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었다. 경남 도청을 지나 버스에 내리자 마자 본 회색의 3층 건물은 공포의 분위기였다. 우리 고참들이 우리를 힐껏 힐껏 쳐다보는데 완전 불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시작된 훈련은 실전에 투입되는 훈련이었다. 고참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우리는 방패로 막는 훈련이었다. 학교 다닐 때 아무것도 모르고 돌멩이 던질 때 앞에 있는 전경들 몸에 맞으라고 던졌는데 정말 고참들이 그런 무자비한 마음으로 던진다. 새로온 신입 몇 명을 세워놓고 수십 명의 고참들이 돌멩이를 던지는데 정말 온몸으로 막았다. 이게 훈련이 아니고 실전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의경 자대 생활은 매일이 전쟁의 연속이었다. 훈련을 마치면 실전에 바로 투입되었다. 농민들의 데모에 동원되어 달걀이나 오물을 던지면 맞았고 대학생들의 학교 앞 데모에 동원되어 돌멩이를 막았고 화염병은 피했다.
창원시내 수많은 공장의 근로자들이 벌이는 노동 투쟁에 동원되면 쇠가루와 볼트가 날아왔다. 잘못 맞으면 눈이 실명되는 위험에서 근무했다. 의경 생활을 길거에서 데모 막다가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모른다. 밥차가 오면 겨우 한그릇 먹고 또 데모 현장으로 갔다.
최루 가스 속에서 내 인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다친 사람도 무척 많았다. 나중에는 우리도 악이 바치면 데모 하는 사람들을 향해 무자비 하게 방패와 곤봉을 휘둘렀고 최류탄을 쏘았다.
겨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대로 돌아오면 또 새로운 공포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틈난 나면 거듭하는 진압훈련과 혹시라도 진압 현장에서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졸병들에게는 가혹한 얼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도 주먹으로 많이 맞아서 내 가슴에는 파스가 떠날 날이 없었다. 잠자기 전에도 침상에서 얼차례 받고 자다가도 일어나 머리 박아를 시키고 식당에서도 식판이 더럽다고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얼차례를 받았다. 하루라도 편하게 넘어가면 뭐가 잘못되나 불안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이런 의경 시절 이야기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정말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우리 부대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고참들이 많았는데 나는 대학 2년을 마치고 입대했고 그들은 고등학교 졸업후 군대 바로 온 친구들이었다. 심지어는 우리 동기의 친구의 동생도 있었다. 그들은 “ 아니 꼬우면 군대 빨리 오지” 하는 말로 우리를 조롱했다.
군대 시계는 거꾸로 메달아도 돌아 간다고 했는데 내무부 시계도 그렇게 돌아갔다.
점점 고참이 되고 나중에 다른 경찰서로 발령을 받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 인생에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겨우 통과했다.
제대하고 나서도 몸 상태가 안좋거나 하면 꾸는 가장 큰 악몽은 다시 군대 가는 꿈이었다.
다시 방범대로 들어가는 꿈을 꾸면 얼마나 내 마음이 힘들었는지 모른다. 다시 입대라니 헐 ~
다시 그 지겨운 시간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그 왠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정말 제대후 현실에서 만나면 멱살 잡고 패주고 싶은 사람들이었는데 다시 고참으로 만나다니 이럴 수는 없다. 이건 아니지, 내 나이가 몇인데, 제대 한지가 언젠데 뭔가 잘못되었을거야 ,,,,
꿈속에서도 그렇게 넉두리를 하며 악몽을 꾸다가 잠을 깨고는 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예수 믿고 나서는 그 꿈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예수 믿고 난후에는 군입대하는 꿈을 꾸어도 악몽이 아니다. 처음에는 꿈속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서 안부를 물어보고 서로 친하게 지내다 온다. 나중에는 입대하는 꿈을 꾸면 그 사람들을 만나서 전도하고 온다. 나를 괴롭힌 그 고참들은 내가 벌써 다 용서했다. 꿈속에서 만나면 기도해주고 전도하고
예수 믿으라하고 시간 내서 대전에 놀러오라고 하고 꿈을 깬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군대 입대하는 꿈을 꾸지 않는다. 사탄이 내 마음에 여러 가지 근심을 심어보다가 이제는 군대 가는 꿈을 꾸어도 평안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전하고 오니 더 이상 악몽을 꾸지 못하게 되었나 보다.
예수를 믿으면 꿈도 바뀐다. 늘 예수 믿으면 꿈 (비젼)도 바뀐다고 하지만 진짜 잠자다가 꾸는 꿈도 바뀐다.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를 믿으라.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라. 완전 마음의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날마다 좋은 꿈 꾸기를 ^^
사방에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직장, 공부, 연애, 아무것도 안될 때)
2월에 제대하자마자 3월에 3학년 복학을 했다. 아무 준비 없이 복학했기에 열심히 공부했다.
일단은 취업에 포커스를 맞추고 영어와 자격증 관련 공부를 했다. 어머니가 아프실 때 늦둥이로 태어나서 그런지 나는 어릴적부터 심장이 약하여 조그만 뛰면 헉헉거렸다. 대학 들어와서 건강을 위해 테니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테니스를 배웠다. 지금도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테니스의 힘이 크다. 좋아하던 테니스도 공부를 위해 거의 끊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잘 몰랐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의 전문 분야를 연구해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소득을 보장받는 자격증을 공부했다.
시험을 쳤지만 떨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도 못하고 계속 공부만할 자신이 없었다.
어릴적부터 암기와 여러 시험을 위한 공부는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시험에 떨어지고 취업을 위한 현실에 부닥치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대학 4학년 졸업반이 다 되어가는데 막상 해 놓은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버지 말씀 듣고 공고를 졸업하고 공대를 가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기계나 건축이나 토목등 취업이 잘되는 공대 친구들이 부러웠다. 도서관에 앉아 밤늦게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 밀려왔다. 집안이나 학벌이나 외모나 돈이나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으니 여자 친구도 한번 제대로 못사귀어 보았다.
맨날 불쌍한 남자들끼리 도서관에 모여서 할 게 없으니 공부만 죽어라 하는 시절이었다.
공부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시간과 비례 한다고 했는데 그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지만 목표와 어떤 방향을 못 잡고 막연히 잘 되겠지 기대하고 공부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 시간들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의 취업난 소식을 들으면 그때 내 모습이 생각이 난다.
어머니를 모시고 간 대학병원에서 만난 하나님
위기가 기회라고 했다. 점점 내 삶에 불안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시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생겼다 우리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순천향 대학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병간호할 사람이 없어 서 마침 3학년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라 공부하던 걸 멈추고 대학병원에서 병간호를 했다.
어머니는 많이 아프다고 하시는데 병원에서는 원인을 모르겠다 한다. 혹시 들쥐가 옮기는 쯔쯔가무시 병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다. 어찌할 바 모르는 답답함과 아직 취업해서 돈도 못 벌었고 효도도 못 했는데 혹시라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찌하나 하는 불안감과 함께 아무것도 못해 드리는 무능한 내 자신에 대한 괴로움이 찾아왔다.
며칠을 어찌할 바 몰라 눈물로 지새는데 마침 같은 병실에 입원한 어머니를 병간호 하는 같은 방 친구가 자기랑 같이 교회에 기도하러 가자고 한다. 또 같은 병실에 입원한 마산 여고 졸업한 누나가 있었는데 내가 마고 졸업했다고 동생처럼 나를 잘해주었는데 나보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순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구를 따라 병원 앞 교회로 갔다. 정말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교회에 갔는데 마치 주님이 나를 기다린 것처럼 푸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에 감격해서 처음 들어간 낯선 교회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기도한 제목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니 고쳐달라고 살려달라고 한 것 밖에 기억나는게 없다
며칠을 밤마다 기도하러 갔다. 기도 할 줄도 모르지만 눈물로 기도했다. 며칠후에는 병실에 와서
어머니 손을 잡고 머리맡에 앉아서 잠잠히 기도했다. 어머니 상처에 손을 대고 조용히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어머니 상태가 점점 좋아지더니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결국 입원한지 보름 만에 퇴원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병원 갈 때는 돌아가실 것처럼 했는데 올때는 차타고 건강한 모습을 퇴원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다. 치유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이시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어머니는 건강하시다. 예수 믿고 교회도 잘 다니시니 감사^^
예수님을 만나고 병원에서 한 세 가지 서원
병원에서 친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매일 교회에 다니며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세 가지 있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어머니를 고쳐 주셔서 건강하게 퇴원하게 하시면 내가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는 서원 결심이었다.
