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마을은 푸른 솔밭을 뒤로하고, 앞뜰을 나서면 얕은 계단 채밭이 서너단계 줄지어 감싸고,
연이어 벼논이 넓게 펼처 져서 문전옥답 이라 하지요!
강길로 들어 서려면 크고작은 돌맹이 자갈 밭을 내려, 햐얀 은빛 모래 사장이 눈부시개 반짝이고 강섶에 찰락이는 물 소리는 연인의 밀어를 감춰주는 친구 같다오.
강폭이 평시 오십 여메테 되니! 수영을 한답시는 장정들만 드나 들수있다오.
건너 돌섶를 오르면 산밑 자락을 타고 길이 나 있는데,이길이 安東에서 大邱로 오가는 길이람니다.
즉 안동 단촌 무릉리 솔밭이 "무릉"이 태어난 고향이랍니다.
봄이면 보리밭 밟는 아낙과 아저씨들 콧노래가 들리고 무명 치마 올려매고 허리춤에 나물 쾅우리 찬 매순이와 춘자의 맑은 웃음 소리가 동구밖을 휘젖으며 달음질 칠때, 검둥 고무신 손에들고 누나의 꽁무니를 딸아 잡을려고 악을쓰며 달리던 무릉이가,두엄뒤 짚가리 밑으로 숨어 버린 누나를 놓쳐 버리고 손에든 검둥 고무신 내려 신고 은모래 사장에 모여 노는 꼬마대장 밑으로 들어 갈수 밖에 없었지요,
뻐꾹이가 울고 송학 가루가 바람에 싫려 올때면, 어머니께서 송학가루 편떡을 빚져 주시던 여름으로 접어들때,무릉은 5리길 단촌 초등학교를 다닐 적이랍니다.
사변을[6.25]격은 후라 가난은 어느 집이고 같은처지 였으나, 무릉의 어른께서는 동리 이장님으로 `~~그나마 심한 기근은 격지않았으나 위로 누나와 형들이 많아 막내인 무릉이 에게는 옷가지나 책을 물려받아 써야할 처지에 늘 심통을 달고 지내게 되었읍니다.
강 바람을 막아주는 신작로에 늘어선 버드나무와 뽀뿌라가, 지나는 차들이 일으키는 모래먼지에 허엿게 분칠을 하고 그늘에 주져않아 땅따먹기 하던 손꼽 친구들은 제가끔 객지로 나가고,무릉이도 안동 농고를 거처 대학 유학길에 올라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어, 이나라 대장이될 청운의 꿈을 품고 갈고 닦아 위풍도 당당한 육군 소위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내고향 무릉을 찾아 갈때,가난에 찌들어 울고 웃던 매순이는 밥술이나 먹는 안동으로 시집을 가고 강섶에 매어둔 나릇배는 간곳없고 솔 가지를 베어다 만든 돌섬 나무다리는 햐얀 콘크리트 다리로 변했고, 다리 목엔 새마을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읍니다.
꿈도 많고 살기좋은 무릉에서 부모형제 뫼시고 동리 어른 모인 자리에 큰잔치 한번 벌려볼 양이 였는데! 어이타 지금도 서울 수도권 대청에 매여살아, 고향 잊어 찌든 마음 달래려고 인터넷 카폐에, 바랜 사진 오려내어 오색칠로 분장하여 여러친구 보게하고 있읍니다.
이나마 남은 한은 옥돌같은 군 동기와 한달에 한번 오르는 등산길이 무척이나 기다려져 모여웃고 즐기는 행복이 유일한 낙이 되었읍니다.
가끔씩 고향에 다녀 오기도 하지요. 여러 동기생님들 덕분에 무릉이네 고향 한번 잘 다녀왔읍니다.
<~~무릉의 *"시골 고향 풍경"*을 보고 나선 김에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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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 아랫마을를 잊을수 없는 김문종 동기생,
자네 역시 촌티를 털어 버릴수 없어 크래파스와 화판을 끼고 사는구만!
하얀 종이위에 녹아 내리는 크래파스를 떨어 트려봐!
고향이 보여 아주 잘보여 웃어봐 흥얼거리면서!~~~
사실적 묘사, 무릉이와 소꼽친구한 죽마고우와 다름 없네요
봉수 큰누나가 고향 중,고등학교 동창의 형수 이기 땜에 어릴때
누나네집 자주 갔는 모양이야!1
60년대 기와집 대문에 칼라 가족사진 보고 마을 리장을 붙였나 보는데
덕망있는 양반으로 빵꾸께나 뀌면서 밥술이나 먹었지?? ㅎㅋ... 어쭈~
그러나 천진난만하게 개구장이 시절의 옛 생각은 언제나
향수를 느끼게 한다오...
청정지역 봉화 청량산으로 산행 한번 가야지요~~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