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감시건물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은 4.19 혁명 후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이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사실상 무력화된 후에도 1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사실상 하야를 강요당했다.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대결하여 아주 근소한 1.55%포인트 차이로 석패하였고(아래 박스 참조),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다시 야당을 이끌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상대로 다시 대결하였으나 2위에 그친 뒤, 유신정권하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고,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나무위키). 그는 상징적 국가수반의 역할과 국민 정서를 아우르는 역할도 하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더불어 자유당 정권의 상징인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도 국민의 원성의 대상이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 본관의 청기와 지붕의 이미지를 따서 경무대를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그는 하야 후에 민주화의 열망이 가장 고조되고, 군부세력과 민주세력의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국에서 민주화 투쟁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공안당국은 그에 대한 감시를 철저하였다.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임기 1960.8.12~1962.3.23)은 1963년 제5대 대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한테 1.55%p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 기록은 1987년 직선제를 도입한 이후에도 기록으로 남았다가 15대(임기 1998.02.25 ~ 2003.02.24) 대선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1.53%p 득표율 차이로 신승하면서 깨지었다. 그러나 이 기록도 20대 대통령 선거(2022.3.9)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역대 최소 득표율차인 0.73%p 차이로 승리하면서 다시 깨어졌다. 이처럼 윤보선 대통령(4대), 김대중 대통령(15대), 윤석열 대통령(20대)의 근소한 득표율의 격차는 우리의 헌정사에서 여야의 첨예한 대립을 말해준다.
윤보선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와중에 있었고 1962년 3월 대통령 하야한 뒤에도 1970년대까지 그와 민주화 지도자들에 대해 철저한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있었다. 그러한 정황은 윤보선 고택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감시건물이 그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의 저택이 재야인사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맞은편 집을 중앙정보부에서 공안 건물(별칭 윤보선 감시건물)로 마련하여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였다. 윤보선가의 솟을대문 앞에는 1909년에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양반들이 자생적으로 세운 안동교회가 있다. 안동교회 옆쪽, 윤보선가(家) 맞은편에는 소위 ‘윤보선 감시건물’이었던 5층 건물이 있다. 윤보선 가옥과 약 5m 너비의 길을 사이에 둔 콘크리트 건물이다. 이 건물은 1층 바닥 면적이 153.52㎡ 정도이고 위층으로 갈수록 면적이 더욱 좁아져서 맨 위 5층은 5평(16.73㎡)으로 옥탑 방 같아서 이 건물은 누구라도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조립식 망루처럼 보인다.
‘윤보선 감시건물’은 1967년 박정희 정권 때 윤보선 대통령의 집을 출입하는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세운 것으로 알려지면서 붙여진 별칭이다. 명문당(明文堂)은 1970년 이 건물을 매입해 입주했다. 역사의 굴곡을 말해주는 이 건물에 대해 서울시는 2012년부터 “근현대사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건물”이라며 ‘미래유산’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해하였다. 이 건물에 대해 서울시는 2012년 10월부터 약 1년간 역사학자들의 고증과 전 중앙정보부 직원의 언론 인터뷰 등을 참고해 해당 건물이 윤보선 감시 건물로 사용됐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울시의 입장에 대해 명문당 측은 당초 2012년 말 “윤보선 감시 건물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5년 미래유산에서 빠졌는데 명문당 측이 “건물 개·보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2015.10.09). 어쨌던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므로 합리적인 차원에서 미래유산으로 보존하여야 할것이다. (2023.8.24)