첫 번째는 앞으로는 하나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어릴적 교회 다니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주님곁을 떠났지만 이제는 하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삶고 평생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 아들이 학교 숙제라고 우리 집의 가훈이 뭐냐고 물을 때 우리 집의 가훈은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고 우리집 가훈을 이야기했다.
지금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어떤 이단이나 사이비나 좋은 곳이 있다고 해도 나와 내집은 주님만 섬긴다. 그분은 내가 원하는 것 다 들어주셨는데 우리가 그분을 배신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서원은 주일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동안 중학교 때 교회를 떠난 이후에 주일도 없이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철저히 주일을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에수 믿고 난후부터 지금까지도 거의 지키고 있다. 처음 신앙생활 할 때 가족 결혼등 특별한 일이 있었을 때 빼고는 한번도 주일을 범하지 않고 약속을 지켰다.
세 번째 서원은 내가 가진 재능이나 돈이나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께 말씀 드린 것이 있다. “ 하나님 정말 저를 잘 선택하셨어요. 저 같이
이성적으로 살려고 하고 세상 지식에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을 선택해서 기적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 믿게 하셔서 다른 나 같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니 정말 나를 잘 선택하셨다“ 고 고백했다.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이성적인 사람을 만나도
세상 지식에 논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을 만나도 나는 자신있게 내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한다.
내가 가진 지식도 재능도 주님의 것이다. 물질도 하나님의 것이다. 예수 믿고 난후 바로 십일조 생활을 했다. 가난한 대학생이 용돈을 1만원 받으면 천원을 했고, 직장에 들어가서 100만원을 받으며 10만원을 했고 소득이 늘어나면 너무 감사해서 감사헌금과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려운 교회나 선교사를 돕고자 선교헌금을 했고 교회 건축을 위해 땅을 사고 성전을 건축할 때도 힘껏 건축헌금을 드렸다.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주님께 고백하고 서원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믿음은 더욱 굳건해져서 물질도 자녀도 아내도 교회도 내 생명까지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다.
버스에서 만난 대학 친구 ( 경상대 앞 교회로 인도하심)
서원 기도하고 어머니가 병이 나아서 퇴원했지만 지금까지 다닌 교회나 아는 교회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또 뭐라고 하면서 들어가야 할지도 어떻게 교회 가야할지를 몰랐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건설현장의 알바를 시작했다. 한주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토요일이 마침 성탄절이었다. 금요일 오후에 알바를 하다가 보니 현장 가까운 시골 교회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보이고 성탄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 아 내일이 성탄절이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뭘 하고 있지? 알바하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이 생각이 났다. 교회를 가야겠다.
저녁에 자취 집으로 돌아가는 시내 버스안에서 대학 같은과 친구를 만났다. 방학이라 공부하고 있을텐데 버스에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 너는 어디갔다 오노 ? 나는 노가다 알바하고 온다”
“ 너는 어디가노? ” “나는 지금 교회 간다. 성탄절 준비하러 가는데 너도 같이 교회 갈래 ?”
나보고 교회 같이 가자는 소리가 마치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그 길로 버스에서 내려 친구를 따라 바로 학교 앞 작은 교회로 갔다. 성탄절 준비가 한창이었다. 먼지 나는 노가다 현장의 옷을 입고 간 내 모습에 아랑곳없이 그곳에 있는 형제 자매 모두가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곳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참 평안을 누렸다. 중학교 3학년 성탄절을 끝으로 교회를 떠났던 내가 대학 3학년 성탄절 전야에 교회로 돌아왔다. 성탄절이 내게는 뜻 깊은 날이다.
처음 간 교회에서 낯선 자매들이 나보고 악수를 청한다. 세상에 얼마 만에 잡아보는 여자 손인가? 나를 처음 잡은 자매의 따뜻한 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기가 대학부 부회장 이라고 인사 하면서 잘 왔다고 성큼 먼지 묻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쑥쓰러워 얼른 손을 뺐지만 너무 좋았다. 짠 ~ 벌써 눈치 챘겟지만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손이다. 자주 잡아보는 내 사랑하는 장성숙 자매. 내 아내의 따뜻한 손이다. 주님은 그렇게 내가 반드시 주일을 지키겠다고 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한주도 그러지 않고 정확하게 내가 섬길 교회로 인도하셨다.
당연히 그날부터 내가 전도사가 되어 그 교회를 떠날 때 까지 그 교회를 다녔다.
좋은 교회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도서관에서 만난 자매의 뒷모습
예수 믿고 삶의 목적이 바뀌었다. 내 성공과 야망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주일 낮, 주일 밤 예배를 드리고 수요 예배와 금요 기도회를 다니면서 새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안 믿는 친구들 보고 같이 교회 가자고 전도하면 나보고 적당하게 미치라고 놀렸다.
그렇지만 그 좋으신 주님을 놓칠 수 없었다. 그동안 멀리 떠났던 게 미안해서라도 더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신앙이 자라면서 공부하기 전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세례 받기 위해 신구약 성경을 한번 읽어오라는 목사님의 권면도 있었지만 성경 읽는 게 좋아서 단숨에 읽었다.
잘 모르는 단어들은 적어두었다가 주일날 만나면 친구들에게 물어보면서 그렇게 신앙이 자랐다.
어느날 중앙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낯익은 자매의 뒷모습이 보였다. 도서관 5층 열람실에 공부하는 자매 중에 우리 교회 사람은 없는데 우리 교회 자매가 공부하러 왔다.
긴 머리에 약간 곱슬 파마를 하고 뒤로 묶은 모습. 바지는 청바지 차림이고 자켓을 자주 입고 다니는 모습이 영낙 없는 우리 교회 대학부 부회장 자매의 모습이다. 예배드릴 때 보면 앞 모습은 완전 예쁜 자매인데 뒷 모습은 남자 스타일이라 특이하여 잘 기억한다.
얼른 가서 보니 그 자매가 맞다. 빙고 ~ 내가 아는 체를 하니 그 자매도 마지못해 반가워한다.
도서관에서 공부나 하지 왜 쓸데없이 아는체 하고 말을 시키느냐 하는 그런 표정이다.
그래도 아랑곳 없이 열심히 아는체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동안은 마산에서 언니랑 같이 살면서 통학 했는데 이제 4학년이고 공부를 위해 진주로 이사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부터는 자매도 매일 도서관에 공부하러 올것이라 한다. 이런 기쁜 소식이~
안 그래도 믿는 친구들이 주위에 없어서 외로웠는데 가장 믿음 좋은 부회장 자매가 공부하러 온다니 얼마나 복음의 기쁜 소식인가? 당연히 내일부터 도서관 자리를 미리 잡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거의 열람실에서 몇 번째로 빨리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출근하던 중이었다.
도서관 자리 잡기는 식은죽 먹기다. 그것도 믿음의 자매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못하랴.
