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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溪 박희용의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8월 22일 수요일]
국역 『대동야승』 제7부
허봉 許篈 찬 [海東野言] 중 <최윤덕 장군의 압록강 상류 4군개척>
○ 세종 14년(1432년) 겨울 10월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朴葵)가 말을 달려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야인(野人) 4백여 기(騎)가 여연(閭延)에 갑자기 침입하여 인민을 노략질하므로, 강계절도사(江界節度使) 박초(朴礎)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잡혀 갔던 26명, 말 30마리와 소 50마리를 다시 빼앗았는데 전사자는 13명입니다. 마침 날이 저물어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노하여 곧 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정세를 살피게 하고, 전사한 장수와 병사에게 쌀과 콩을 내려 주었다. 이난(李爛)의 《유편서정록(類編西征錄)》. 아래 대목도 같다.
○ 박규(朴葵)가 또 장계를 올리기를, “여연(閭延)과 강계(江界)의 백성으로 포로 된 자가 75명이요, 전사자가 48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영의정 황희(黃喜),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우의정 권진(權軫), 이조 판서 허조(許稠), 호조 판서 안순(安純)을 불러 이르기를, “포로로 잡혀 간 민가가 비록 죽음은 면하였으나, 유리(流離)되어 생업을 잃었으니 내 매우 걱정이 된다.” 하고, 그들을 구호할 계책을 의논하니, 황희 등이 조세와 부역을 30년 동안 탕감하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에서 옷과 식량을 주며, 친척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기르게 하되, 만일 친척이 없을 경우에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구휼하게 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건주위 지휘(建州衛指揮) 이만주(李滿住)의 관하 올량합(兀良哈)과 천호(千戶) 열아합(列兒哈) 두 사람이 문첩(文牒)을 가지고 포로 된 남녀 7명을 거느리고 여연에 와서 말하기를, “이만주가 성상의 뜻을 받들어 토표(土豹 스라소니)를 잡았는데, 홀라온 올적합(忽剌溫兀狄哈) 등 1백여 기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여연과 강계에 들어와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이만주가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산골짜기의 요로를 막아, 모두 빼앗아 보호하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데려가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정부(政府) 육조(六曹) 및 삼군(三軍)의 도진무(都鎭撫)를 불러 그 처치 방법을 의논하니, 황희(黃喜)ㆍ허조(許稠)ㆍ안순(安純)과 판중추부사 하경복(河敬復), 찬성(贊成) 이맹균(李孟畇)ㆍ성억(成抑), 공조 판서 조계생(趙啓生), 호조 좌참판(戶曹左參判) 김익정(金益精), 공조 좌참판(工曹左參判) 정연(鄭淵), 예조 우참판(禮曹右參判) 유맹문(柳孟聞) 등이 강계 등지에 통사(通事)를 보내어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하였다.
○ 세종 15년(1433년) 봄 정월에 이만주가, 포로가 되어 갔던 남녀ㆍ어른ㆍ아이 등 64명을 송환하면서 강계에 이르러 아뢰기를, “선덕(宣德) 7년(1427년) 12월 29일에 난독 지휘(㬉禿指揮) 타납노(咤納奴)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보고하기를, ‘홀라온이 1백 50여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난독 땅을 약탈하며 지나간다.’고 하기에, 내가 이 말을 듣고 본위(本衛)의 인마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별빛이 밝은 밤에 전진하다가, 천사(天使) 장도독(張都督)과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만나 함께 수정산(守定山) 입구까지 뒤쫓아 포위하여 머물러 길을 막아서 포로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관리를 시켜 송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홍사석(洪師錫)이 여연(閭延)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여연 절제사 김경(金敬)과 강계 절제사 박초(朴礎)는, 적의 침범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책(木柵)이 헐었어도 수리하지 않아서 적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죽이고 노략질하게 만들었으며, 도절제사 문귀(文貴)도 규찰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관청에 회부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의금부(義禁府)에서도 아뢰기를, “도관찰사(都觀察使) 박규(朴葵)와 경력(經歷) 최효손(崔孝孫)이 국경 순찰을 게을리 하여, 성(城)과 보루(堡疊)를 완전히 수리하지 못하여 적의 침입을 불러들였으니 모두 잡아서 문초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이를 따랐다.
의금부 제조 등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박초ㆍ김경 및 백호(百戶)ㆍ천호(千戶)ㆍ진무(鎭撫)의 우두머리 등은, 우리 백성이 죽고 잡혀 가는 것을 보고도 나아가 싸우지 않았으니 그 죄는 크다. 마땅히 법에 따라 처리해야겠지만, 그간에 혹 길이 험준한 탓으로 때맞추어 가서 구원하지 못했거나, 혹은 힘으로 겨룰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후퇴할 경우는 사정상 용서하지 않을 수 없으니 거론하지 말라. 경들은 죄과를 살피되 정리(情理)에 맞추어 경중(輕重)의 알맞음을 잃지 않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박초와 김경의 죄는 마땅히 중형에 처해야 하고, 천호(千戶) 정유(丁宥)와 진무(鎭撫) 김영화(金永禾)ㆍ김봉천(金鳳天)의 죄도 박초와 김경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경들의 의논에 따르겠다.” 하여, 드디어 문귀(文貴)는 울산으로 귀양 보내어 군(軍)에 충당하고, 박규(朴葵)는 함열(咸悅)로 귀양 보냈다.
