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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와 쉼 마태복음 11:28-30
‘쉼’은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은 주말이나 휴가철만 되면 쉼을 위해 교외로 빠져나갑니다. 돌아올 즈음이면 ‘집이 제일 났다’고 푸념을 하기도 합니다. 그 푸념의 내면에는 쉼을 위해 간 그곳에서도 온전한 쉼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전도할 때에 많이 사용되는 성경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초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약속)” 그런데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내게로 와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시면 좋을 터인데, 이어지는 29절 말씀에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초대).” 하십니다. 그때에 비로소 ‘쉼’을 얻으리라는 것(약속)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들을 위해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초대의 이유)”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교 지혜문학에 나오는 인격적 지혜가 어리석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지혜를 익히도록 권하는 초대사와 유사합니다. 마태는 이 초대사를 예수님의 초대사로 바꾸면서 ‘짐 진’이라는 말과 ‘내 짐’을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613가지나 되는 율법계율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가벼운 짐을 지우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613가지 율법을 황금률-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7:12)-과 사랑의 이중 계명-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라 (22:34-40)-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인생고와 나날의 긴장에 지친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위안과 휴식을 찾으라는 권고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수고, 짐, 쉼’이라는 몇몇 단어들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수고’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일을 하는 데 애를 쓰고 힘을 들임’입니다. ‘짐’은 ‘맡긴 부담이나 책임’을 이르는 말이며, ‘쉼’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춤’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고 가는 짐입니다. 베스트셀러 중에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서 멈춤이라는 것은 곧 ‘쉼’이고, 그 쉼을 통해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좋은 책 제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쉼을 얻고 싶고, 그 쉼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쉼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탓일까요? 그것도 있겠지만, 우리 신앙의 사고방식이 너무 구조화된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인의 삶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줄 것이며, 하나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다”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의 시대는 과거 유대교의 613가지 율법계율보다 더 복잡한 신학체계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복잡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구체화 시켜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그것을 아주 쉽게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황금률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세속적인 것에 기초하였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의 외형은 주일 성수, 십일조 등으로 나타났고 그 보상은 세속적인 성공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매가 처치에서는 교회 공동체성을 해체하고 개별적인 인간구원의 차원으로 접근하면서, 개인구원을 추구하는 신앙인을 양산해 냈습니다. 한 예로, 주일예배만 참석하여 십일조 헌금을 하면 신앙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는 다한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없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싶거나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싶으면, 각종 성경공부 모임과 주차관리 같은 봉사를 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해졌습니다. 아주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혼재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모두를 충족시켜줄 메시지는 두루뭉술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을 편들면 사단이 생깁니다. 결국, 신앙이 모호하여진 것입니다.
부자들에게는 그들의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인정해 주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사회구조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미완 혹은 연단의 과정, 그 끝은 결국 부자가 되리라 혹은 이 땅에서 그리하여도 사후에는 주님을 만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선에서 타협합니다. 때론 이런 것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 모여 지식인 교회를 만들어 지성의 유희를 즐기기도 합니다. 지적인 깨달음이 곧 신앙의 깊이인 것처럼 지적만족을 채워줍니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게도 이 두 가지 모습 모두 혼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내가 지어주는 짐은 쉽고 가볍다.” 그 초대와 약속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황금률과 사랑의 이중 계명을 요약하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수고, 짐, 쉼’이라는 단어들을 묵상하면서 저는 아주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미 나는 그리스도 안에 쉬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나는 끊임없이 바라면서 그가 바라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버려보았습니다. 그가 내게 해주기 바랐던 것을. 그것을 버리고 나니, 그가 내게 해주지 않아서 서운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이 사라지니 그가 밉지 않고 불쌍해 보입니다. 기대를 버리자 서운한 마음도 없어진 것입니다. 서운한 마음이 사라지니 미운 마음도 사라지고,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 그 때문에 아파하던 내 마음도 아프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고서도 그냥 포기만 했는데도 나는 많은 것을 얻은 것입니다. 성인군자가 되면 혹은 신앙이 더 깊어지면 그를 위해서 기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랑’, 이것도 그랬습니다. 내 앞가림하기도 버거운데 이웃은 무슨 이웃?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어도 내 삶의 초점은 내 삶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바꾸면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나 중심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길이 있는데, 탕아처럼 그냥 제 길을 제힘으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태하게 살지 않았지만, 수고하며 살았지만 고됩니다. 목사로서 늘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따르며 살아가라”고 하면서도 정작 나는 내 삶을 스스로 살아가겠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욕심도 버리자. 지난 주간, 이틀은 분노에 빠져 살았습니다. 내 삶을 살아오면서 치욕스러웠던 순간이 몇 있는데 그와 유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사흘이 되기 전에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나눈 말씀을 읽으면서였습니다.
내 잘못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해가 됐습니다. 그래도 나라면 그렇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기에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저의 한계입니다만, 그냥 안고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이것도 내 삶의 색깔이다 생각하고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일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지나친 합리화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저의 그릇입니다.
지금 지고 가는 짐과 수고도 무거운데 쉼을 주시겠다고 하더니만 ‘나의 멍에를 매라’니 말이 되는 소린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그동안의 멍에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동안의 멍에가 지고 가면 갈수록 삶을 옭아매는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지어주시는 멍에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고 가벼워서 누구라도 매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신앙인, 신앙생활에 대해 너무 복잡다단하게 생각하고 살아온 자신을 돌아봅니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내가 남들에게 바라는 대로 해주자. 그렇게만 살아가면 대성공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웃들, 나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이웃들에게 다가가자. 내가 가진 것 비록 적어도 그분이 들어 쓰시면 그 분량만큼 쓰일 것이다. 나 스스로 짐을 벗어버렸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할 때, 힘들었습니다. 이제 조금 그 멍에를 벗어버리고 쉬려고 합니다. 그 쉼의 출발은 바로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멍에를 예수님은 제게 지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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