공부할 최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내 옆에 그 자매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매일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열심히 공부하라고 자리를 잡아주었는데 나중에는 그 자매가 옆에 없으면 외롭고 어디 수업 갔나 신경이 쓰이고 점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같이 공부하고 같이 예배드리고 밤 늦게 집으로 데려다 주는 동안에 완전히 내 마음을 사로 잡아 버렸다. 첫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갑자기 밥 맛이 없어졌다. 자매가 옆에 오면 심장이 두근 두근 거리고 성경을 읽어도 자매에 관련된 구절만 눈에 보였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잠언 16:22)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잠언 31:1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30)
저 자매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현숙한 여인이다. 가장 좋은 자매를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혼자만의 믿음이 생기며 그때부터 혼자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는 꿈을 꾸는 열병에 빠져버렸다.
큰일이다. 나 혼자 짝사랑에 빠져버렸다. 자매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온갖 여러 가지 생각에 부끄러워 자매의 얼굴을 못 쳐다보겠다. 고백해 볼까?
“ 오 ! 주여 이 무슨 시련을 주시나이까? 이 자매가 내 마음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
주여 어찌하오리까? 기도해야겠다. 기도가 답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믿음이 생겼다.
새벽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 ( 자매를 위한 기도 )
사실 어떻게 기도 할 줄도 모르고 믿음도 없는 내가 새벽기도 작정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무슨 연유로 젊은 초신자 형제가 새벽에 기도하러 왔는지 모르기에 걱정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여튼 하나님이 그 자매의 마음을 만지셔서 나와 사귀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길 바라며 새벽 기도를 다녔다. 드디어 며칠 만에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기도한 것과 다른 응답이 왔다.
나는 그 자매와 사귀게 해 달라는 인간적이고 육신의 소욕을 구하는 기도를 했는데 주님은 나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내가 거듭난 피조물이 되었다는 영적인 깨달음을 주셨다.
내가 처음 새벽 기도하며 받은 말씀은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17 )는 말씀 이었다.
이 말씀이 내 마음에 확 들어오면서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믿음이 생겼고 내가 완전히 주안에서 거듭났다는 감격을 누렸다. 이 은혜는 육신의 기도 응답과는 또 다른 영적인 충만함을 주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작은 것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고 날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얼마나 그 사랑이 큰지 말로 할 수 없는 영적인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았다.
얼마나 감격해서 울었는지 모른다. 새벽 기도 갈 때와 똑 같은 거리를 걸어서 돌아오면서 발을 디뎠는데 하늘을 붕붕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신선한 바람처럼 주님이 나를 새롭게 하시는게 느껴졌다. 육신의 응답을 간구하는 나에게 주님은 거듭남 비밀을 깨닫는 체험을 하게 하셨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새롭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부활절 간증과 프로포즈의 추억
영적인 거듭남의 체험과 기도의 응답으로 며칠 동안 주님과 열병 같은 사랑을 앓았다. 나는 주님이 너무 좋아서 주님께 사랑의 편지를 썼다. 주님 사랑해요. 주님 감사해요. 주님이 너무 좋아요. 이루 말할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담아 편지를 썼다,,, 온 집안 자취방에 사랑의 고백. 기도문. 편지를 가득 붙여 두었다. 지금도 그 열정적인 사랑의 편지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스친다. 며칠후 부활절에 교회에서 내가 학습 세례를 받게 되었고 그때 나를 보고 간증을 하라고 간증문을 적어 오라고 하신다. 나는 어릴적 교회 다니다 교회를 떠났던 이야기와 방황하다가 돌아온 이야기. 어머니의 병 치유를 통해 내가 만났던 하나님을 간증했다.
그 간증문을 작성하는데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준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고 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며 내 곁에서 신앙의 상담을 해주고 성경 읽다가 모르면 설명해주는 옆에 있는 장성숙 자매가 감사해서 결심하고 사랑의 프로포즈를 위한 긴 연애편지를 썼다.
며칠후 사랑의 고백으로 그 편지를 건네 준 날이 4월 1일 이었다. 그날이 하필 만우절이다. 다음날 자매는 나를 보고 만우절에 왠 농담을 잘 하느냐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냥 교회의 형제 자매로 있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마디로 퇴짜 맞았다. 아 ! 이럴수가 ~
얼마나 자매를 위해 새벽 기도도 다니고 혼자서 마음의 열병을 앓았는데 완전 냉정하게 거절하다니 흑흑 ^^ 남자의 자존심에 완전 상처가 났다. 아 이대로 그냥 끝인가?
자매에게는 그 프로포즈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나는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교회 형제 자매로 돌아가서 그 자매를 볼 용기가 안 생겼다.
아 ~ 어떻게 해야하나 ? 포기하고 말아야 하나?
거절을 승낙으로 바꾸기 위해
며칠을 망설이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자매에게 설득 작전에 들어갔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다. 도서관에서 자매를 만날 때 마다 설득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내가 사랑한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농담처럼 여겼지만 여전히 공부하러 도선관으로 온다는 것이 나에게는 위로요 은혜였다. 옆에 있는 것만도 감사했다.
그때부터 어찌하면 자매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온갖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했다. 최선을 다해서 정중하게 설득했다.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께는 효자고 친구들도 많고 몸이 약해서 테니스를 배웠는데 조금 칠 줄 안다고 운동도 잘한다고 자랑하고 노래도 잘하고 멋지다고 입이 침이 마르도록 선전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자랑했다.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더욱 예배도 잘 드리고 성가대도 하고 교사도 하고 예수도 잘 믿겠다고 맹세를 했다. 나랑 사귀면 정말 잘 선택했다고 자매가 후회 없도록 해 주겠다고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아이고 ~ 절망이 찾아왔다.
이럴 때 주님이 안 도와주시고 뭐 하시노? 괜히 주님이 가만 있는 것 같아서 섭섭했다.
내가 너무 고민을 하니까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적극 나서서 도와주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사귀어 보라고 권했지만 자매는 여전히 꿈쩍도 안했다.
그렇게 아무런 진도도 안 나가고 답답하고 어색한 긴 시간이 흘러갔다. 공부도 재미가 없었다
이제 내가 결단의 시간이 왔다. 공부도 해야 하고 다른 할 일도 많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성숙 자매와 그 친구 자매와 또 나를 위해 잘 되기를 기도하며 애쓰고 수고한 내 친구와 함께 네명이서 사천 공원의 아름다운 벚꽃이 핀 곳으로 데이트를 갔다.
아무리 아름다운 벚꽃이 피어있어도 자매와 이별을 통보해야 하는 내 마음에는 슬픔의 눈물이 흘렀다. 차마 이별 통보를 맨 정신으로 못해서 옛날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를 따라 술집으로 들어오는 자매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술을 연거푸 마셨다.
예수 믿고 잘 안 먹었는데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금방 취기가 돌게 했다. 용기를 내서 고백했다.
“ 정말 성숙 자매를 사랑했다. 내 첫사랑이다. 예수 믿고 자매가 옆에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예배드리는 시간도 자매가 있어서 즐거웠다. 처음 교회 갔을 때 잡아준 그 손 잊지 못할 것이다. 간증문 작성하다가 돌아보니 자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을 깨달았다. 모든게 고마웠다.
그러나 이제는 자매를 잊겠다. 그동안 고마웠다. 첫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당신을 떠나겠다.
그렇지만 나는 두 마음을 가지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그 교회에서 자매랑 예배드릴 수가 없다. 내가 그 교회를 떠나겠다. 다른데 가서 예수를 믿기는 믿겠지만 다시 자매를 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이제 나를 잊고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괜히 자매 인생에 끼어들어서 이리 저리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겠다 “
주절 주절,,,,, 말을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내 진심을 밝혔다. 모두들 내가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니 놀라는 모습이다. 그러나 입으로 뱉은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는 끝이다. 어떻게 집에 왔는 지도 잘 모르겠다. 비몽사몽으로 집에 왔다. 밤새도록 앓았다. 같은 방 룸메이트 고향 친구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왜 그러느냐? 그때 내가 완전 실성한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내 첫 사랑은 끝났다. 안녕 ~ 내 사랑 ~
행복했던 첫 사랑의 시간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내가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젯밤에 엄청 실수를 했나보다 아이고 큰일났다.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과 후회가 밀려왔지만 한편으로 잘 되었다 생각했다.