○ (세종 15년 1433년)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고,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撫)로, 최치운(崔致雲)을 경력(經歷)으로, 이숙치(李叔畤)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윤덕ㆍ효성ㆍ치운 등이 하직할 때, 상이 불러들여 보고 이르기를,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법은 예로부터 별 묘책이 없으므로, 삼대(三代)의 제왕들도 그들이 오면 어루만져 주고, 가면 추격하지 않아 그저 회유책을 쓸 뿐이었다. 문헌(文獻)이 없어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한(漢) 나라 이래로 역사에 상고할 만한 것이 있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흉노(匈奴) 따위는 마치 마른 가지를 꺾듯 할 것 같지만, 백등(白登)에서 포위를 당하여 겨우 몸만을 구하여 화친을 논의하였고, 여태후(呂太后) 역시 여주(女主)로서 영특하였는데도, 묵특(冒頓) 의 글이 비록 매우 무례하였으나, 도외시하고 화친하였을 뿐이요,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사방의 오랑캐에게 일을 많이 벌여, 드디어 천하를 헛되이 소모하였다. 이러므로 옛 사람은 오랑캐를 모기에 비유하여 그저 몰아냈을 따름이었다. 옛 사람이 이렇게 한 까닭은, 나라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벌도 쏘면 독이 있듯이, 피차간에 죄 없는 백성들에게 차마 전쟁의 폐해를 입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은 이와 달라서, 임인년(1422년)에 우리 여연(閭延)에 침입하였다가, 그 뒤에 홀라온(忽剌溫)에게 쫓기어 저들의 소굴을 잃고, 가솔들을 이끌고 강가에서 살기를 빌기에, 나라에서 그들을 가엾게 여겨 허가하여 주었으니, 그 은혜가 크다 하겠는데, 이제 배은망덕하게도 변방의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극악무도한 그 죄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토벌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징계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사방 변방에 걱정거리가 없으니, 맹자가 말하기를, ‘적국(敵國)이 침노하는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기 일쑤다.’ 하였으니, 오늘의 일은 비록 야인이 한 짓이기는 하나, 실은 하늘이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제 이만주(李滿住)ㆍ동맹가(董猛哥)ㆍ윤내관(尹內官)의 글에 모두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하였으나, 지난번에 임합라(林哈剌)가 여연(閭延)에 와서 말하기를, ‘도망친 우리의 종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제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비록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은 이들의 무리가 꾀어서 한 것이리라. 옛날 경원(慶源)에서 한흥부(韓興富)가 야인에게 죽을 때에, 하륜(河崙)은 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조영무(趙英茂)는 쳐야 한다고 하였는데, 태종이 영무의 계책에 따라 토벌하였고, 기해년에 대마도(對馬島)를 칠 때에, 어떤 이는 치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옳지 않다 하였으나, 태종이 대의(大義)로써 결단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니, 비록 그 소굴을 소탕하지는 못했으나, 그 적들이 결국 우리의 위엄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치운이 오랫동안 나를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경은 막중(幕中)에서 그와 더불어 고사를 논하라.” 하고, 최윤덕에게 안장과 말 및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김효성에게는 말을 하사하였다.
○ 여연의 사변이 있은 뒤로부터 상이 변방 일에 유의하여, 자주 무사(武士)를 모아서 후원(後園)에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상이 장차 야인(野人)을 칠 생각으로, 대신들의 뜻을 떠보려고 은밀히 정부에 명을 내려, 육조 참판 이상의 관원과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 등으로 하여금, 각각 야인 토벌에 대한 방략을 진술하게 하였으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지신사(知申事) 안숭검(安崇儉)에게 결정된 토벌 계획을 밀봉하여 새나가지 않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삼군을 거느릴 만한 장수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들 아뢰기를, “최윤덕이 중군을 거느리고 이순몽(李順蒙)이 좌군, 최해산(崔海山)이 우군을 거느리게 하소서.” 하니, 이순몽이 아뢰기를, “군사의 진퇴는 오로지 중군에 달려 있는데, 신이 좌군을 거느리면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최윤덕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신을 부장(副將)으로, 해산을 좌장으로, 이각(李恪)을 우장으로 삼아, 선봉의 정예(精銳) 5,6백 기를 거느리고, 먼저 적의 땅으로 들어가 형세가 칠 만하면 치고, 불가하면 물러나서 후군을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였더니, 맹사성(孟思誠)도 그대로 말하자 임금도 그 말에 따랐다. 드디어 최해산에게 명하여 먼저 가서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게 하였다.
사목(事目 공사에 대한 규칙)을 들어 윤덕에게 유시를 내렸는데, “그 하나는, 도절제사가 장계한 야인에 대한 공초(供招)를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되풀이하여 생각하니, 파저강(婆豬江)의 침입은 홀라온을 사칭한 것이라는 것은 정상이 드러나고 명백한 일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살면서, 지난날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간사한 마음을 품고 악독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변방 백성을 죽이고는 도리어 홀라온이 한 짓이라고 핑계하여 후환을 모면하려 하는 것은, 위로는 중국을 속이고, 아래로는 우리나라를 속이는 것이다. 그 죄악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의논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침입이 홀라온이 한 짓이라는 말이 황제에게 들리면, 파저강 야인을 지목하지 않고서 그들을 칠 수 있다고 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황제는 한결같이 인(仁)한 자와 함께 하는데, 어찌 야인이 속이는 말을 믿고, 허물을 우리나라에 돌리겠는가. 혹시 따지게 되면 마땅히 사실대로 아뢰고, 또 태종 황제가 내린 성지(聖旨)를 인용하여 아뢰면 마침내 허락을 받을 것이다. 군사는 3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되, 2천 5백 명은 평안도에서 내고, 5백 명은 황해도에서 내며, 기병과 보병의 수효는 상황에 따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또 하나는, 강물이 깊어서 군사가 건너기 어려울 때에, 만약 여울 위로 건널 만한 곳이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두세 곳에 부교를 만들 것을 논의하라.
또 하나는, 강계(江界)와 여연(閭延) 등지의 강가에 무지한 백성들이 일찍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그 땅에 몰래 들어간 것을 관리들도 몰라서 금지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사를 당하여 중요한 정보가 새나가고 있으니 작은 일이 아니다. 관리에게 밀령을 내려 더욱 엄하게 검찰 하도록 하라.
또 하나는, 사람을 시켜 그 부락의 다소와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을 알아본 뒤에, 가서 칠 시기를 결정하라.
또 하나는, 부교를 만들되 민가의 장정을 징발하지 말고, 근처 각 관가의 배를 부리는 사람을 시켜 운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순몽은 말하기를, “최해산이 먼저 강가에 이르러 백성을 시켜 벌목을 하게 하면, 서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저들의 의심을 살 것이다.” 하였다. 황희(黃喜)ㆍ권진(權軫)ㆍ하경복(河敬復), 병조 판서 최사강(崔士康) 등은 말하기를, “얼음이 녹으면 반드시 저들이 모두 밭갈이에 힘쓸 것이니, 마땅히 이 해산으로 하여금 먼저 그곳에 가서 성책(城柵)을 순찰하는 중이라 둘러대고, 몰래 모든 일을 준비하여 뜻하지 아니한 때를 대비하면서 수군과 육군을 모아서 만들게 할 것이지, 굳이 다른 사람을 다시 보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 곧 최해산에게 유시하기를, “처음에는 경이 가서 부교(浮橋)를 만들도록 명을 내렸으나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무단히 벌목을 하면 인심이 동요되어 저들이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경을 성책 순심사(城柵順審使)로 삼으니, 목책(木柵)을 신설할 터를 골라서 정한다고 둘러대고, 강가를 돌아보면서 심사숙고하여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급히 부교를 만들되, 만약 다리가 튼튼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사람과 말이 함께 바지게 될 것이니 보통 일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 된 이는 큰일을 당하면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계책을 묻고 널리 여러 사람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경들은 각기 방략을 말하여 보라.”하니, 조뇌(趙賚)ㆍ김익정(金益精)ㆍ권도(權蹈) 등이 아뢰기를, “사변을 예측할 수 없어 임시의 계략도 미리 세울 수 없으니, 임기응변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은 장수에게 맡기고, 그 부장(副將) 이하는 그의 호령을 들어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하였다. 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조계생(趙啓生)ㆍ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정예를 골라 재갈을 물리고 급히 달려 길을 나누어서 나란히 쳐 나아가며, 그 부락을 습격하고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는 것이 상책이요, 대군이 진을 치고 북을 치면서 전진하면, 저들이 장차 두려워하여 온 부락을 거두어 도망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이니, 어찌 감히 항거하겠습니까. 병정들의 무용(武勇)을 빛내어, 그들로 하여금 무서움을 알게 하면 감히 다시는 변방을 엿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중책입니다.” 하였다. 황희ㆍ안순(安純)ㆍ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군사가 몰래 강을 건너가 뜻하지 아니한 때에 엄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다리를 만들어서 군사를 건너게 하면, 적이 먼저 알게 되어 복병이 갑자기 일어난다면 승패를 헤아리기 어렵고, 비가 와서 물이 차면 진퇴양난에 빠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이미 잘 알았다.” 하였다.
