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집 제18권 / 묘표(墓表)
고려(高麗) 대장군(大將軍) 여공(呂公) 묘표(墓表)
영남(嶺南)의 함양군(咸陽郡)에서 남쪽으로 수십 리 거리에 임청(林淸)이라는 산이 있는데, 바로 고려 때의 대장군 여공 임청(呂公, 林淸)의 무덤이 이 산에 있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이 장군의 풍도(風度)를 사모하여 장군의 이름을 따서 그 산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관(官)에서 희생(犧牲)을 준비해서 해마다 그 무덤에 제사를 올리고, 또 묘지기를 두어 초목(樵牧)을 금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서 옛날에 행하던 일이 폐지되었고, 현달(顯達)한 자손들마저 흩어져 먼 곳에 살고 있어서 때마다 와서 성묘하지 않으므로 묘역(墓域)이 황폐해졌다. 그런데 민간의 풍속이 날로 오만해져서 장군의 무덤 가까이에 묘를 쓰거나 집을 짓는 자까지 있어, 길 가는 사람들이 한탄을 자아낸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계묘년(1663, 현종 4)에 19대손 이량(爾亮)이 금산 군수(金山郡守)가 되어 공무를 보고 난 여가에 와서 성묘하고는 슬픈 마음으로 뿌리를 생각하며 ‘내가 후손으로 가까운 지방의 수령으로 왔으면서 즉시 수축(修築)하지 않았으니 죄가 실로 나에게 있다.’ 하고서, 중씨(仲氏) 상서공(尙書公)에게 품의(稟議)하고 여러 종인(宗人)들과 상의한 다음 방백(方伯)에게 고하니, 방백 이공 상진(李公尙眞)이 “장군은 우리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외가(外家) 선조이니, 관직에 있는 자라면 모두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서, 즉시 명령을 내려 묘를 쓴 자에게는 무덤을 파내고 집을 지은 자에게는 집을 철거하도록 하고는 봉분을 더 쌓아올려 면목(面目)을 일신(一新)시켰다.
금산공(金山公)이 또 근처에 사는 일가들과 약조하여 다시 봄가을로 제사를 거행하게 하고, 또 돌을 떠다가 묘표를 세워 영구토록 밝게 보이려고 생각하여, 나에게 그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사람이 고루하고 문장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장군의 선조는 본래 당(唐)나라 내주(萊州) 사람이었는데,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연간에 황소(黃巢)의 난리를 피해 우리나라로 와서 함양(咸陽)에 살면서 이곳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장군의 생몰 연월(生沒年月)과 벼슬한 전말(顚末)에 대해서는, 연대가 너무 오래되고 증빙할 만한 문적(文籍)이 없어서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고려조에서 보답한 은전(恩典)과 한 지방에서 존모(尊慕)한 의리로 보면 장군이 왕실에 공이 있고, 생민(生民)에 은택을 끼쳤음을 대략 알 수 있다.
자손이 지금 20여 대(代)에 이르렀는데, 대대로 더욱 번성하여 내외(內外) 제파(諸派)의 자손이 거의 수천 명이나 되고, 명망 있는 공경(公卿)과 선비가 보첩(譜牒)에 수없이 실려 있다. 내가 듣고 본 바로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순원(順元)의 일파(一派)가 가장 번성하다.
이를테면 우윤(右尹) 유길(裕吉), 관찰사(觀察使) 우길(祐吉), 절도사(節度使) 인길(䄄吉), 참판(參判) 이징(爾徵), 판서(判書) 이재(爾載), 교리(校理) 성제(聖齊), 장령(掌令) 증제(曾齊)ㆍ민제(閔齊)가 가장 현달한 분들인데, 이들은 모두 의정공의 아들, 손자, 증손이다. 이 밖에 사방에 흩어져 사는 사람도 많아서 다 기재할 수 없다.
일찍이 듣건대 뿌리가 무성한 나무는 그 열매가 잘 익고, 근원이 깊은 물은 그 흐름이 길다고 하니, 장군의 성대한 공렬이 쌓인 것이 두터워서 드러나는 것이 길다는 것을 이에서 증명할 수 있다. 금산공은 바로 관찰공의 아들로 내외직을 거치는 동안 모두 유능하다고 칭송되었다.
그리고 또 수백 년 동안 미처 거행하지 못했던 일을 거행하였으니, 비록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으로 이룩된 것이지만, 또한 세상에 드러나고 묻힘이 더디고 빠른 것은 본래 때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장군의 영령(英靈)이 은밀하게 도와줌이 있어서이니 아, 기이하다. 여씨의 경사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기록한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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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大將軍呂公墓表
嶺之咸陽郡南十數里。有所謂林淸麓者。卽高麗大將軍呂公林淸衣履之藏。鄕人慕其風。因其名而號其山者也。世傳麗朝官備牲牢。歲祭其墓。且置冢人。以禁樵牧。歷世旣久。舊事就廢。子姓之顯者。又散在遠外。不克以時展省。兆域不治。甿俗日慢。至有葬於近而家於傍者。行道傷嗟。匪日月矣。歲癸卯。十九世孫爾亮守金山。莅事之暇。來拜墓下。愴然思惟本原曰。余惟遺紹而來尸近土。不卽不修。罪實在余。迺稟議於仲氏尙書公。謀諸宗人。諗于方伯。方伯李公尙眞以爲將軍於我仁烈王后。亦系外氏先。則有官者皆不可不爲之所。卽下令葬者掘家者撤。仍加封護。以新瞻聆。金山公又約宗族居近者。申擧春秋祀事。且將伐石樹表。昭示永久。屬余記其事。余以陋拙。辭不獲命。蓋將軍之先。本唐萊州人。僖宗乾符中。避黃巢亂。來於東籍於咸。將軍生歿歲月。立朝顚末。年代已遠而文籍無徵。不得以攷也。獨以勝國酬報之典。一方尊慕之義觀之。將軍之功存王室。澤在民生。可槩而知之也。子孫今至二十餘世。世益蕃衍。內外諸派。殆數十千人。名公聞士。譜牒相望。以余之耳目所睹記。贈領議政順元。其一派尤盛。有若右尹裕吉,觀察使祐吉,節度使禋吉,參判爾徵,判書爾載,校理聖齊,掌令曾齊,閔齊。其最顯者。而皆議政公子若孫曾。其餘散居四方者亦多。而不能盡載。嘗聞根之茂者其實遂。源之深者其流遠。將軍之豐功盛烈。蓄之厚而發之長者。於是乎徵矣。金山公卽觀察公之胤也。歷職內外。皆有能稱。乃今修擧數百年未遑之事。雖其追遠之誠致然。亦可見顯晦遲速。自有其時。抑將軍之威靈精魄。有以陰騭於其間者。嗚呼奇矣。呂氏之慶。其未艾矣乎。是爲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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