지금까지 사랑한번 못해 보다가 예수 믿고 혼자 실컷 짝사랑을 해 보았으니 행복하다.
여자는 깨끗하게 잊자고 새롭게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하나님이 나에게 맞는 가장 좋은 여자를 선물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 어릴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무모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가장 좋은 여자를 만날 것이다.
고향 친구들과 내기를 하자고 했다. 20년 뒤에 우리 서로 만나서 어떤 친구의 아내가 가장 괜찮은지 서로 투표해 보고 1등을 받은 그 사람에게 원하는 선물을 사주기로 한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당연히 내가 1등이다. 아무도 선물을 안 주었지만 나는 하나님께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는 어디로 가야하나? 자매를 안 만날려면 도서관 자리도 옮겨야 하나? 완전 머릿속에 하얗게 되면서 정리가 되지 않고 온통 뒤죽 박죽 되고 말았다.
그 자매를 만나는게 싫어서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에 친구가 오더니 그 자매가 나를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은 어제 밤에도 그 자매가 너를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이런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뭐 때문에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이왕 엎질러진 물이다.
어떤 이별 통보를 한다 해도 깨끗하게 끝내자 생각하고 편하게 그 자매를 만나러 갔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기가 힘들다. 어떤 분부를 내리더라도 순종하겠습니다.
거저 죽을 죄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눈을 못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침내 들려오는 자매의 부드러운 첫 음성 ? 오잉 ! 화가 난 음성이 아니다.
“ 태경 형제 . 내가 그렇게 좋아요 ? 즉시 대답했다. ” 네 너무 너무 좋아요 “
“ 그럼 나랑 사귑시다. 단 형제 자매로서 오랜 시간을 두고 서로 지켜보면서 사귀어 봅시다”
“ 성숙 자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 할렐루야 아멘. 만세! 만세! 주님 감사합니다. 땡큐. 아리가도. 쎄쎄 ”
어떤 말로도 다 표현 못하는 감사를 주님께 드렸다. 역시 주님은 멋지셔요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너무 아름다웠다. 비록 지금은 내가 땅을 밟고 살지만 하늘을 날아 다니는 기분이었다.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이 행복했다. 온갖 꽃들이 나를 위해 피어있었다. 길가의 나무들이 나를 보고 “태경 형제 축하해요” 하고 축복해 주었다.
새들이 나를 보며 “태경 형제님! 축하해요.” 축복해 주었다.
누가 꽃들에게 나무들에게 새들에게서 축하한다고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주님을 만난 후 가장 아름다운 자매를 만나게 하신 주님의 선물이다.
주님이 나에게 정말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축복해주시는 말씀 같았다.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것과 비슷한 온 세상을 다 얻은 기쁨의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모든 것을 주님께 감사 ^^
여름 수련회의 은혜 ( 내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
대학교 4학년 여름 방학을 맞아 교회 대학부 학생회에서 지리산 자락의 시골 교회로 여름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께도 서원하였고 자매에게도 약속한 것처럼 성실하게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공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교회학교 보조 교사로 섬기고 찬양대로 섬기고 여름 성경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공부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기도문을 계속 기록하며 신앙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재미있는 영적인 체험도 했다. 어느날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 하다가 신기한 그림이 있어서 저 그림이 뭐냐고 물었다. 사진작가가 찍었다는 눈 속에서 찍었다는 설명과 함께 그림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였다. 믿음이 있어야 보인다는데 나는 안보이니 믿음이 없구나 생각이 들어서 즉시 회개하고 눈을 감았다. 주님 저도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해주세요. 잠시 후 눈을 떴는데 ~ 그림 속에 예수님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를 보고 웃고 계시는 인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보인다. 나도 보여 ! ” 감격하며 외쳤던 기억이 난다.
내심 교회 여름 수련회가 어떤 것 인지도 모르지만 자매랑 2박 3일 같이 있는 것만 해도 즐거운데 뭐든지 좋을 것 같은 마음으로 기대하며 갔다.
그날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은혜의 시간이었다. 낮에 부터 찬양하며 기도하며 말씀 들으며 밥하고 설거지하고 너무 너무 재미있었다. 그날 밤에 말씀을 듣고 각자 흩어져서 개인 기도 시간을 가질 것인데 정말 전심으로 간절히 회개하라는 강사 목사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꽃혔다. 간절히 회개해야지 하고 지리산 산골 교회의 한적한 곳으로 갔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림이 생각이 나서 나도 아무도 없는 바위 밑에서 주님께 엎드렸다.
사실은 행동은 그렇게 하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그동안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으니 별로 회개할게 없는 줄 알았다. 주님 앞에 엎드려 처음엔 중얼 중얼 내 나름대로 생각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점점 목소리가 통곡으로 바뀌고 강한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면서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죄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내 생각 속에 묻혀있던 기억들, 마음속에 남아있던 더럽고 추한 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마치 눈물로서 내 죄를 씻어 내기라도 하듯 비 오듯이 눈물을 쏟았다. 어릴적 아무도 몰래 남의 집 감 따먹은 것부터 좀 커서는 부모님을 미워하고 대들었던 것 까지 내 살아오면서 나이별로 시간별로 장소별로 잘못했던 모든 사소한 것들이 기억났다. 너무 미안해서 울었다. 너무 내 모습이 추하고 더러워서 울었다.
주님의 사랑이 감사해서 울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 지신 그 사랑이 감격해서 울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그 사랑이 나를 감싸고 들어 왔다. 그 피가 내 몸에 수혈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로써 죄를 씻어내고 있는 중이고 주님은 십자가의 피로써 내 몸에 계속 공급해주고 계신 밤이었다. 찬양하며 울었고 죄를 고백하다가 울었다. 꺼이 꺼이 ~~
밤새도록 찬양을 불렀다. 목이 쉬도록 찬양을 불렀다. 다른 사람들을 다들 기도를 마치고 수련회 일정 마무리 정리하고 숙소에 들어갔는데 나는 방에 못 들어 가고 주님 앞에 엎드려 있었다.
“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말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
다음날인가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는 간증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했던 은혜를 나누었다. 어떤 자매가 나보고 은혜 최고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중보 기도해 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떤 자매가 나에게 위로 해준 말이 지금도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갑자기 날 보고 손을 잡아보라고 했다. 악수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자기의 손목을 잡으라고 했다. 그 자매도 나의 손목을 잡았다.
“ 태경 형제! 우리가 잡은 손을 잘 보세요.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잡는 손은 서로 악수하는 것처럼 한사람이 놓으면 관계가 쉽게 떨어져 버려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주는 손은
우리가 손목을 잡은 것처럼 한사람이 놓아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요. 비록 내가 교회를 떠나고 죄를 짓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 손을 놓지 않으세요. “
그리고는 기도해 주는데 얼마나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떠난 후에도 주님을 곁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할 때에도 주님은 내가 놓아버린 그 손을 결코 놓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내 손을 끝까지 잡아주신 주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한참을 눈물로 감사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이 내손을 놓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않고 늘 기억하며 살아간다. 지금도 내 손을 놓지 않고 계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
다른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또 신기한 영적 체험이 있다. 이상한 말로 기도하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도 다른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였다. 한참 은혜를 받을 때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방언의 은사를 사모했지만 잘 주시지 않았다. 어떤 은혜의 집회라고 가서는 방언 받으라고 하면서 자기들을 억지로 따라 해보라고 했지만 안된 경험이 있었다. 억지로 되는게 아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냥 잊어버리고 있다가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에 교사로서 아이들을 데리고 간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은혜 받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냥 내려갈 수는 없습니다.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어 ~ 방언의 은사가 터졌다. 신기한 체험을 했다.