이전에 상이 박호문(朴好問)ㆍ박원무(朴原茂)를 이만주(李滿住)ㆍ심타납노(沈咤納奴)ㆍ임합라(林哈剌)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적이 쳐들어올 때의 허실(虛實) 및 종류(種類)의 다소와,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길의 멀고 가까운 것들을 정찰하게 하였는데, 이제 돌아와 복명하였다. 임금이 맞아들여 비밀히 야인의 소식을 물어보니, 박호문이 길의 구부러지고 곧음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부락의 많고 적음 등을 두루 진술하고, 또 아뢰기를, “전에 야인 부락에 가서 정세를 보았을 때는 모두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었으나, 지금은 달래어 생업에 안정하게 하여 저들이 생각지 못한 때에 습격하려 합니다. 또한 대군이 강을 건너려면 그때는 강물이 몹시 빨라서 부교(浮橋)를 놓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호문의 아룀을 듣고 더욱 칠 결의를 하고, 정부 육조(六曹)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를 불러 박호문의 말을 가지고 의논하였더니, 이순몽(李順蒙)ㆍ정연(鄭淵)ㆍ박안신(朴安信)ㆍ황보인(皇甫仁)이 아뢰기를, “홀라온에게 포로로 잡혀 간 사람을 빼앗아 사람을 시켜 들려 보내 온 것은 그 뜻이 가상할 만하니, 술과 음식을 보내어 위로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전과 같이 강을 건너 가 농사를 짓게 하되, 그 연장을 감추어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형적을 나타내지 말게 하고 사태를 관망하게 하소서.” 하니,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이 계획이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술과 음식을 보내면 도리어 의심을 사게 하여 무익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맹사성과 조계생이 아뢰기를, “저 적들은 완악하고 교활하여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일찍이 집을 비우고 산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비록 여러모로 달랠 수는 있으나 속여서는 안 됩니다. 또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지금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군사를 일으키어 한 모퉁이를 치게 되는 날이면,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다 알게 될 것이니, 어찌 그 부족을 다 멸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하루 사이에 길을 나누어 함께 나아가 초전에 공격하여 그 죄를 성토해야 합니다.” 하였다. 황희가 아뢰기를, “소득이 잃은 것을 보상하지 못하여 수고로움만 있고 아무 공로가 없다면 도리어 적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니, 전날 말씀드린 계책대로 도절제사로 하여금 잡혀간 사람과 마소와 가재들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되, 만일 듣지 않으면 죄를 선언하고 토벌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서움을 알게 하는 동시에, 편안히 농사지을 수도 없이 멀리 도망치게 한다면, 명분도 서고 듣기에도 좋아 곧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4월에 풀이 자랄 때를 이용할 것이며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 하였다.
황희 등이 아뢰기를, “물살이 빠른지 느린지와 배와 부교 중 어느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일이니, 장수로 하여금 배나 부교 중에서 편의에 따라 만들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옛 사람이 싸움을 할 때에는 모두 간첩을 두어 그 정세를 살피게 하였다. 나도 몰래 사람을 보내어 저 사람들의 정상을 파악한 연후에 치려고 하노라.”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옛날에 간첩을 쓴 것은 같은 중국 사람으로서 옷이나 음식에 차이가 없고, 말소리도 서로 같아서 그 속에 섞여 있어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야인은 말이나 옷, 음식 등이 전혀 다르고, 또 인구의 수가 많지 않아 그들과 섞이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만약 잡힌다면 더욱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 3월에 최윤덕(崔潤德)이 최치운(崔致雲)을 보내어 아뢰기를, “지금 내전(內傳)을 받자오니,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을 토벌하는 일에 군사 3천 명을 낸다고 하는데, 신(臣)이 가만히 생각건대, 적지는 험하여 지나가는 요새마다 반드시 병사를 머물게 하여 지켜야 할 것입니다. 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계교로서는, 한 길은 만포(滿浦)로부터, 또 한 길은 벽동(碧潼)으로부터 함께 올라(兀剌) 등지로 향하고, 한 길은 감동(甘同)으로부터 마천목책(馬遷木柵) 등지로 향하여 동서(東西)에서 한꺼번에 일어나게 하고, 신은 소보리(小甫里)로부터 타납노(咤納奴)ㆍ임합라(林哈剌)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군사가 만 명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맞아들여 만나보고 이르기를, “처음에 여러 신하들과 군사의 수효를 의논할 때, 어떤 이는 7,8백을 말하고 어떤 이는 1천이라고 하여 말이 많아 정하지를 못하다가, 결국 3천 명으로 정하였는데 나는 적다고 하였다. 박호문(朴好問)도 만 명 이하여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제 올린 글을 보니 과연 그렇구나.” 하였다.
