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각저'각력·각희'상박이라고도 하며 이와 비슷한 놀이가 몽골·일본·중국·티베트·베트남 등에도 있었다. 조선 헌종 때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중국 진나라 무왕 때 씨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이사전〉에는 씨름과 배우의 놀이를 베풀었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에 씨름 형식의 놀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만주 퉁거우[] 지안 현[]의 고구려 고분 각저총 주실에 씨름벽화가 있음을 볼 때 삼국시대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씨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세종 때의 〈고려사〉에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충혜왕이 정무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환관들과 씨름을 즐겨 조정의 예를 무너뜨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단오절·중추절 등에 씨름을 했는데 이러한 민속경기가 현대식으로 발돋음한 것은 1927년경이다. 당시 강낙원·서상천·한진희 등이 조선씨름협회를 구성한 뒤, 도별로 씨름의 형태가 달랐던 것을 '왼씨름'으로 통일하고, 1927년 9월 제1회 전국씨름대회를 개최하여 매년 실시했다. 이 대회를 8·15해방 뒤에 '전국 씨름 선수권대회'로 명칭을 바꾸어 계속 실시했다. 1936년 3월 대한체육회에 경기단체 중 17번째로 가맹하여 본격적인 씨름대회 운영·보급이 이루어졌고, 그후 계속 발전하여 1953년 씨름경기의 단일체급을 중량급과 경량급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1964년 대통령기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967년에는 다시 5체급으로 분리되어 체급별로 경기가 이루어졌다. 1971년 회장기쟁탈 전국학생씨름대회, 1972년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가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으로 국민에게 호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3년 민속씨름대회가 개최되면서부터이다. 1984년 해외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아메리카 서부와 1985년 브라질 지부, 서독 지부가 결성되어 해외에서도 보급이 이루어졌다. 1986년 1월 16일 민속씨름위원회는 금강장사급(80㎏ 이하)·한라장사급(80.1~90㎏)·백두장사급(90.1㎏ 이상)의 3체급으로 나누었으며, 그해 11월 20일 금강장사급(80㎏ 이하)·한라장사급(80.1~95㎏)·백두장사급(95.1㎏ 이상)으로 재조정되어 현재 이 체급에 따라 대회가 운영되고 있다. 1993년 현재 천하장사대회가 24회, 체급별 장사대회가 64회를 맞이했으며, 연말에 거행되는 천하대장사의 단체전경기가 실시되고 있어 민속경기로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경기
씨름은 몸 전체의 움직임과 기승 및 전진근육을 사용하고, 높은 투지력을 바탕으로 하는 운동으로 체력·기술·투지력이 3대 요소이다. 주심 1명, 부심 2명이 있으며, 경기장은 높이 50㎝ 이상의 모래와 지름 9m의 원형경기장으로 선수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2m 이내에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다리와 허리에 걸치는 샅바는 4.2m의 청색과 홍색의 광목을 쓰며 국민학생 샅바의 길이는 3m이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씨름의 형태는 '왼씨름'으로 샅바를 자기의 오른쪽 허벅다리에 낀 다음 허리에 돌려맨다. 선수는 서로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경기를 시작하는데, 오른손으로는 상대의 허리 샅바를, 왼손으로는 상대의 다리 샅바를 잡고 경기를 치른다.
출처:Daum백과사전
첫댓글 한별 씨름 해 보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