또 한번은 친구의 연로하신 어머니가 경상대 병원 응급실에 입원을 했다. 호흡을 못하고 계신다고 한다. 믿는 분이기 때문에 천국 소망을 가지고 언제 돌아가실지를 몰라 간절히 기도했다. 수술 후에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겨우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나서 중환자실에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은 치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바라고 소망하기는 잘 치유되어서 말도 잘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직 더 사시다가 돌아가시길 기도했다. 그분은 남편을 일찍 여위고 혼자서 자녀들을 믿음으로 훌륭하게 키우신 분이다. 젊을 때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남편이 갑자기 살아나서 당신의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해주시고 다시 그 다음날 돌아가셨다.
“ 빛을 따라 천사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갑자기 온 것이 생각이 나서 다시 이 땅에 내려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죽은 분이 살아났다. 온 가족들과 교회 성도들이 장례를 위해 모인 곳에서 당신은 천국으로 간다고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예수 잘 믿다가 다음에 천국에서 만나자고 유언하고 이제 내일 아침에 간다하고 다음날 아침에 거짓말처럼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와 친구가 실재로 겪은 실화다.
나는 이런 신비한 이야기들을 통해 확실히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간절히 기도하고 잊어버리고 있닥 며칠후 다시 그 병원에 가보니 어머니가 건강해지셔서 일반 병실로 옮기셨다. 내가 다시 병원에 가는 날에 그때는 목에 손을 대고 하시지만 말도 하셨다.
며칠후에는 건강하게 퇴원하셨다. 그 어머니는 내가 전도사가 되었을 때 너무 기뻐하셨다.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나는 그분을 위해 별로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그 어머니는 평생을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했더니 주님이 응답하셨다. 나에게는 내가 기도해서 나았다는 감사가 있다.
그래서 병원 심방은 여러 사람이 가는게 좋다. 누가 기도하던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평생을 위한 투자다. 조금 투자했는데 엄청나게 돌려받는다.
또 한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 것에 대한 감사의 체험이 있다.
친구의 아내가 갑자기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건강했는데 목욕탕에 가서 때 미는 아주머니가 때를 밀다가 갑자기 가슴에 멍울이 만져진다고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살다보면 한번씩 목욕탕가서 다른 사람에게 때미는 것을 맡겨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던 친구의 아내가 수술하는 날이 되었다. 나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금식 기도하러 가라고 하셔서 가까운 기도원에 혼자서 금식 기도하러 갔다. 자매만 바라보는 남편과 어린 세 자녀가 있는데 하나님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내 젊은 날에 하나님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 간절히 기도하는데 주님이 도와주실 것 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 사건은 “ 한 알의 밀알”이라는 사인을 내 마음에 주셨다. 나만의 기도 응답 방법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는 말씀을 주시면서 그 수술을 통해 믿지 않는 가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는 치유해 줄 줄로 믿고 감사하며 기도했다. 수술은 잘 되었다. 그 후 치료도 잘 되어서 지금도 건강하다. 그리고 믿지 않던 시부모님이 예수를 믿는 계기가 되었다. 아픈 며느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 후 하나님이 그 가정에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항암 치료를 받았기에 더 이상 도저히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쌍둥이를 선물로 주셨다. 5남매의 건강한 자녀를 잘 키우는 엄마로 열심히 교회 사역하는 남편을 돕는 사모로 아동센터 수십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센터장 으로 선생님으로 건강하게 잘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 기도는 반드시 좋은 열매가 되어 돌아온다. 다른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
직장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난후 내 모든 삶이 바뀌었다. 내 성공을 위해 살던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주님의 은혜에 보답 할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대학 4학년 때 내 남은 삶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졸업후 신대원을 가기로 결심했다. 주변에 다른 선배들이 신대원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처럼 나도 신학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무도 내 결심을 환영해 주지 않는 것이다. 특히 믿지 않는 부모님께서는 말도 못 꺼냈다.
이리저리 고민하며 알아보는데 우리 총회 헌법에 보니 내가 목사가 될 자격이 안되는 것이다.
세례 받은지 7년이 지나야 한다는데 내가 세례 받은지 1년 밖에 안되는 구나 깨달았다.
어떤 신학적 소양을 떠나서 내가 아직 아무 준비도 안되었는데 신대원을 가는 것은 무리였다.
주님께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면 다시 주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하고 신대원의 꿈을 접었다.
그 후 내가 직장을 들어간 것도 주님의 은혜다. 자매는 여러 가지 기도하며 직장을 찾다가 자기 적성을 찾아서 비록 돈은 안 되지만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며 거제 성로원이라는 곳의 고아원의 보모로 들어갔다. 세상에 이렇게 젊고 실력있고 아름다운 보모가 왔다고 하며 성로원 식구들과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얼마 못가서 못 견디고 나갈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다고 한다. 결혼도 안한 처녀가 낮에는 아이들 학교 보내고 방 청소하고 서류작성하고 일하다가 밤에는 10명 가까운 아이들의 엄마로 그들을 돌보는 힘든 직업이다. 그 직장을 결혼해서 그만 둘 때까지 꾸준히 섬겼다
남자는 젊을 때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데 하나는 직장이고 하나는 결혼이다. 둘 다를 이루기 위해 일단을 직장을 구해야 했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전문적인 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은혜로 보험회사 공채에 합격했다.
회사 첫 발령도 자매가 근무하는 거제도 에서 가장 가까운 통영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앗싸 !
다른 사람들은 완전 구석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근무지로 갔다.
직장 생활은 엄청 스트레스가 심하고 힘들었지만 자매가 가까이 있어서 근무하는게 재미있었다
휴일이나 다른날 시간나면 자매를 만나러 거제도로 가는게 즐거웠다. 자매는 고아원에서 한달에 한번씩 1박 2일로 휴가 나오는게 전부였다. 내가 자매를 만나려면 거제도로 면회를 가야 했다.
왠 군대 생활도 아니고 이런 곳이 있다니. 편지도 자주 썼다. 나중에는 편지 쓰는 것보다는 직접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를 자주 했다. 성로원에 대표 전화 밖에 없어서 내가 전화하면 아이 들을 시켜서 “ 성숙 샘 애인한테 전화 왔다고 와서 전화 받으라고 해라” 목소리가 들린다. ^^
나중에는 전화 바꾸는게 미안해서 직접 자매 방에다 전화기를 따로 설치해 주었다. 내가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통화해도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
그때는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했는데 식당에서 매일 먹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집에서 통근 하는게 낫겠다 생각이 들어 중고차를 구입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자매를 자주 만나러 가고 싶어서라도 차를 구입했다. 차를 몰고 자매를 만나러 신나게 달리던 거제의 해변 길은 내가 달려본 가장 멋진 환상의 드라이버 코스였다.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언젠가 누가 하는 말 중에 아내에게 투자하는 것이 최고의 투자라고 했는데 전적으로 공감 한다. 예수 믿고 난후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자매를 나는 기도의 응답인줄 알고 믿고 있다.
처음 간 교회에서 우연히 만나게 하셨고 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게 하셨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내가 잘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잘하라고 내게 과분한 선물을 주셨다. 지금도 나를 먼저 보고 나중에 우리 집사람을 본 집사님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어떻게 저런 시골스런 목사님이 저런 도시형의 미인 사모님을 만났을까 하는 믿기지 안흔 표정이다. 내가 생각해도 꿈인지 생신지 나도 잘 안 믿어지니 이해가 된다.
자매에게 사귀어 보자는 승낙을 받은 후에 내 삶은 최고의 행복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연애도 못해보고 지지리 궁상처럼 보낸 모든 시간을 보상받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같이 옆에 있어서 행복했고, 회사 다닐 때도 전화하고 편지 보낼 때도 행복했다.