정부 육조(六曹)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를 불러 의논하니, 혹은 5백을 더하라 하고 혹은 1천을 더하라 하며, 혹은 더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최치운이 아뢰기를, “최윤덕이 말하기를, ‘처음 올 때에는 다만 타랍노와 합라 등만을 치려 했으므로, 정예군 1천 명만 얻으면 넉넉히 일을 처리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제 다시 생각하니, 마천(馬遷)에서 올라(兀剌) 지방까지 야인이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닭소리와 개 소리가 서로 들리는 터이므로, 만약 한두 부락을 치면 반드시 서로 구원할 것이니, 성패를 헤아릴 수가 없다. 옛 사람이 대군을 동원하였다가 몇 안 되는 적에게 패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대군은 다시 일으키기가 힘 드는 것이니 한두 부락에 한 군(軍)씩 보내면, 저들이 장차 자신도 구할 겨를이 없어서 남을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 명의 군사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최치운이 아뢰기를, “윤덕이 말하기를, ‘황해도의 병사가 먼 길을 달려오면 피로하여 쓸 수 없고, 평안도의 병사는 거의 3만이나 되니, 황해도의 병사를 출동시킬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고 묻기를, “최윤덕이 언제 군사를 일으키려 하더냐.” 하니, 최치운이 아뢰기를, “윤덕이 단오(端午) 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도적들의 풍속에 그때에는 서로들 모여서 놀이를 하며, 풀도 자라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비가 와서 물이 질까 염려되어 24, 25일 동안을 기다려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윤덕이 말하기를, ‘토벌하는 날 저들의 죄명을 써서 방을 붙이고 돌아와야 한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상이 안숭선(安崇善)과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김청(金聽)에게 명하여 방문을 써 보내었다.
○ 병조(兵曹)가 아뢰기를, “스스로 모병(募兵)에 응하여 종군한 자로서 만약 공을 세운 자는 한량(閒良)이면 상으로 벼슬을 주고, 향리(鄕吏)ㆍ역자(驛子)면 부역을 면제해 주며, 관노(官奴)면 천인을 면하게 하여 그 공을 표창하소서.” 하였다.
○ 여름 4월 초 10일에, 최윤덕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마를 강계부(江界府)에 모아 군사를 나누되, 중군절제사 이순몽(李順蒙)으로 하여금 군사 2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괴수 이만주(李滿住)의 성채(城寨)로 향하게 하고, 좌군절제사 최해산(崔海山)은 2천 70명을 거느리고 거여(車餘) 등지로, 우군절제사 이각(李恪)은 1천 7백 70명을 거느리고 마천(馬遷) 등지로,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은 3천 10명을 거느리고 올라(兀剌) 등지로, 김효성(金孝誠)은 1천 8백 88명을 거느리고 임합라(林哈剌)의 부모의 성채로, 홍사석(洪師錫)은 1천 1백 18명을 거느리고 팔리수(八里水) 등지로 향하게 하고, 최윤덕 자신은 군사 2천 5백 99명을 거느리고 곧 바로 임합라 등이 있는 성채로 달려갔다.
임금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이선(李宣)을 보내어 최윤덕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용병(用兵)은 제왕이 중대하게 여기는 일이다. 그러 므로, 고려 고종(高宗) 때에는 3년의 역이 있었고, 주 나라 선왕(宣王)은 6월의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모두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됨을 염려한 것이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 이제 야인이 준동(蠢動)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고 쥐나 개처럼 도둑질을 하는 일이 빈번하였으나, 그들의 짐승 같은 풍속을 탓할 바 못 된다 하여 참고 용서해온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제 변경에 숨어 들어와 늙은이와 아이들을 죽이고 부녀자를 노략질하며 민가를 소탕하여 제멋대로 포악한 짓을 하니, 그들의 죄를 성토하는 거사(擧事)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오직 경은 충의(忠義)의 자질과 장상(將相)의 책략을 겸비하여, 명성이 평소에 드러나 중외(中外)가 다 아는 터이므로, 경에게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야인의 죄를 문책하게 하노니, 부장(副將) 이하 대소 군관ㆍ사졸들의 항오(行伍)에 있는 자를 거느리되, 명령을 받들고 안 받듦에 따라 상벌(賞罰)하라.” 하였다.
이순몽ㆍ최해산ㆍ이징석ㆍ이각ㆍ김효성 등에게도 교시하기를, “임금의 도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된 신하의 충성은 적개심을 갖는 것을 귀히 여긴다. 야인이 준동하여 일어나 늑대의 심술을 멋대로 부리고, 벌과 전갈의 독을 거리낌 없이 피워 우리의 변경을 침략하고 백성을 학살하니, 고아와 홀어미에게 원한을 품게 하고 부부간의 금슬을 해치게 한다. 이것이 내가 애통하고 불쌍히 여겨 마지않는 것이며, 경들도 함께 가슴을 치며 이를 가는 터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죄를 성토함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에게 모군(某軍)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노니, 합심 협력하여 주장(主將)의 방략을 잘 따르고, 적을 무찌르는 공을 이룩하여 변방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라.” 하였다.
또 3품 이하의 군관과 민군(民軍)에 교시하기를, “야인들이 준동하여 짐승[梟獍 나쁜 새와 짐승] 같은 본성을 드러내고 이리 같은 마음을 행하여, 우리의 경계에 이웃하여 항상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틈을 엿보아 침략하므로, 방비를 엄하게 하고 화친을 수고로이 행하느라고 너희 백성의 근심이 된 지 오래였는데, 지금 또 변방을 침범하여 인명을 살해하고 집들을 부수니, 나는 참으로 고아와 홀어미들을 위하여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이에 장수로 하여금 그 죄를 성토하게 하노니, 너의 모든 군사들은 내가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을 잘 알아서, 장수의 절제(節制)하는 규율을 삼가 지키며 늙은이와 아이들 및 부녀자를 제외하고는 벨 수 있는 대로 베어라. 그 죽인 그 수효의 다소에 의하여 혹은 3등급, 혹은 2등급, 혹은 1등급을 승진시켜서 벼슬로 상을 줄 것이다. 만일, 군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공을 세워도 상이 없을 터이니, 너희들은 각기 용맹을 다하여 과감하고 굳셈을 다하도록 힘쓸지어다.” 하였다.
