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 남 말하네!’
<중주>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새달이 다가오면 새달에 들어있는 중국의 국경일과 기념일, 절기, 행사, 이런 것들을 파악하곤합니다.
중국을 위한 기도에 참고하기 위해서입니다.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기념일(국경절, 1일)이 들어있습니다.
지난 9월 30일(금) 베이징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국경절 경축행사는 시진핑 국가주석을 띄우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오는 16일(일)에 시 주석의 3연임을 확정할 중국공산딩 20차 전국대표회의(당대회)가 열리는데 이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국경절에 중국에서는 긴 연휴가 주어지는데 전에는 이때 한국을 찾는 중국관광객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무렵에 제주 공항이나 쇼핑단지에 가면 ‘가만, 내가 지금 중국에 와 있는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서울 명동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만큼 유커(游客)들이 많았는데, 서먹해진 한중관계와 코로나는 이런 광경을 우리로부터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요, 타이완은 10일을 건국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911년 10월 10일에 일어난 신해혁명을 기념해서인데요, ‘10’이 겹치기 때문에 이날을 쌍십절(雙十節)이라고 부릅니다.
전에는 쌍십절이 낯선 말이 아니었는데 지금 젊은 세대 가운데는 이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과 타이완의 건국일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얼마 전에 타이완 해협에서 중국이 무력시위를 여러 날 계속해서 긴장이 고조된 일이 생각났습니다.
지금도 타이완 해협에는 긴장이 감돌고 있지요.
요즘 ‘신냉전구도’가 강해지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 지역이 신냉전의 화약고가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중국과 타이완은 뿌리가 같은데 건국일을 다르게 지키네’ 하다가 ‘사돈 남 말 하네!’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정부수립일이 남녘은 8월 15일이고 북녘은 9월 9일이기 때문입니다.
북녘은 9월 9일을 ‘구구절’이라는 약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돈 남 말하네”는 자기도 똑같은 흠이 있거나 잘못을 저질렀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 쓸 수 있는 말인데 중국어에도 이런 표현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중공군, 6⋅25때는 어땠나?
중국은 10월 25일을 ‘’중국인민지원군 출국작전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6⋅25 저쟁 때 중공군이 이날 '항미원조'의 깃발을 들고 압록강을 건너 참전했지요.
6⋅25 전쟁 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6월 28일에 서울을 처음 빼앗겼을 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인민군의 사납고 거친 행동을 많이 목격하고 또 겪었지요..
9월에 서울을 수복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년 4월에 서울을 다시 한 번 빼앗기게 되었을 때는 얼른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서 피난을 떠났기 때문에 중공군을 보지 못했씁니다.
제가 중국사역을 하게 되어 중국의 이모저모를 공부하면서 그때 서울에 남아있던 분 여럿에게 ’중공군은 어땠나요?‘ 물어보았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국공내전 때 마오쩌뚱의 팔로군 지휘부는 ’욕하지 말라, 때리지 말라, 빼앗시 말라, 젊은 여자는 누이 대하듯 하라, 나이든 여자는 어머니 대하듯 하라‘고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이런 것을 ’신교(身敎)‘라고 불렀습니다.
’몸으로 가르친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해서 민심을 얻었고, 이것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면서 ’6⋅25 전쟁 때도 그런 분위기가 약간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해방후 1호 중국 선교사 이야기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넉 달 전쯤인 지난 6월 7일(화), 서울 남대문교회에서는 ‘맹의순(孟義淳) 선생 순직 70주기 추모예배’가 드려졌습니다.
맹의순 선생은 6⋅25 전쟁 때 신학생이었는데 피난을 가다가 만난 미군이 그를 인민군으로 오인해서 그는 부산 거제리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억울함을 이기지 못했고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으나
이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수용소 안에 교회가 세워졌지요.
그 수용소에는 중공군 포로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맹의순 선생은 이들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보살폈습니다.
맹의순이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여러 사람이 힘을 써서 그는 수용소를 떠나게 되었는데 석방 직전에 뇌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952년 8월 11일,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맹의순 선생의 이야기는 소설가 정연희 선생의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에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저는 <중국을 주께로> 2018년 6월호(제190호)에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맹의순 선생의 임종 열흘 뒤인 1952년 8월 22일 오후 7시,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부산 보수교회에 모요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중공군 포로들이 그 예배에 참석한 분들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편지 내용을 발췌해서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오늘 밤, 귀교회에서
우리의 위로자였고, 사랑과 존경의 표적이었던 맹 선생의 추도 예배를 드린다기에 우리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서둘러서 이 글월을 드립니다.(중략)우리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을 때 이게 때체 무슨 일인가 통탄을 했습니다.
이 낯선 땅 엉뚱한 곳에서 우리가 왜 포로로 남겨져야하는지 기가 막힐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맹 선생과 함께 보내면서
그 분께 가르침을 받은 후에 우리들 몇 사람은 기쁘고 신기한 놀라움에 이따금 혼자서 고개를 끄떡이고는 합니다.
중공 땅에서 복음이 지워지고 그 담장이 하늘끝까지 닿을만큼 높고 두터워지자 하느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일 몇 사람을
위해서 우리를 이 땅으로 밀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총부리를 한국사람에게 들이대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음의 생명수를 받아 마시기 위해서 보내어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누가 무어라 하여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맹의순 선생은 '해방후 1호 중국선교사'라고 불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현지에 가서 선교하는 것만을 선교사로 여기다가 30년 전쯤부터 ‘와 있는 사람에게 선교하라’는 것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맹의순 선생은 그 훨씬 이전에 그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중국을 주께로> 2018년 6월호가 발간되고 석 달 뒤에 열린 장로교통합측 제103회 정기총회에서는 맹의순 선생을 순직자로 공식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순직 70년 추모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중공군 참전일이 들어있는 10월에 우리는 맹의순 선생을 통해 다시 한 번 도전을 받고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지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태국 치앙라이에서는 메콩포럼이 열렸습니다. 이번호는 그 포럼에서 발표된 원고들을 특집으로 엮었습니다.
<중국을 주께로> 편집진이 취재를 겸해 이 포럼에 참석하고 돌아오느라고 이번 호는 평소보다 늦게 출간된 점, 양해를 구합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국제적으로 어지러운 소식들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그
러나 우리의 사명에는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가을에 <중주> 가족 여러분께 평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