3년의 꿈같은 연애 시간을 보내고 29살에 결혼을 했다. 하나님이 내게 짝지어 주신 사람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단순 이유를 대고 청혼했다. 다른 친구들 다 결혼하는데 나는 애인이 있는데도 안하고 있으니 이상하고 일단 집에 오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너무 외로웠고 매일 식당에서 먹는 밥도 맛이 없고 또 매일하는 전화비도 아낄 겸해서 빨리 결혼 하자고 했다. ^^
결혼하면 왕비같이 모시고 살겠다. 자매를 위해 아침마다 일어나면 사랑의 키스와 함께 음악을 톨어 놓고 토스트와 모닝 커피를 대령하겠다. 청소도 내가 하고 빨래도 내가 하겠다.
온갖 감언이설은 벌써 연애 할 때 다 써 먹었기에 그냥 빨리 결혼하자고 졸랐다. 아버지께 빨리 승낙을 받으라고 자매만 괜히 힘들게 했다. 우리 부모님은 진작부터 내가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선포했기에 뭐든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양가 부모님은 믿지 않지만 교회에서 목사님 모시고 결혼한다고 선포 했다. 자매는 아직 결혼 허락을 못 받았다. 오래전 결혼 전에 자매 집에 인사드리러 간 게 기억난다. 믿지 않는 자매의 부모님은 우리가 대학생 때부터 연애를 했다고 우리의 만남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으셨다. 교회 다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자매의 부모님과 첫 만남이 어색했다. 결혼만 시켜 주시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 정말 잘해주고 효도하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맹세를 했다. 우리 보고 많이 걱정을 하셨지만 드디어 결혼 허락을 받았다. 비록 첫 보금자리를 통영의 구석에 오래된 작은 아파트에 세들어서 시작했지만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정신없이 세 아들 키우고 못난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무척 고생해서 왕비로 모시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모닝 커피도 몸에 않 좋다고 하며 잊어 버렸다. 빨래도 청소도 요리도 설거지도 아내가 한다. 아내의 존재는 왕비 보다 더 귀한 위치인데 살아가는 것은 완전 낮은 자로 우리 집의 하녀로 살아가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하는 나와 우리 아들들은 아내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나는 아내에게 정말 조금 밖에 해 준게 없는데 아내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었다.
나하고 닮은 귀여운 세 아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해주었고 매일 맛있는 요리해주고 빨래해주고
기도해주고 내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 주었다. 우리 가정이 가장 어려울 때 내가 직장을 그만 둔다고 할 때도 그렇게 하라고 승낙해 주었다. 사업하자면 사업을 같이 했고 전도사한다고 사업을 정리할 때도 또 믿고 나를 따라 시골로 이사 갔다. 사역지를 대전으로 가자 하면 대전으로 왔고 개척교회 하자 하면 아무 반대 없이 개척교회 사모로 열심히 기도하며 섬겼다.
설교 못해도 늘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고 내가 잘 못해도 늘 이해해주고 기다려주었다.
아내는 나에게는 하나님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천사와 같다.
새벽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고 격려해주는 아내가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을 할수 있었다.
아내에게 투자하는게 가장 좋은 투자라는 것을 확실히 실감하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남자들이여 아내에게 투자하라. 조금 투자하고 평생 거둘 수 있으니 얼마나 멋진 장사인가
태의 열매로 주신 세 아들
결혼하고 몇 년 안 되어 거의 연년생으로 세 아들을 주셨다. 첫아들 의진이를 임신했을 때 내가 태몽을 꾸었다. 자라가 꿈속에서 내게로 오는 꿈을 꾸었다. 다 남자가 태어날 꿈이란다.
태어난 아이들을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이름을 지었다.
첫아들 의진이는 시편 1편의 말씀이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첫째 아들 의진 (義眞) 뜻은 의인의 길. 진리의 말씀을 쫓아가는 길.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라는 뜻이다.
둘째 아들 의영이는 다니엘서 12장 3절의 말씀이다. 의영이를 임신 했을 때 또 꿈을 꾸었다
어두운 밤에 어떤 배가 바다를 항해하고 내 시야로 들어오는데 빛이 환하게 비추는 꿈이었다.
그 배가 가는 곳마다 그 배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서 환해지는 것이었다. 신기한 꿈을 꾸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의영 (義榮) 뜻은 우리 의영이가 다니엘처럼 멋진 사람이 되라는 소망을 담았다.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셋째 의성이는 시편 18편의 말씀이다. 우리 의성이가 태어난 것은 주님의 은혜다. 그때 셋째를 낳는 집은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했다. 주위에 아무도 셋째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셋째를 낳고 난후에야 집사님들이 셋째, 넷째를 낳았다. 우리가 셋째는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의성이는 엄마가 안 낳을려고 할 때 아빠가 설득해서 은혜로 낳은 아들이다.
“ 우리가 타는 차를 보아라. 5인승이다. 앞에는 부부가 타고 뒤에는 3명을 타라는 뜻이다.
형제 두 명이 싸우면 심판이 필요하다. 나중에 아빠가 아이들이랑 테니스 복식 한게임하려면
3명이 되야한다. 엄마는 심판 보면 된다. 내가 키울게 걱정하지 마라. 딸을 주시면 더 좋다“
온갖 이유를 붙여서 감언이설로 셋째를 낳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귀여운 아들 의성이다. 하나님이 우리 의성이의 산성이 되어 주셨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의성 (義城)의 뜻은 우리 의성이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산성처럼 지켜주시는 분으로 삼고 살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 아들을 볼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태의 열매요 귀한 선물인줄 믿는다.
아빠 엄마는 영원토록 우리 아이들 곁에서 지켜주지는 못하지만 나보다 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이 아이들을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빛나고 존귀하게 하실 것이고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산성이 되어주실 것을 믿는다. 아멘 ^^
아들을 잃어 버렸다가 찾은 은혜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이 형 가인에게서 동생 아벨을 찾는 말씀이 나온다.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을 우리 아들 의진이에게 비슷하게 한 적이 있다.
진주에 살 때 같은 교회 집사님과 나란히 집을 얻어서 석류공원 근처에 살 때가 있었다.
나란히 붙어있어서 옆 집이랑 한 가족처럼 지내며 서로의 아이들도 형제처럼 매일 같이 지냈다.
나는 한참 직장에 다닐 때인데 저녁 퇴근 무렵에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아내가 전화를 했다.
“ 여보! 우리 의영이가 없어졌어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둘째 아이가 없어졌다고 한다.
내가 “여보, 갑자기 무슨 일이냐? 어떻게 된 일이냐? 천천히 이야기 해보라”고 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우리 큰아들 의진이가 옆집의 광해 형이랑 아래 동네 학교근처로 놀러가는데 어린 동생 의영이가 따라 갔다는 것이다. 우리 의영이는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형 의진이를 무척 따랐다. 형아가 무슨 말을 하던지 무조건 따라했다. 형아가 밥을 김치라 하면 김치 인 것이고 숫자 1일 보고 2라고 하면 2이라 믿을 때였다. 엄마 아빠 보다 형아 말을 더 따를 때였다.
아내는 6살된 큰아들 의진이도 있고 또 옆집의 광해와 하영이도 같이 있기에 믿고 보냈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의진이 하고 광해하고 하영이만 왔다.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 의진아 니 동생 의영이 어디갔나?” 물어보니까 의진이가 동생을 데리고 가다가 어린 의영이가 너무 늦게 따라오고 또 빨리 갔다 와야 하는데 같이 가는게 귀찮으니까 의영이보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동생이 먼저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의영이를 찾아서 물어보니 형아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순간 형아 말에 100% 순종하는 4살 된 의영이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지금 있는 곳이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니까 그냥 신호등 근처에 가만히 서있었다고 한다. 어떤 지나가는 아저씨가 보니 왠 아이가 가만히 서있는 것을 보니 길을 잃은 모양이다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잃었나? 집을 모르겠나? 물어보니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기 이름만 알고 엄마 아빠 전화번호도 몰라서 할 수 없어서 그 아저씨가 그 동네 파출소에 맡겼다는 것이다. 급히 온 교회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혹시 의영이 비슷한 아이 있는지 마을을 찾아보라하고 또 학교 근처의 청년들에게 찾아보라 부탁하고 온 동네를 찾아보았지만 없다고 한다. 전화기를 통해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순간 아 ~ 큰일이다. 어떡하지 하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 아직 어린 애기가 어디갔을까? 혹시 귀엽고 잘 생겨서 누가 납치해 간 것은 아닌가? ”
온갖 불길한 상상이 들면서 급히 차에 시동을 걸고 정신없이 집으로 가기 위해 회사를 나섰다.