교서의 반포가 끝나자, 최윤덕이 여러 장수들을 모으고 명을 내리기를, “주장(主將)의 조령(條令)에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처리할 것이니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그 조령에 이르기를, “싸움에 임하여 지휘에 응하지 않는 자, 북소리를 듣고도 전진하지 않는 자, 나아가서 장수를 구해 내지 않는 자, 군사의 정보를 누설한 자, 요망스러운 말을 퍼뜨리어 군중을 의혹하게 하는 자는 대장에게 고하여 베고, 제 패를 잃고 다른 패를 따라 장표(章表)를 잃은 자,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고 항오(行伍) 중에서 세 사람을 잃은 자, 패두(牌頭)를 구해 내지 않은 자는 벨 것이요, 도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명령이 내리기 전에 재물과 보화를 거둔 자는 벨 것이다. 또 도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늙은이와 아이들과 남녀를 막론하고 치지 말 것이며, 장정일지라도 항복하면 죽이지 말라. 험한 곳에 행군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났을 때에는 멈추고 공격하면서 나팔을 불어 주장에게 알려야 하며, 물러나 도망하는 자는 벨일 것이다. 닭ㆍ개ㆍ소ㆍ말을 죽이지 말고 집들을 불사르지 말 것이다. 토벌하는 법은 정의로써 불의를 치되 그 마음을 치는 것이 만전(萬全)의 의(義)가 되는 것이다. 만일, 늙고 어린 자와 중국 사람을 죽여서 군공(軍功)을 낚으려 하여 조령(條令)을 범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군법에 의하여 시행할 것이며, 또 강을 건널 때에는 모름지기 다섯 사람씩, 열 사람씩 차례로 배에 오르되 먼저 오르려고 다투지 말 것이니, 위반하는 자는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명령이 끝나자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19일에 함께 적의 소굴을 두들기되 만일 비바람으로 캄캄하면 20일로 기일을 정하기로 하고는, 최윤덕이 소탄(所灘)으로부터 시번동(時番洞) 어구로 내려가 강을 지나서 강가에 군사를 멈추니, 강가에서 네 마리의 노루가 군영(軍營) 안으로 뛰어들었으므로 군인이 그것을 잡았다. 최윤덕이 말하기를, “노루는 야수(野獸)인데 이제 저절로 와서 잡히니 실로 야인(野人)이 섬멸될 징조로다.” 하였다.
어허강(魚虛江)가에 이르러 군사 6백 명을 머물게 하여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19일 어두운 새벽에 임합라의 성채를 쳐서 그대로 머물러 군영(軍營)을 차리니, 타납노의 성채가 모두 도망쳐 버렸다. 강가에 되놈 10여 명이 나와서 활쏘기 하는 것을 발견하고 최윤덕이 통사(通事) 마변(馬邊)으로 하여금 그들을 불러서 이르기를, “우리들의 행군은 오직 홀라온을 잡으려는 것이요 너희들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더니, 되놈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20일에 홍사석(洪師錫)의 군대가 와서 최윤덕과 서로 모여서 적 31명을 사로잡았다. 되놈들이 뒤쪽으로부터 싸움을 걸므로 이에 남아 있는 적 26명을 베어 버렸다. 타납노의 동쪽산 으로부터 임합라의 성채에 이르는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색하다가 해가 저물자 석문(石門)에 물러나 군영을 설치하고 지자성군사(知慈城郡事) 조복명(趙復明)과 지재녕군사(知載寧郡事) 김잉(金仍) 등에게 명하여 군사 1천 5백 명과 포로들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길을 닦게 하고, 홍사석(洪師錫)과 최숙손(崔叔孫)으로 하여금 (원문 빠짐)
○ 마변(馬邊)이 군사 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함께 각 부락을 수색하면서 타납노의 성채에 이르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최윤덕은 이순몽이 적의 수급을 바치지 않고, 또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것과, 최해산이 군사 기일에 미치지 못한 것과, 이징석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일들을 모두 탄핵하였다. 오명의(吳明義)를 보내어 전문(箋文)을 받들어 축하하고, 또 박호문(朴好問)을 보내어 아뢰기를, “선덕(宣德) 8년에 삼가 병부(兵符)와 교서(敎書)를 받들고 장차 파저강(婆豬江)의 도적을 치려 할 때 좌부(左符)를 보내어 왔으므로 병부를 맞추어 보고 군사를 동원하였는데, 곧 마병(馬兵)과 보병(步兵) 1만과 황해도 군병 5천을 출동시켜 4월 초10일에 강계부(江界府)에 모아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일곱 개의 길로 갈라 나란히 진군하여, 이달 19일에 여러 장수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를 소탕하여, 남녀 모두 2백 36명을 사로잡고 1백 7명을 베었으며 소와 말 70여 마리를 얻었는데, 우리 군사의 전사자는 4명, 화살을 맞은 자가 5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오명의와 박호문에게 각각 옷 두 벌을 주고, 선위사(宣慰使) 박신생(朴信生)을 보내어 군영에 이르러 술을 내리어 여러 장수들을 위로하고, 교지를 선포하기를, “오늘의 일은 실로 천지와 조종(祖宗)의 덕을 힘입어 여기에 이른 것이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군사가 돌아오는 날,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니, 사로잡은 사람은 늙은이와 아이들은 제외하고 장정은 모조리 베어 죽이고, 배가 지나다니는 강 등은 더욱 조심하여 지키라.” 하였다. 이순몽ㆍ이징석ㆍ최해산은 탄핵을 당하였으므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황희(黃喜)ㆍ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허조(許稠)ㆍ하경복(河敬復)ㆍ안순(安純)ㆍ예조 판서 신상(申商)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어림(御臨)한 이후로 매양 문물(文物)을 지키는 데 뜻을 두고 병혁(兵革)의 일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뜻이 미치지를 못했었는데, 이제 어찌 공을 이루었음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적이 말썽을 부려 할 수 없이 거사(擧事)한 것인데, 다행히 크게 이기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이 공을 길이 보전하고 후환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자랑하고 뽐내는 마음은 옛사람도 경계한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크게 이긴 것을 기뻐하기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들은 깊이 축하 하옵는 동시에 성책(城柵)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비축하여 불의에 대비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이제 정벌한 뒤에 만약 또 적이 침입하여 오면 변방의 장수를 시켜 성벽을 튼튼히 하고, 적의 이용물을 없애어 들을 말끔히 하고 기다리다가, 그 형세를 살펴 적당한 시기에 쫓아가 잡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토벌에 나가서 죽은 군사와 말의 수효가 천을 헤아리니, 곳간의 쌀로 말을 사서 갚아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더니, 모두 그것은 안 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변방의 장졸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말로 알목하(斡木河)와 여러 야인(野人)들을 타이르기를, ‘파저강의 야인이 오랫동안 나라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아무 명분도 없이 군중을 선동하여 은덕을 배반하고 살생(殺生)과 약탈을 하였으므로 부득이 장수에게 명하여 그 죄를 치게 한 것이다. 어찌 공(功)을 좋아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만약, 너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귀순하면 나라에서는 반드시 처음과 같이 대접할 것이다.’ 하고 말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최해산이 원수(元帥)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고 지체하였으며, 천 명이 넘는 군사를 가지고도 적을 잡은 것이 가장 적으니, 마땅히 군기(軍機)를 어긴 죄에 해당되지만, 특사한 뒤이니 이제 다시 논하지 말 것이며, 또한 논공(論功)도 하지 말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만약 특사를 받지 않았다면 죄를 멸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어찌 상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관하에 공이 있는 군사에게만 상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최해산은 군기(軍機)를 놓친 것이 특사를 받기 전에 범한 일이어서 죄줄 수가 없으니, 청컨대 그의 고신(告身 관직의 임명 사령장)을 거두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그 벼슬만 파면시켰다.
