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우는 직업 / 드니스 레버토프]
성장하는 것에 온전히 사로잡힌
아마릴리스,
특히 밤에 자라며
동 틀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바라보는 데는
내가 가진 것보다 약간의 인내심만
더 필요할 뿐
육안으로도 시간마다 키가 크는 걸 볼 수 있다.
해마다의 성장을 자랑스럽게 뛰어넘으며
헛간 문에 키를 재는 아이처럼
착실히 올라가는
매끈하고 광택 없는 초록색 줄기
어느 날 아침, 당신이 일어났을 때
그토록 빨리 첫 번째 꽃이 핀다.
혹은 짧은 머뭇거림의 한순간
막 피어나려는 걸 당신은 포착하리라.
다음 날, 또 다음 날
처음에는 새끼 망아지처럼 수줍어하다가
셋째 날과 넷째 날에도 망설이다가
마침내 튼튼한 기둥 꼭대기에서
의기양양하게 꽃이 피어난다.
만일 사람이 저토록 흔들림 없는
순수한 추진력에 이끌려
한눈 팔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온 존재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가지고꽃
을 피울 수 있다면,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꽃을
불완전한 것조차 감추지 않는 꽃을!
드니스 레버토프, <꽃 피우는 직업> 일부
시인은 혼자 시를 쓰지만, 그 시는 많은 이들이 감상한다. 밤새워 한 송이 꽃을 피워 낸 구근식물이 그렇듯이. 아마릴리스는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꽃으로 '눈부신 아름다움', '침묵', '자랑스러움' 등 꽃말이 여럿이다. 봄에 시장통 좌판에서 흙 묻은 아마릴리스 구근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뿌리를 심으면 해마다 뿌리가 는다. 둥근 구근에서 봄부터 싹을 내밀어 길게 꽃대가 자라다가 밤 사이에 꽃을 피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노지 월동이 가능하다. 서귀포에 살 때 돌담 옆에 핀 이 꽃을 더러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꽃이 그렇듯 개화 기간은 아쉬울 만큼 짧다!
드니스 레버토프(1923~1997)는 영국 출생의 미국 시인으로 웨일스 출신의 어머니와 하시디즘(유대교 신비주의)을 따르는 독일계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신비주의적 종교 성향이 “나의 세포를 구성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문학, 미술, 음악, 무용 등 전 과목을 배웠다. 자신이 예술가가 될 운명임을 느낀 드니스는 어렸을 때 이미 시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열두 살에 자작시 몇 편을 영국 시문학의 거장 T. S. 엘리엇에게 보냈으며, 엘리엇은 두 장에 달하는 격려 편지를 보내 주었다. 30대 후반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뛰어들고, 인생 후반기에는 MIT, 스탠포드대학에서 시를 강의했다. 퇴임 후에는 미국과 영국을 여행하며 시 강의와 시 낭송을 하는 한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강력히 규탄했다. 림프종 암에 걸린 후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영성과 시문학 강연을 했다. 그녀의 인생 자체가 열정적으로 꽃을 피운 아마릴리스였다.
나도, 당신도, 그렇게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가? 흔들림 없는 추진력에 이끌려 온 존재로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는가? 시인은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는 두세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긴 시를 쓰는 경우가 있다. 아마릴리스가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마침내 줄기 끝에서 한 송이 선홍색 꽃을 피우듯이, 시인은 동이 틀 때까지 밤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침착하고 끈기 있게 아마릴리스가 피어나는 모습을 묘사해 나간다. 그런 다음 마침내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독자 또한 인내심을 가지고 시를 읽어 내려간 후에 그 중요한 메시지에 도달한다.
'우리 자신을 가지고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불완전한 것이 없는 아니 불완전함조차 감추지 않는 꽃을!'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중에서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