잠간 차에서 출발전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기도를 하는데 순간적으로 번뜩 파출소 생각이 났다. 정촌 파출소랑 우리 아들을 잃어버린 곳과는 거리상으로는 상당히 멀지만 혹시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어떤 경찰관이 반갑게 받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 혹시 어린 아이 하나 없나요? 연암 공대 근처 길에서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아무데도 없어요. 4살쯤 된 귀여운 남자애 예요.” 한참을 다급하게 설명하는데 아저씨가 하는 말 “ 혹시 애기가 빨간 체크 남방이랑 멜빵 바지 입었나요? ” “ 네, 며칠 전에 제가 사준 옷 이예요. 혹시 애기가 거기 있나요 ?”
“ 네 여기에 잘 놀고 있습니다. 아까 어떤 아저씨가 보니 길에 가만히 서 있기에 파출소에 신고하고 여기 데려다 주고 갔습니다” “ 제가 아빠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번만 애기에게 전화 좀 바꿔 주실래요? ”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 의영아, 영아 ~ ” “ 아빠 ! ”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귀여운 우리 아들의 목소리.
어찌 그 사랑스런 목소리를 잊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우리 아들 의영이를 키우면서 수없이 기분좋게 들어본 “아빠”였지만 그때처럼 감동적으로 들려온 적이 있었을까?
정말 고맙고 미안하고 정말 가슴 저리는 순간이었다. “ 아빠 얼른 갈게 거기서 잠간만 기다려.”
경찰관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 여보 애기 찾았어요. 파출소에 있어요 ” 아내가 고맙다고 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 ”
파출소로 가는 길은 완전 날라갔다. 지금까지 내 최고시속의 운전 스피드 였을 것이다.
차안에서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정말 우리 아들을 잃어버렸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기도 싫은 모습이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저쪽 쇼파에 혼자 앉아있는 우리 아들 모습이 보인다. “ 의영아~ ” 달려가서 눈물로 안아본다. 경찰관 아저씨가 사준 과자를 먹고 있다가 놀란 아들이 아빠에게 안겨온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아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완전 새로운 아들을 얻은 느낌이다.
나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볼 때 마다 멀리서 아들이 오는 것을 먼저 보고 신발을 벗고 달려가는 아빠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 그렇게 밤마다 문열어 놓고 아들을 기다리는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다. 집나간 아들 같은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를 애타게 찾으셨고 마침내 찾아서 기쁨으로 안고 오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빠 감사해요 ^^
에벤 에셀의 하나님 (도움의 돌)
내가 한창 보험회사를 다니며 영업과 수금을 할 때다. 그때는 자동차 보험료를 받으러 직접 집으로 찾아가고는 했다. 그날도 멀리까지 수금하러 가는 길이었다. 거리는 좀 멀어도 고속도로 톨게이트 비용을 아끼려고 늘 국도를 다녔다. 한참 아무도 없는 논길 옆으로 나 있는 한적한 국도를 달려가는데 갑자기 언덕에 가려있는 삼거리 코너 길에서 대형 트럭이 튀어나온다. 브레이크도 안 밟고 일단 정지도 없이 바로 내 앞으로 차가 튀어나온 것이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서 핸들을 급하게 왼쪽으로 틀며 피했다. 뭔가에 바퀴가 쾅하고 부딪치고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이 꺽이며 튕겨 나갔다. 나중에 보니 양쪽 앞바퀴가 부서지고 휠이 깨지고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도로 가운데에 겨우 정차했다. 그 트럭도 놀라서 섰는데 다행히 사람은 하나도 안 다쳤다.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고 너무 놀라서 심장이 두근 두근 거렸지만 조용히 차에서 내려
정비공장에 전화해서 레카차를 부르고 그분들의 연락처를 적고 보험처리 하기로 하고 보냈다.
차는 많이 부서졌지만 이렇게 사람은 안 다친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 은혜구나 생각하고 감사했다. 며칠 후 차를 다 고치고는 갑자기 사고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국도를 따라 가만히 사고 현장에 왔는데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내가 사고난 현장 바로 옆에 커다란 돌멩이가 뭔가에 심하게 부딪힌 흔적을 남기고 서 있었다. 주변 다른 곳에는 업는 돌멩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어도 아무 필요가 없는 커다란 돌이 덩그랗게 서 있다. 뭐 할려고 서있나?
순간 상처난 그 돌을 만져 보다가 도로 옆 아래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엄청 깊은 낭떠러지다
만약에 그 돌이 없었다면 내 차가 그리로 떨어질뻔 했다. 완전 날아서 낭떠러지로 쳐박힐 뻔했다. 아찔한 순간이다. 완전 대형사고 날뻔 했다. 앞으로 쳐박혔을 것이니 최소한 중상이다.
갑자기 주님이 이 사고의 순간을 지켜주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필요 없는 제법 큰 돌이다. 누가 언제부터 거기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이때를 위해 나를 위해 그 돌을 여기에 세워 두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위해 그돌을 여기 두신 주님이 감사해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감사 기도하며 울었다. 또다시 나를 살려 주셨군요. 아직 어린 세 아이들과 나만 바라보는 아내를 두고 완전 먼저 갈 뻔 했는데 주님이 나를 지켜주셨군요.
이렇게 내 몸 하나 안 다치고 살아서 주님의 은혜 느끼고 호흡하는 것이 주님의 은혜군요
에벤 에셀 ( 도움의 돌 ) 하나님의 존재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내 평생에 주님 은혜 잊지 말아야지 하고 그 돌을 기념비로 가져 올려고 했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서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원히 내 가슴에는 에벤 에셀 도움의 돌이 기념비로 남아있다. 주님께 감사 ^^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하심
IMF 여파로 위기가 찾아온 직장을 그만두고 내 개인 사업을 하고 싶어서 진주에서 가게를
할 때 였다. 집에서 가까워서 건강도 생각할 겸 가게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하루는 가게로 가는 길에 8차선 대로변을 건너갈 때였다. 횡단보도에 자전거를 타고 서 있다가 보행 신호가 바뀌는 것을 보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내가 제일 먼저 1등으로 앞서 나갔다.
열심히 페달을 밟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자전거 넘어져 버렸다. 이런 부끄러움^^
그런데 갑자기 넘어진 내 바로 앞으로 대형 버스가 휙 지나갔다. 아마 그 버스는 주황색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시간이 쫒겨 과속으로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나보다. 나는 버스가 오는 줄도 아무것도 모르고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그냥 보행자 초록 신호만 보고 자전거를 타고 달려 나갔으니 정말 0,1초만 내가 빨리 나갔어도 아니 다리에 힘이 빠져서 길거리에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완전 버스에 부딪혀서 날라갈 뻔 했다. 돌아보니 아찔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이유를 모른다. 뒤 따라 오던 사람들은 앞서서 잘 타고 가던 자전거가 갑자기 넘어진 이유를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주님이 내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하셨고 자전거가 넘어지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위험을 넘어가게 하셨다. 피할 길을 미리 아시고 에비해 놓으셨다.
이 은혜를 알고 나니 살아가다가 한 번씩 내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도 은혜다.
잘 나가다가 넘어지는 것도 은혜다. 아 하나님이 뭔가 내가 모르는 어려움이 앞에 있기에 멈추라 하시는구나 생각하고 주님의 사인인줄 알고 멈춘다. 멈추면 비로소 뭐가 보인다고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면 멈출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미리 예비하심과 도우시는 은혜가 보인다.