임금이 황희ㆍ권진 등과 의논하기를, “전날 기해년에 동쪽으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고 도통사(都統使) 유정현(柳廷顯)이 돌아올 때에는 대언(代言 승지)을 시켜 가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돌아올 적에는 내가 상왕을 따라 낙천정(樂天亭)으로 나가 맞이하여 위로했으니, 이종무가 친히 대마도를 치고 돌아올 때는 유정현에게 했던 예와는 다르다. 지금의 파저강의 역을 대마도 정벌과 비교하면 그 공이 배나 되니, 최윤덕과 이순몽 등이 개선하는 날은 어떻게 처우하는 것이 좋겠는가. 내 생각에는 최윤덕이 돌아올 때에는 모화관(慕華舘)으로 나가 맞이하고, 이순몽이하의 경우에는 대군(大君)이나 대신(大臣)을 시켜 맞이하게 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이 너무 정중하다고 한다면 최윤덕은 대군이나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로 하여금 가서 맞이하게 하고, 이순몽 이하는 대군이나 대언(代言)이 나가서 맞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옛날 이성(李晟)이 주자(朱泚)를 치고 서울을 수복하였을 때, 덕종(德宗)이 이성에게 사도(司徒)의 벼슬을 배수하고 영락리(永樂里) 저택을 주어 특별히 잔치를 베풀었는데, 태상(太常 예악을 맡아 보는 관청)으로 하여금 예악(禮樂)을 갖추어 서울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풍악을 울리어 영화를 베풀었고,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에는 장수를 보내어 진주(鎭州)를 평정하고 돌아오자 친히 성 밖까지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그의 집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옛날의 제왕이 장수를 대접하기를 이렇게 영화롭게 하였는데 지금은 어떤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상왕이 이종무를 낙천정(樂天亭)에서 맞이하여 위로한 것은 그때 우연히 낙천정에 납시었는데 때마침 종무가 왔을 뿐이요, 일부러 윤정현과 달리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저 당 나라와 주 나라의 임금들이 장수를 사랑하고 우대한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마음을 잡기에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나, 오늘의 일은 수복(收復)한 것과 같은 공은 아니며, 다만 조그마한 추악한 무리를 쳤을 뿐입니다. 때가 다르고 사건도 다르니 어찌 나가서 마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최윤덕은 지신사(知申事)로 하여금 맞이하여 위로하게 하고, 이순몽이하는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을 시켜 맞아 위로하게 하여도 넉넉히 한때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예조에서 싸움에 이겼음을 종묘에 고하고 중외(中外)에 널리 선포하고 곧 치하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장수의 공을 표창하려고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허조(許稠)는 최윤덕에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주어 표창하자고 하고, 맹사성(孟思誠)은 자기의 벼슬을 주자고 하여 두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리는 날,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에게 특명을 내려 안숭선(安崇善)을 대신하여 문선(文選 문관과 종친의 인사를 담당하는 사무)을 관장하게 했더니, 모두들 임금의 생각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김종서를 불러들여 이르기를, “경은 지난해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때에 경과 더불어 말하기를, ‘최윤덕은 수상(首相)이 될 만하나 그 직임이 지극히 무거우므로 전공(戰功)으로 인해 상을 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최윤덕이 비록 전공이 있으나 만약 재덕(才德)이 없으면 단연코 줄 수가 없다. 나는 일의 선후와 취사의 가림이 이러하니, 경은 이 뜻을 대신들에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여 잘 의논해 가지고 아뢰라.” 하였더니, 맹사성 등이 아뢰기를, “윤덕은 청렴 정직하고 부지런하여 삼가 임금의 뜻을 받드니, 수상이 되어도 부끄러움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생각이 이러하고 대신들의 뜻이 또한 그러하니, 권진(權軫)의 벼슬을 대신하여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삼고, 이순몽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이각(李恪)과 이징석(李澄石)을 중추원사(中樞院事)로, 김효성(金孝誠)과 홍사석(洪師錫)을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삼으라.”고 하였다. 최윤덕에게는 노비 10명, 이순몽에게는 8명, 이각과 이징석에게는 6명씩, 홍사석에게는 5명, 김효성에게는 4명을 주었다. 이숙치(李叔畤)는 군사를 조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잘하였다 하여 벼슬을 올려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삼고 그대로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있으라고 하였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납시어 최윤덕 등과 장수 및 관리들을 위로할 때,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옷과 신을 나누어 주어 그것을 입고 잔치에 나오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잔을 잡아 최윤덕 등에게 내리고, 또 세자에게 명하여 술을 돌리고는 이어 최윤덕에게 명하여 술잔을 받을 때에 일어나서 받지 말게 하고, 군관으로 하여금 서로 마주 서서 춤을 추게 하였다. 최윤덕도 술이 취하자 역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토벌에 나가 전사한 군사에게는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게 하고 교서를 내리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장하게도 충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은공에 보답하기 위하여 구휼의 은전(恩典)을 내리노라. 전번 야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가서 치게 하였더니, 너희는 모두가 용맹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 항오(行伍)의 대열에서 뛰쳐나와, 창칼을 휘두르며 다투어 용감히 나아가서, 적진을 함락시키고 예봉을 꺾어 죽음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특별히 죽음을 무릅쓴 의리를 가상히 여기고 은전을 베푸노라. 혹 영묘한 넋이 앎이 있으면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릴 것이다.” 하였다. 쌀과 콩을 내리고 5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고, 앓다가 죽은 자에게는 쌀과 콩을 주고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고, 말을 잃은 자에게는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병조가 아뢰기를, “사로잡은 야인의 남녀 1백 74명을 제주현(濟州縣)에 편안히 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린것과 여자들은 모두 도적질한 자가 아니니 마땅히 구해 주되, 야인은 습성이 본래 더위를 두려워하므로 모름지기 기온(氣溫)을 알맞게 해주어 병이 나지 않게 하여주고, 또 남녀가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지 않도록 그곳 수령(守令)은 심중히 살피도록 하라.” 하고, 경기와 충청도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갈라놓아 둔 야인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써 보호하도록 하고, 포악한 무리가 여자들을 겁탈하지 못하게 하여 마음 놓고 살게 하고, 혹시 떠도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처벌하라.” 하였다.
또 처음 갈라놓을 때에 예조에 명령하여 모자(母子) 형제가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으나, 예조의 조치가 충분치 못하여 완전히 모여 살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므로 다시 그들의 소원을 들어 한 곳에 완전히 모여 살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공격하여 싸운 뒤에는 수비를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여연(閭延)의 방비가 얼음이 녹은 뒤 튼튼하다고는 하나, 야인이 보복할 생각을 품고 있어 어떻게 나올지 헤아릴 수가 없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의정을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를 삼아 성을 쌓고 목책(木柵)을 세워 변경을 튼튼히 함이 어떠할까.” 하니, 노한(盧閈)ㆍ안순(安純)ㆍ허조(許稠)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평안도 인심에 폐를 끼침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별다른 조치가 없을 것이니, 가을에 가서 보내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갑산(甲山)은 야인의 땅과 경계가 이어 있는데, 다만 색군(色軍)에 소속되어 있고 주둔군을 두지 않았으니, 이제 주둔군을 두어 방비를 엄히 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모두들 병사(兵使)로 하여금 규약을 만들어 정하게 하자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해산(惠山)의 민가는 두 강어귀 외에는 불과 7, 8호 밖에는 살고 있지 않는데, 이곳이 맨 먼저 적의 해를 받을 곳이니, 그곳 백성을 깊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떨까.” 하니, 황희가 말하기를, “도순무사(都巡撫使) 심도원(沈道源)으로 하여금 방문하게 하여 옮기는 여부를 알아보고, 또 전입시켜 보호할 곳을 살피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임금이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요즘 세월이 태평하여 군사훈련을 소홀히 하고 있으므로 각 도(道)에 소속시켜 훈련하게 하고자 하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정벌한 뒤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한창 의구심(疑懼心)을 품고 있는데, 만약 양쪽 경계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을 하면 반드시 더욱 더 의심을 할 것이요, 남쪽에는 왜가 아주 가까이 있는데, 왜인이 그것을 들으면 또한 의심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황희(黃喜)ㆍ권진(權軫)ㆍ최윤덕(崔潤德)ㆍ허조(許稠)ㆍ하경복(河敬復)ㆍ노한(盧閈)ㆍ이징석(李澄石)ㆍ홍사석(洪師錫)이 아뢰기를, “병졸을 훈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오나 요사이 양계(兩界)에 시끄러운 일이 많을뿐더러 축성(築城)의 역사도 있고 하오니 잠깐 후년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맹사성(孟思誠)ㆍ안순(安純)ㆍ이순몽(李順蒙)은 아뢰기를, “양계에서는 당번 군사를 제외하고 훈련하되 다만 진법(陣法)에 관한 책을 읽게 하고, 다른 도에서는 집합 장소를 정해 놓고 군사를 모아 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법을 마련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가을 7월에, 임금이 경회루(慶會樓)에 납시어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 최윤덕 및 여러 군관 등을 전송하고, 또 지신사(知申事 도승지) 안숭선(安崇善)을 시켜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송케 하였다.
○ 임금이 황희ㆍ맹사성ㆍ권진과 의논하기를, “중국 도독(都督) 한 사람이 우리나라가 파저강의 야인을 친 소식을 듣고, ‘조선이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였다.’ 하나 나는 생각하기를 태종 황제의 성지(聖旨)가 뚜렷이 믿을 만하고, 더구나 또 황제의 칙유(勅諭)에, ‘기미를 관찰하고 잘 다루어 야인의 업신여김을 사지 말라.’ 한 것으로 보아, 황제는 반드시 우리가 가서 정벌한 것을 죄로 삼지 않음을 알겠다. 또 맹날가래(孟捏哥來)와 최진(崔眞) 등이 오는 윤8월에 건주(建州)와 본국을 향해 떠나서, 두 곳의 포로 된 사람과 물건을 찾아서 각각 제 고장으로 돌려보낸다고 하였다. 내가 처음에 정벌한 것은 위령(威靈)을 보이고자 함이었으니, 저들이 만약 와서 항복하면 포로를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여러 번 여연(閭延) 등지를 침범하였으므로 두 도(道)에 갈라 두었던 것이다. 만약 황제의 칙서가 온 뒤에 돌려보내면, 야인은 다만 황제의 덕으로만 생각하고 우리나라의 은덕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강계(江界)에 머물러 두었던 야인 2명을 본고장으로 돌려보내면서 유시하기를, ‘너희들이 진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포로를 보낼 것이나, 전의 잘못을 그치지 않고 변경을 엿보므로 지금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옷과 음식이 때를 잃는 일이 없고, 강포한 무리들이 침해하지 못하게 하여 마음 놓고 살고 있다.’고 하여 만일 저들이 이 말을 듣고 진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마땅히 다 돌려보낼 것이니, 전날의 위세와 오늘의 은혜를 알게 하면, 은혜와 위엄이 함께 행해져 서로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8월에 최윤덕이 아뢰기를, “올적합(兀狄哈)과 열가(列家) 등 세 사람이 강계(江界)에 이르러 말하기를, ‘전에 보낸 포로 조사라(趙沙剌)가 죽지 않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만약 진심으로 나와서 항복하면 잡아온 사람과 물건을 모두 돌려보내게 할 것 이다고 하기에 이만주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만나보고 이르기를, “만약 다시 나오면 다시 말하겠다.” 하면서, “너희가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면 처음과 같이 대우하고 잡혀온 사람을 다 보내어 주겠다.” 하였다.
○ 야인이 이만주(李滿住)의 편지를 가지고 강계(江界)에 와서 고하기를, “최진과 맹날가래 두 중국 사신이 홀라온에 가서 조선 사람과 물건들을 조사하고 만포로부터 나온다.” 하였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선덕(宣德) 7년에, 올적합 1백 40명이 조선 국경에 이르러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내가 힘껏 싸워 64명을 빼앗아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조선에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식량을 주고, 또 군사를 일으켜 와서 토벌하니, 잡힌 사람들이 말을 갖추어 주달(奏達)하여 이미 중국 황제의 성지(聖旨)가 내렸으니, 잡아간 처자와 마소와 재물을 모두 돌려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의 정부 육조(六曹)를 불러 그 답사를 의논하는데, 모두 아뢰기를, “너희 무리가 홀라온을 끌어들여 변방 백성을 노략질하였으므로 나라에서 가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너희 무리가 항거하고 복종하지 않아 스스로 패망을 가져오게 했으니, 이것은 오로지 너희들이 순종하지 않은 잘못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홀라온을 핑계대고 스스로 벗어나려 하느냐. 너희들의 처자 4명이 이미 돌아갔으니, 만약 성심으로 귀순하면 어찌 칙서(勅書)를 기다려 돌려보내겠느냐.” 하였더니, 임금이 거기에 따랐다.