나의 어려움을 미리 아시고 피할 길을 내시며 멈추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삶의 즐거움과 어려움의 때 예수 믿고 나서 좋은 교회 다니며 예쁜 자매 만나서 연애도 결혼도 했고 자녀도 멋진 세아들 주셨고 직장도 다녔고 내가 하고 싶은 사업도 해보았다. 더 이상 바랄게 없는 행복한 삶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아들이 뭐가 좋으냐? 딸이 있어야 된다. 자녀들을 볼때 1남 2녀는 금메달.
2남 1녀는 은메달, 2녀는 동메달. 2남은 노메달. 세 아들은 목메달이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말은 세 아들 데리고 목욕탕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그런 사람들은 아들 없는 사람의 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우리 막내 의성이가 태어났을 때였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애기의 보호자를 불렀다. 네 접니다.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또 아들이네 하고 멋쩍게 허허 웃었는데 옆에 있던 할머니가 그 말을 들었나 보다. 또 아들입니까? 아들이 몇 명인데예? 네! 남자애만 세명 입니다. 그 할머니 하시는 말씀 하이고 우리 며느리는 또 딸인데 저집은 아들만 세명이란다. 아이고~ 어찌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분은 딸만 셋 있는 다복한 집안인데 하루는 짜장면 집에 세 딸을 데리고 외식하러 갔다고 한다. 맛있게 짜장면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세 아들을 데리고 식사하러 온 가족을 보는 순간 밥 맛이 없어서 그냥 돌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세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 가서 쪼로록 앉아서 서로 등을 밀어주고 있어 보라. 얼마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좀 자랄 때 까지 목욕탕을 거의 전쟁터로 만들고 놀았고 세아들 등밀어 주고 나면 나는 지쳐서 떼밀 힘도 없었지만 이제는 멋지게 자라 서로 아빠 등밀어 주겠다하는 듬직한 아들이 되었다.
누가 세월은 화살과 같다고 했는가? 정말 쏜살 같이 행복한 시간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던 내 생활에 위기가 찾아 왔다. 다니던 직장을 정리했다. 사업장도 2개나 열었지만 계속 적자를 내고 있었다. 모든게 막혔다. 완전 앞이 보이지 않는 위기가 찾아왔다.
어떤 일을 해도 재미가 없고 눈물만 흐를 때에 부르심
직장을 다니는 것도 재미없고 돈을 벌어도 재미없고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해도 흥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매일 가게에 앉아 있으면 주님의 은혜 생각나서 눈물만 흘렀다. 찬양을 해도 나를 부르시는 찬송이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소서.
성경을 읽어도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말씀만 보였다. 차를 타고 가도 기독교 방송이나 극동 방송을 들어도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이 들려 차를 세워놓고 울었다. 삶의 위기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내 마음에 기억났다. 그리고 오래전 대학 다닐 때 서원이 생각났다.
“ 주님 내가 지금은 아니고 세상 일 다 해보고 주님 부르시면 그때 주의 일 하겠습니다”
정말 세상을 다 해보고 나니 주님이 부르시는 것을 느꼈다. “ 뭘 더 해보 싶으냐? ”
아무것도 재미가 없습니다. 주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저절로 그런 결단과 고백이 흘러 나왔다. 주의 종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상 내가 닥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게를 정리하고 신학을 하고 전도사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내는 극구 반대했다. 왜? 하필이면 신학이냐? 아이들은 어떡하고? 교회는 어떡하고?
처음부터 아내의 반대에 막혔다. 주님이 아내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하며 그냥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새벽 기도를 다니며 기도했고 기도원을 다니며 기도했다.
아내도 그때부터 작정하며 거의 1년을 두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기다렸다.
드디어 아내가 허락을 했다. 사업을 정리하고 기도하며 신학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할렐루야 ! 아내에게 감사하며 늦은 나이에 새로운 부르심에 순종하여 열심히 신학을 위해 성경공부와 신대인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내 나이 38살 때 였다.
3일의 금식 기도에서 기도 응답을 받고
늦게 다시 공부하는 신대원 입학을 위한 성경공부와 영어 공부는 뭐든지 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 주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했지만 지금 나와 우리 가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주의 응답을 기도하며 3일 금식 기도를 작정하고 아내와 함께 금식 기도원으로 갔다. 열심히 기도했다. 당연히 주의 종의 길을 택한데 대한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주의 사인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하루 이틀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할 때 였다. 그날 밤 기도 굴에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주의 음서이 내 마음에 들려왔다.
잔잔하면서도 뚜렷한 주의 음성이다. “ 두려워 하지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 하시는데 너무 너무 감사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귀에 들리기 보다 심비에 새겨진다고 했는데 정말 또렷하게 내 마음에 새겨지는 구나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데 신학에 대한 뭐 먹고 살거냐 어디 갈거냐 아이들은 어떻게 할거냐 하는 문제가 아무것도 두렵거나 무서울 게 없었다.
기도 응답을 받고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확신하고 굴을 나왔다. 마음에 평안이 물밀 듯 찾아왔다. 금식을 끝내고 집에 가도 될 것 같았다. 기도 응답 받았어요
대학생 때 예수 믿고 서리집사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었고 성경공부도 했지만 별로 말씀을 암송하지 못했는데 그 말씀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주 들었던 말씀이다. 얼른 방에 와서 성경을 찾아보니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이다. 내게 주신 평생의 약속의 말씀이다.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
가족 전도 ( 가족도 구원하지 못하고 어떻게 전도사가 되겠는가? )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신학 준비하는 것도 감사했다. 아내가 흔쾌히 응답해 주었기에 기쁨으로 주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가게를 정리했다. 그런데 마음에 부담이 한 가지 있었다. 아직 예수 믿지 않으시고 교회도 안다니시는 연로하신 우리 어머님은 어떡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늘 우리 걱정이신데 이제 신학해서 전도사가 된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다.
그리고 내가 전도사가 되어 다른 사람을 전도하러 다닐 것인데 내 사랑하는 어머니도 전도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자신 있게 예수 믿으라고 할 것인가? 말할 자신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걱정만 하시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영적인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지 못한다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아무리 예수 믿고 교회 가서 기도해 달라고 해도 내 말을 잘 안 들으신다.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예전부터도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 신학을 앞두고 내가 가는 길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맞다면 표적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바로 우리 어머니가 교회 나가신는 것이 나에게는 표적이었다. 작정하고 기도하고 어머니를 찾아뵈러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결심하고 예수님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나랑 같이 교회 가시자고 간절히 울면서 기도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셔야 된다고 부탁했다. 어떤 목사님은 신학하기 전에 어머니 전도 하러 가서는 나랑 같이 갈때가 있다 하고는 바로 업고 교회로 뛰어 가셨다고 했는데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물러 설수도 없었다. 교회 안 나가시면 나도 집에 안간다. 신학도 못한다
어머니가 도와 주시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아들 부탁인데 한번만 들어 주시라 간청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아들이 불쌍했나 보다 . 주님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셨나 보다.
우리 어머니 대답은 “ 알았다. 다음 주 부터 교회 갈게 ”하시는 거였다. 할렐루야 !
주님은 그렇게 내 기도에 또 한가지 응답해 주셨다. 내 모든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셨다.
믿지 않던 장모님은 우리 장인어른이 아프실 때 예수를 믿고 어머니 보다 먼저 교회 다니셨다. 장인어른은 돌아가실 때 예수 믿고 돌아가셨고 교회 예식으로 장례를 다 치루었다.
처갓집 가족도 우리 조카들도 한 사람 한사람 예수를 믿고 하면서 그렇게 주께로 돌아왔다.
믿지 않는 가족을 전도하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힘내고 가서 어머니와 가족들 앞에서 울어라.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