○ 최윤덕이 박호문을 보내어 아뢰기를, “야인이 강계에 와서 하는 말이 전날 포로를 돌려보내 준 데 대하여 이만주가 몹시 기뻐하면서 우리의 가속이 만약 살아 있으면 강가에서 서로 만나보면 좋겠다고 하는데, 지금 강 연안의 방비에 있어 군마(軍馬)가 극도로 지쳐 있고, 또 흠차사(欽差使)가 중국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오니, 포로 중의 한두 사람은 혹은 들여보내고 혹은 강가에 보내어 서로 만나보게 하여, 저들이 귀순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박호문으로 하여금 돌아가 윤덕에게 이르라고 하면서, “지금 야인이 처자를 돌려보내 달라 하고, 또 사신이 나온다 하니, 연변 방비에 있어 남도(南道) 병사에 한하여 얼음이 얼면 풀어 보내고, 얼음이 언 뒤에 자산(慈山) 이남의 병사로 교대하되, 그런 일은 먼 데서 헤아리기는 곤란하니 기회를 보아가며 조치하라.” 하였다.
○ 윤8월에, 파저강의 야인 왕반거(王半車) 등 4명이 이만주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빼앗긴 가산(家產)을 돌려보내 주기를 빌고, 서울로 올라와 임금을 뵙고자 하니, 맹사성과 권진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를 청하였고 황희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맹사성의 의논을 따랐다. 9월에 왕반거(王半車) 등이 화친을 허락하는 교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가기를 청하자 임금이 정부 육조에 의논했더니,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가 아뢰기를, “이런 교지를 내린 것은 전례가 없습니다. 예조(禮曹)나 병조, 의정부(議政府)에서 교지를 받아 이첩(移牒)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황희 등은 아뢰기를, “지금 온 한두 사람의 말이 추장(酋長)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관원이 교지를 받아서 써 보내는 글이라 할지라고 너무 간단한 것 같고, 또 사사로이 문서를 통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성심으로 귀순한다면 예전과 같이 대접한다는 뜻을 말로 하여 주면 그만입니다.” 하고, 김익정(金益精) 등은 아뢰기를, “지금 온 사람의 말이 비록 믿을 수 없다 하여도 이미 이만주의 공문을 받았으며, 와서 화친할 뜻을 말했으니, 예조에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이첩하되, 화목하지 못한 이유와 아울러 화해(和解)의 뜻을 소상히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임금이 다시 의논하여 일치한 의견을 가지고 아뢰라고 하였다. 황희 등이 아뢰기를, “문서를 보내는 것은 단연코 불가합니다. 그러나 자제(子弟)를 볼모로 보내어 와서 빌고 또 임금께 뵙고자 하는 것은 도의(道義)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맹사성 등이 아뢰기를, “지금 온 사람이 진정으로 통서(通書)를 요구하니, 기록을 갖추어 문서를 청하는 뜻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너희들이 스스로 틈이 벌어지게 할 만한 일을 꾸몄으므로 부득이 가서 친 것이니, 만일 마음을 고쳐 성심으로 복종하면 반드시 전날과 같이 대접할 것이다.’ 하고 예조에서 교지를 받들어 이첩하면 대의(大義)를 상함이 없을 것이요, 이제부터 우리나라에 오는 자와 자제(子弟)로서 입시(入侍)하는 자를 함께 모두 허락하면 시의(時宜)에도 적합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맹사성 등의 의논에 따랐다.
○ 최윤덕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사자 최치운(崔致雲)이 와서 아뢰기를, 친히 군졸을 거느리고 변방의 고을을 순행(巡行)하여 무용(武勇)을 빛내고 위엄을 보이려 한다고 하나 나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매년 순행하는데 올해는 이렇게 하고 이듬해는 그렇지 않게 하면, 저들이 장차 이르기를, “대장의 순행이 없으니, 예측하지 않은 사변이 장차 여기서 생길 것이다.” 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이미 저들에게 말하기를, ‘성심으로 와서 항복하면 처음과 같이 대접한다.’ 하고서, 이제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순찰하면 저들에게는 반드시 의심이 생길 터이니, 이것이 어찌 이전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군사에 있어서는 비밀을 중히 여기는 것이니, 적으로 하여금 속셈을 모르게 해야 한다.” 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
[독평] 『대동야승』에서 기사를 읽고, [한국고전종합DB]에서 옮겨와 길게 인용한 까닭은 압록강 상류 남쪽 땅이 어떻게 우리 강토로 굳어지게 되었으며, 국토를 조금이라도 더 굳히기 위해 위로는 세종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어떤 정책을 기획했고, 실무를 맡은 최윤덕 장군 등 장수들과 군사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이다.
최윤덕 장군이 개척한 여연군(자강도 중강군), 무창군(평안북도 후창군), 자성군(자강도 자성군), 우예군(자강도 중강군) 등 서북4군은 세종 때 새로 넓힌 국토가 아니라 이미 조선인들이 압록강 남쪽에 거주하면서 강 건너 북쪽에 밭을 만들어 경작할 정도로 조선 땅이었다. 강 건너에는 언어, 풍속, 혈통이 다른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다. 여진족들은 압록강 북쪽에 살면서 자주 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며 조선인들을 괴롭혔다. 이에 세종이 최윤덕 장군을 보내 강 건너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경계를 준 다음에 강 남쪽에 4군을 설치하여 완전한 국토로 만들었다.
현대의 우리 한국인은 크게 혈연과 모습, 언어와 풍습이 비슷한 고구려, 옥저, 동예, 백제, 마한, 신라, 가야 등 여러 종족의 집합체이다. 여러 대소 나라의 조상들 모두가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족이 아니라 바이칼 호수에서 몽골 초원으로 이어지는 중남부 시베리아 지역에 살다가 시대에 따라 각자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 크고 작은 부족국가를 세우면서 왕조시대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루 섞이면서 비로소 한국인의 본체가 형성되었다.
압록강 북쪽의 고구려와 발해 옛땅을 수복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 5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효종이 좀 더 오래 살아 북벌정책을 성공시켰다면, 최소한 압록강 건너 일부 지역은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미 여진족들이 곳곳에 터전을 잡아 살고 있는 남만주 땅을 차지해봐야 오래 보존하기 어렵고, 오히려 압록강 이남의 국토에 악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효종의 북벌은 왕과 노론파들이 복수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명분이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극성기의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세종이 결정한 4군과 육진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는 정책은 역사적으로 합리성과 정당성을 갖는다. 한반도는 비록 작은 땅이지만 한 치 한 자도 다 쓸모가 있는 금수강산이다. 농산물, 수산물, 광산물, 임산물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일 년 쓸 만큼은 생산되는 복지이다. 단지 허리가 끊겨서 남북동서 유통이 안 되어서 금수강산이 제대로 빛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땅 금수강산에서 명줄을 받고 태어나 사는 사람들은 세종 이도 李裪, 최윤덕, 김종서 세 분께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